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리들리 스콧이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풍경
'나폴레옹' 리들리 스콧이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풍경
  • 김경수
  • 승인 2023.12.2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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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은 '나폴레옹'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 소니 픽쳐스

<카운슬러>(2013) 이후의 리들리 스콧의 영화를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힌다. 전작보다 한층 어두운 조명으로 인해서 그의 캐릭터가 한낮에 있더라도 새벽녘에 있는 듯해서다. 그의 영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햇볕이 드리울 틈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캐릭터는 시종일관 우울과 격정에 잠겨 있으며 너무도 사실적으로 카메라에 포착된다. 앞서서 이야기한 여러 장치 덕분에 스크린 너머의 세계는 마치 희망도, 탈출구마저 없는 종말론적 세계로 그려진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종말론적인 정서는 사건이나 몸짓, 대사 등등 의미화된 언어가 아니라 분위기 그 자체로만 드러나 보는 이의 마음에 침투하는 듯하다. 리들리 스콧의 신작 <나폴레옹>(2023)만큼 그 정서가 잘 드러나는 영화는 없는 듯하다.

<나폴레옹>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전기 영화로, 리들리 스콧과 <올 더 머니>(2017)에 이어서 이번 영화에서도 각본을 담당한 데이비드 스카르파의 합작품이다. 둘은 나폴레옹의 유년기를 잘라낸 뒤에 나폴레옹이 집권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루되 두 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하나는 나폴레옹이 지휘한 여러 전투, 하나는 조제핀 보나파르트와의 멜로드라마다. 두 이야기가 번갈아 그려지면서 천재 전략가인 동시에 애정 결핍에 나르시시스트인 나폴레옹의 양면이 드러난다. 두 이야기의 교차로 관객은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을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볼 수 있다.

이 각색은 제법 영리하다. 나폴레옹의 인생은 장편 영화로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파란만장하다. 최소한 드라마로 찍어야 하는 규모다. 감독은 워털루 전투 등 나폴레옹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에 집중하든, 불완전하되 그의 삶을 단편적으로 나열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각본가는 나폴레옹에 주목받지 않은 조제핀(바네사 커비)에게 초점을 두어서 나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에게 속박되지 않으려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그녀는 전장에서 드러나지 않는 나폴레옹의 내면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

 

ⓒ 소니 픽쳐스

영화는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시작된다. 나폴레옹의 얼굴이 아니라 단두대 앞에 선 마리 앙투아네트의 분이 번진 얼굴이 먼저 카메라에 포착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목이 잘린 다음에야, 군중 한가운데에 서서 이를 관조하듯이 보는 나폴레옹의 얼굴이 드러난다. 나폴레옹은 화면의 중심에 있지 않고 평범한 군중 중 하나로 보인다. 처음만 하더라도 그는 "코르시카에서 온 깡패" 정도로만 불리는 정도에 불과한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기까지 나폴레옹의 권력을 만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니다. 장군이었던 나폴레옹을 통령으로 불러들인 것은 당시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이들이다. 감독이 그리는 나폴레옹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를 초인이라고 착각한 것과는 달리) 역사를 개척하는 영웅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우연히 발굴된 존재에 가깝다.

감독은 나폴레옹을 평범한 시민으로 그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겁쟁이로 그린다. 나폴레옹이 첫 전투인 툴룽 전투에 임하는 장면에서부터 그러하다. 그는 동생에게 기습이 아닌 정면으로 승부할 것이라는 편지를 보낸다. 곧장 그는 한밤중의 기습으로 툴룽 요새를 점령하는 작전을 실행한다. 그가 툴룽에 진입하려는 순간에 포탄이 자신이 탄 말의 심장을 관통하자 겁에 질린다. 나폴레옹은 요새에 진입한 뒤에도 전장 한가운데에서 겁에 벌벌 떨고 있다. 나폴레옹은 리들리 스콧이 그간 <글래디에이터>(2002)와 <킹덤 오브 헤븐>(2005), <로빈 후드>(2010) 등의 시대극에서 그린 여러 영웅을 생각하면 정반대의 인물로 보인다. 정의나 평화 등의 신념에 기반해 공포를 이겨내는 영웅이 아니라 공포와 초조함, 불안을 숨기려 정의와 평화를 주장하는 이가 나폴레옹이어서다. 또한 나폴레옹은 야망이 있긴 해도, 그 야망이 본인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황제에 오르기까지는 본인의 신념이 아니라 주변인의 정치적인 요청에 따라서 움직인 존재에 불과하다. 나폴레옹은 권력은 지니고 싶되, 이에 마땅한 신념은 없는 듯이 보인다.

조제핀과의 멜로드라마는 이보다 더 깊은 차원의 심리적 문제를 건드린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영국군을 제압하러 원정을 떠날 동안 그는 조제핀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을 접한다. 나폴레옹은 조제핀을 괴물이라고 힐난하며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말하라"라고 말한 뒤에 사과하라고 강요한다. 또한 "당신은 나 없이 못 산다"라는 것을 더한다. 이는 곧장 조제핀에 의해서 전유된다. 조제핀은 나폴레옹이 어머니의 명령만 따라서 산 마더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평범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꾸짖는다. 이윽고 나폴레옹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당신은 나 없이 못 산다"라는 말을 끝내 이야기한다. 나폴레옹은 애정 결핍과 인정 욕구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어야만 하는 나르시시스트에 가깝다. 조제핀은 남편이 죽었다는 트라우마로 인해서 나폴레옹에게 집착한다. 조제핀과 나폴레옹은 서로 다른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이라는 것을 안 뒤에야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나폴레옹은 트라우마로 인해서 여러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은 엔딩 크레딧에 나오듯 총 300만에 달하는 군인을 헛된 죽음으로 몰아세운다. 다만, 나폴레옹의 정치적 결정을 단순히 조제핀과의 병적인 사랑이 만든 결과라고만 보기는 힘들다. 나폴레옹은 외적인 문제, 내적인 문제 모두를 감당하지 못하기에 저도 모르는 선택을 내릴 뿐이다.

 

ⓒ 소니 픽쳐스

<나폴레옹>은 분명 단점이 가득한 영화다. 2시간 38분에 담기에 너무도 많은 전투가 있으며, 조제핀과의 드라마도 잘 연결되지 않는다. 4시간 10분짜리 감독판에서 여러 장면을 잘라내느라 플롯이 곳곳이 텅 비어 있어서다. 특히,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겨우 다섯 쇼트로 요약되고, 나폴레옹의 심리는 잘 묘사되지 않는다. 호아킨 피닉스의 무뚝뚝한 연기를 감안해도 인서트가 부족하다. 이 외에도 서사의 빈 구멍이 한가득하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에 장애물이 없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나폴레옹을 황제에 오르게까지 한 여러 정치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설득력이 사라진다. 나폴레옹을 둘러싼 모든 인간이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과정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소모된다. <나폴레옹>은 한 인간의 연대기를 무리하게 그린 듯하다는 인상을 피하기가 힘들다.

또한, 이성적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정치와 경제 등 영역이 사실은 불가해한 욕망이 지배하는 영역이며, 보통 사람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감독의 염세주의도 문제적이다. 이 염세주의는 <카운슬러>(2013)에서부터 최근에 찍은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다. 다만 이 염세주의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2022)도 오펜하이머라는 한 개인이 스트로스의 질투심 때문에 간첩으로 낙인찍히는 과정을 그린다. <오펜하이머>는 과잉에 가까운 대사로 매카시즘 시대의 정치공학을 스케치한다. 반면에 <나폴레옹>에서는 나폴레옹이 우상화된 존재라고 한들, 나폴레옹을 둘러싼 정치적인 의견 충돌을 전혀 소개하지 않는다. 되려 나폴레옹이 유배지에서 탈주해 다음에 파리로 돌아올 때도 이 과정은 생략된다. 정치적인 의견 충돌이 부재하는 자리에 남은 것은 정치 자체에 대한 냉소적 태도뿐이다. 욕망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아이러니를 그리려 한 것은 이해된다. 그러나 역사가 움직이는 동인을 욕망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다소 편협하다. 여러 정치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가운데에 나폴레옹의 욕망이 이해관계의 추악함을 드러낼 때 그 아이러니가 두드러진다. 아마도 감독판이라면 조금은 낫게 그려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쉽다.

 

ⓒ 소니 픽쳐스

그런데도 <나폴레옹>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면 리들리 스콧이 리얼리스트로 현실을 포착하는 감각 때문이다. 영화가 폭력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린 목을 사형집행인이 한 차례 더 들게끔 한다. 관객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린 목을 두 번이나 목도한다. 툴룽 전투를 찍을 때도 카메라는 말의 심장이 포탄에 의해서 뚫리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또한 왕당파 진압에서도 시민의 신체가 포탄으로 관통되어서 바닥에 뒹군다. 이는 영화의 리듬과도 맞물려 있다. 나폴레옹이 지휘한 전투 가운데 승리한 전투는 전쟁이 시작한 순간만 드러난다. 대신에 나폴레옹이 민간인에게 대포를 쏜다든지 하는 행위의 폭력성을 충격 효과로 더욱 강력하게 전달한다.

반면에 후반부의 러시아 원정과 워털루 전투를 찍을 때, 카메라는 인간의 훼손된 신체를 멀리서 찍기 시작한다. 전투가 진행될 때에 두 진영의 군인은 진흙탕 싸움이라고 할 만한 육탄전을 벌인다. 또한 이 러시아 원정과 워털루 전투는 다른 전쟁보다 더 길게 찍힌다. 문제는 누구도 전쟁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물러서야 하는 순간에도 프랑스 만세라는 명분 아래서 몸소 전장에 가서 병사를 사지로 내몰기까지 한다. 우리는 거기서 초반부의 폭력 묘사만큼의 충격을 느끼지는 못한다. 리들리 스콧은 이것이 우리가 전쟁을 경험하는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처음만 해도 충격과 공포, 순간적인 폭력의 이미지로 기능한다. 나중에는 현실적이면서 지속되는 폭력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그때의 스크린은 회색빛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것은 리들리 스콧이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풍경일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은 개봉한 시기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등 명분이 분명치 않은 전쟁 등 외부의 상황과 이어져 있다. 이는 우리가 전쟁을 느끼는 감각까지 시각화한다. 타인의 전쟁은 잠깐만 폭력적이고 흥미롭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라는 문제적 개인을 통해서 그 전쟁의 감각을 체험하게 하는 영화가 아닐까.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소니 픽쳐스

나폴레옹
Napoleon
감독
리들리 스콧
Ridley Scott

 

출연
호아킨 피닉스
Joaquin Phoenix
바네사 커비Vanessa Kirby
벤 마일즈Ben Miles
타하르 라힘Tahar Rahim
뤼디빈 사니에르Ludivine Sagnier
매튜 니덤Matthew Needham
유세프 케르코르Youssef Kerkour

 

배급|제공 소니 픽쳐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58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12.06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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