'사랑은 낙엽을 타고' 노동가의 끝에는 비로써 사랑
'사랑은 낙엽을 타고' 노동가의 끝에는 비로써 사랑
  • 이현동
  • 승인 2024.01.0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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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추락하는 길을 무작정 손잡고 걸어보기"
ⓒ 영화 <Valimo>(2007)

현재(23.12.29) MUBI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 작품전이 진행되고 있고, 공교롭게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한겨울의 클래식》(23.12.21~24.01.17)이라는 제목으로 10개의 작품이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MUBI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대부분 초기작이긴 하지만, 그 중 특히 몇몇 단편은 카우리스마키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의 영화가 갖고 있는 반영적 성격을 드러내는 단편 <Valimo>(2007)는 공장노동자들이 노동을 끝난 후 영화관에 들어가 뤼미에르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985)를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동은 그의 세계관에서 스크린을 넘어 지연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단편에서 극장 입구 벽에는 마르크스를 상징하는 포스터가 부착되어 있다.

덧붙여 보자면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르아브르>(2011)에서 도시 르아브르는 노동자 투쟁의 상징으로도 유명하고,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심지어 Marcel Marx다. 현실을 그저 낭만적으로만 채색하지 않는 그의 세계는 노동, 관료주의, 사기꾼, 투기꾼 등을 통해 반복된 노동에 착취당하면서도 얼핏 희망을 전망해 왔다. 노동자나 인종차별을 다룸에 있어 미학적으론 '다르덴 형제'나 '켄 로치' 영화라기보다 '로베르 브레송', 혹은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가깝다. 특별히 브레송에 대한 존경심을 표명했던 것과 같이 신체 일부분이나 사물을 클로즈업하는 숏은 마치 그를 염두에 두고 설계한 숏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오즈 야스지로를 연상시키는 다다미 숏과 필로우 숏, 현대적인 건물이 아닌 70년대를 연상시키는 가라오케와 펍은 최근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에서도 역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오브제로 구성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이 2023년 칸 영화제에 출품되고 영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감독은 개별 인터뷰를 피해 왔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던 공식 기자회견에서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프롤레탈리아 3부작이라 불리는 <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89)에 이어 4부작이라는 표현하기도 했다. 그가 <황혼의 빛>(2006) 이후 거의 6년에 한 번씩 작품을 선보이고, <희망의 건너편>(2017)을 은퇴작이라 표명한 후 다시 6년이 지나 <사랑의 낙엽을 타고>가 관객에게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노동을 넘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라는 짐작을 해볼 수 있다. 특히 다른 인종을 다루는 문제에 진척해 왔던 <르아브르>와 <희망의 건너편> 이후 다시금 핀란드 수도인 헬싱키로 돌아온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노동 너머에 있는 사랑은 아니었을까.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찬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6년 만에 복귀작인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남녀의 관계를 통해 소소하고 찌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희망을 전망하게 되는 작품이다. 계층별 갈등이 일어나는 노동 현장에서 유토피아의 현존이란 불가함을 역설적으로 표명하는 그는 이 작품에서 이례적으로 있는 힘껏 사랑을 건축한다. 술이 없이는 삶을 지탱하기 힘든 홀라파(유시 바타넨)는 공장에서 일하기 전에 숨겨둔 술을 연신 들이키다가 상사에게 걸려 해고를 당하는 일을 반복한다. 안사(알마 포이스티)는 마트에서 일하면서 제품을 진열하고 유통기한 지난 제품을 구별하여 버리는 일을 한다. 그녀도 노숙자의 유통기한이 지닌 음식을 나눠주고 샌드위치를 직접 먹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영화는 홀라파보다 안사의 일상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그 이유는 안사의 이름 때문이다. 안사는 '갇힌'이라는 뜻이 있다. 삶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인물, 매일 같이 직장에서 일하고, 트램을 타고 퇴근길에서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다 집에 도착해 간단한 끼니를 때우고 라디오를 듣는 일상을 계속한다.

카우리스마키의 캐릭터 디자인이 늘 그렇듯이 표정과 분위기에는 생기가 없고, 건조하다. 노동에 질식당한 삶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전혀 축소되지 않을 것만 같은 영원한 노동. 그의 영화를 보아왔던 관객들이라면 익숙할 테지만 이 느릿하고도 어떠한 자극도 주려 하지 않는 진공상태의 감정은 어떤 관객에겐 그의 영화에서 무엇을 발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과제처럼 다가온다. 또한 이 영화가 공간을 구현하는 과정에서도 보이는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 철거될 위기에 처한 건물과 녹슨 파이프와 금속 조각은 산업화된 차가운 도시를 상징하기도 한다. 종종 라디오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 전체를 직조하는 내레이션처럼 흘러나올 때 관객이 체감하게 되는 감각이란 지극히 현실을 배제할 수 없는 반영적 현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치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가 종종 많은 영화에 등장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이러한 대조에서 감독이 배설하는 노동의 의미와 밀도, 스타일, 분위기를 감별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관객은 틈입하는 사랑에 의해 자그마한 유머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찬란

홀라파와 안사는 오래된 펍에서 만나 호감을 느끼게 되고 몇 번의 만남을 갖게 된다. 영화관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안사는 홀라파를 초대해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그들이 함께 첫 번째 데이트에서 선정한 짐 자무쉬의 영화 <데드 돈 다이>(2019)는 그간 짐 자무쉬가 카우리스마키를 향한 경의를 표했던 것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집에 한 번도 누굴 초대해 본 적이 없는 안사는 홀라파를 위해 그릇과 식기 도구를 구입하고 음식을 대접한다. 계속해서 술을 탐하는 홀라파를 보며 안사는 술로 삶을 마감했던 아빠와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절대 술을 마시는 사람하고는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한다. 홀라파는 자신은 "잔소리꾼"이 싫다며 그녀를 떠난다. 그 이후 안사는 유기견 보호소에서 강아지를 입양해 온다. '채플린'이라는 강아지의 이름은 이 영화가 복원하고 싶은 복고적인 방식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자 희망을 전망하게 하는 해학적 이미지의 전형으로 관철된다. 산업화된 사회를 적나라하게 다루었던 <모던 타임즈>(1936)에서 채플린이 연기하는 떠돌이란 캐릭터와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이 강아지는 유사해 보인다.

곧이어 홀라파는 한 음악을 듣게 되는데, 그 음악은 핀란드 인디팝 듀오의 마우스테티퇴트의 노래다. "난 여기서 영원히 죄수야. 묘지조차 울타리에 묶여 있어. 지상에서의 기간이 끝나면. 땅속 깊이 나를 파묻을 거야."라는 가사가 나온다. 가사는 절망적이면서도 굉장히 밝고 유쾌한 음조인 이 음악을 듣고 홀라파는 술 마시는 일을 멈추고 세면대에 술을 버린다. 영화의 반전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절망을 노래하고 들으면서도 결국 희망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인간, 그 변화를 향해 무작정 나아가기 위한 동기는 바로 사랑이다. 홀라파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찾아가겠다고 말하고 재킷을 빌려 집을 나선다. 그러던 중 기차에 부딪혀 사고가 난 홀라파를 기다리던 안사는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평범한 일상을 다시 살아간다. 훌라파의 동료가 안사를 찾아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한 다음에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죽었나요?'라는 단호한 이 물음은 어쩌면 그녀가 늘 상기해왔던 절망을 담아낸 표현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계속 인형처럼 보이던 캐릭터에게 거의 유일하게 미소로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이 하나 있다. 홀라파의 죽음을 예감하던 안사가 그의 생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이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에게 안사는 키스를 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난다. 여기서 우린 가장 위대한 영화적 속임수를 발견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동하는 순간, 예수의 부활을 발견하고 의심했던 제자들처럼 우리는 영화에서 기적을 목격하고 심지어 믿게 되는 것이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오데트>(1954)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첫 번째 며느리 잉거만이 부활한 숭고한 순간을 다시금 꺼내올 수 있었다. 장 뤽 고다르가 영화사에서 기적을 보여준 감독은 알프레드 히치콕과 드레이어밖에 없다고 한 적이 있는데, 우린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숭고함을 기적처럼 여기는 순간들이 있다. 결국 기적의 광경을 보려하는 건 결국 절망보다 사랑에 의거하는 믿음 때문은 아닐까. <모던 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에서 떠돌이(채플린)과 개민(폴렛 고다드)가 불확실하지만, 미래를 떠나는 뒷모습은 분명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낙엽을 밟고 걷는 홀라파와 안사의 뒷모습과 묘하게 겹쳐 있다. 신이 창조한 필연적인 노동 끝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건 낙엽이 떨어진 후에도 낙엽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임을. 어떤 영화는 기적에 대해 믿음을 요청하는 도구가 된다. 그렇게 카우리스마키는 노동 4부작을 사랑으로 마감했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찬란

사랑은 낙엽을 타고
Fallen Leaves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Aki Kaurismaki

 

출연
알마 포위스티
Alma Poysti
주시 바타넨Jussi Vatanen
얀느 히티애넨Janne Hyytiainen
누푸 코이부Nuppu Koivu
알리나 톰니코프Alina Tomnikov
마르티 수살로Martti Suosalo

 

배급|수입 찬란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81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12.20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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