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킬러>(2023)는 며칠째 암살하려는 표적을 기다리는 킬러(마이클 패스빈더)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폐업하고 폐허가 되어버린 WeWork에서 창문 너머 호텔을 보는 중이다. 20분 가까이 이어지는 독백과 함께 그의 일상이 소개된다. 영화 속 킬러는 도심에서 총격전을 벌이고, 전력 질주로 상대방을 추적하는 데에 비해서 이 킬러는 그러하지 않다. 그의 일상은 권태롭다. 그가 처음으로 하는 나레이션은 "지루함을 못 견디면 이 일은 당신의 적성이 아니다."이다. 바닥에다가 매트를 깔고 운동하기도 하며, 저격총을 조립했다가 풀기도 한다. SNS를 보기도 하는 모습은 킬러라기보다는 직장인과 비슷하다. 이 모든 과정이 긴 호흡으로 전개된다. 다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의 독백에 드러나듯이 그는 "나는 그저 나다"라고 말할 뿐이다. 우리는 이 킬러의 정체를 알기도 전에 그의 사유를 먼저 접한다. 어쩌면 감독은 그가 누구인지보다는 그의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사유가 곧 그 킬러 자체라고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데이비드 핀처'가 넷플릭스와 두 번째로 손잡은 <더 킬러>는 그가 오랜만에 스릴러를 찍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화제작이 되었다. 마이클 패스빈더가 연기한 중절모를 쓴 킬러가 그려진 충분히 포스터는 그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세븐>(1995), <파이트 클럽>(1999), <조디악>(2007)를 연상하게끔 만든다. 물론, 그는 드라마와 멜로, 전기 영화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 수 있는 연출력이 있는 감독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의 본령이 스릴러에 있다고 평가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어두컴컴한 미국의 도심 한가운데에서 활개를 치는 악인을 그리는 데에 탁월한 감독이어서다. 또 그 악인이 생길 수밖에 없는 미국의 지옥도를 잘 그려내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악인의 사상이 왜 문제적인지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븐>에서 인간의 7가지 원죄를 따라서 범죄를 저지르는 존 도의 범행은 자본주의와 결탁한 미국의 풍경을 스케치한 것에 가깝다. <조디악>에서는 살인마를 추적하는 동안에 1970년대 미국의 풍경을 탐사보도 하듯이 따라간다. 그의 매력적인 빌런은 스크린 밖에도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강력하다. 그중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파이트 클럽>이다.
<더 킬러>는 핀처가<파이트 클럽>을 일부러 지루하게 찍은 듯한 영화다. 우선, <더 킬러>를 이야기하기 전에 <파이트 클럽>을 이야기해야 할 듯하다.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은 <조커>(2019)에서의 아서 플렉과 함께 미국에서 대안 우파의 상징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타일러 더든이 우연히 4chan 등 커뮤니티에서 재력이나 외모, 사회적 지위 등등 다른 남성보다 우위를 지니는 조건을 통해서 이성을 언제든 유혹할 수 있는 알파메일의 완성형으로 오해되기 적당해서다. 극단적인 자기계발로 알파메일이 되고 싶다는 인셀의 환상이 말라 싱어와 병적 관계를 주도하는 타일러 더든에게 투영된 것이다. (한편, 핀처는 최근 미국매체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한다. 그는 타일러 더든이 대중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타일러 더든을 우상화하는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막막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타일러 더든은 미국의 컬트작가 척 팔라닉의 상상력에서 탄생한 악인이다. 그는 물질적인 풍요에 휘둘리지 않고 금욕해야만 정신의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에픽테토스와 같은 스토아 철학자의 사유를 폭력적으로 실천하는 인물이다. 이를 실천할 때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등장하는 버르호벤스키처럼 자신의 사유로 세뇌한 테러리스트 집단을 모은다. 이는 원작에서도 비스름하게 묘사된다. 다만 그가 소설 속 인물에 불과했다면, 이 인물의 파괴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타일러 더든을 아이콘으로 그려낸 것은 핀처의 스타일리쉬한 연출 덕분이다. 핀처는 권태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보험 회사 직원인 잭의 무의식에서 탄생한 이중 자아라는 설정을 연출할 때 온갖 실험적인 기법을 도입한다. 잭은 제4의 벽을 오가는 해설자로 등장한다. 잭은 타일러 더든이라는 연극적인 자아가 움직일 동안 뒤에 머물러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는 이케아에서 생산된 가구로 정신적 허기를 채우려는 잭의 자아와 비슷하다. 그를 둘러싼 물질적 조건이 그의 정신을 압도하고 있어서다. 그 권태에 질려 고환암 환자 모임에 참여해 가짜 환자로 행세할 때 그는 해방감을 느낀다. 그가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한 말라 싱어의 등장은 잭이 타일러 더든이라는 가상 자아를 만드는 촉매제가 된다. 이때 타일러 더든은 잭보다 당연히 더욱 매력적으로 등장한다. 더든은 심지어 육체 단련으로 자본주의의 상징적 공간인 월스트리트를 무너뜨리는 혁명까지 성공한다. 타일러 더든은 이 영화가 연출된 때만 해도 자본주의에 완전히 잠식당한 소비문화에 저항하는 문제적인 인물로 보일 여지가 있다. 문제는 지금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지구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욱 쉬운 시대라는 것이다. 여기서 <파이트 클럽>의 패러디 같은 <더 킬러>가 탄생한다. 영화는 트렌트 레즈너의 박진감이 넘치는 전자 음악이 흐르지만, 결코 스타일리시하지 않다. 오히려 지루하기까지 하다.
<더 킬러>의 플롯은 단순하다. 킬러가 표적을 암살하는 데 실패하자마자 그의 클라이언트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은신해있는 그의 아내를 폭행한다. 킬러는 살인청부업체에 뒤엉킨 인물을 하나하나 추적해 죽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는 클라이언트의 펜트하우스로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클라이언트를 죽이지 않고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돌아간다. 그는 거기서 아내와 여생을 누리기로 한다.<더 킬러>는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프렌치 느와르의 거장 장 피에르 멜빌의 <한밤의 암살자>(1967)을 재해석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밤의 암살자>의 제프(알랭 들롱)는 고독과 거기서 비롯하는 신념을 육체로 소화한 캐릭터다. 언어가 아니라 침묵과 몸짓으로만 신념을 드러낸다. 끝내 죽음으로 신념을 실천하기까지 한다. 반면 <더 킬러>의 킬러는 신념을 계속 되뇌면서 신념이 육체에 적응하게끔 하려고 노력하지만, 둘은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 킬러는 살인할 때마다 정해진 업무 매뉴얼을 외우듯이 신념을 되뇐다. <한밤의 암살자>의 제프와 달리 <더 킬러>의 킬러는 적성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킬러가 고정적인 직업이라기보다 프리랜서 노동자에 가까워서다. 킬러가 노동하는 환경을 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한밤의 암살자>에서는 정비공이 창고에 상시 대기 중이다. 반면에 <더 킬러>에서는 혼자서 창고 다섯 개를 운영하고, 거기에서 혼자서 모든 일을 담당해야 한다. 이는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만 하는 긱 노동과 비슷하다. 폐쇄된 WeWork, 에어비앤비부터 시작해 그가 일하는 모든 일터는 고정된 장소가 아니다. 유동적인 인구가 오가는 비장소다. 거기서 킬러는 당연히 얼마든 대체될 수 있는 무수한 익명의 군중 가운데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국가의 규제가 최소화된 신자유주의에서는 <파이트 클럽>의 정규직 잭을 비정규직 킬러가 대신하고, 권태를 불안이 대신한다.
<더 킬러>의 킬러가 반복적으로 되뇌는 신념은 타일러 더든과 같은 철학이 아니다. 되려 긍정심리학에 기반한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문장이다. 이는 불안을 덜어내려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외부 환경을 의식하지 않고 내면을 수련하려는 이성적인 스토아주의와는 기반이 달라서다. "세상엔 운도 없고, 업보도 없고, 정의도 없다."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독백은 "예측하되 임기응변하지 마라", "아무도 믿지 마라"라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타일러 더든의 사유가 내면에 침잠하는 것이라면 킬러의 사유는 외부에 적을 만드는 이분법적인 사유에 기반해 있다. 킬러는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다수와 소수로 나누고, 자신을 소수라 생각한다. 이 소수라 생각하는 기준은 "공감은 나약함이다", "나약함은 약점이다"라는 독백으로도 드러나는, 타인과 경쟁하려는 의식이다. 더욱 강해져야만 상대와 구분될 수 있다는 의식은 이윽고 그의 행동 전반에 드러난다.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일이 그르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가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제 심장 박동이 65 bpm인지를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단백질 위주 식단을 짜고, 표적을 기다리는 동안 근력 운동을 하는 행동은 모두 자신을 통제하는 마인드컨트롤이다. 이는 마음챙김 등 실리콘밸리에서 유행하는 자기계발과도 맞물린다. 킬러에게는 플랫폼 노동이라는 물리적 감옥, 계속 그의 육체를 심리적으로 통치하는 자기계발이라는 심리적인 감옥이 동시에 작동하는 셈이다.
신자유주의와 맞물려 탄생한 긍정심리학은 개인을 사회의 영향력에서 분리된 원자화된 존재로 본다. 킬러는 그의 살인 행위를 변호하면서 전세계의 출생률과 사망률을 생각할 때 살인 행위가 끼치는 영향이 없다고 여긴다. 이 원자화된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의 적이다. 마케팅의 핵심은 전쟁과 전술에서 비롯한 것이며 자기계발의 핵심은 상대를 짓밟고 사회적 성공을 이룩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도덕성은 플랫폼노동 아래에서 사라진 것일 수 있다. "보수가 따르는 싸움만 한다"라는 철칙이 무너지는 순간, 그는 자신의 진짜 자아를 보게 된 셈이다. 그가 죽이는 모든 킬러가 자신과 똑같은 철칙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처리해야 할 청소부는 자신을 사고사로 위장해달라 하고 본인의 죽음을 돈으로 환산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가 반성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또 다른 킬러(틸다 스윈튼)와 만남이다. 또 다른 킬러는 채식으로 제 몸을 통제하는 이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채식만 한 것을 후회한다. 그녀가 결국 아내를 폭행한 기업가를 만나서 그를 죽이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기업가는 인간이 아니어서다. 기업가는 오로지 돈의 논리대로만 움직이기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대신 킬러는 그가 언제든 거기에 있을 거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제야 그녀는 다수 혹은 소수로 세계를 나누는 논리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핀처가 마주하는 악은 이제 자본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더 킬러>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지옥도를 그리려 했으나, 결국 사프디 형제가 만드는 얽히고설킨 지옥을 만드는 데에는 다소 서툴렀다. 이 영화는 가장 잔혹한 세계관을 드러내나, 반복되는 자기계발서풍 독백은 웃음만 자아내고, 관객을 지루하게끔 한다. 안타깝게도 가장 잔혹해야 할 영화가 가장 잔혹하지 않은 아이러니로 인해서 이 영화는 핀처의 영화 중 최악의 영화가 되었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더 킬러
The Killer
감독
데이빗 핀처David Fincher
출연
마이클 패스벤더Michael Fassbender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소피 샬롯Sophie Charlotte
알리스 하워드Arliss Howard
찰스 파넬Charles Parnell
케리 오말레이Kerry O'Malley
살라 베이커Sala Baker
제공 넷플릭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8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2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