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짐과 불협화음 ['괴물' #1]
허물어짐과 불협화음 ['괴물' #1]
  • 변해빈
  • 승인 2023.12.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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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고 섬뜩한 순간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

어느 밤, 동네 빌딩에 위치한 걸스 바에 화재가 발생한다. 영화는 비교적 먼 거리의 뒷산 언덕쯤에서 동네 전경을 넓은 화각으로 담아내며 위 상황을 제시하는데, 이는 홀로 외진 산을 어슬렁거리는 '한 아이의 시점 쇼트'로도 이해된다. 배경적 어둠과 흐릿한 초점, 신체를 부분적으로 포착한 기법으로 인해 아이의 실루엣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무리지만, 인물의 차림새 또는 손에 들린 물건들은 분명 어떤 쓸모를 지닌 단서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우리는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라는 한 아이가 산에서 등장한 것과 유사한 장난감을 크게 회전시키는 동작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그가 대교 위에서 떨어트린 것이 라이터라는 사실과 함께 증폭되는 사이렌 소리가 암시하는 위험 요소도 뚜렷이 감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비밀 친구 사이인 '미나토'(쿠로카와 소야)가 요리에게 '아버지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걸스 바에 방화한 것이 맞느냐'고 물을 때, '술은 나쁜 것'이라고 모호하게 답을 흩트리는 요리의 모습은 단지 우리 앞에 펼쳐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앞의 화재가 방화일 것이라는 일련의 추측, 수상한 존재 사이 어떤 연관성이 극 안에 감돌고 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괴물>은 사건의 테두리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데서 가능한 무언갈 탐색하려는 쪽 같다. 이 영화의 이야기에서 입체적인 규모가 느껴진다면, 테두리 안에서의 반복 운동 때문이다. <괴물>은 걸스 바 화재를 기준으로 세 번 시간을 되돌리면서 여러 인물의 입장을 살피며 전체 궤적이 짜 맞춰지기까지의 과정을 담는다. 그러기 위해선 한 축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존재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괴물>은 분명하게 확인되는 사실에 가까워지려 하기보단 사실을 감별하는 획일적 체계로는 불가능한, 모호함이 이룩한 가능성을 중시한다. 모호함이 발생하고 작동하는 원리를 작중 세계 안에 들여놓는다. 필요악으로 기능하는 모호함, 주어진 상황을 다른 방향에서 보게끔 조력하는 영화의 구멍. 확신 안에 내포된 위험 요소를 감지하기 위한 의심의 지속이 영화적 운동을 만든다.

​영화는 어떠한 오해의 지점에 대해 여러 관점을 거치면서 관객이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도, 모든 상황을 극 안에서 일일이 수습하진 않는다. 오해를 이해(그 이상의 존중)로 풀어내는 순간만이 아니라 굳이 오해를 다 풀어내지 않은 기로도 공존한다. 예컨대 극 초반부, 사오리(안도 사쿠라)의 관점에서 아이 발을 걸어 넘어트리는 교장(타나카 유코)의 행동. 각 관점의 편향성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의 속임수일까. 손녀를 상실한 아픔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된 걸까. 그도 아니면 공동체의 논리를 내세워 개인을 희생시키는 데 거리낌 없는 그에게 진실로 어떤 악한 지점이 있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영화만으로 모든 의문을 해소할 수 없다. 그런데 그뿐 아니라, 극 후반의 몇 가지 장면을 거쳤을 때 교장에게서 '괴물'적인 것이 아닌 혹은, 절대적인 괴물이 되지 못한 한낱 인간의 나약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면성은 다른 인물들에게도 적용된다. 어른(요리 아버지) 또는 사회의 규정된 시선으로부터 가해진 폭력과 고통, 위태로움이 미나토와 요리의 거짓말이라는 외상으로 나타나며 또 다른 이(호리)에게 영향을 가하는 경로. 결코 '어른의 잘못과 반성'을 제고하는 단순한 접근으로 현실적 문제가 옹호되진 않는다. 하지만 <괴물>이 관객에게 안긴 미심쩍은 분열은 상황을 편리하게 모면할 구석을 마련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어중간함과는 다른 지점이 있다.

 

ⓒ NEW

​그러한 점을 살피기 위해선 <괴물>이 하나의 경우에 드러날 수 있는 두 측면을 팽팽하게 붙잡고 있음을 말해야 한다. 즉 <괴물>의 기이하고 섬뜩한 지점은 그것이 연약한 무언가와 분리되지 않다는 데 있다. 동일한 하나의 장면, 상황, 입장 안에 섬뜩함과 연약함을 동시적으로 만들어 내는 균형감. 감정적 무거움과 감정적인 환기가 공존하는 풍경, 냉혹함과 위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얼굴, 관계 내 힘이 없는 존재가 표면과 달리 더 강압적인 힘을 뻗치는 듯한 이상한 인상, 교환과 뒤섞임. 단일한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 기이한 그 힘의 관계를 빼고선 <괴물>이 주는 감흥을 다 말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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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하게 어그러지며 팽창하는 영화

우선 큰 축을 좀 더 말하려 한다. 오프닝의 화재는 사건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위한 시간적 전제로 기능한다. 남편과 사별한 사오리는 아들 미나토와 불 난 광경을 바라보던 중 돼지 뇌 이야기를 최초로 듣게 된다. 돼지 뇌를 이식한 존재가 인간일 수 있냐는 것. 그것이 어딘지 별스럽다는 식으로 넘긴 이후, 미나토에게서 이상 증세를 점차 발견하게 된 사오리는 초등학교 담임인 호리(나가야마 에이타)의 가혹행위를 의심, 그리고 확신한다. 여기엔 미나토의 거짓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아이의 변화에 눈먼 사오리가 화재 당시 호리가 걸스 바에 있었다는 뜬소문을 비롯, 그것을 이성적인 사고 회로로 판단하지 못하는 인물 내면의 극심한 불안, 두려움과 분리되어 말해질 수 없다.

<괴물>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인물 저마다의 절박함이 동일한 하나를 좁게 바라보게 만드는 문제를 겨냥함과 동시에, 그러한 절박함이 복합적이고 동시적으로 부딪히며 팽창하는 영화다. 이러한 사실은 영화가 호리 선생, 초등학교 교장, 미나토와 요리의 시점에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무너트리는 영화의 철저한 질서 안에서 이뤄진다. 시퀀스의 마디마다 존재할 수밖에 없는 추측과 불확실함은 오히려 세계를 정교하게 어그러트리기 위한 모호함을 설계하는 작업으로 의도된다. 이를 통해서 규정되고 합의된 질서에 따른 사실관계만으론 불충분한 이해관계에 얽힌 문제를 응시한다.

​그러한 맥을 이어, <괴물>이 자기 정체성에 혼돈과 방황을 겪는 두 아이를 중심으로 진행될 때, '반복'과 '재구성'이 어떤 오해와 편향된 시선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간파하진 않더라도) 비정상성과 타자화 개념에 대한 화두로 확장한다는 게, 이 영화를 말하는 가장 안정적인 방법일 것이다. 관점을 기준으로 나눈 세 개의 구간 사이에 공통적으로 관류하는 요소들은 특정 인물과 인물, 진실과 거짓, 앞면과 뒷면의 관계 안에서 자리를 교환하며 고정된 규정성을 탈피하는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자기 뇌가 '돼지 뇌'라는 미나토의 이상한 판단은 호리와 미나토의 관계 바깥, 요리가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아온 세뇌와 폭력이다. 서사적인 맥락이 메워짐에 따라 잘못 위치한 이름은 자리를 찾아가고, 구멍이 뚫려 위태롭고 기이하게 느껴지던 상황을 마주할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시선과 감응을 다른 결로 작동케 한다.

​'돼지 뇌'만큼이나 "괴물은 누구?"라는 작중 인물들의 대사는 영화 안에 반복되며 다양한 의미의 층위에 오른다. 사오리 시점에서 통로 막힌 터널 속 미나토가 외치던 "괴물은 누구?"는 누군가로부터의 괴롭힘으로 읽히지만, 미나토와 요리 사이에선 그들만의 암호이자 놀이이며, 의미를 좀 더 확장하자면 외부 폭력을 다른 질서로 바꾼 자발적이고 저항적인 힘으로 변주될 수도 있다. 이같은 변주는 영화가 작중 사건의 실질적인 발화점인 요리의 아버지, 학급 아이들을 극 중심부로부터 비교적 바깥에 머물게 한 이유와 연관된다. '괴물은 누구인가'하는 물음을 영화의 바깥, 현실 속에 안착시키려는 시도인 셈이다.

무엇보다 물음의 대상뿐 아니라 물음의 형태도 다양하게 갈라진다. 물음은 동성애 성 정체성을 지닌 미나토, 요리 주변을 맴도는 무언가에서 '누가 또는 무엇이 진짜 괴물(폭력)인가'의 의미로 교체된다. 아마 이러한 지점이 <괴물>이 보는 이에게 감동을 안기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위의 물음이 긍정적인 차원으로 열려 있을 수 있는 건,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누구든 괴물이 되는(될 수도 있는)' 상황을 경유하여 '누구도 괴물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이상한 시선을 부조해 내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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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결핍)이 이어낸 동형성

<괴물>에서 가장 즉각적이고 원초적인 기이함이 감도는 대목은 단연 구멍이 많은 사오리의 관점일 것이다. 돼지 뇌 이야기에 이어, 미나토는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고,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점점 어딘가를 다친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다가 그대로 일시정지된 순간처럼 '정상적'인 속도와 행동반경을 벗어난 몸짓을 보인다. 미나토의 입에서 호리의 이름이 나온 이후, 그의 얼굴마저 등을 지거나 웅크리는 특정 움직임으로 교묘하게 가려진다. 그의 사물에 의해 생겨난 구멍은 점점 사오리 곁에서 모습이 가려지고 축소되는 인물의 존재 자체로 옮겨간다. 대신 화면의 공란은 알 수 없는 것들로부터 발생한 일종의 귀기로 메워진다. 느낌은 있지만 그 실체는 알 수 없는 것. 인간의 사고와 능력 바깥의 그것. 그 강도는 다섯 개의 학부모 상담 시퀀스에서 고조된다. 아마 이러한 기이한 인상은 인물들 사이 견고하고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묵인 혹은 외면과 회피의 질서에 따라 비가시적으로 감춰진 폭력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려는 영화의 주된 메시지에 대한 화두로 이어질 것이다. 사전에 입을 맞추고, 과도하게 형식적으로 설계된 언어를 구사하는 공동체, 그들의 (사오리 말처럼) '인간의 마음이란 게 없는' 기계적인 이미지처럼 말이다.

​그런데 위 인상에는 좀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것 같다. 앞서 말했다시피 핵심은 '힘의 관계가 일방향적이지 않다는 것'.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가 마련된 영화가 피해자 시점 위주로 전개될 때, 장면은 자칫 특정 심경이 지닌 물리적 연약함으로 팽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괴물>은 좀 다른데, 이때 선악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 상호적으로 일치된다는 게 관건이다. 장면을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사오리가 학교에 두 번째 방문한 장면. 교장은 교사들끼리 합의한 내용, "선생님의 팔과 학생의 코가 접촉했다"하고 거의 읊는다. 그것은 너무 형식적이어서 '접촉'을 '폭력'이라고 바로잡는 사오리의 분투는 정당하다. 어느 정도 관객이 예상 가능한 반응 중 하나다. 그런데 이때 사오리가 보인 행동은 범상치 않다. 눈을 피하는 교장의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사오리의 눈, 손가락으로 교장의 코를 지그시 누르는 제스처, 그것에 가까이 달라붙어 잡아낸 카메라의 거리감(익스트림 클로즈업 쇼트). 여러 차원에서 '접촉'이란 언어와 일치되는 이 광경이 주는 긴장감은 기계적인 맞물림의 상태가 사오리에게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기 때문 아닐까.

​다시 말하면, 세 번째 방문에서 사오리가 교장이 대본처럼 들고 있던 서류철을 빼앗아 집어던지지만, 이 충동과 우발은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영화는 교장의 계획대로 죽은 손녀 사진이 떨어지며 사오리의 연민을 자극하는 계획의 일치, 성사를 보여준다. 충동과 우발이 견고한 체계를 허물어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동조하는 상황. 사오리가 서서히 자기주장의 빈틈을 채우는 것 같지만, 그것이 호리의 입장이 들어갈 빈틈을 막아 세우는 형국. 이는 걸스 바 소문을 낸 동료 교사가 낸 또 다른 소문(교장이 낸 사고로 손녀가 죽었지만 지위를 지키기 위해 남편이 대신 죄를 뒤집어썼을지 모른다는 것)을 붙잡고야 마는 호리의 각박함, 두려움 때문에 연쇄적으로 불어나는 미나토와 요리의 거짓말로 이어진다. ​그 근원에는 인물들이 지닌 결핍의 버틸 뿐 아니라 증식된 결핍이 연쇄적인 흐름을 만든다. 영화의 내용물이 채워짐에 따라 저마다의 구멍들, '알 수 없음'의 두려움은 해소되기보다 해소되지 않음을 알리는 쪽으로 기능한다. 다른 이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에 담긴 '나'의 방황이 누군가를 타자화하거나 실재를 왜곡하는 결과로 정교하게 무너지고 또 의도와 다르게 정교하게 어긋난다.

<괴물>의 촘촘한 서사적 짜임새가 가진 미덕은 입장 차에 따른 구멍을 메운다기보다, 결핍(구멍)을 드러내는 쪽이라는 데 있다. 영화는 자기 세계를 허물어트리지 않으려는 개개인의 세계를 기어이 허물어트린다. 이지메로 전학을 가면 중학교 입학시험을 볼 수 없다는 학교 선생의 말, 사오리의 남편이 외도하던 도중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그러모아 인물에게서 나타나는 면모를 유추해 보는 꼼꼼한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각 사실을 노골적으로 그러모으지 않는다는 것, 의도된 허술함, 분산과 흩트림은 단선적인 일화로 한 인물을 규정하지 않으려는 영화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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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음과 태풍의 기능

그런데 <괴물>에는 복잡한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고, 도리어 동떨어져 그저 존재함으로써 형용하기 어려운 울림을 안기는 요소가 있다. 먼저, 사오리가 다섯 번째 학교를 방문하던 장면. 그는 학부모 설명회 이후 학교를 그만둔 호리가 돌연 미나토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미나토가 호리를 피해 도망치던 중 계단에서 굴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에 없다. 이때 실종된 미나토가 남긴 휑한 기운 대신 별안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화면에 끼어든다. 짐승 울음 같기도 하고, 부피를 지닌 사물이 둔탁하고 거칠게 부딪힌 마찰음 같기도 한데, 여하간 급작스런 끼어듦만큼이나 괴상하고 불쾌한 소리다. 더군다나 그것이 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복도를 지나던 한 아이가 잠시간 허공을 유심히 올려다보는 모습을 조감한 쇼트가 삽입되긴 하지만, 그 굉음을 인식한 이가 장면의 중심인물이 아니란 점도 요상하다. 물론 미나토의 자살까지 상상했던 사오리의 극과 극을 오간 심경을 부연하는 장치쯤으로 짐작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호리의 관점에서 조금 더 우렁차게 울릴 때 넘겨짚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은 것이 된다. 그러니까 사오리가 안도하던 바로 그때, 호리는 옥상 지붕 위에 맨발로 선다. 죽으려던 것은 미나토가 아닌 호리이다. 그는 단지 미나토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았단 결백을 확인하려던 것이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 이 잔인한 불운을 절감한다. 카메라가 뒷모습을 응시하는 동안 그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좌측 외화면에서 침투하는 굉음을 따라 고개를 돌려 프레임 너머를 응시하던 순간의 얼굴은 볼 수 있다. 그것은 소리의 출처를 밝혀내는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의문을 더한다. 어리둥절함이란 표현으론 모자란, 죽으려던 사람의 얼굴에선 보기 힘든 모종의 평안함에 가깝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대로 시공간적 간격을 뛰어넘은 영화는 호리가 미뤄왔던 일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모습을 그려낸다.

​굉음의 경이로운 점은 영화가 확신이 가진 위험을 늘려갈수록, 그것과 불화하여 이상한 확신을 준다는 데 있다. 영화의 반복에 따라 세 번째 굉음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된다. 교장과 미나토가 트럼펫을 부는 소리이다. 그것이 울려 퍼지는 순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적 만감을 선사한다. 중요한 건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소리가 실제로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단 사실이 감동을 준다. 교장은 우연히 미나토가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이 모든 것이 자기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초조하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 미나토에게 교장은 "누군가에게 말 못 할 일이 생기면 그냥 후- 불어"하고 말하며 트럼펫을 쥐어준다. 이것이 현실의 문제에 언제나 적용될 수 없고 누군가의 고통을 해결하는 절대적 방법이 아님은 물론이다. 아주 일시적인 것이다. "그렇구나. 거짓말을 한 거였구나"하던 교장의 되새김은 구체적인 행위로 이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문다. 하지만 두 대의 트럼펫 소리가 강하게 퍼지는 순간은 영화의 어느 장면보다, 아니 거의 유일하다시피 그들이 진심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그 풍경엔 불필요한 의심이 없다. 두 대의 트럼펫 소리는 그저 온몸으로 숨을 불어넣는 순간에 집중하는 안간힘으로 만들어진다. 그 소리의 강렬함은 무언가를 숨기려는 태도로는 외부를 뚫고 나오지 못했다. 심지어 서로의 무언가 조율할 필요도 없는 부조화로 가능한 것. 우연한 조우와 불협화음을 수용하는 굉음은 어떤 멜로디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무규정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세계의 기질을 흔든다. 사실관계의 배열에 조금의 이탈로 다른 풍경을 만들던 언어 대신 배열이 허물어져도 존재하는 불협화음이 동시간대 바깥에서 죽으려는 이를 살린다. 그런데 이는 일시적으로 환기되는 감정에 안주할 수 없음을 동시에 의식하게 만들기에 가능한 것 같다. 트럼펫 소리가 울리는 잠시간의 순간을 지나면 인물들은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이 문제를 말하기 위해 우리는 영화에 굉음과 흡사한 기능을 지닌 재난의 풍경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전야의 시간이 지나고 태풍이 본격적으로 휘몰아칠 때 모순되게도 불안감만으론 다 설명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소음 안에서 어딘지 예민함을 잠시 풀어놓게 하던 안도감이 있다.

그것은 상투적이긴 해도, 문제의 근원을 직시 또는 직면해야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삶의 어떤 지점을 들여다보게 한다. 외면한 것과 죄의식과 죄책감, 감추고 싶은 심부 안으로 기탄없이 들어갈 때 주체가 된다는 접근 말이다. 전야의 속임수, 고요 이후 휘몰아침, 그 '때'를 맞이하지 않고선 오지 않는 것들. 인물들은 하나같이 태풍이 몰아치는 시공 안에서 보호장비 없이 맨몸으로 비바람을 맞는다. 저마다의 관점, 세계 안에 갇힌 인물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혼돈인 셈이다. 외부의 혼돈에 정신을 빼앗긴 틈에서 사오리와 호리는 지속적으로 미끄러지던 소통의 가능성을 마주한다. 산사태의 혼돈은 날카롭던 그들 사이 미끄러짐을 다른 성질로 바꾼다. 미나토와 요리의 동행이 주는 감동은 나의 위험과 마주하며 상대에게 향하는 그 어려운 걸음에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표면적인 강인함과 거리가 멀다는 게 관건이다. "적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힘을 빼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한다"는 요리의 설명에 대해 미나토는 '나무늘보'라는 답 대신 '호시카와 요리'라는 답을 내놓은 적 있다. 그건 아픔의 원인을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 중요하단 말(주체의 직면)만큼이나 그것이 아픔이란 진단(외부의 시선, 끼어듦)을 내포한다. 상대에 관해 떠도는 소문과 같이 타인의 아픈 지점을 건들던 인물들은 태풍 안에선 스스로의 나약한 지점들을 드러낸다. 날씨와 죽음, 파괴되어 지속되는 어떤 자연의 힘을 거치며 재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주된 영화적 풍경이다. 맨몸의 이미지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간 후 아이들 사이에서 반복되던 존재론적인 물음에 대한 자답,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 원래 그대로'라는 미나토의 말은 반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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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개연적 흐름 없이 교장이 홀로 비바람을 맞는 모습을 담아낸 쇼트는 다소 도식적이다. 그럼에도 잠시나마 교장에게서 인간적인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 이미지 때문이다. 여기엔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고 부른다"라던 인물 스스로의 말에서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적인 방황, 직면하기의 불완전함이 있다. 그건 <괴물>이 괴물이 아닌 인간을 말하기 위한 공통점이다. 부연하자면 태풍이 '가능성'으로 읽히는 데는 그것이 혼자 감내하는 쪽이 아니라 모두가 감지할 수 있는 위험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태풍 안에서 다른 인물들은 같은 얼굴을 하고 오로지 같은 위험만을 걱정한다. 그 마음들이 경계를 허물고 인간적인 하나로 이어낸다. 죽음의 기운이 존재하는 장면에도 이상한 믿음이 깃드는 이유다. 오프닝의 방화 사건보다 타오르는 불길 그 주변에서 한날한시 동일한 위험을 감지하던 인물들(의 시점)으로 돌아가길 중시하던 영화의 형식을 돌이켜 본다. 이 주변화는 한 지점을 향해 모여들기 위한 전제다. 그러므로 영화는 다른 이들의 눈(시점)에 기계적으로 비치던 교장에게도 아이들의 대화 속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는 진단이 적용될지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한 경우의 수를 일으킨다. 사물화된 주체, 곧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적 능력의 상실이 세계와 조정되지 않는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을 수 있다는 추측. 이것은 손쉬운 미화가 아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마주한 사실을 뒤흔들며 다른 관점을 요청하던 <괴물>이 하나가 될 수 없는 인물들의 세계에 일으킨 대입의 시선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NEW

괴물
Monster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Koreeda Hirokazu

 

출연
쿠로카와 소야
Soya Kurokawa
히이라기 히나타Hinata Hiiragi
안도 사쿠라Ando Sakura
나가야마 에이타Nagayama Eita

 

수입 미디어캐슬
배급 NEW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2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11.29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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