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방 ['열병의 방' #1]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방 ['열병의 방' #1]
  • 이현동
  • 승인 2023.11.1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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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꿈과 의식을 찾아서"
ⓒ Kick the Machine Films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빈곤해진다. 의식의 빈곤, 해석의 빈곤, 지각의 빈곤… 이런 빈곤 속에서 투덜투덜하며 방황하다 보면, 어느새 그가 설정한 목적지에 도착한다. 목적지는 바로 '꿈'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의식이 무의식을 왜곡하는 현상이라 말했다. 왜곡된 꿈 혹은 사망선고를 받은 꿈을 소생시키기 위해 인간은 늘 무의식으로부터 도망가 기록을 남긴다. 꿈은 늘 종언을 말하고, 의식은 이를 붙잡고자 한다. 프랑스 미학자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탄생이란 죽음을 정복한 승리이자 죽음을 통해 자격을 얻은 승리라 표현했다. 망각에 취약한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한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 이미지를 발명한 것이다. 꿈을 탐닉하는 과정도 이와 같다. 꿈은 비일관적이고 일탈적이며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는 빈곤한 기억으로 늘 죽어가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가 꿈을 재현하는 양식이라면 그 형태는 궁극적으로 의식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일반적으로 영화가 의식을 선명하게 복구하려는 작업이라면, 위라세타쿤은 관객에게 의식으로서의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에 가까운 경험을 선사한다. 그는 도리어 왜곡에 가까운 의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개관 페스티벌에 <찬란함의 무덤>(2015)과 <열병의 방>(2015)이 처음 소개될 때 아피찻퐁은 기자회견에서 '혼돈과 혼란'이 자신의 주요한 모티브라고 말하기도 했다.

<열병의 방>과 함께 선보인 장편 <찬란함의 무덤>은 유사한 세계를 공유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동일한 주연 배우와 꿈과 잠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잠재하고 있는 외화면의 세계를 연결하는 인상을 준다. <찬란함의 무덤>에서 주인공인 남자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잠을 잘 때 전설로 전해지던 왕이 그를 불러 전쟁에 참여시킨다. 꿈에서 깨어난 남자는 꿈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메모하며 기억을 저장한다. 이는 <열병의 방>에서도 연결되는데, 꿈을 기억하기 위해 위라세타쿤은 '빛'을 활용하여 기억과 기억을 접합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종류의 세계가 서로를 침범하며 의미를 부여할 때 서사와 시간성은 어떠한 개입도 허용될 수 없도록 방치된다. 궁극적으로 그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꿈' 자체인가. '꿈'이 나타내는 상징인가.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의 영화세계는 그가 살아있는 한 여전히 완성되지 않는 꿈일 것이니 말이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그가 태국에서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밝힌 건 군부 독재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영화와 현실을 연결하려는 직설적 태도가 드러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Kick the Machine Films

영화라는 동굴을 탐험하면서

올해 옵/신 페스티벌(Ob/Scene Festival 2023)을 통해 공개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2015)은 공연의 형식을 표명하면서도 그가 주장하듯 영화라는 장르를 포함한 다중적 이미지로 분절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이 일정 부분 우리에게 체험을 독려하는 방식 중 하나는 공연장에 출입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출입구에 진입하면 통로에는 모든 조명이 암전되어 있으며, 스태프의 조그마한 불빛에 의지해서 공연장을 더듬더듬 찾아가야 한다. 어둠을 인내하지 못한 몇몇 관객은 핸드폰 불빛을 켜기도 한다. 도착한 후 안내에 따라 관객들은 바닥에 앉거나 뒤편에 설치된 몇 개 되지 않는 의자에 앉아 대기한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시각이 마비된 채로 들어오는 관객들이 차츰 자리를 메우는 것만이 어렴풋이 확인된다. 그리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영화가 늘 그렇듯이 태국의 일상이 스크린에 영사되기 시작한다. 방에서 창문 바깥을 가만히 비추는 롱 숏, 에어로빅하는 남자, 1~3마리의 강아지, 엄마와 아이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 관세음보살 조각상, 타릿 장군 조각상, 노동자들의 벽화, 바다의 전경 등이 상영된다. 맨 처음에는 여자의 내레이션으로 상황이 낭독되다가 이내 똑같은 시퀀스가 반복되면서 남자의 목소리로 뒤바뀐다.

이후 잠들어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이 등장하고, 스크린이 두 화면으로 분할된다. 1번과 2번 스크린은 서로의 장면들을 따라가기도 하고, 다른 각도로 인물과 배경을 포착한다. 다음으로 전에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좌우에 설치된 3번과 4번 스크린이 켜지면서 관객들은 어떤 화면을 주목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해변과 파도가 네 스크린에서 모두 보이지만 미묘하게 동일하지 않다. 그의 영화 몇몇에서 드러나는 화법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대칭이 주는 효과란 어느 것이 현실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카오스를 촉발하면서 이내 감각 안에서 집합하지 않고 분산되는 효과를 초래한다. 이내 배경이 동굴로 바뀌고 나서 복면을 쓴 한 남성을 보게 된다. 그는 동굴에서 무엇인가를 채굴하러 온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피신하러 온 사람에 가까워 보인다. <찬란함의 무덤>에서와 같이 전쟁하고 온 사람처럼 그는 하염없이 동굴을 내려간다. 각각의 스크린에선 그 남성이 손전등을 들고 어디론가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비밀스러운 동굴 한 곳을 가만히 비추기도 한다. 어느 순간 스크린이 사라지고 암전된 상태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기서 충격적일 정도로 혼란을 일으키는 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스크린 뒤에 있던 커튼이 올라갔을 때'이다. 관객이 머물러있던 공간이 관객석이 아닌 '공연장'이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이 상황은 시야 앞에 놓여 진 의자들 위에 프로젝트에서 분출되는 빛을 통해 더욱더 선명해진다.

이는 스크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안내해 온 장소적 대칭이기도 하고,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체험의 영역으로 끌고 오려는 감독의 기획이기도 하다. 이 빛은 점차 한 방향이 아닌 여러 갈래로 분사된다. 공연장을 채우는 연기가 빛을 타고 면이라는 층위를 만들어 내고 빠르게 변화하면서 공간 안에 점차 확산된다. 어떤 관객은 강렬한 빛을 견디다 못해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또한 빛과 연기의 조합을 통해 생성된 긴 터널과도 같은 공간이 형성될 때 관객은 그곳으로 빨려가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모든 지각을 빼앗아 갈 만한 위력을 발휘하는 이 장면 속에서 관객은 일종의 꿈을 꾸는 상태로 이끌린다. 이전에 보았던 모든 이미지가 기억에서 일제히 소거된 상태로 의식은 행방을 잃는다.

 

ⓒ Kick the Machine Films

40분가량 지속되는 이 시퀀스의 후반부에서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의도적으로 포함한 장면이 있는데, 안개를 스크린으로 활용하여 강변에서 소년들이 나누는 담소 장면이다. 실루엣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모습은 정확히는 식별할 수 없는 모습이어서 '꿈'에서 본 것 같이 흐릿하게 묘사된다. 짐작할 수 있듯이 커튼이 올라간 순간이 '꿈'을 꾸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묘연하게도 우리가 <열병의 방>을 보며 기억하는 순간이란 도리어 우리의 의식을 빼앗아 간 '빛'일 것이다. 커튼이 내려가고 난 후 조명이 암전된 상태로 관객은 다시 스크린을 주목한다. 복면을 쓴 남자가 돌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장면에 이어 몇 분의 시간이 흘러 남자가 깨어나고 어떤 화면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 뒤 다음의 대화가 흘러나온다.

여자 "요즘은 꿈이 기억나지 않아요. 젊었을 땐 잘 기억했는데."

남자 "아니요. 그건 제가 당신의 빛을 가져가서입니다."

<열병의 방>은 빛을 통해 영화 바깥에 있는 외부 세계로 이행한다. 생각해 보면 빛을 투과하지 않고는 영화에 도달할 수 없다. 작은 구멍을 뚫고 바깥에서 어두운 방향으로 틈입하는 빛을 통해 상을 맺히게 하는 원리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오로지 외부를 조망하기 위해 설계된 도구였다. 또한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방'이라는 뜻이 있다. 이를 <열병의 방>에 대입하면 영화의 공간이란 그 자체로 카메라 옵스큐라이자 빛=꿈으로 서로 교차한다. 또한 동굴 아래 깊이 잠들어 있었던 영화라는 꿈이 빛으로 발굴되고 이내 스크린에 머물러있던 영화는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제의가 아닌 전시적 요소로 표출된다. 요즘 영화가 나열하고 있는 모방과 복제로 인해 균일하게 소비중심주의로서 소진되고 있다면 그는 기존 영화 문법을 이탈하여 새로운 개척을 성공적으로 시도해 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 '스테판 들롬'은 "아피차퐁은 아시아 영화를 위한 새로운 길을 그리는 것이 아닌, 영화 자체를 완전히 다시 그리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암실과도 같은 공간에서 관객은 기존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던 영화적 체험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향유하며 관객 사이에서 작동하는 공동의 감각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말하듯 <열병의 방>은 영화작업의 연장선이며 꿈이란 표적을 다시금 우리에게 제시함으로 위대하고도 기이한 실험을 성공시킨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열병의 방
Fever Room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Apichatpong Weerasethakul

 

출연

쩬찌라 뽕빠스, 반롭 롬노이, 나부아 지역 10대 청소년들
촬영지

콘깬, 차이야뿜, 나콘파놈

조감독

솜폿 칫가손뽕세
촬영감독

찻차이 수반
촬영보조

타나요스 루쁘카쫀
프로젝트 프로덕션 매니저

차이 시리스
시각 디자이너, 슈퍼바이저

루에안그릿 순티숙 (덕 유닛)
조명 디자이너

뽄빤 아라비라시드
사운드 디자이너

시비즈 고이치, 아크릿찰렘 깔라야나미트
사운드 보조

찰레므랏 까위와타나
회계

빠리차트 뿌아리
포스트 프로덕션 슈퍼바이저

리 차타메티꿀

 

제작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제공 Ob/Scene Festival 2023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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