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영화 편지 이완민 #2] '사랑의 고고학' 그 후, 여전히 그곳에 있을 세상
[한국독립영화 편지 이완민 #2] '사랑의 고고학' 그 후, 여전히 그곳에 있을 세상
  • 김민세
  • 승인 2023.12.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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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나고 증식하는 존재의 풍경"
ⓒ 맑은 시네마

'영실'(옥자연)은 침대에 누워 인식과 문자를 주고받다가 동거남 환민이 없는 틈을 타 전화를 받는다. 영실의 말이 프레임이 담고 있는 방 안에서 울리는 반면, 통화 상대인 인식의 말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다. 이내 영실은 노트북을 갖고 와서 '인식'(기윤)과 영상통화를 한다. 노트북 화면에는 인식의 얼굴과 그의 방이 담긴다. 잠시 후 환민이 집으로 들어오자, 영실은 노트북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 이때 장면은 노트북 화면 너머에 있는 인식의 방안으로 전환된다. 인식은 사랑을 고백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쓰다가 영실이 다시 돌아오자 지워버린다. 환민이라는 제삼자이자 외부인을 두고 둘은 침묵한다. 침묵 위로 사랑을 약속하는 메시지들과 달뜬 얼굴들이 오고 간다. 이때부터 숏은 영실의 숏, 화면 속 영실의 숏, 영실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숏, 인식의 숏, 화면 속 인식의 숏, 인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숏들을 넘나든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이렇게 달뜬 시기가 지나가도 계속 곁에 있겠다"라고 약속하는 <사랑의 고고학>의 결정적인 장면은 아무리 봐도 평범하지 않다. 인식은 마치 재현의 역사를 그려내듯이 문자 텍스트로 문자화되고,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로 음성화되었다가, 다시 화소로 이루어진 디지털 이미지가 된다. 영실이 잠깐 자리를 비울 때, 영실의 얼굴을 비추던 카메라는 침대 위에 놓인 노트북으로 틸트(tilt) 하는데, 그 순간 카메라는 노트북이라는 스크린을 뚫고 인식의 방에 도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호를 통해 영실의 세계 안에 놓였던 인식의 몸은 영실의 숏과 동등한 지위를 얻듯이 온전한 역숏이 된다.

다시 말해 기호로서 외화면에 놓였던 인식의 존재가 결국은 온전한 숏으로 튀어나왔을 때, 우리는 그제야 한 주체가 타자를 주체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긴 행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 이후로 숏들은 실재와 복제, 존재와 기호, 내화면과 외화면, 얼굴의 숏과 대안적인 숏, 클로즈업과 커버리지를 넘나들며 숏의 관습에 긴장을 일으킨다. 그때부터 이들은 말, 즉 언어의 교환을 멈추고 주체화된 숏들(몸과 얼굴의 숏), 또는 주체의 복제로 놓인 숏들(화면 속의 숏과 메시지를 담고 있는 숏)로 대화하기 시작한다.

 

ⓒ 맑은 시네마

<사랑의 고고학>의 영실과 인식은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외화면의 영역으로, 또는 유물의 상태로 증식시킨다. (여기서 외화면은 사운드의 다른 말이, 유물은 프레임 속 프레임의 다른 말이 될 수 있다.) 인식이 지인으로부터 영실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알게 되고 과거의 남자 문제를 따지러 가는 장면에서 그는 작업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실을 보자마자 한숨을 쉬고 다른 방으로 나간다(프레임 아웃 한다.). 컷이 바뀌면 카메라는 꼿꼿이 앉아 있는 영실에게 포커스하고, 좌측 구석 어둠 아래 놓인 인식의 얼굴은 포커스 아웃 되어 알아볼 수 없게 희미하게 남아있다. 곧 인식은 영실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고 영실을 쳐다보며(카메라에겐 뒤통수를 보이며), 이야기를 한다. 때로는 얼굴을 부여잡으며 한숨을 쉰다.

인식의 프레임 아웃 하는 몸과 앞모습을 드러내길 포기하는 얼굴은 긴 시간의 숏을 오롯이 지탱하다 숏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꼿꼿한 영실의 몸과 달리, 숏 안에 놓이길 포기하는 것만 같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사랑을 약속하던 때와는 달리 영실을 집요하게 몰아붙이는 인식은 도대체 왜 그랬냐는 질문들, 앞으로도 수없이 쏟아져나올 의심들로 가득 찬 폭력의 '말'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어 영실과 헤어진 뒤의 인식은 '통화는 매일 하는',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말의 세계이자 외화면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언제나 인식은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내뱉고 영실은 꼿꼿한 몸으로 가만히 그 말들을 듣기만 한다.

더불어 이들의 존재는 스스로를 복제하고 누군가에 의해 복제되길 반복한다. 인식이 영실과의 첫 만남에서 하는 행동은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 사진이 영화에서 실질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영실은 고고학 연구와는 무관한 시를 쓰는 일을 하고, 그녀의 시는 인식의 음악 가사가 된다. (영실의 시 또한 영화 안에서 명확한 문자의 형태로 드러나지는 않으며 영실의 컴퓨터 화면 속 폴더로 간접적으로 시각화된다.) 또한, 인식에게 영실의 존재는 지금 여기에 놓인 영실보다 그때 그곳에 있던 영실로, 영실이 하는 말보다 남이 말하는 과거로 정의된다.

한편, 인식은 영실과의 첫 만남에서 스스로를 '음악 작업하는 사람'으로 소개한다. 영실은 8시간 만에 인식과 사랑에 빠질 수 있던 이유에 대해 '그의 작업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영화가 동시대적이고 특정적인 코로나 팬데믹의 맥락에 다다랐을 때조차 인식의 존재는 카페 어딘가에서 흐르는 희미한 노래의 형태로 영실의 세계에 머문다. 영실은 사진과 시와 이야깃거리가 되고, 인식은 말과 음악(사운드)이 된다.

<사랑의 고고학>의 관계의 논리를 구성하는 것은 주체로서 현존하는 몸들의 교환이 아니라 프레임 주변부(외화면)를 모호하게 맴돌며 시차로 인해 엇갈리는 복제들의 난교다. 서문에서 언급한 영상통화 장면은 이 난교하는 숏들의 광경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 맑은 시네마
ⓒ 맑은 시네마

영실과 인식이 남긴 과거(유물)는 자신의 것 또는 남의 것이 되어 프레임 주변을 떠돈다. 자기 자신과 타자에 의한 복제의 형태로 서로의 세계에 침투하는 이들의 존재는 자연스레 영화 초반부의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실이 익산의 전시관 내부를 떠돌다가 마치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처럼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홀로 소파에 몸을 누이는 장면. 어디인지 모를 잔디 언덕의 풍경 위로 흐르는 인식의 음악과, 그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아니 그것을 넘어 자신 앞에 놓인 무언가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영실의 몸의 뚜렷한 실루엣. 어쩌면 영화라는 경험과 카메라라는 시공간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이미지. 이 장면이 붙들고 있는 것은 인식이라는 현존이 여기에 없더라도 그것이 사랑의 근거가 되는, 나아가 복제를 생산해내는 기록 장치이자 재현 장치인 카메라로 인해 유물화된 무언가가 지금 내 앞에 없더라도 그렇다고 믿어야만 하는 영화라는 믿음, 그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이렇게 영실은 불신과 의심으로 둘러싸인 재현의 가장자리에서 영화라는 믿음의 형태로 인식의 세계를 껴안는다.

<사랑의 고고학>의 숏들은 결국 이 인상적인 숏의 반복과 변주다. 유령의 형태로 프레임 내외부의 세계를 희미하게 떠도는 인식(의 말). 그리고 그것을 오롯이 받아내는 영실(의 몸). 인식이 말의 숏으로 영실의 세계에 침투할 때, 영실은 그 폭력의 여진을 안고 누워 있는 몸의 숏으로 리액팅 한다. <사랑의 고고학>이 이들의 존재, 특히 영실의 몸을 집요하게 긴 시간 동안 담아내는 이유는 자신의 것이자 남의 것인 모호한 존재 깊숙한 곳의 상처를 최대한 긴 시간 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래서 영화는 언제나 영실의 몸의 숏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영실이 세탁기를 고치다 말고 마지막이 될 인식의 전화를 받았을 때. 카메라는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결심이 선 것처럼 그 어떤 분절 없이 통화를 듣고 있는 영실의 몸을 담아낸다. 이 숏에서 보이는 영실의 몸, 반팔 소매 밖으로 나온 팔의 가느다란 선과 약간 구부정한 등, 한 손을 뻗어 책상 위의 쪽지에 무언갈 적는 사소한 몸짓들은 인식이 말처럼 “유리로 만든 악기”의 형상이다. 그리고 영실이 프레임 아웃 할 때, 싱크대 위에 행주와 프라이팬이 올려져 있고, 식탁 위에 화분이 놓여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은 오즈적으로 다가온다. 그 여백의 이미지가 담고 있는 것은 지난 8년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영원히 기억되어 남을 것만 같은 순간, 또는 그 몸이 사라지고 지독하게도 그 몸을 따라다니던 8년 동안의 약속이 깨어져도 세상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자명한 사실과 그 후에 따라올 무시무시한 영겁의 시간이다.

 

ⓒ 맑은 시네마

끝으로, 짚고 싶은 것이 있다. <사랑의 고고학>이 시간을 다루는 이상한 방식이다. 영화는 8년을 훌쩍 넘는 영실의 시간을 오히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려낸다. <사랑의 고고학>의 세계는 언제나 여름에 머물러 있다. 시간이 별로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누구는 러시아를 갔다가 돌아오고, 이별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헤어진 지 2년이 지나있다. 영실이 2년 동안 짝사랑하던 우도를 만나러 갔을 때, 8시간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곳의 시간은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변화가 없다. 지나온 시간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이들의 말이 더듬어대는 과거와 '8년 전'과 '1년 후'를 가리키는 두 번의 자막뿐이다.

<사랑이 고고학>은 자꾸만 돌아오고야 마는 여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 그 후를 상상할 수 없는 여름에 대한 영화다. 이 여름은 영실과 인식을 다시 한번 식탁 위에, 침대 위에, 방 안에 앉힌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끝난다는 것은 곧 여름이 끝난다는 말일까. 영화가 끝나기 전, 우도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영실은 문 앞에서 아마 고양이가 나타날 수도 있는 계단 너머를 돌아본다.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화면 속 인식의 얼굴을 응시하던 영실의 눈은 여름의 끝자락에서 외화면으로 향한다. 여름이 끝나더라도, 누군가는 여전히 그곳에 있을 테니까. 영화가 끝나더라도, 그곳엔 세상이 있을 테니까.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 맑은 시네마

사랑의 고고학
Archaeology of love
감독
이완민

 

출연
옥자연
기윤

 

제작|배급 맑은 시네마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6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4.12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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