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킬러가 '더' 휴먼이 되기까지 ['더 킬러' #2]
The 킬러가 '더' 휴먼이 되기까지 ['더 킬러' #2]
  • 이현동
  • 승인 2023.11.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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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살기 위해 파이트 클럽에서 내려온 핀처"

'데이빗 핀처' 감독이 킬러 영화(<더 킬러>(2023))를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새삼 잘 어울릴 수 있겠다 싶었다. 최초 베니스에서 공개될 때만 하더라도 그의 스타일을 신봉하던 비평가와 관객은 핀처의 스타일을 분명 궁금해했을 것이다. 특히,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세븐>(1995)을 다시금 복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카일 쿠퍼라는 걸출한 디자이너가 이를 수행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총괄한 핀처의 안목은 역시나 빛을 발한다.

 

ⓒ 넷플릭스(NETFLIX)

<더 킬러>와 상반되는 영화로는 마틴 맥도나의 <킬러들의 도시>(2008)가 떠오른다.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아이를 살해하게 된 킬러가 윤리적 딜레마에서 방황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킬러가 인간이 되는 이야기를 코믹하면서도 제법 진중하게 다루고 있다. 반면에, <더 킬러>는 말 그대로 교훈이나 윤리, 도덕에 관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킬러의 몸짓, 말투, 행동 방식에 대한 영화다. 다시 말해, 실존의 문제에 관한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에서, 킬러를 수식하는 'The'라는 정관사를 고려해 본다면, 이는 킬러라는 존재를 특정하거나 선행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여기서 킬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은 완벽한 일 처리이며,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하는 데 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규율을 마땅히 고수해야 하면서도 통제를 당하는 대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드는 물음은 킬러 영화가 재현해야 할 온당한 세계란 리얼리즘의 문제일까.

적어도 <더 킬러>에서 핀처가 염두하고 있는 건 리얼리즘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형식의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다. 핀처가 의도하는 킬러의 형식은 어쩌면 그동안 쌓아왔던 킬러에 관한 선입견을 파괴하려는 목적에서 주어진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반면에 흥행을 견인하는 킬러 영화는 호쾌한 액션을 자랑하는 <존 윅>과 같은 영화다. 어느새 킬러도 어트렉션에 탑승하여 아예 현란하거나 아예 코믹한 연기를 감상하는 것이 관객들에겐 익숙한 일이 됐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길복순>(2023)도 마찬가지다. 핀처의 고민은 이 지점에 있다. 그는 미국매체 헐리우드 리포트에서 <더 킬러>가 "흥미로울 만큼 아트하우스 적이면서도 '이 정도면 관객이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영화가 되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핀처가 집중하고 싶었던 킬러에 대한 접근은 '인물의 과거를 서서와 연동할 필요 없이도, 장르적인 영역 안에서 충실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 넷플릭스(NETFLIX)
ⓒ 넷플릭스(NETFLIX)

핀처는 일관된 킬러의 성향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유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그의 몇몇 영화에서 보여줬던 스타일이 반전을 거듭하면서 복잡한 구조의 플롯을 형성했다면, <더 킬러>는 정직할 정도로 단순하다. 또한 킬러의 특성에 걸맞게 이 영화는 구조와 프레임을 일률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심지어는 영화의 길이가 총 119분인데, 1장을 제외한 5장의 챕터에 유사한 시간을 할애하면서, 마치 '영화'의 볼륨마저도 실용주의에 입각한 킬러다운 면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식의 명시적 나열은 핀처의 영화 <세븐>, <파이트클럽>(1999), <조디악>(2007), <나를 찾아줘>(2014)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핀처 스타일은 이러한 명시를 통해 차츰 시간과 공간, 인물의 구조를 비틀어 관객들이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끌고 간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더 킬러>에서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는 굳이 이야기하자면 후반부 장면밖에 없다. 이런 명시적 요소가 있는 반면에 모든 인물들에게 '이름'이 붙여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름이란 화자가 지시체를 확정하는 방식이다. 화자는 지시체를 특수한 성질이나 외형을 통해 '이름 짓기'를 시도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명제(배경이라 설명할 수 있는)와 연관된 '이름'을 통해 지시된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표명했다. 이름이 없는 이 영화에서 상정된 명제는 모두 직업이나 각 나라와 문화를 상징하는 대명사로 표기된다. 킬러의 본명은 공개되지 않고 가명을 바꿔서 사용하고, 크래딧에서도 킬러로 표기된다. 변호사, 클라이언트, 짐승, 막달라, 돌로레스 등은 영화가 가진 분명한 명제인 킬러를 드러내는 데 주요한 방편이 된다. 킬러는 그들의 모든 흔적을 파괴해야 하고 결국엔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를 연기한 마이클 패스빈더의 육체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실제 그의 성향하고도 큰 연관이 있다. F1 마니아로 알려진 마이클 패스빈더는 레이싱 선수로 활동하며 육체적 도전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그에게 있어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사가 거의 없고, 반복된 독백으로 채워지는 디제시스 사운드는 영화의 일관성과 더불어 무성 영화와 같은 액션과 몸짓으로 킬러를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제1장인 파리는 킬러의 생활 패턴을 섬세하게 구현해 낸다. 킬러가 타깃을 처리하기 위해 건너편 공간을 활용하는 세심한 계획에서부터 시간을 체크하고 집중을 위해 필요한 직업적 습관까지 포함한다. 제1장에서 임무의 마지막 날인 7일의 잠복 중에 킬러는 건너편에 있는 타깃을 확인 후 정신 집중을 위해 음악을 듣는다. 그 음악은 더 스미스(The Smith)에 'How Soon Is Now'라는 곡이다. 핀처가 애정하기도 하는 이 80년대 음악은 영화의 리듬을 약간 비틀어 절제된 미학에서 벗어나 킬러가 가진 특성을 미세하게 조정한다. 덧붙여서 이는 킬러가 가진 취향을 동반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누군가를 죽이러 갈 때 '아, 여기에 딱 맞는 플레이 리스트가 있네'라고 중얼거리기도 하는데, 사실 이 장면은 핀처의 취향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태도는 주변부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브랜드에서도 독특하게 드러낸다. 킬러는 맥도날드에서 맥모닝을 사서 먹거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인터넷 쇼핑 몰 아마존을 활용해 상품을 픽업하기도 한다. 또 그가 잠복하고 있던 장소가 WeWork는 오피스 공간을 공유하는 대표 기업이라는 요소에서 킬러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공유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 넷플릭스(NETFLIX)

영화의 1장, 저격 시퀀스에서 숏/역숏의 시점 변경은 사운드트랙의 음량을 조정하면서 규칙성을 부여한다. 타깃을 지정할 때는 볼륨이 업이 되고, 다시 킬러를 비출 때는 사운드 없이 보이스오버가 영화를 채운다. 이러한 규칙은 오로지 물리적인 법칙을 긴밀하게 구현하기 위해 동원된 장치다. 핀처는 킬러가 소유한 강박적인 감각을 날카롭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가 타깃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노래가 밀착되어 있지만, 관객의 시선에는 그의 독백만이 들린다. 이 영화는 이러한 시점 분리를 통해 킬러의 예민한 특성에 설득당하게 한다. 영화의 톤이 건조하고 심지어는 느리다는 불만을 느끼는 관객에게 핀처는 그 안에서도 변속의 가능성을 유지하면서 로드 무비의 결말을 향해 진중하게 나아간다. 그러나 킬러가 의뢰에 실패하고 난 후 사랑하는 연인에게 해코지당한 이후 복수를 계획하고 감행하는 장면은 실상 특별하지는 않다. 물론 긴장을 촉발하는 몇몇 장면이 있고, 몰입도 있는 액션 장면도 등장하지만 정작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마지막 타깃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마지막 타깃을 향해 킬러가 올라간 장소는 자동으로 <파이트클럽>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이 건물 Baliquinox은 실제 존재하는 건물이 아니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실제 존재했던 브랜드를 떠올린다면 이례적이다. 막대한 부가 축적된 이 건물에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거나 결정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지닌 타깃인 클라이언트(Client)가 있다. 이 장면은 마치 <파이트클럽>을 부정하는 듯 보인다. 킬러와 타깃이 만나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폭발도 없고, 현란한 액션도 없다. '찾아온 이유도 짐작이 안 간다'는 이 클라이언트에게 '다시 찾아오게 될 때 죽이겠다'는 뉘앙스로 언질을 주고 돌아서는 킬러는 영화에서 소수가 아닌 다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 시퀀스는 마지막이 아니다. 그리고 <파이트클럽>과 <더 킬러>의 마지막은 모두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다. 1999년인 세기말을 연상시키는 <파이트클럽>의 창문 밖으로 폭파되는 건물의 전경 숏과 킬러가 가정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커피를 내려주며 바다가 보이는 선베드에 누워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킬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독백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나처럼 다수에 속할지 모르지." 이 마지막 말은 그 전 장면을 떠올렸을 때, <파이트클럽>과 반대의 태도를 보여준다. 공황과 분열증을 겪는 이가 현대 미국 사회를 조롱하는 이 블랙 코미디에서 그들은 결코 다수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일으키는 소수에 속해 있었지만, 킬러는 복수를 하지 않고 건물 밑으로 내려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친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복수, 혹은 관객이 원할지도 모를 처참한 복수를 하지 않고, 자본주의에 대한 날 선 비판을 거둔 그에게 킬러는 직업의 소명보다 가정의 안위를 추구하는 다수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일상을 살기로 결단한 그의 모습은 더 킬러가 아닌 더 휴먼이 되려고 하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우린 그것을 높은 고도가 아니라 그가 누워 있는 바다란 지평선, 이토록 평면적인 공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더 킬러
The Killer
감독
데이빗 핀처
David Fincher

 

출연
마이클 패스벤더
Michael Fassbender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소피 샬롯Sophie Charlotte
알리스 하워드Arliss Howard
찰스 파넬Charles Parnell
케리 오말레이Kerry O'Malley
살라 베이커Sala Baker

 

제공 넷플릭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8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23.11.10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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