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랜드' 불법으로 찾은 나의 진실
'조이랜드' 불법으로 찾은 나의 진실
  • 박정수
  • 승인 2023.12.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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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핍박받는 타자들의 운명"

지금껏 파키스탄 영화는 국제 영화계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이 말은 그간 파키스탄 영화가 국제 영화제를 거쳐서 다양한 나라에 배급되는 일이 드물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이렇듯 파키스탄 영화가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와중, 사임 사디크의 장편 데뷔작 <조이랜드>가 2022년 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칸 영화제에서 공개된 <조이랜드>는 그간 가려져 있던 파키스탄의 사람들, 특히 이슬람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은닉된 섹슈얼리티의 타자들을 드러냈다.

 

ⓒ 슈아픽처스

1991년 라호르 태생의 '사임 사디크'는 파키스탄의 영화감독이다. 보수적이고 독실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며 폐쇄적인 이슬람 사회에 염증을 느낀 그는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단편을 다수 연출하였다. 인터넷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굿모닝>, <나이스 토킹 투 유>, <달링>(2019) 등의 작품에서 사디크는 '언어'를 탐구한다. 그는 익숙한 언어와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동시에 배치하여, 내가 잘 모르는 언어를 조심스럽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나와 다른 '타자', 사회의 보편성을 따르지 않는 '소수자'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유성영화가 보편적인 오늘날에 무성영화를 차용하며 감독 역시 몸소 다름을 실천하였는데, 이러한 타자성을 <조이랜드>에서 '비바'를 연기하는 '알리나 칸'이 '알리나'라는 배역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의 전신인 <달링>에서 구체적으로 탐구하였다. 남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으로 성을 전환한 알리나는 남성의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승인'되어야만 하는 여성의 수동성을 체감한다. 이렇게 타자를 핍박하는 폐쇄적인 파키스탄 사회를 영화로써 드러냈다.

이러한 폐쇄성은 <조이랜드>의 형식으로 이어진다. 사디크는 파키스탄 사회를 '4:3 화면비' 안에 담는다. 4:3 화면비는 영화의 보편적인 몇몇 화면비(1.88:1, 2.39:1)와 비교해서 양옆이 가장 좁아서 폐쇄적이다. 이 숨 막히는 화면비에 공간 또한 출구 없이 갑갑하게 담아내고, 여기에 개개인의 얼굴을 프레임 가득 클로즈업한다. 이렇게 담겨진 영화의 주인공 하이더르(알리 준조)는 마음이 유약한 남자다. 가부장적인 이슬람 사회는 영화 속 살림(소하일 사미르)이나 아버지(살만 파르자다)처럼 남성이 경제권을 쥐고 식구들을 강하게 호령하라고 주문하지만, 하이더르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뭄타즈(라스티 파루프)에게 결혼 이후에도 커리어를 이어 나가도 좋다며 청혼할 정도다. 그러나 결혼 이후 아버지는 하이더르의 취업을 닦달하고 뭄타즈를 전업주부로 주저앉힌다. 둘은 '가장 남성' 및 '전업주부 여성'이라는 성 역할에서 달아날 수 없고, 좁은 화면을 빽빽이 채우는 클로즈업의 미감이 이를 가시화한다. 젠더를 수행하는 얼굴 외의 것은 프레임에 담길 수 없고, 좁다란 화면비에 사실상 '가둬진다.' 영화 초반부의 염소가 프레임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한 채, 도축 및 촬영이라는 목적으로 붙잡히듯, 하이더르도 아버지가 부여한 남성성이라는 프레임에서 도망치지 못한다.

영화에는 4:3 화면비, 클로즈업에 더해 카메라까지 '고정'된다. 물론 항상 카메라가 정박해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성 관행이나 역할을 강요받을 때 영화의 카메라는 멈춘다. 젠더는 내가 원하지 않고 외부에서 강요하기에, 이로써 젠더를 수행하는 나는 외부에 종속되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뭄타즈가 화장실에서 임신, 곧 가부장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조카들이 시끄럽게 보채며 빨리 나오라 닦달하듯, 타인을 위한 나로 전락한다.

 

ⓒ 슈아픽처스

사회가 개인에게 주문하는 젠더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이더르는 남근이 항문에 박히기를 원하고, 사회가 여성성이라 규정한 성정을 갖추고 태어난 남성으로서, 즉 그의 정체성은 양성구유적이다. 그러나 사회는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와 사회문화적 성별인 젠더의 일치를 강요한다. 한 몸에 남성성과 여성성 둘 다 지닐 수 없고, 둘 중 하나는 타자화되어야 하기에 하이더르는 괴로워한다. 만약 둘 다 지닌다면 무용단의 남성 백댄서들이 하이더르를 괴롭히는 것처럼 끔찍한 처우가 뒤따른다.

이렇게 젠더는 남녀 모두를 구속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부장제에 속한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극심한 답답함을 느낀다. 사회가 규정한 남성 젠더는 일을 하기 위해 바깥을 나도는 것이 허용되고, 심지어 야외 자위행위까지 눈감아주기에, 살림은 집을 자주 비우고 하이더르는 산책을 하다 비바를 만난다. 남성들의 배경에는 항상 출구나 틈이 있는 모습이다. 반면 여성에게는 출구가 허용되지 않고, 사방이 꽉 가로막힌 집만 허용된다. 누치와 뭄타즈가 선풍기를 가지고 내려올 때 좁은 집의 폐쇄성이 도드라진다. 심지어 집에선 어디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침실은 조카들이 접수했고, 화장실조차 살림이 감시하니 말이다. 이를 더 이상 참지 못해 짐을 싸는 뭄타즈지만 여성이 도망칠 곳,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여성의 외출엔 남성의 승인이 필요하기에, 몰래 빠져나오면 결국 돌아가야 한다. 여성에게 가능한 선택은 노예로서 버티느냐, 아니면 죽느냐 오직 둘 뿐이다.

사회는 남성에겐 여성성을, 반대로 여성에겐 남성성을 적대시하게 만들지만, 양성구유적 성질을 천성으로 지니고 태어난 인간에게 타자화는 곧 '자기 부정'이다. 사디크는 타자화 이전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줌인'으로 가시화한다. 뭄타즈는 거울을 보고 화장하며 출근 준비를 한다. 그 옆에서 하이더르도 함께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단장한다. 부부는 사회가 각 젠더에게 허용하지 않은 여성의 노동, 남성의 치장을 열망하고 있다. 그 모습을 줌인한다. 앞서 언급한 클로즈업은 빠져나갈 수 없는 맥락 속에서 사용되어 폐쇄적인 의미가 짙었다. 이와 달리 줌인은 자신의 욕구를 확인하는 맥락에 위치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정체성에서 멀어져 비로소 자아에 다가서는 느낌을 준다. 줌인 외에 하이더르가 비바를 쳐다볼 때의 클로즈업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자아를 찾아가는 이들은 '거울'을 본다. 누치는 꽉 끼는 옷을 선호하지만, 뭄타즈는 헐렁한 옷을 좋아한다. 사회활동에 불편한 의상 대신, 뭄타즈가 일하기 편한 의상을 거울이 '객관적으로 반영한다.' 즉 나 자신의 솔직한 정체성엔 가까워야 하고, 왜곡 없이 정확하게 비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물들은 자아를 줄곧 잃어버리기에, 사디크는 '술래잡기'라는 상징을 반복 사용한다. 하이더르가 조카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 그는 흰 천을 뒤집어쓴다. 그의 성별이나 나이 등이 모조리 말소된 해당 장면은 '줌아웃'된다. 그는 자신의 본래 모습에서 멀어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멀어진 자신을 찾아 헤맨다. 이후 뭄타즈가 술래잡기를 할 때, 아버지는 축사로 비로소 뭄타즈가 가문의 저주를 이겨내고 아들을 가졌다며 칭송한다. 그러나 그녀는 가문의 아들을 낳기 위해 희생하는 여성이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뱃속의 태아는 잊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뛰어논다. 그렇게 숨바꼭질하는 그녀는 누구를 찾는 것일까, 아마도 전업주부이자 어머니로 전락하며 잃어버린 맹랑한 그녀 자신일 것이다. 일을 할 수 있는 여성, 자위를 하는 여성을 말이다.

 

ⓒ 슈아픽처스

<조이랜드>에는 두 차례의 정전이 발생한다. 한 번은 뭄타즈가 일할 때, 다른 한 번은 비바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발생한다. 이로 인해 일하는 여성, 무대에 오른 트랜스젠더 여성은 보일 수 없게 된다. 정전뿐만 아니라, 비바가 공연을 하려 할 때면 음향 사고가 발생한달지, 세트장 준비가 안 되는 등 직장의 상급자들이 여성의 노동이나, 남성 하이더르가 여성 비바에게 임금을 받는 관계 등을 승인하지 않는다. 이는 집안의 우두머리 아버지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그 또한 아들이 가져온 비바의 간판이 부끄러운 듯 천으로 숨기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빛을 비춰 자신을 드러낸다. 뭄타즈는 불이 꺼졌을 때 동료들의 손전등을 빌려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한다. 비바를 돕는 하이더르 역시 관객들에게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달라고 요구하여 무대를 비추고 공연을 재개한다. 이때 영화의 카메라는 처음으로 현란하고도 유려하게 변한다.

문제는 규칙을 만들어내는 직장의 상사, 가장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는 '불법'에 가깝다. 이에 어둠 속에 숨은 것을 찾거나 발광하는 행위는 불완전하고 간헐적이다. 하이더르는 일하는 내막이 아버지에게 탄로 나면 명예를 실추했기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한 법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비바는 남성과 여성 어느 좌석에도 앉지 못하고, 뱃속의 남아를 지키지 못하고 음독자살한 뭄타즈는 죽어서까지 모욕을 당한다. 즉 법을 따르면 생존하거나 머물 수 있는 반면, 법을 어기면 그 어디에도 머물 수 없게 배태되거나 처벌당한다. 이에 사디크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숏이라 말할 수 있는, 흐르는 염소 피 위에 저 하늘의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숏을 만들어낸다. 죽어야만 비행할 수 있는 삶, 죽음 속에서 날아다니는 삶, 그것이 사회에서 핍박받는 타자들의 운명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타자들은 자유로워야 한다. 사디크는 자유롭기 위한 개인의 '태도'와 타자가 위치한 '공간'을 탐구하며, 자유를 위한 여건을 고찰한다. 영화 속 자유를 두고 타협하지 않는 존재는 비바가 있다. 그녀의 생물학적인 성별은 남성이지만, 선천적인 불가항력을 마다하고 여성으로 능동적으로 성을 전환한다. 그 과정에서 피를 철철 흘리더라도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치장이 가능하고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여성 젠더를 열망한다. 물론 여성 젠더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남성에게 여성성을 검열당하고, 또 경제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기존 여성 젠더의 한계 역시 닮아야 한다. 그러나 여성 젠더의 수동성을 원치 않는 비바는 능동적인 남성 젠더의 특징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성 백댄서들을 고용하여 지시한다. 또 남근을 남겨 놓으라는 하이더르, 곧 남성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성기를 제거할 것이라 말한다. 즉 사회가 금기시한 젠더를 선망하면서도, 사회가 규정해놓은 젠더의 특성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지향하는 고유한 젠더를 몸소 규정해갈 수 있어야 한다.

 

ⓒ 슈아픽처스

비바는 아주 으슥한, 외부인의 시선이 들지 않는 은밀한 아지트에 거주한다. 동료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건대, 더더욱 그들은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숨어야 할 것이다. 공인되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의 아지트와 달리, 뭄타즈와 하이더르의 관계는 국가 및 가족들에게 합법적으로 승인된 관계, 이로써 탁 트인 시야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관계뿐만 아니라 그들이 머무는 집 또한 규정하는데, 그래서 갑갑한 것이다. 뭄타즈는 화장실에 숨겨놓은 약물을 마시려는데, 갑자기 하이더르가 들어온다. 줌아웃으로 멀어진다. 이렇게 합법적인 공간은 아무리 사적인 집이라 한들, 타인에게 승인받아야 하는 나머지 정작 자신이 소외된다. 반면 외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비바의 집에선 조명이 개인을 훤히 밝힌다. 어둠 속에 자꾸만 숨어야 하는 뭄타즈와 정반대로 자신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다. 즉 집에서만이라도 감시, 곧 법이 미치지 않아야 한다. 법이 미치지 않을 때, 비로소 비바와 하이더르는 자신이 잃어버린 반쪽을 되찾는다.

사디크는 결말에서 모든 옷을 벗고 바닷 속으로 들어가는 하이더르를 줌아웃한다. 멀어지면서 롱숏, 익스트림 롱숏으로 확대된다. 4:3 화면비의 갑갑함을 잊으리만큼 광대한 풍경, 거기에 무엇이든 입혀질 수 있는 나체의 하이더르는 검열을 피해 '잘 보이지 않고', 대신 변형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액체가 들어찬다. 사디크가 파키스탄에 바라는 것이 내게로서의 줌인 반면, 검열로부터의 줌아웃, 이를 가능케 할 바다와 같은 법인 것이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슈아픽처스

조이랜드
Joyland
감독
사임 사디크
Saim Sadiq

 

출연
알리 준조
Ali Junejo
라스티 파루프Rasti Farooq
알리나 칸Alina Khan
사르와트 길라니Sarwat Gilani
살만 피르자다Salmaan Peerzada
소하일 사미르Sohail Sameer

 

배급 슈아픽처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27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12.13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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