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음악 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 샤프, '연극이 끝난 후'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예술은 무수한 개별적 삶들 아래 전승되며 영원을 획득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아름다운 오역으로 전해진 오랜 문장을 새삼스레 곱씹으며 '인생'과 '예술'이란 두 항 사이의 존재를 떠올려본다. 자신의 삶보다 오래 살아남을 작품을 만드는 이들에겐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탁월한 재능과 극기의 노력은 당연할 테고, 이를 뒷받침할 운과 환경적 요소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들 너머에 필연적 조건으로서의 또 하나의 계기가 있다고 여긴다. 바로 '연극이 끝난 후'의 시간이다. 정적만 남은 무대, 고독이 흐르는 시간을 견디며 심연을 바라보는 자만이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이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 예술가의 삶을 상상할 때마다 내가 샤프의 노랫말을 흥얼거리게 되는 이유다.
'마에스트로'와 '번스타인' 사이
첫 연출작 <스타 이즈 본>(2018)으로 꽤 성공적인 데뷔를 치렀던 '브래들리 쿠퍼'가 다시 한번 뮤지션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로 돌아왔다. 이번엔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을 연기하며 연출을 겸한 그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2023)은 음악가로서 화려한 성취를 이룬 인물의 내밀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번스타인의 아내이자 미국의 배우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로'(케리 멀리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한편, 이를 위해 흔히 언급되는 인물의 이력 대부분은 과감히 생략됐다. 비교적 뒤늦게 음악의 길로 들어선 계기, 화려한 데뷔 후 의외로 빛을 받지 못했던 10여 년의 기간, 대중적 명성을 얻게된 브로드웨이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57)의 창작 과정, 뉴욕 필 하모니의 상임 지휘자로서 보낸 전성기, 유럽 무대에 진출해 역량을 펼친 말년의 이야기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작곡가이자 지휘자, 강연자이자 저술가로서 성취한 그의 빛나는 업적은 전면적으로 장면화되지 않거나 이따금 빠른 대사로 관객의 귓가를 스쳐 지난다.
전기영화가 인물의 일대기를 빼곡히 써 내려간 위인전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작법으로 획득하려는 작품의 개성이 극의 높은 완성도로 이어지느냐의 문제는 별개의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의 경우, 서사의 초점이 실제 인물의 성취와 업적에서 비껴나 인물의 사적 이야기와 이면에 맞춰진 만큼 작품에 대한 평가 기준은 고증의 엄밀함을 넘어 드라마의 역량에 맡겨진다. 잘 알려진 인물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얼마나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지는 물론이고, 이를 내적 완결성을 갖춘 극의 형태로 구현했는지가 관건이 되는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이 지점에서 큰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다. 영화의 핵심 줄기는 크게 두 갈래다. 앞서 언급했듯 아내 '펠리시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 레너드의 생애와 그의 삶에서 감지되는 '분열'의 감각이다. 사랑과 예술에 관한 두 이야기를 세련되게 엮어내려는 야심은 높이 살 만하나, 작품의 의도와 선택과 집중의 결단은 끝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 영화가 위시하는 내밀함 속에서 인간 '번스타인'으로서의 삶은 '마에스트로'의 삶, 즉 야심차게 덜어낼 것 같던 영화 바깥의 캐릭터와 장중한 음악에 설득력을 빌리는 데 그친다.
납득 가능한 분열, 납득 불가능한 화해
극 중, 아내 펠리시아와 함께한 인터뷰에서 레너드는 '작곡가 번스타인'과 '지휘자 번스타인' 사이의 차이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인물의 대사로 직접 '분열'의 감각이 언급되는 대목인 만큼 카메라는 귀를 기울이듯 레너드의 얼굴 가까이 다가간다. 세상과 사적인 소통을 나누며 내면의 풍부한 삶을 사는 쪽이 '창작자(Creator)'라면, 외향적이고 보여지는 삶을 사는 쪽은 '공연자(Performer)'라는 것이 그의 답변이다. 이어서 두 성격을 모두 가진 이는 결국 '정신 분열(schizophrenic)'이란 최후를 맞는다는 말이 너스레처럼 덧붙여진다.
흑백 화면으로 표현된 영화의 전반부, 두 예술가 커플이 삶과 무대를 넘나들며 사랑과 성취를 이루는 모습이 재치 있게 그려진다. 그러다 레너드가 분열된 삶에 대해 말하는 인터뷰 장면 이후로 극에는 모종의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레너드를 보여주는 장면과 자유롭고 감성적인 성격의 동성애자로서 레너드의 모습을 포착한 장면이 대비를 이룬다. 이윽고 무대 위에 선 레너드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펠리시아가 비춰지고, 그녀의 얼굴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뒷모습으로 연결된다. 이를 기점으로 화면에 색채가 드리우며 부부 관계를 둘러싼 국면의 전환이 전면화된다. 이제 '분열'의 테마는 공연자와 창작자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레너드의 것만이 아니라, 펠리시아의 입장에서 부부 관계를 균열시키는 레너드의 성적 지향을 겨냥한다. 그래서일까. 마침내 레너드가 미사곡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수영장으로 뛰어든 펠리시아의 기행은 남편이 이룩한 창작의 결실에 기뻐하는 아내의 세리머니로 읽히지 않는다. 젊은 남성과의 만남이 창작의 동력이 되었음을 아는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소리가 굴절되는 수중으로의 도피다.
화면이 컬러로 전환된 후, 개인적 삶과 예술가로서의 무대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두 인물의 청년기를 재치있게 표현한 편집(매치컷)은 음향이 화면에 선행하며 다음 장면을 연결하는 방식(사운드컷)으로 대체된다. 이때 영화의 사운드가 숏과 장면을 '연결'하고 있다는 말에는 약간의 함정이 있다. 사운드의 주도하에 끌어당겨진 각각의 장면에서 서사의 밀도는 점차 떨어지기 때문이다.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할 감각을 활성화하기 위해 장면을 세공하기보다, 극의 분위기를 어영부영 조성하기 위해 음악을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이 앞선다. 극의 클라이맥스로 마련된 대성당 장면, 즉 레너드가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하는 대목에서 장중하게 휘몰아치는 사운드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의 화해에 대한 감정적 이입이 쉽게 이뤄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시 한번, 영화의 중반 이후로 레너드의 자유분방한 애정관으로 말미암은 갈등의 서사는 펠리시아의 불안한 내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한쪽으로 수렴되지 않고 끊임없이 발산되는 주인공의 정체성, 양쪽을 향해 열린 채 닫힌 레너드의 독특한 성향이 그녀를 경유해 극의 긴장과 활력을 이끄는 것은 얼마간 사실이다. 하지만 그 긴장과 갈등 끝에 두 인물이 비로소 화해를 이루는 지점에서 어리둥절한 쇼맨십으로 설득을 무마하려는 연출 때문에 서사의 논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맥없이 풀려버린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개성적인 외양을 재현한 분장과 브래들리 쿠퍼의 과장된 연기가 논쟁의 도마에 오른 이유 역시, 실제 인물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넘어 그러한 의심이 앞설 정도로 영화가 내적인 완결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근본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정적과 고독을 품은 영화를 기다리며
"예술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 레너드 번스타인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암전 위를 수놓은 위 글귀는 다름아닌 예술의 역할에 관해 논한 실제 레너드 번스타인의 말이다. 마치 인물의 말을 토대로 그의 생애를 논하겠다는 선전포고처럼 보이는 오프닝은 엔딩에서 오케스트라를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인물의 영상 클립과 짝을 이룬다. 레너드가 피아노 앞에서 홀로 인터뷰에 응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도 마찬가지다. 이에 더해 흑백과 컬러로 나뉜 장면들까지, 두 번씩 나뉘고 세 겹으로 포개어진 영화의 구성을 되짚으며 오프닝의 글귀가 엔딩에 이르러 영화 스스로를 향한 질문으로 되돌아옴을 느낀다. 과연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예술인가?
삶은 곧 무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창작하고 공연하기 마련이다. 다만, 개인적 삶과 예술적 삶이란 이중의 무대에 선 예술가에게는 각각의 무대 사이 심연을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내면의 심원함과 삶의 복잡성 덕에 그들은 다양한 이면을 동시에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예민한 감수성'과 같은 기질적 차원의 해석만으로는 예술가의 고뇌에 제대로 다가설 수 없는 이유다. 예술가로서 누구보다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고 떠난 예술가에게는 그만큼 복잡다난한 삶의 이면이 함께했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영화로 이를 체험하리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분열적 정체성을 안고 살아간 번스타인의 이야기는 그저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이 있었다는 정보의 나열에 그친다. 흥미로운 화두로 환기된 테마는 어느새 통속적인 드라마의 차원으로 변색되어 장중한 음악, 모사에 가까운 연기로 인물을 재현하는 데 활용될 뿐이다.
영화에 있어 '감각'과 '분위기'는 각기 다른 차원으로 말해져야 한다. 이 작품에서 간혹 소거된 사운드와 롱숏으로 포착된 인물의 모습은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활용한 결과라기보다, 분위기에 기대려는 연출에 가까워보인다. 상투 바깥 인물인 예술가를 소환해 사랑과 분열의 감각을 엮으려는 시도는 그렇게 호기로운 도전에 그친다. 브래들리 쿠퍼가 재현한 레너드 번스타인에게는 진정한 정적도, 고독도 부재하다. 각기 다른 상황마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이질적 사랑이 동주하며 인물의 심연을 시종일관 봉합한다. 예술과 삶이라는 이중적이고 다층적인 무대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의 아이러니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캐릭터는 외양적 고증과 상투로 납작해진 표면 아래 깊이를 잃는다. 영화는 펠리시아의 죽음이란 사건으로 달아난 후, 영화는 여전히 젊은 남성과의 염문을 뿌리며 살아가는 레너드의 모습으로 분열된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의 균형점을 되찾는다. 그렇게 당도한 에필로그에서 펠리시아의 대사는 레너드에 의해 반복된다. 새로운 질문을 기다리는 인물의 말("Any questions?")은 별안간 흑백의 화면의 펠리시아를 재소환한다.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눈빛과 돌아서는 뒷모습에서 관객은 어떤 질문을 발견해야 하는 걸까. 에필로그와 엔딩 사이, 영화를 구성하는 세 겹의 차원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해당 숏은 그야말로 붕 뜬 장소가 되어 의아함을 남긴다.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한 샤프의 노래를 다시금 떠올려 본다. 가사에 깃든 애환, 그러나 고독을 겸허히 받아들이듯 덤덤한 목소리.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멜로디와 리듬. 때로는 잠깐의 반짝임을 위해, 때로는 그 빛을 후대에 전파하기까지 불태워지는 무대 바깥의 시간은 대체로 어둡다. 훌륭한 예술은 그 어둠을 가벼이 위로하지도, 섣부른 주석이 되지도 않는다. 다만, 이와 같은 필연적 계기를 자신만의 언어로 상상하게 만든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그 상상을 영화만의 언어로 구현하지 못한 채, 짧은 한 곡의 음악이 이토록 긴 영화보다 훌륭할 수 있단 사실을 일깨우는 데서 그친다. 그리고 음악이란 오랜 예술의 형식과 그 전통을 새롭게 빛낸 인물에 빚진 작품 명단에 이름을 추가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정적과 고독을 품은 예술로서의 영화를 기다릴 뿐이다.
[글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Maestro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
출연
브래들리 쿠퍼Bradley Cooper
캐리 멀리건Carey Mulligan
맷 보머Matt Bomer
마야 호크Maya Hawke
세라 실버먼Sarah Silverman
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29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넷플릭스NETFL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