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의 세계' 감각의 전이, 배움의 도치
'클레오의 세계' 감각의 전이, 배움의 도치
  • 변해빈
  • 승인 2024.01.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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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 태도"
ⓒ 그린나래미디어

<클레오의 세계>의 엔딩이 주는 갑작스러움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여섯 살 클레오(루이스 모루아-팡자니)가 유모 글로리아(일사 모레노 제고)의 고향에서 질풍노도의 방학을 보낸 뒤 항공편에 오르며 이별하는 상황이다. 서로에게 맹세한 대로 그들의 미래엔 재회가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각자의 삶을 살며 그렇게 서로를 한 시절의 아련한 기억으로 영영 묻어버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각 사실은 예상 가능하고 괴리적인 흐름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는 두 경우를 상상하기까지 잠깐의 시간도 기다리지 않고 닫힌다. 암전된 검은 화면에는 가열한 여운을 미래에 음미할 무언가로 남겨두려는 태도도 없다. 멀어지는 클레오를 보던 글로리아가 예기치 않은 눈물을 터트리고, 클레오가 문득 뒤를 돌아보는 찰나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제스처가 글로리아의 눈물에 대한 반향인지도 확실치 않다. 무엇보다 이별을 일찍이 실감하고 눈물 흘리던 클레오에 비하면 글로리아의 눈물은 뒤늦은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이 엔딩이 중단을 통해 중단될 수 없는 이후 삶의 과정을 개복해 놓기보단, 화면 안에서 수습되지 않은 두 사람의 제스처를 영구적으로 각인하는 데 목적이 실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클레오의 세계>는 아이의 성장 드라마이고, 아이의 눈을 경유하면서 의도적으로 그 외부 세계, 곧 어른들의 형편과 감정의 영역을 반만 제시한 영화다. 가령 글로리아에겐 두 명의 자녀가 있는데, 첫째 딸은 출산을 앞두었지만, 남편이 부재하고 둘째 아들과 글로리아 사이엔 비혈연 관계의 운명 같은 모종의 벽이 있다. 관객의 여러 상상과 추측은 단일한 정의로 가닿지 않는 관계의 결속을 비집으며, 그들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를 짚어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클레오의 시선을 따르는 이 영화에서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고, 의심할 문제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감독 마리 아마추켈리는 타지에서 노동하는 경제 이민자 글로리아의 상황을 가리켜 "한 대륙이 다른 대륙을 지배하는 식민주의의 유산인 불균형한 관계는 금기시되고 있다"며 금기의 유산으로서 인물들의 관계를 사유하길 권유하지만, 그에 관한 질문이 극 안에서 첨예하고 진득하게 펼쳐지는 쪽도 아니다.

 

ⓒ 그린나래미디어

오히려 <클레오의 세계>는 중심인물이 아이일 때 가능한 미지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탐험한다. 피사체에 과도하게 달라붙은 카메라 워크, 서투름을 동력 삼은 인물의 무정형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활력, 물리적 채워짐을 거부하는 영화의 형식이 호기심으로 붐비는 아이의 세계를 감각하는 방법론으로 작동하는 것. 전작 <파티 걸>(클레르 뷔르게사무엘 테이스, 2014)에 이은 감독의 주요 화법이다. 신체든 사물이든 근거리에 달라붙어 확대 촬영한 <클레오의 세계>는 좁을 수밖에 없는 아이의 세계를 물리적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아무리 자율적인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의 움직임이 결정된다고 해도 규격이 정해진 프레임의 조건 내에서 클로즈업은 전체를 광각으로 담기란 역부족인데, 감독은 클레오가 '근시'라는 설정을 가미, '근시'의 이미지의 파편들이 불충분하게 존재할 때 발생하는 미흡함을 불안, 두려움, 슬픔, 치기 어린 시절을 풍족하게 그려내는 조건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술했듯, 어른들의 세계가 카메라의 시야와 인식 안에 제대로 걸려있지 않아서 가능한, 초월적이고 이념적인 영역을 탐험한다. 다시 말해 클레오가 치열하게 탐험하는 건 글로리아의 세계, 정확히는 딸이 누군가의 엄마로, 엄마는 누군가의 딸로, 모녀의 위치가 교환되고 가계를 잇는, 자기 세계에선 중단된 흐름이다. 그 흐름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정서' 사랑의 전이와 생성을 경험한다.

물론, 그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초월적이고 이념적인 개념일 뿐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개체에 관한 관심을 확장시키는 요체다. 상대를 먹이고 씻기고 포옹하는 스킨십, 생명력을 느끼는 감촉, 시기 질투가 교환되는 눈빛, 인물 간의 애틋한 속삭임은 이 영화의 정체성이다. 물리적인 접촉을 넘어, 감정적으로 교감하고 기억에 접속한다. <클레오의 세계>는 정의되지 않았거나 카메라로 포착할 수 없는 아이의 감각적 질서를 페인팅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하는데, 클레오의 내적 반향 혹은 기억을 형상화한 해당 장면들은 불완전하고 몽유적인 화풍을 고수하지만 오히려 그런 스타일 안에서 말로 정의되지 못한 심층적인 감정의 휘몰아침을 읽어내게 만든다. 따라서 근시의 제약에도 <클레오의 세계>가 여러 감각을 건드리려는 영화임은 분명하다.

 

ⓒ 그린나래미디어

<클레오의 세계>는 스스로의 감정적 정의를 찾아가는 어린아이의 세계가 확장되는 여정이다. 그런데 클레오는 유독 환희와 성취보단 슬픔과 그리움, 상실감으로 요동치는 다층의 감정적 굴곡을 배운다. 클레오는 글로리아의 떠남을 맞이하며 창가에서 숨죽여 우는 법을 깨우치고, 글로리아의 엄마를 추모하던 장례식에서 (태어나자마자 유명을 달리해) 그간 알 수 없던 엄마의 죽음을,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경험으로 깨닫는다. 울음의 방식은 위험에 뛰어드는 반항의 몸짓, 용서를 구하는 입맞춤 등으로 조정되어 세상에 대한 배움의 목록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클레오의 울음과 그 변형된 몸짓들은 모방의 대상이 없다. 오히려 글로리아를 포함해 다른 인물들을 대신해 클레오가 눈물을 흘리는 설정이 반복된다. 아이의 몸의 표출은 감정의 명령을 따르는 즉각적 반응이지 어른들을 통한 학습의 결과가 아니다. 감정의 종류를 배우는 것이지 감정을 배출하는 방법을 배우는 건 아니다. 이 말은 장례식장에서 클레오의 울음을 이상하단 듯이 거리 두고 바라보던 글로리아의 두 아이의 반응처럼, 인물들의 시각적인 스킨십, 교감의 제스처에 비해 감정적으로 일치된 동화 경험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엔딩도 마찬가지이다. 클레오의 감정을 달래던 글로리아의 울음이 영화의 대미에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클레오의 반응, 동화되지 않은 혹은 동화되기 이전의 얼굴은 슬쩍 카메라를 스친 뒤 중단된다.

두 차원에서의 중단이 감정적으로 거대한 해석의 갈래를 생산하는 건 아닐 테지만, 두 인물의 부조화가 클레오의 비학습된 결과가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맞물리지 않은 엔딩의 두 제스처는 글로리아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클레오의 막연히 성장을 촉구하는 데 방점 찍힌 이미지가 아니다. 아이의 울음이 엔딩에서 글로리아에게로 옮겨 갔다는 사실.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쪽이 글로리아인 채로 막을 내리는 갑작스러운 전환이 발생할 때, 이 영화가 삶의 과정 안에서 배움의 형상을, 세월을 요구하는 것으로써 이념적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이념적 사고를 전도시켜 '깨닫'게 만드는 쪽은 어른의 세계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녀의 자리를 끊임없이 교환하던 클레오의 자리바꿈이 글로리아가 감정을 배출하는 '어린아이의 몸'을 되찾는 것으로 비로소 확장된 셈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를 현실(의 감각)의 축소판으로 제시하겠다는 일념으로 프레임을 '비좁음'의 형식으로 디자인하고, 거칠고 자유분방한 카메라의 떨림을 혼돈, 불안의 정서를 시각화하는 공식으로 다룬 영화는 많다. 이 방식 자체가 특별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다만, 영화가 의도하고 표현한 것과 그것에 관객이 반응하는 건 다른 문제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물리적인 값을 조정하는 기술만으론 감응을 다 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만든다. <클레오의 세계>가 인물에게 주어진 '여러 감각'을 관객에게 완벽하게 제공한 영화라는 데에 미약한 반감이 없는 건 아닌데, 이를테면 클레오가 상대 앞에서 얼굴을 감추고 숨죽여 우는 모습을 비칠 때 어찌할 바 모르겠는 기분이 드는 것. 이를 클로즈업으로 담은 화면을 마주하는 부담스러움이 있다면 어른의 것이라고 단정 지은 감정의 파고가 낯선 세계에서 발원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도 비록 아이-어른의 구도로 이분화해 접근하긴 했지만, 적어도 각각의 성질을 구태여 다른 차원으로 감각해 보려는 시도를 지지하게끔 하는 것 같다. 최근의 영화들이 아이의 세계, 아이의 눈을 경유하는 유사성을 구축하면서 그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 태도, 이를 쇄신하는 어른의 관점과 사고를 요청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클레오의 세계
Àma Gloria
감독
마리 아마추켈리-바르사크
Marie Amachoukeli-Barsacq

 

출연
루이스 모루아-팡자니
Louise Mauroy-Panzani
일사 모레노 제고Ilca Moreno Zego
압나라 고메스 발레라Abnara Gomes Varela
프레디 고메스 타바레스Fredy Gomes Tavares
아르노 르보티니Arnaud Rebotini
바스티앵 에우장Bastien Ehouzan

 

배급|수입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84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4.01.03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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