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아] 죽은 삶의 침묵은 '침묵'으로만
[김진아] 죽은 삶의 침묵은 '침묵'으로만
  • 변해빈
  • 승인 2023.11.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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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위안부 VR 3부작' <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
영화 <동두천>(2017) ⓒ Gina Kim

<동두천>(2017)의 거리는 순식간에 밤이 된다. 드물게 보이던 행인들도 더는 드나들지 않는다. 거리는 좀 더 난잡해지고, 골목에서 쪽방으로 더 좁아져 간다. 누구도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 내부에 누군가 나타난다. <동두천>의 장소는 영화의 진행에 따라 점층적으로 폐쇄되어 간다. 영화는 숨 막히는 쪽방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혈흔이 흥건하게 고여가는 광경을 들이밀어 급기야 죽음의 부동성(不動性) 안에 밀폐시킨다. 그것은 단순히 무참한 폭력 아래, 누군가 외롭게 죽어간 곳이라는 데서 기인하는 정서적 반응, 위압감에 그치지 않는다. 삶이 주어질 수 없는 곳, 삶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서 실제로 살았었던 존재들이 그와 같아선 안 될 유유한 형색으로 그들의 삶으로 잡아끄는 걸음을 따를 수밖에 없는 관객이라면, 장소에 나타나야만 하는 무수한 유령들의 자리가 비좁아 터져가는 형국을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과부하 됨은 영화의 표면에서 인식되는 상태와 어긋나므로 중요하다. 거리에서 거리로 이어지는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3부작' <동두천>, <소요산>(2021), <아메리칸 타운>(2023)의 장소들은 극단적으로 텅 비어있다. 주한미군에 의해 한 여성이 살해된 동두천의 쪽방, 기지촌 여성들을 감금한 낙검자 수용소, 미 공군 부대를 위해 국가가 계획적으로 조성한 기지촌 아메리칸 타운을 담은 각 영화에는 줄곧 외따로 그 위태로운 장소를 맴도는 유령이 등장한다. 물론 그들은 위험을 온몸으로 표출하기보단 위험에의 감지를 초과하는, 건조하고 무감한 폐허적 육신을 이끌고 깜깜한 고통을 홀로 오롯이 감당한다. 하나가 이름 없이 죽은 무수한 전체를 대표해 낼 수 있다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의지할 곳 없이 살았었더라는 지극한 사실의 반영이다.

 

영화 <소요산>(2021) ⓒ Gina Kim

생동하는 장소, 발굴을 위한 몰입

어떤 존재가 관심을 잡아끄는 때는 그것이 죽어가거나 폐허의 얼굴을 할 때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와 더불어 그러한 참상에 담긴 폭력의 이면에 닿으려는 시도 역시 폭력의 굴레로 유지되는 무언가로 변모되기 쉬울 터, VR(가상현실) 영상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된 3부작은 그에 대한 김진아의 윤리적 사유가 반영된 결과다. ⟪당신의 침묵을 비추는 거울 – 김진아 감독 VR 특별전⟫을 통해 상영된 세 작품은 그토록 불가능한 고통에의 접촉과 일률적 재현의 한계를 고민한다. 모종의 안정적 거리감을 보장받는 '본다'라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관람자의 보다 적극적인 유입을 중시하면서 그 매개물로서 (평면적인 기계의 화면이 아닌) 가상 공간과 접촉하는 몸이 있으며, 그 몸으로 나타나는 반응과 느낌을 중시한다. VR 영화 3부작은 보는 것을 넘어서 체험되고 경험적인 몰입의 자리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러나 김진아가 겨냥하는 실재감과 체화적 경험은 단지 기술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360도 촬영된 각 장소, 거리와 방 안에 들어선 관객은 시종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부지런과 민첩함을 겸비해도 끝끝내 시야각이 미치지 못하는 범주에서의 발생을 놓쳐버리고 만다. 혹은 클로즈업과 컷의 반복 등이 제한됨에 따라 널따란 공간성에도 교묘하게 빗겨나간 각도에 발 묶여 특정 이미지를 평면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연관된다. 김진아가 이 3부작으로 시도하는 '몰입'이란, 환경적 요건의 조성에 따른 몰입 행위 자체만으로 접근 가능한 범주에의 제한과 불가능을 수용하는 태도를 염두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한 윤리적 사유를 기반으로 관람자가 체화할 수 있는 장소가 발원된다. 우리는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그 느리고 고단한 유령의 걸음 속도에도 멀어지는 그를 뒤따라갈 수 없거나 거듭 놓친다(<동두천>, <아메리칸 타운>). 김진아의 유령들은 관객을 유인하다가도 좀처럼 곁을 내어주지 않고 그저 나타나거나 사라지고, 그저 죽어간다. 유령이라는 실체를 드러내는 데에 인식적 교란도 없고, 사연을 우회하거나 불거지게 만들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내면을 터놓고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짐작하건대 엄청난 분노와 슬픔이 어떤 식의 해소로 이어지지 못하고 쌓이다 못해 응축되면 아무런 표현 양식을 갖지 못하는 건 당연할 터이다. 그러므로 무정한 얼굴의 유령들은 그들을 구원할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관객, 아니 지금의 우리는 바로 내 부근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동안 어떠한 행동을 취할 수 없고(<동두천>, <소요산>), 위험한 실내외로 이어지는 문을 대신 여닫아 줄 수도, 감금된 벽을 허물어트리지도 못한다(<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 우리는 단지 생생하게 구현된 사건 현장 내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혹은, 오히려 스스로 유령이 된 위치에서 장소 구석구석을 옮겨 다니게 된다.

김진아는 VR 영화를 통해 관객의 능동성과 참여적 위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상태, 다시 말해 무언가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란 인지와 욕망이 가장 높은 시점에서 실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몰입의 빈틈은 그러한 부동성 자체가, 있었던 진실을 복원하는 작업의 일환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내포한다. 각 영화가 주는 실재감은 사실 그대로를 훼손하지 않는 거리감에서부터 비롯되는 셈이다.

 

<아메리칸 타운>(2023) ⓒ Gina Kim

김진아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거기 있(었)음을 전하는 데 있어 피력하는 것은 국가가 묵인 혹은 기피해 온 일련의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영화를 통해 응답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실제 사건에서 제기될 수 있는 갖가지 물음에 대해 영상 이미지로 응답하려는 게 아니라, 관객이 물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답해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동두천>의 마지막 장면, 우리는 낡고 지저분한 어느 쪽방에 '들어가 있다'. 어딘지 불길한 그 방 바깥을 나서지도 문을 걸어 잠그지도 못한다는 것을 차근히 받아들여야만 하고 이내 이불 더미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모습을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 목격하게 된다. 강조하건대 우리는 그것을 단지 스크린으로 마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소 안에 죽음의 진행과 함께 공존하는 중이다. 어떠한 인기척도 느낄 수 없는 방 안에서 피의 면적이 서서히 넓혀지는 과정만이 시간의 지속을 감지하게끔 허용한다. 난폭한 형상으로 가만히 유지됨으로써 현재에 흔적으로 나타나는 둔기 따위의 오염된 사물들, 현재에도 반복되는 '영혼적인 죽음'의 재생이 그려내는 천연스러움에서 오는 섬뜩함과 슬픔. 장소의 풍경을 이루는 것들이다.

1992년 실제 피해자가 죽어간 수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유추 또는 알아낸 것처럼 설명해 내는 게 아니라, 관객이 직접 그 장소 안에서 어떤 감각의 발현을 느끼고, 그것은 어떤 심정이라고 저마다의 언어로 말해내게 만드는 것. 그것을 자기 경험으로 기억하게 된다는 것. 김진아가 낙검소 수용소에 대해 "아무런 설명 없이도,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다는 본능적 직감"을 불러온다고 진단한 것이 감독 자신이 장소에서 감각한 느낌, 몸의 반응이라면 그의 영화는 단순히 현장을 카메라의 설계로 포착한 결과가 아니라 "본능적 직감"이 시킨 일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체화되는 느낌과 반응의 생동을 담아내기 위한 장소로 존재한다. 몸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를 열어줌으로써 그 장소를 경유해 비물질적이던 고통의 성질은 형체를 갖추며 받아들이게 되는 무언가로 다가오게 되는 셈이다.

 

영화 <소요산>(2021) ⓒ Gina Kim

존재가 몸과 말없이 존재할 때

다른 한편에서, 3부작의 이미지들은 필사적으로 상상을 자극하는 쪽이다. <소요산>은 그저 버려진 것으로 치부되었을 법한 현재의 장소(낙검소 수용소) 내부에 어떤 사물들을 잔상처럼 이미지를 겹쳐 들여놓는다. 비어있던 공간에는 빈약한 식사와 담요를 덮고 누운 어떤 형체들, 성병 관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허술한 의료기구와 혈흔들이 자리하며 은밀하게 감춰진 폭력을 암시한다. 말 없는 사물들은 단지 나타나기만 할 뿐이지만, 어렴풋한 것으로 자극되는 상상이 어느 때보다 정확한 언어와 살결의 감지로 생동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말없이 우리를 장소로 안내하던 <동두천>의 유령은 <소요산>에서 몸 없이 말한다. 장소는 폭력의 잔상을 갖춰가고 유령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때 영화는 옥상 난간 끄트머리, 무너진 실내에 쏟아지는 폭우 한 가운데 도달한 뒤 사운드만으로 유령의 흐느낌이나 감정을 버티는 호흡을 들려준다. 그러면 관객은 누군가 탈출을 위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던 사실을 '본능'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고, 형체가 사라질 만큼 운다는 것은 무엇인지 몸 없는 육신들을 대신해 내가 장소 안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직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사운드만을 자극하는 울음은 VR 기기 사용자 스스로가 내는 소리라고도 느껴지지 않는가. 실재의 장소 안에서 밖 없는 장소를 바라보며 내가 울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이 허구적 일치감은 개인의 느낌만은 아닐 터, 왜냐하면 죽음(혹은 그와 유사한 상태)의 침묵은 오로지 침묵으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진아는 <아메리칸 타운>에 이르기까지, 섣불리 말할 수 없고, 말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실제 존재들을 재현함에 있어서 말 없는 (인물을 통한) 태도를 고수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눈은 없는 듯 존재하던 과거의 여성들을 없는 듯 존재하는 현재의 유령으로만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은폐를 끊어내기 위한 과거와의 조응, 재생과 동등함. 그러므로 영화에서 발견되는 김진아의 거울은 기피 대상으로서의 유령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은연중에 두려운 진실을 기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유령들을 비춘다.

 

<아메리칸 타운>(2023) ⓒ Gina Kim

<아메리칸 타운>의 유령은 현재의 군산 아메리칸 타운의 곳곳, 미용실과 식당, 노래방, 그들의 거처까지 좌표를 찍으며 거닌다. 사실상 해당 장소만으로도 예상 가능한 것들이 있다. 하지만 김진아는 굳이 유령이 '몸소' 무언갈 행하길 요청하고, 유령은 잠시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앞서 언급하였듯 <동두천>과 <소요산>은 장소만으로, 기능하는 억압과 폭력을 보여준다. 여성의 몸이 아니라 다른 것의 물질성, 예컨대 밤거리에 구두 굽 울리는 소리, 찢어진 옷가지, 어떤 역겨운 쓰레기와 소리들, 기상 상태로 은유된 울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것들은 다른 시공과 장소에서도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현실의 문제로 인지하는 데 기능한다. 이것이 가능한 건 유령이 장소 안에 결박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장소는 존재 이전에 발생하고, 그 내부 존재를 규정짓는다. 위태로운 장소 안에 있으면 위태로운 존재가 된다. 위태로움은 종종 기이한 매혹을 거머쥐고 눈길을 끈다. <아메리칸 타운>의 유령은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그 주변을 에워싼 위험하고 불길하고 불쾌한 요소들, 가령 미군들의 주정과 욕설을 외부적인 소음으로 전복시켜 매혹이 작동하는 방식을 중단시킨다. 그러면서 부동해 온 장소의 지반을 흔든다. 시간이 과거와 현재, 두 축으로 갈라지고 죽은 삶이 움직인다.

그리고 유흥가를 전전하던 궤적 끝에 그것이 누군가의 생활 패턴이기도 하단 사실이 새삼스럽게 분명해진다. 밤이 걷힌 <아메리칸 타운>의 낮의 골목에는 기지촌 여성들의 빨래가 널린다. 바깥에 아무렇게나 널린 속옷이 나른하게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 그러나 위험하게 화려하던 밤의 차림새와 상반된 단출한 일상의 조화. 비정상적인 체계 안에서 존재하는 나름의 질서 같은 것. 누군가 죽은 곳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살았던 곳이기도 함을 유념하게 하는 순간이 아닌가. 그러나 세 편의 영화, 세 개의 장소를 지난 뒤 잔여하는 것은 교훈적 깨달음이 아니라 잃어버림의 확인이다. 유령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정면으로 다가와 "누구세요?"하고 말을 건다. 물음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어떤 연유로 장소에 자리하였는가. 무엇과 조우하고 어떤 존재로 살아왔는가. 아마 유령에게 되물어야 할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형상은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자로 흩어진다. 영화는 무언갈 망각하거나 무화되어가는 현장의 감각을 실시간 위로 올려놓는다. 그러면 우리는 무언가 하나쯤 잃어버린 채로, 그것이 과하다면 잃어버림의 감각을 얻어 현실로 복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 <소요산>(2021) ⓒ Gina Kim

김진아는 몸과 감정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떠돎의 문제를 침묵의 형상으로 드러내면서(<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2), <그 집 앞>(2003)) 그 침묵이 욕망으로 이르는 길을 트여왔다(<두 번째 사랑>(2007)). 투쟁적 욕망의 언저리에서 인물의 외로움이 가로막힌 삶의 표면을 뚫고 나왔다면, 부랑은 일종의 투어의 형식을 갖추며 오래된 것들, 역사, 장소, 기억, 얽힌 감정을 유물처럼 발굴해낸다(<서울의 얼굴들>(2009). 그러므로 욕구가 절단된 3부작의 거리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은 결단코 그것이 과거적인 것이거나 버려진 것으로 귀결지어질 때의 불온한 해방감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시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과거의 얼룩과 파편들이 여전히 그 장소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는 해괴한 사실은 유령의 존재가 복원되어야 함을 부인해온 역사를 응시하도록 권유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의 힘으로는 흩어지지 않는 어떤 분명한 기운. 그것을 감지하게 만드는 것으로써 황량한 장소의 풍경을 발굴하기 위해서.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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