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야' 초록빛 여자들에게 구원은 개의 얼굴을 하고 온다
'녹야' 초록빛 여자들에게 구원은 개의 얼굴을 하고 온다
  • 이지혜
  • 승인 2023.11.1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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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모습이 꼭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의인법은 '사람이 아닌 생물이나 사물이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십 대 초반의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던 중이었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해왔다. "개가 엉엉 울었다고 표현하면 그것은 의인법입니까?"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학생이 다시 물었다. "인간만 울 수 있습니까?" 잠시 침묵했다. "짐승의 언어와 행동을 모르므로 개가 짖는 행동이 우는 것인지, 말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학문적으로는 명확하게 인간만 운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감정, 즉 희노애락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개도 울 수 있습니다."

 

개의 삶을 원하는 여자

영화 속에서 종종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관계를 발견한다. 그런 관계는 대부분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필수 조건으로 건다. 수많은 사랑의 양태가 지질하고 누추한 일상 속에서 구원의 기색으로 나타난다. 이들 사이에 고난이 있을수록 사랑은 빛난다. 다시 말해 서로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는 과정에 있어 고난이고 금기일 때 역설적으로 구원은 더욱 빛난다. <델마와 루이스>(1993)의 두 여인이 그랬다. <캐롤>(2016) 속 캐롤과 테레즈의 관계가, <아가씨>(2016)의 숙희와 히데코가 그리고 <윤희에게>(2019)에서 윤희와 쥰, 새봄의 모양이 꼭 그랬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녹야>(한슈아이, 2023)는 앞서 말한 영화들의 맥을 잇는 퀴어영화다. 그러므로 진샤(판빙빙)와 초록머리(이주영)의 관계는 언뜻 여타 다른 퀴어영화와 같은 맥락으로 읽히기 쉽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구원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구원이 아니다. 명확히 구분 짓자면 서로의 존재는 구원이라는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사건'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녀들을 구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구원의 모습이 꼭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구원은 받았을까…

'한슈아이'의 카메라는 서울 도처에 널린 붉은 십자가를 여러 번 클로즈업한다. 메아리치는 찬송가 사이로 축복의 노랫말이 닿지 않는 도시의 모퉁이를 아낌없이 전시한다. 채도 낮은 건물의 틈을 집요하게 비집어 찍는다. 이러한 장면들 속 곳곳에 설치된 푸른 트리와 붉은 전구 장식은 초록머리와 진샤가 함께 지내는 하룻밤이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한 해의 끝,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공항 한구석. 진샤와 초록머리는 짐승에 가까운 본능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내국인과 외국인, 한국인과 중국인이 갖는 언어의 장벽과 구분은 이들 관계에서는 무의미하다. 일상의 모양이 똑같이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두 여인은 각자의 '사건'을 목도하고 서로를 구해보고자 애를 쓴다.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구할 수 있는 기적이 도래한다면 좋았겠으나, <녹야>에서 두 여성에게 일어난 일 중 유일하게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은 겨우 크로스드레서(여장남자)의 호텔방 열쇠를 훔치는 장면뿐이다. 둘은 이 공간에서 초록머리 몸에 남은 타투처럼 '초록빛 폭발에 가까운' 성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아주 잠시간 본능적으로 서로를 아끼며 위무한다. 이 씬 직후 둘은 아침 뉴스를 함께 보며 "다음 생에는 개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내뱉는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떡볶이를 먹던 초록머리는 진샤에게 자신이 키우는 '딸래미'가 이 개와 닮았다고 스치듯 이야기한다. 사실상 초록머리가 '딸'이라고 지칭하는 대상은 남자친구와 키우는 흰 강아지를 말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홀로된 진샤가 초록머리의 흰 강아지를 품에 안기까지, 그녀들은 러닝타임 내내 사냥개 같은 남자들에게 쫓긴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마약밀매라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도피한다. 초록머리는 물건을 빼돌렸기 때문에 남자친구에게 쫓기고, 세관검사원인 진샤는 밀매에 가담했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쫓긴다. 

이들은 죄를 짓기 전에도 쫓기는 삶이었다. 마약에 취한 초록머리는 알게 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진샤에게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했던 정신적 학대를 고백한다. 진샤 또한 법적남편에게 쫓기며 살았다. 남자는 시종일관 진샤에게 신의 은혜에 대해 말하고, 성경의 구절을 되뇌며 신부님을 찾아가 원죄를 빌고 속죄해 구원받자고 강요한다. 남자는 입으로는 용서와 축복을 외우며 눈으로는 진샤의 몸을 집요하게 훑는다. 진샤가 원치 않는 와인을 마시길 강제하고, 진샤의 몸을 함부로 침범한다. 혼자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진샤를 강압적으로 눕히고 폭력과 욕설로 위협하며 말한다. "용서해줄게, 내가 다 용서할게."

용서받을 일을 한 적 없는 진샤가 굳이 용서받아야 할 일인 마약밀매에 가담한 이유는 특히 중요하다. 진샤에게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자신이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남편에게 진 빚을 갚고 온전히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삶의 목표가 있었다. 또한 직장상사와 마약밀매원, 경찰까지 모두 한패였기 때문에 정직하게 일한 자신은 오히려 밀고자가 되었으므로 필연적으로 범죄에 가담해야만 했다. 이처럼 <녹야> 속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진샤와 초록머리를 삶의 끝으로 쫓고 내몬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는 전부 목표의 목을 물어 숨통을 끊기 전엔 절대 포기하지도, 놓치지도 않는 사냥개의 본능을 지닌 자들이다.

물론, 진샤와 초록머리가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서로를 위안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 이는 결과적으론 남성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게이이다. 볼링장 씬에서 그는 애인인 듯 보이는 다른 남성에게 떠나지 말라고, 헤어지지 말자고 매달리며 울다가 정신을 잃는다. 그녀들은 쓰러져 누운 남자의 지갑을 뒤져 호텔 방의 열쇠를 훔친다. 이 공간은 남자가 애인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크리스마스를 기념으로 특별히 꾸며둔 곳처럼 보인다. 방에 도착한 그녀들은 아까의 남자가 사회적 함의의 측면에서 여성으로 보일만한 복장으로 스스로를 꾸미는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낸다. 성별의 구분으로는 남성이지만, 성향의 구분으로는 여자였을지도 모르는 그가 준비해 둔 것들을 진샤는 살뜰히 헤집어 본다. 그리고 초록머리에게 말한다. "이 남자는, 대체 왜 여자가 되고 싶었을까?"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어린 개의 얼굴을 한 구원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를 두 여자는 이해할 수 없다. 초록머리가 개로 태어나고 싶은 이유를 개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초록머리와 진샤의 말에 의하면 "여자로 사는 건 너무 힘들고, 재미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초록머리는 "나쁜 년"이 되고 싶다. 그것이 어렵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개'의 삶을 살길 소망한다. 이처럼 '나쁜 년'이 되고 싶고, '개'가 되고 싶다는 대사는, 바꾸어 말하자면 지금의 초록머리는 '개가 아니'며, '나쁜 년이 아니'라는 진실을 내포한다.

영화 속에서 초록머리는 진샤와 비교하자면 훨씬 '나쁜 년'처럼 보여진다. 예컨대 초록머리는 진샤와 첫 만남에서부터 그녀를 곤란하게 한다. 세관검사원인 진샤를 업무적으로 괴롭게 했으며, 일면식도 없던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고서 다짜고짜 따라나선다. 진샤의 집까지 침범한 이후에는 그녀의 사적영역에 마구 끼어든다. 초록머리의 행위는 자신의 바람처럼 '개'와 다름없는 듯 보인다.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짐승처럼, 그녀는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이 더 편하고, 진샤와 닿는 맨살이 더 편하다. 스크린 속 초록머리는 자신이 벌인 모든 일들에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범죄 직후 그녀들은 떡볶이를 먹는다. 식욕이 없는 듯 젓가락을 들지 않는 진샤에 비해, 초록머리는 떡볶이 소스가 얼굴에 묻는지도 모른 채 입속으로 떡가닥을 욱여넣는다. 이때 나타나는 그녀의 모습도 마치 '개'와 같은 행동이다. 그녀는 단지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는다. 그녀의 행동에는 어떠한 인과도 없다. 그저 배가 찰 때까지 먹는다. 이러한 풍경 속에서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포장마차 안에 갑자기 등장한 흰 개다. 먹는 것을 멈추고 개의 얼굴을 쓰다듬는 초록머리의 동작을 한슈아이는 화면안에 유독 세심하게 담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길이 좋아서 본능적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유순한 흰 개의 얼굴과, 진샤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초록머리의 얼굴이 닮아 보인다면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초록머리와 헤어진 진샤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그녀는 아주 잠깐 멈춰선다. 이때 진샤의 시선은 낡은 교회를 향한다. 카메라는 진샤 1인칭의 시점으로 교회 간판 근처에 달린 스피커를 수리하는 한 남자를 풀 쇼트로 잡는다. 남자가 스피커를 만지는 도중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장 31절)라는 성경의 문구가 어둠 속의 간판 위에서 선연히 클로즈업 된다. 이 장면 직후 찬송가가 울려퍼지던 스피커가 거칠게 낙하한다. 한슈아이는 이 씬을 통해 두 여성의 삶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구원의 기미가 필멸했음을 드러내어 못 박는다.

<녹야> 속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첨탑과 핏빛 십자가의 모티브는 서울의 어두운 야경을 파수하듯 빛난다. 그녀들의 생에 가끔 드리워졌을 이 붉은 빛은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구원의 빛은 아니었던 듯 보인다. 다만 일 년 중 단 하루, 온 세상을 축복하는 초록빛 아래에 진샤가 있다. 어린 흰 개와 있다. 진샤는 어린 개를 힘껏 끌어안는다. 이제 그녀는 개의 얼굴을 하고 왔던 찰나의 구원을 향해 미련없이 팔을 뻗는다.

[글 이지혜 영화평론가, leehey@ccoart.com]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녹야
Green Night
감독
한슈아이
Shuai Han

 

출연
판빙빙
이주영
김영호

 

수입 퍼스트 런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92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11.01

이지혜
이지혜
 영화가 삶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계관의 일부가 될 수는 있다고 믿는다. 인생 첫 영화는 주말 저녁 부모님과 본<패왕별희>(첸카이거, 1993)였지만,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9)가 세계관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OTT로는 <레디 플레이어 원>(스티븐 스필버그, 2018)를 본다. 지독한 사랑영화 처돌이이기도 하다. 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부문으로 등단했다. (공식인스타 @leehey_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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