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한국사회라는 유령 앞에서
[이주영] 한국사회라는 유령 앞에서
  • 김민세
  • 승인 2023.12.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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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라이더>, <안나> 속 원본을 상실한 모호한 욕망의 대상들"
<안나: 감독판> ⓒ coupang play

<안나: 감독판>(이하 <안나>)의 후반부, '한지원'(박예영)은 '이유미'(배수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학원 원장으로부터 이유미(이안나)의 학위 증명서를 받는다. 그 후 한지원이 예일대로부터 받는 통지서가 밝히는 것은 이유미(이안나)의 학위가 위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유미가 자신의 것으로 위조한 학위 증명서는 이현주(정은채)의 것인데, 미국에서 이현주는 '이안나'였고 이유미는 '이안나'라는 이름을 훔쳐 그의 삶을 흉내 냈기 때문에 '이안나가 예일대를 졸업했다는 사실'은 이유미의 거짓된 정체를 사실인 것으로 증명하는 이상한 증거가 되어버린다. 이후, 한지원은 이현주의 예일대 동창생으로부터 이현주(이안나)가 졸업논문을 대필로 위조했다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때 예일대 학위증명서에 적혀 있는 '이안나'라는 이름은 이유미도 아니고, 이현주도 아닌 거짓과 위조로 둘러싸인 모호하고 실체 없는 유령 같은 기표가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이유미와 이현주를 오가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한지원에게 '이안나'라는 이름은 추적의 경로를 무화(無化)시키는 맥거핀이다.

시리즈의 후반부에 환상 또는 환각의 형태로 다시 나타난 이현주를 앞에 두고 이유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훔친 것도 가짜였어" 이 문장에서 이유미는 다시 한번 '유령'의 존재를 호명한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죽은 뒤 잠시나마 실체를 가진 몸으로 프레임 안에 현현한 이현주의 형상은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에서 '유령적'이라 불릴 만하지만, 이유미가 말하는 '가짜', 즉 '유령'은 이현주가 거짓과 위조로 만들어낸 '이안나'라는 텅 빈 기표이다. 이유미가 모방한 '이안나'의 존재는 모방의 원본인 이현주가 죽은 시점에서 더 모호한 기표가 된다. 이유미가 갖고 있는 욕망의 경로는 실체 없이 이름과 서류들로 증명되는 원본을 상실한 기표로 향하고 한지원은 그 공허한 존재 앞에서 진실을 밝혀내려 노력한다. 이런 모호한 욕망의 대상이 만드는 <안나>의 서스펜스는 (배수지라는 아이돌 스타의 연기 변신이라는 이유로) '리플리 증후군'을 다루는 서사의 장르성이 주목된 나머지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지점이다.

 

<싱글라이더>(2016)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싱글라이더>(2016)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한국사회의 유령, 그리고 한국사회라는 유령

이주영의 첫 장편 <싱글라이더>(2016)에서도 보았듯이 그녀의 작품에서 '유령의 존재'는 낯선 것이 아니다. <싱글라이더>에서 이주영은 부실채권 사건으로 삶의 위기에 처한 한 남성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개인의 욕망이 한국사회라는 시스템에 부딪히는 모습을 그린 바 있다. 여기서 재훈(이병헌)은 유령의 형태로 한국을 떠나 가족들이 살고 있는 호주에 도착한다. 그리고 영화는 재훈과 진아(안소희)가 유령이었음을 드러낼 때, 마치 반전의 구조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다시 돌이켜 보았을 때, 세밀하게 세공된 숏들을 복기해 보았을 때, <싱글라이프>의 후반부를 단순한 반전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뒤뜰과 뒷문을 서성이고, 창문 너머로 집 안을 훔쳐보고, 복층의 집 안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침입하는 재훈과 그를 담는 숏들. 특히, 재훈이 침대에 누워있는 수진(공혀진)을 분노에 차서 바라보다 결국 자리를 떠나는 장면에서 흔들리는 커튼과 바람에 날려 떨어진 서류들과 사진 더미들을 담는 미적으로 돌출된 숏들.

<레베카>(1940)의 몇몇 숏들을 복기하듯 다분히 히치콕적으로 찍힌 이 숏들은 어쩔 수 없이 유령의 존재를 떠올리게 만든다. 즉, <싱글라이프>에서 유령은 메타포의 영역에서 표면적인 서사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 것뿐이다. 그것은 반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알고 있지만 그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것의 복구와 직시에 가깝다.

이주영은 한 편의 장편 영화와 한 편의 시리즈를 거쳐 현대의 시스템에 가로막힌 개인의 욕망이 프레임 안에 도달하는 형상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개인의 형상은 유령의 상태에 가장 가깝다. 이중 <싱글라이더>의 '유령'은 개인의 욕망이 한국사회라는 시스템에 부딪혔을 때, 소멸 직전 반짝이는 잔상이다. 재훈은 회사의 비상사태에 대한 논의가 한창인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유리창 밖에서 서성이다가 다음 장면에서 항의하는 고객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뺨을 맞는데, 서서히 한국사회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이행하는 듯한 이 과정은 결국 재훈이 소멸할 운명의 경로를 가리킨다. 이 소멸하는 영혼은 한국사회 밖에서만 연명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재훈은 호주로 떠난다. 이때 재훈이 호주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기 위해 노트북 타자를 누르는 숏은 아주 비장하게 찍혔다. 그것은 단순히 한국을 떠나 도피하겠다는 선택을 넘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의 메타포, 나아가 유령이 되겠다는 결심일 것이기 때문이다.

 

<안나: 감독판> ⓒ coupang play
<안나: 감독판> ⓒ coupang play

한편 <안나>의 '유령', 즉 서류들과 거짓, 위조로 존재를 증명하는 '이안나'는 한국사회라는 시스템 그 자체가 된다.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욕망의 부산물이며 욕망 그 자체다. 또한 그 유령은 원본 없는 기표, 또는 어느 순간 원본을 상실하게 되는 기표라는 점에서 자본과 권력, 그리고 명예와 유사하다. 예일대의 학위 증명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안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최지훈이 자신의 온 삶을 바쳐 열망하던 '서울시장'은 그의 죽음과 함께 공석이 되며, 이유미가 이현주의 협박에 못 이겨 만들어낸 30억은 이현주의 죽음 이후 갈 곳 없는 돈이 되어버린다. 한지원이 수첩 한 면에 적는 '이안나=현주'라는 텍스트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최지훈의 장례식장, 최지훈과 이유미의 비리를 고발하는 장부 리스트가 된 공허한 이미지와 기호들. 이렇게 한국사회라는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서서히 원본 없는 텅 빈 기표가 되어버리는 것이 <안나>가 한국사회를 들추는 방식이다.

이러한 시스템의 유령적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이유미가 실시간 검색어의 순위를 조작하는 모습이다. 한지원의 직장 상사가 '이안나 교수 논문대필'에 관련한 검색어 순위를 보며 말하듯 "기사 뜬 건 없는데 계속 올라오는" 이 기이한 팩트(fact)는 곧 한국사회의 믿음을 구성하는 것이 근거와 사실 여부 이전에 존재하는 텅 빈 텍스트임을 증명한다. 게다가 아이러니한 점은 세상에 아직은 밝혀지지 못한 '이안나 교수의 논문 대필 이슈'가 진실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 일차적으로 가로막힌 진실의 규명은 이유미를 돕는 한지원의 과감한 폭로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진다. 이렇듯 <안나>에서 진실은 기사 없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이안나 교수의 논문 대필 이슈'처럼 거짓과 유사한 형태로 세상에 드러나다가도 모두를 파괴하는 좁고 기이한 경로를 거쳐 진실임을 인정받는다.

<싱글라이더>가 한국사회 밖으로 뛰쳐나가는 유령에 관한 이야기라면, <안나>는 오인과 모호한 진실로 가득 찬 한국사회라는 유령에 맞서는 이야기다.

 

<안나: 감독판> ⓒ coupang play

보통 사람의 욕망

주인공 이유미를 둘러싸고 있는 <안나>의 세 핵심 인물은 이유미의 욕망과 상호작용하는 데 있어서 복잡미묘한 관계 속에 있다. 이현주는 정체를 폭로할 것을 빌미로 이유미에게 협박을 가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지만 이유미의 욕망의 대상이며, 그의 거짓된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최지훈(김준한)은 이유미의 신분 상승을 도왔지만, 그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인물이기도 하며, 숨겨진 정체를 이용해 궁지에 몰아넣는 이유미의 족쇄이지만, 거짓말뿐인 이유미의 삶을 지켜내는 성(城)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부터 시작하여 이유미의 삶의 진실을 조금씩 파내기 시작하는 한지원은 결국 이유미의 삶을 망치는 동시에 그의 삶을 구원하는 자가 된다. 즉 이현주와 최지훈, 한지원은 모두 이유미에게 있어서 안타고니스트와 조력자 중 무엇이라 할 수 없는 모호한 경계 위에 서 있다.

이때 오해하기 쉬운 것은, 서사 상 표면적인 적대자인 이현주와 최지훈을 한국사회의 시스템 그 자체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2화와 7화의 타이틀 시퀀스에 떠오르는 두 개의 숏, 각각 이현주와 최지훈의 단독숏을 담고 있는 이미지는 다소 낭만적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인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이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명품으로 치장한 고풍스러운 이현주의 실루엣과 넓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서울 한복판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고심하며 프레임 너머를 하염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얼굴이기도 하다. 또한 말끔한 정장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는 멈출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찬 최지훈의 실루엣과 배경을 한가득 채우는 서울시장 홍보 전단이기도 하지만, 고민에 빠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그를 둘러싼 압력을 견디는 몸이기도 하다. 도리어 이 이미지에 놓여 있는 것은 불가해하고 유령적인 한국 사회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얼굴과 몸이다.

 

<안나: 감독판> ⓒ coupang play

더불어 <안나>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현주와 최지훈, 한지원의 욕망의 근원을 제시하기 위해 먼 과거로 플래시백 한다. 바이올린 강사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학창시절의 이현주, 갓 군대에서 제대한 후 가세가 기울어 친구와 사업을 도모하는 최지훈, 교사의 비리를 교육청에 고발한 이유로 뺨을 맞는 학창시절의 한지원의 과거가 그것이다. 이 플래시백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이 한국사회라는 시스템에 가로막히는 순간이다. 그것은 끝내 이유미의 서사를 멈춰 세우고 또 다른 보통 사람의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그렇기에 주의해야 할 점은 이들은 이유미의 삶을 위협하기 이전에, 즉 한국사회라는 시스템이기 이전에 한국사회 앞에 놓인 개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 후를 따라오는 것은 서로의 과거를 추적하며 한국사회라는 유령을 앞에 두고 허우적거리는 보통 사람들이다. 또는 한국사회의 서사를 보통 사람의 서사로 만들려는 이들의 끈질긴 싸움이다.

이 싸움의 끝에서 이유미는 자기 파멸에 이르는 선택을 한다. 최지훈과 자신의 비리 행적들을 담고 있는 유에스비를 한지원에게 넘기는 이 선택에서 이유미의 삶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가난함'으로부터 비롯한 부와 신분 상승의 욕망은 결국 파괴된다. 자신의 삶을 위해 모두를 속이는 삶은 공동체 모두를 위해 정의를 추구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희생하는 삶이 된다. 거짓말로 아빠를 속이며 돈을 빌리던 그가 "그런 사람이 서울 시장 되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며 입을 다물려 하는 김기사를 설득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선택 앞에서 이유미를 둘러싸고 있는 두 여성, 최지훈의 당선을 앞에 두고 검찰을 찾은 한지원과 고용주의 선택을 따르고 협력하겠다는 비서 조유미는 한국사회의 거대한 힘을 거스르고 가까스로 버텨낸다. 최지훈의 고발이 외면당할 위기 앞에서 한지원은 검찰청 창문 밖에 가까스로 매달려 관심을 끌고, 조유미는 수많은 기자에게 둘러싸여 몸을 부대낀다. 두 여성은 이렇게 한국사회의 중력과 압력의 이미지를 온몸으로 견뎌낸다.

 

<안나: 감독판> ⓒ coupang play

서울시장에 당선되기에 무섭게 최지훈은 이유미와 함께 미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최지훈의 죽음 이후 실종된 이유미가 은신한 곳은 설원으로 가득한 캐나다의 한 시골 마을이다. 한국을 떠난 외지의 풍경. 이곳은 어쩌면 <싱글라이더>의 호주와 같은 곳이다. 재훈이 호주의 절벽 위에서 희망에 찬 얼굴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유미는 황량한 사막의 고속도로 한가운데를 걸어 나가고, 썰매를 끌며 설원을 천천히 미끄러지는 해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싱글라이더>와 <안나>에 걸쳐 이주영은 실제 사건들을 토대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회의 이면을 집요하게 프레임 안에 붙들어 놓는다. 그리고 결국 이들은 한국을 떠난다. 그런 면에서 이주영은 지금 한국의 가장 정치적인 작가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안나>의 편집권을 두고 쿠팡플레이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싱글라이더 
A Single Rider
감독
이주영

 

출연
이병헌
공효진
안소희

 

제작 퍼펙트스톰 필름
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작연도 2016
상영시간 97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2017.02.22

 

<안나: 감독판> ⓒ coupang play

안나: 감독판
ANNA
감독
이주영

 

출연
배수지
정은채
김준한
박예영

 

제공 coupang play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8부작(429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2022.06.24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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