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인' 마침내 불면의 밤
'괴인' 마침내 불면의 밤
  • 배명현
  • 승인 2023.11.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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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없는 삶과 단절에 관한 속물적 이야기"

목수 '기홍'(박기홍)과 인부 '경준'(최경준)은 작업 전날 밤 피아노 학원에 잠입하려 한다. 문을 열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르지만 이상하게 문은 비밀번호를 틀렸다는 경고만 반복해서 알려준다. 잠시 뒤, 어렵사리 들어간 실내에서 경준은 화장실 문에서 이상한 점을 알아챈다. '안에서 잠가야만 작동하는 문이 잠겨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홍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다. 러닝타임 전체를 지배(할)한 문제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 버린 채, 영화는 시작한다.

 

ⓒ 영화사 진진

기홍의 삶을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보통이라 말할 수 있다. 생활력도 보통, 외모도 보통, 경제력도 보통, 자주 언성을 높이고 친절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수치를 주거나 가해하지 않는 그런 인물. 종종 친구를 만나 허풍을 떨고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서 호감 가는 사람과 합석을 하는 밤을 보내는 보통 사람이다. 이런 보통의 삶에 작은 균열 하나가 발생한다. 학원에서 잠을 자는 시간 동안에 누군가 자동차의 지붕을 찌그러트리고 사라진 것이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 사고에 한 인물이 침범한다. 기홍이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 정환(안주민)이 함께 범인을 찾자며 부추기며, 그의 삶에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주행하며 목적지 없는 운행을 한다.

<괴인>의 서사는 왜 여기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른 채 출발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다 상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끝이 나버린다. 영화가 끝난 시점에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불편하다'는 감각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영화에서 불편을 발견했고 수용했을까. 물론 이는 괴인이라는 제목처럼 괴상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제목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은 대체 누구일까. 기홍에게 뜬금없이 범인을 찾자며 재촉하는 정환? 아니면 정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좋은 아내는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심지어 한밤중 기홍의 방문을 두드린 현정(전길)? 아니면 쉼터에서 쫓겨나 집 없이 곳곳을 전전하다 차 지붕을 찌그러트린 하나(이기쁨)? 화장실에서 수상한 낌새가 있었음을 말해줘도 전혀 듣지 않는 아영? 그것도 아니면 껄끄러우면서도 이들과 반복해서 만났던 기홍? 영화 속 이들은 각자 다른 양태로 특이하지만, 누구 하나 콕 집어서 범인(犯人)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행동과 선택이 일반적이라 보긴 어렵지만, 다수가 행동하는 경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평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범인(凡人)이기에 오히려 '현실의 인간 군상'이라 보는 게 더 적절하겠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이 영화에는 엄존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목수 일을 하고 호기심이 생긴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행동,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 잘못을 '노블레스 오블리주'하는 이들의 삶과 관계가 만들어낸 작고 단단한 질감이 그렇다. 이 감각은 바람을 타고 눈에 들어가거나 양말 속에 자리를 잡은 모래처럼 자꾸만 신경이 쓰이지만, 정리하기엔 귀찮아서 참을까 싶다가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까끌까끌한 표면으로 관객의 연약한 피부를 긁어 놓는 기분을 만든다. 불편하고 거친 질감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순간, 우리의 눈을 가장 먼저 끌어당기는 곳에는 언제나 '관계'가 있다. 작은 사건을 시작으로 연결된 관계인 만큼 영화는 사건보단 인물을 주목하게 하니까. 여기서 우리는 기홍의 생계와 성격 탓에 얽혀가는 대화에 주목하게 되고, 동시에 '소통의 불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일례로 차의 지붕을 고치기 위해 하나와 함께 간 정비소에서 작업자가 2002년 월드컵을 보고 자란 세대가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다며, 기홍의 노동을 지지하면서 하나를 은근히 힐난하지만, 사실 작업자의 말이 도달해야 할 곳은 기홍임을 ―작업자가 말한 내용 또한 정당하다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기홍 본인도 이 사실이 불편하다는 듯 작업자를 말리기까지 한다. 실제로 이정홍 감독은 이 소통의 불가능성을 작품의 탄생 배경이 되는 경험으로 언급했다. 언어의 불확정성과 이를 사용하는 인간의 불완전성 이 두 가지 성질은 나와 타자의 연결을 헐겁게 만들며, 오해와 오독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 지적된다. 모든 인간은 이 한계 위에 발을 딛고 서 있기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다만, 영화를 보는 관객이 관계에만 시선을 집중시킨다면, 우리는 그 바깥에 놓인 것들을 놓치게 된다. 관계가 문제가 된다는 지적의 책임은 결국 나와 타자 간의 거리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는 개인에게 귀결되기 때문이다.

 

ⓒ 영화사 진진
ⓒ 영화사 진진

우리는 소통 불가능을 껴안으면서도 인물의 외곽을 이루는 배경과 풍경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를 살피기 위해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영화의 시작이나 사건의 시작보다 더 이전에 있는 인물들이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근원으로써의 시작 말이다. 영화의 러닝타임 선상에서 가장 먼저 관계로써 불화하는 인물은 경준이다. 경준은 기홍과 동창이자 '시다'로 일하는 관계다. 경준은 기홍에게 보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작업을 할 것과 함께 일하는 전기기사에게 친절할 것을 요구하지만, 기홍은 전혀 듣지 않는다. 그러다 이후 경준이 본가로 가겠다고 하자 기홍은 카톡을 지웠다 썼다 반복하며 기다려달라 애원한다. 기홍은 말한다. "가면 다시 안 올 거잖아" 여기서 들여보아야 할 점은 '이 대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이다. 영화는 바로 다음 씬에서 홀로 일하는 작업 과정을 보여주며 기홍의 불편을 보여주지만, 결코 이 노동의 불편만을 위한 대사가 아니다. 다신 오지 않을 거란 건, 타지에서의 생활을 쉽게 청산할 수 있을 만큼 기반이 가볍다는 의미이다. 영화는 경준의 집을 아주 살짝 보여주며 답답하고 좁단 인상을 주는데, 확신할 순 없지만 이 공간은 고시원으로 추정된다. 이와 다른 양상이지만 그다음 불화하는 인물은 기홍의 집주인 정환이다.

정환은 자꾸만 기홍에게 제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어딘가를 가자, 무엇을 하자, 어떻게 하자. 이 제안에 기홍이 한 번도 제대로된 거부를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의 말은 젠틀한 명령의 형태로 그려진다. 기홍은 왜 거부하지 못할까. 당연하게도 집주인이기 때문이다. 집 구조를 설명하며 정환은 '연결'에 초점을 맞춰 설계했다고 말한다. 기홍이 자신의 집이라 허세를 부리며 과시할 만큼 매력적인 외관의 집이지만 이 공간 안에는 제대로 된 '분리'가 없다. 마당을 통해서든 2층 복도를 통해서든 어떻게든 공간은 열려있고 문 하나만 열만 개인의 내밀한 모습을 볼 수 있게끔 디자인되어 있다. 심지어 방의 벽 중 일부는 통창으로 나 있어 밖에서도 내부의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으며 방음이 되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에 이점이 적극적으로 드러나는데, 느슨한 차단이 유발하는 모호한 관계의 긴장이 결국 불화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앞선 두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모든 문제는 구겨진 지붕 탓이 아니라 집이 없기에 생긴 문제라 보아야 정확하다.

요컨대 기홍은 집이 없기에 관계를 단절시키지 못했고, 집이 없었기에 현정과 미묘한 관계로 이어졌으며 또 하나와 재회할 수 있었다. 때문에 영화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의 선택과 마주침 그리고 재회는 사실 자유의지가 아닌 집 없는 사람이 강제로 수행해야 하는 임무로 보인다. 그리고 이 순간 영화는 영화의 바깥인 현실을 상기시킨다. 버려진 세대, 월세, 집값과 대출, 한국의 고용 시스템 등등. 다양한 키워드가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심지어 영화의 시놉시스에 집주인이라 표기된 정환의 정체 또한 수상한데, 현재 무직 상태인 정환은 심심함을 견뎌내지 못한다. 현정은 이런 정환을 찡찡댄다고 표현한다. 정환이 기홍과 테니스를 치는 이유도 대사로 전달될 정도로 부부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이 찡찡댐을 사실상 기홍이 러닝 타임 내내 받아주는 상황이다.

현정은 기홍이 정환을 받아주는 것으로 상당한 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조금 더 상상을 발휘하자면 레슨 비용과 장비값 또한 정환이 지불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가정의 부부라면 이런 '경제적 호의'는 아내의 타박으로 직결되지만 현정에게는 돈보다 심적 '분리'가 더 필요하다. 그녀는 돈을 주고 분리를 구매한 사람이다. 여기서 경제적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판단할 단서가 발견되는데, 우선 직업 없는 이 부부는 '영끌'로 집을 구매하지 않은 꽤나 사는 집사람들이라는 점 하나. 소유권은 아마도 현정이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점 하나. 현정의 친구는 카페를 하려 하지만 언제 차릴지 심지어 개업을 할지 하지 않을지도 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 친구 관계를 맺기 위해선 함께 공유하는 배경이 있어야 한다. 동네, 학교, 직장 등. 하지만 현정과 친구 둘 모두 직장이 없는 관계로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친구였다고 말하는 건 단지 속물적 가정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괴인>이 다루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된 현실의 노골적인 진실이다.

 

ⓒ 영화사 진진

영화의 후반, 애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우위에 서 있는 현정은 하나가 집에 온 날 밤 정환을 바라본다. 하나를 집에 들인 건 정환이었고, 하나에게 말을 건네는 정환을 현정은 유심히 바라본다. 그녀는 일종의 복수를 감행한다. 정환이 있는 집에서 기홍을 데리고 나간다. 스마트폰도 집에 두고서. 두 사람은 정환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완벽하게 분리된다. 이 단절의 시간은 정환에게 복합적인 고통을 안겨준다. 배우자의 바람, 명령의 대상이었던 기홍에게 역전'당했다'는 사실, 경제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을의 위치라는 재확인. 이 고통은 현정과 기홍이 집에 돌아온 다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해진다. 정환은 태연하게 패딩을 벗는 현정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기홍은 그를 애써 외면한 채 지나가고 이층에서 자는 하나를 확인한다. 그리고 침대로 가 눕는다. 카메라는 기홍의 얼굴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면서 표정을 담는다. 말없이 한숨을 쉬며 눈을 감는 기홍. 그는 무언가를 보거나 말하기를 멈춘 상태로 뒤척인다. 그에게 있어 어떤 심정적 압박과 박탈이 길항작용한다. 답 없는 상황과 상태가 말과 대화를 죽이고 영화를 중단시킨다.

서사는 단 하나도 결정되지 않았고,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다. 모든 게 중간인 상태에서 끝이 났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말 앞에서 관객은 기홍의 얼굴과 겹쳐진다. 앞서 기홍이 보통이라 했기에 보통에 속하는 우리 또한 너무 쉽게 그의 얼굴을 허락하게 된다. 타인의 얼굴을 경유해 나를 다시 타자의 얼굴로 바라보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본다. 지난한 관계와 집 없는 삶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잊고 있던 문제를 마주하며 불편을 감각 한다. 우리는 언제쯤 이 불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 불편에 무뎌지는 게 더 현실적이며 손쉬운 해결책일지 모르겠다. 현실은 영화의 엔딩과 마찬가지로 중단될 리 없기에.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 영화사 진진

괴인
a Wild Roomer
감독
이정홍

 

출연
박기홍
최경준
안주민
이기쁨
전길
이소정

 

제작 영화 <괴인> 제작위원회
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36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3.11.08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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