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의 몸의 내맡김 ['열병의 방' #2]
영화로의 몸의 내맡김 ['열병의 방' #2]
  • 변해빈
  • 승인 2023.11.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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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 조건의 소거, 혹은 몸의 결핍을 활성화하기"

'암흑'과 '무성'은 진공 상태를 유추하게 하는 일련의 모사이거나 착시일 뿐 독자적으로 감각되고 지속될 수 없다. '몸'은 본능적으로 얕은 움직임을 포착하게끔 설계되어 있고, 적어도 제 몸의 기관이 내는 소리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 특정한 시공간 내에 위치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극장의 인위적 조건을 빌려 불가능한 그것을 감각하기 위한 하나의 제시다. 지상을 모조리 밀어버린 <멜랑콜리아>(2011)의 검은 스크린은 절대적인 종말이 당도한 끝점에서 검은 담즙의 물질, 덧없음의 세계를 예견하고, <카일리 블루스>(2015) <지구 최후의 밤>(2018)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2018)는 암울한 터널의 심상을 경유해 환상을 오가거나 환상으로 위장할 때 버텨지는 터전을 그린다. 몸들은 폐허의 얼굴을 하고 비대한 무감함에 사로잡혀 있단 점에서 몸의 작동을 최소한으로 줄여버리거나 아예 몸담은 그 세계의 모습이 되어 간다. 하지만 이 감응은 적어도 현실의 세계를 뒤흔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알려진 바와 같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열병의 방>(2015)은 관람자의 몸을 무척 불편하게 만든 환경에서 상연되기를 의도한다. 극은 어둠이 꼼꼼하게 내린 폐쇄된 공간 안에서 관람자들이 극소의 사운드와 미광에 위안 삼도록 유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열병의 방>은 자체로 하나의 연극이면서 이것이 상연되는 '방(극장)' 안에 배우 대신 '빛이 사라진 도시'라는 이름이 붙은 영화를 들여놓는다. 관람자 각각이 영화를 몸으로 체험하는 환경과 조건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아피찻퐁은 <열병의 방>을 영화로 통칭한다. 따라서 이하 별도 구분 없이 영화로 표기). 네 개의 스크린(중앙에 둘, 좌측과 우측에 각각 하나)이 설치된 검은 방에서 관람을 요청하는 이 작품은 줄곧 시야를 사방으로 분산시킨다. 한 스크린을 부여잡으려거든 틀림없이 다른 나머지에 공백을 발생시키고, 심지어 그 혼돈스런 욕망은 아예 보기(시각)를 포기하게끔 한다.

우리는 적어도 절반은 마비되고 불안과 불충분함에 감염된 몸으로 스크린 너머 세계와 마주한다. 역설적으로 둔해져 있던 몸의 갖가지 감각적 통로가 활성화되고 극장은 스크린 막을 응시하는 것만으론 불충분한 심부의 요소들을 펼쳐놓는다. 아닌 게 아니라, <열병의 방>이 상연되는 극장 자체가 누군가의 꿈속 공간이며 심연의 동굴이다.

 

<열병의 방>의 오프닝, 장소와 사람과 정물을 담은 쇼트들이 나열된다. 어떠한 접점 없고 서사적 흐름을 생성하지 않는 미확정적 이미지들의 나열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여성의 음성(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떠받치고 있다. 다른 시간대에 속한 작중 인물의 의식이 발현된 것일까. 하지만 음성의 내용물은 이미지 위에 겹쳐진 사운드일 뿐 관람자의 눈이 보는 것에 들어맞지 않고 어긋나기 일쑤다. 짐작하건대, 이 광경은 누군가의 현실이 뒤섞인 꿈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음성만이 남성의 것으로 바뀐 채 앞과 동일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나열이 반복된다. 동일성이 너그럽게 허용하는 나태함은 관람자의 집중력을 서서히 무디게 만들고, 지속되던 음성이 삽시간에 존재를 감추며 사라져도 그것을 날카롭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사라짐의 순간을 노골적으로 의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존재했던 무언가 소거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한다. 그러나 아피찻퐁의 세계에서 있었던 것의 없음은 불가능하다. 소거는 정교하게 구성된 인위의 구성물이지 자연적이지 않다. <열병의 방>은 소거의 조건 안에서 도리어 팽배해지는 무언가에 관한 관심이다. 반복되지만 축적되기를 중단하는 음성은 아피찻퐁이 거듭 시도해 온 기억과 꿈과 죽음의 규정되지 않은 존재 양식과 닮아있다. 필연적으로 무언가 지나간 자리를 인식하게 하고, 그 자체로 잔상이며, 앞선 것(실재)보다 결핍된 영역을 자극한다.

그런데 몸으로 부딪치게끔 만들어진 <열병의 방>은 정작 인물과 카메라, 관람자와 스크린 사이 형성된 일련의 '막'을 의식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규정성을 벗어난 막은 극장 내 어둠과 빛과 연기, 세 개의 층을 겹쳐내 이미지의 상을 투영해내던 때이다. 객석을 향해 뻗어 나온 얇은 조명 빛줄기는 주변을 에워싼 거대한 어둠으로 인식되고 생김새와 방향 따위를 조율할 수 없는 연기의 퍼트려짐이 때를 맞춰 절묘하게 조명 빛 앞을 가로지르며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 온 물체로서의 스크린 아닌, 허상이라는 표현을 극대화한 듯한 다른 차원의 막을 형성한다. 사라져 가는 중인 연기가 프로젝터로 투사한 상을 투영해 내는 그 순간의 경험은 거기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자신들의 영역을 갖지 못하고 유랑하던 이들, 살아있는 형식을 이탈한 몸이란 점과 연관된다. 아피찻퐁은 상처 구덩이로서의 근대적 폭력에 감염되고 마비된 몸들에 인간의 육체성을 부여하려 들기보다 환상임이 공고한 형태로 존재시키면서 현실의 원리로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들며, 볼 수 없는 것을 가시화하는 시도를 기만하듯 의도적인 (연기와 상의) 흩어짐, 소멸의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순간'들을 잊어도 되는 흐리멍텅한 무언가가 아닌 순간에만 발생하는 어떤 힘, 순간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것으로 변모시킨 셈이다. 사라짐으로써 더 영험하고 더 그리운 이미지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외형을 한 (어쩌면 '진짜' 인간인) 인물들은 오로지 몸만을 지닌 채 극 안에 존재한다. <열병의 방>에서는 인물들 사이의 각종 만남과 우발적인 사건도 벌어지지 않고, 역사적인 주름 또는 폭력이 또렷하게 새겨지거나 시간의 경과를 적극적으로 진행시키는 몸도 없다. 어떤 행위를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몸들이 아니다. 인물들은 그저 죽음의 강가에서, 헤집어진 장소에서, 먼 어딘가를 응시하는 몸짓으로 화면 안에 등장한다. 그도 아니라면 병을 앓고 누운 채 의식과 무의식 사이 사경을 헤매는, 그런 이면을 품은 정지된 몸의 양식으로 존재한다. 극도로 정제된 혹은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몸은 모순되게도 터전을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감과 무력감에 관여하는 정념마저 거부하는 듯하다. 그들의 몸짓은 무언가로 향해가려는 의욕보단 시간을 버티며 무언가를 묵묵히 기다리거나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정작 기다림의 대상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끝에, 어쩔 수 없이 소멸에서 파생된 어떤 상태로 이행하는 삶의 문제를 상상하게 된다면 과한 접근일까. 인물들은 단지 죽음에 기인하는 상태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열병의 방>은 그러한 것들을 설명해 내려하지 않고 극의 기본 요소를 서서히 앗아가버리지만, 아피찻퐁의 이야기는 어김없이 상실과 파괴로부터 열려야 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지배적인 조건으로 여겨져 온 인물과 사건과 정념, 이야기를 최대한 사라지게 만든 뒤, 그다음에도 '존재 가능한 영화란 무엇인지'를 탐문하려는 태도, 곧 아피찻퐁에게 극장은 무엇보다 삶의 문제를 집요하게 감각하는 태도에서 발현된 엄연한 세계이다.

 

아피찻퐁의 영화에서 '꿈'이 동일한 내용물의 반복을 그리거나 아예 꿈이 지워지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빛이 필수적인 영화를 보며 우리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느끼는 건) 빛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라는 영화의 응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본적으로 영화의 조건에서 시각의 불충분함은 결핍을 야기한다. 그 결핍된 지점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를 가시적으로 움켜쥐게 되면 삶의 결핍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론 충분하지 않은 아피찻퐁의 세계와 연관되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엉클 분미>(2010)의 유령의 형체는 검은색으로 빽빽하게 칠해진 것 같은 실루엣이고 <증발>(2015)의 연기는 화면을 뒤덮어버린다. <메모리아>에서 내가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되 내 주위에 도사리는 것으로서 균과 시간의 진행, 이를 흡습하는 인물의 몸이 있으며, 또 그 몸은 왜 그토록 시야가 차단된 채 들음을 수행하고 있던 것인지 떠올려본다. 보이던 것을 가려내고 시각을 마비시키는 것은 암울한 구름이었고, 부서지고 불탄 잔해를 표명하는 것으로서 연기이다. 아피찻퐁은 허구적인 장치를 통해 붙잡아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스크린 내부에 함께 담아낸다. 폭력 아래,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며 아물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의 세계엔 모종의 가림막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무성영화가 사운드 없는 이미지를 허용했다면, 사운드만으로 영화가 성립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열병의 방>은 시청각적 체험에서 비교적 부차적으로 여기기 쉬운 들음의 문제를 응시한다. 강가를 바라보는 인물들의 얼굴 다음으로 그들의 시점 쇼트가 이어 붙지만, 인물들의 시선을 앞서게 된 카메라는 시야를 확장해 주지 못한다. 화면은 오로지 잿빛 강물만으로 채워진다. 네 개의 스크린은 마치 하나의 대상을 다각도에서 포착해낸 것으로 여겨지기 쉽지만, 그것들은 점차 통일된 이미지로 압축되거나 동굴 내부와 같은 어둠 속으로 장소가 이동되며 시야가 점진적으로 닫힌다. 그런 순간마다 극 안에는 풀이되지 않는 언어의 중얼거림, 물체가 마찰을 일으켜 내는 굉음이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그에 관한 소리의 원인을 밝히거나 그 여파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계적 구도가 사라진 채 잡음을 잡음으로 존재하게 한다. 원인 제공자에 해당하는 이미지의 부재뿐 아니라 사운드 자체도 특정한 하나의 사운드로 규정되지 않는다.

들음의 영화, 아피찻퐁의 사운드는 단순히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가 드러내려는 것에 다가서기 위해 집요함을 발휘하는 차원에서 들음의 몸짓, 듣는 몸을 중시한다. 들음은 단순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지 없는 사운드는 더욱이 결핍의 강도가 클 수밖에 없단 점에서 부서지고 닳아 없어진 과거의 잔해를 조금이라도 붙잡아 보겠다는 의지, 온몸을 내던져야 하는 일이다. 불완전한 삶의 문제를 더 깊이 응시하기 위해 영화의 조건을 더 불충분하게 소거하는 시도. 영화의 소거에 해당하는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감각될 수 없는 곳에 닿으려는 욕망으로서 상상계에 불과한 죽음의 세계와 아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피찻퐁의 영화는 내 몸의 반응이 내가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는 뜻을 넘어, (단순한 내 세계가 아니라) 내 세계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것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려는 시도, 가까워지기 위한 몸과 세계의 조율일 것이기 때문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열병의 방
Fever Room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Apichatpong Weerasethakul

 

출연

쩬찌라 뽕빠스, 반롭 롬노이, 나부아 지역 10대 청소년들
촬영지

콘깬, 차이야뿜, 나콘파놈

조감독

솜폿 칫가손뽕세
촬영감독

찻차이 수반
촬영보조

타나요스 루쁘카쫀
프로젝트 프로덕션 매니저

차이 시리스
시각 디자이너, 슈퍼바이저

루에안그릿 순티숙 (덕 유닛)
조명 디자이너

뽄빤 아라비라시드
사운드 디자이너

시비즈 고이치, 아크릿찰렘 깔라야나미트
사운드 보조

찰레므랏 까위와타나
회계

빠리차트 뿌아리
포스트 프로덕션 슈퍼바이저

리 차타메티꿀

 

제작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제공 Ob/Scene Festival 2023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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