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걸린 추도문 ['플라워 킬링 문' #2]
너무 오래 걸린 추도문 ['플라워 킬링 문' #2]
  • 배명현
  • 승인 2023.11.0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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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힘과 영화와 사과문"

1864년, 아메리카합중국에 의한 원주민 섬멸 작전이 진행되고 나바호의 전사들은 대부분 죽음을 맞이한다. 살아남은 일만여 명의 원주민들은 강제이주를 당하여 350마일(약 560킬로미터)을 맨발로 끌려가는데, 그날의 슬픈 행렬을 머나먼 여정(Long Walk)이라 부른다. ― 이원석, 『엔딩과 랜딩』, 문학동네, p.121

현재 활동하는 감독 중 '마틴 스코세이지'만큼 미국이란 나라의 뿌리를 드러내려는 사람이 있을까. '폴 토마스 앤더슨'이 <데어 윌 비 블러드>(2007)로 미국의 탄생과 현재에 대한 진단을 내렸고, <리코리쉬 피자>(2021)로 오늘날 행해지는 미국의 퇴행 그리고 서사 예술에서 불거진 총체적 재현 불가능성과 현실의 괴리를 다루긴 했지만, 마틴 스코세이지만큼 근원 자체를 집요하게 다루진 않았다. 또 '사프디 형제'가 자본으로 근원에 접근하긴 하지만, 스코세이지는 그 자본의 출처까지 탐구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스코세이지 감독이 보다 뿌리에 천착하는 작가는 찾아보기 여전히 어렵다. 여기서 그가 근원에 집중할 때, 부각하는 요소는 '힘'이다. 마피아 영화를 만들어 온 사람답게 그가 바라본 미국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건 힘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플라워 킬링 문>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색다른 어떤 힘을 말한다. 미국의 힘과 결부하고 있는 것이 작품-서사가 지닌 힘이 그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은 "백인에게 가르침을 받을 것입니다."로 시작한다. 티피 안에는 어른뿐이고 아이들은 밖에서 실내를 몰래 훔쳐본다. 대사에 어른은 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아이들은 그저 볼 뿐이다. 이 시퀀스는 '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받아들이는 대상에 따라 시청자의 감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연결되는 다음 시퀀스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땅이 진동하더니 기름이 터진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하 '원주민' 혹은 '오세이지 부족')은 비처럼 내리는 검은 기름을 맞으며 환호하고 즐거워한다. 이때 화면 중앙에 겹쳐진 3명의 원주민이 보이는데 이들의 정체는 알 수 없다. 분명한 점은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프레임을 뚫고 왼편에서 다른 원주민의 손이 침입해 들어온다. 영화는 프레임 바깥의 공간에서도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원주민처럼 기뻐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게 한다. 여기서 춤 시퀀스가 티피 시퀀스 바로 연결되었다는 점과 시간의 경과가 표현되지 않았다('20년후' 와 같은 자막으로 말이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원주민의 탄식과 기름의 분출로 인한 기쁨은 거의 비슷한 시기로 추측된다. 다른 예로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인물들이 기름을 보고 기뻐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정확하게 이 자본에 대한 감각으로 인물의 기분을 이해한다. 하지만 <플라워 킬링 문>에서 우리가 본 화면 속 춤추는 원주민은 아직 백인에게 교육받지 않은 어른이다.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해보아도 오세이지 부족이 호클라오마로 이주한 것은 1870년대이고 석유가 발견된 건 1890년대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본 춤도 1890년대를 기반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기뻐하는가. 우리는 이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화면 안에는 그저 즐거워하는 원주민의 아름다운 모습과 마주한다.

 

ⓒ Apple TV+

영화의 배경은 1920년대 미국의 오크라호마다. 버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돌아온 인물이고, 그의 삼촌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는 일종의 정치인이자 기업가이다. 이들은 가족제도를 이용해 원주민으로부터 기름의 소유권을 가져오려 한다. <플라워 킬링 문>는 이 과정을 보여주는 데, 러닝타임의 상당 분량을 할애한다. 여기서 시놉시스만 본다면 서부와 범죄 장르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스콜 세이지는 장르를 모호하게 비튼다. 이권을 중심에 둔 살해와 사건의 진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범죄 장르(마피아·갱스터 무비) 같지만, '살해'와 '감춰진 진실'을 알아야 하는 대상이 관객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기 어렵다. 심지어 영화는 애초에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놓고 시작한다. '몸이 약한 인디언'이 의뭉스럽게 죽어가는 쇼트가 반복되고 그 끝에는 백인이 총으로 살해하는 쇼트까지 삽입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영화적 관람의 재미를 앗아가는 행위이다. 206분이라는 러닝타임을 끌고 가는 데 있어, 사건의 배경과 범인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시작해버린다는 건, 관객이 얻을 흥미를 지우는 것과 같다. (심지어 스콜세지는 <셔터 아일랜드>(2010)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미스터리와 긴장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작가이다.) 이 선택에 대한 감독의 답은 영화의 끝에 배치된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 영화에서 벌어진 사건은 재미로 다루어선 안 되는 기록이다.

스콜세지는 서사의 재미를 버리는 대신 '윤리'를 택했다. 영화 속 사건을 우리-관객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비해선 안 된다는 감독의 태도가 만든 선택이다. 영화는 윤리적 태도 위에 서 있다. 주인공이 백인, 그것도 원주민을 사랑한 백인의 시점으로 쓰인 것도 그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서사를 재구성해 고통을 전시하지 않았고, 가해자의 입장을 선택하는 것으로 인간적인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세콜세지는 영화의 첫 시나리오를 톰 화이트(FBI의 전신인 수사국의 형사)의 입장으로 썼지만, "사건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디카프리오의 말에 시나리오를 완전히 갈아엎었다고 했다. 영화에서 버크는 백인이고 가해자긴 하지만, 동시에 원주민에 심정적으로 가까운 백인이다. 버크가 놓인 위치로 인해 관객은 가해의 사실과 피해의 진실 둘 모두를 경유할 수 있다. 관객이 피해와 가해 모두를 알면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여기서 '안다'는 건 <플라워 킬링 문>에서 작품의 윤리뿐 아니라 작품 내부를 구성하는 요소로써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곧 개인이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세계의 정보를 학습하는 것이자, 구성되어있는 규칙으로 인식의 체계를 구축함을 의미할 것이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같은 말을 듣고도 어른과 아이가 다른 반응을 보인 이유도 정확히 이를 증명한다. 더불어 규칙이란 대개 힘의 우위로 가르치는 자와 교육받는 자를 구분한다. 아메리카 대륙을 힘으로 지배한 백인이 인디언의 세계를 폭력적으로 재구축할 수 있었던 연유도 이 힘에 근원이 있다.

 

ⓒ Apple TV+

그렇다면 과연 힘이란 무엇일까. 사회학자 김홍중은 저서 『은둔기계』에서 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힘의 현상은 총체적이다. 우리는 힘의 외면과 내면, 표면과 깊이, 원인과 결과를 구분할 수 없다. 힘은 그냥 힘이다. 쪼갤 수 없는 덩어리이자 몰아닥치는 쇄도다. 강하거나 거대하거나 격렬한, 휘몰아치는 파동이다. 힘의 현상, 힘의 본질, 힘의 작용, 힘의 주체는 구별 불가능한 방식으로 뒤섞여 있다. (중략) 내부도 되부도 없는 한 덩어리의 힘." 

아메리카의 원주민을 살해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강제로 옮기기로 하는 결정, 560킬로미터를 이동하게 하는 강제, 그리고 그렇게 강제한 곳조차 다시 빼앗는 행위. 이것이 힘이다. 그리고 힘은 원주민의 세계에 틈입해 돈을 주입한다. 티피 안을 들여다보던 아이들이 보석과 차에서 즐거움을 얻게 만들고 심지어 그들의 돈조차 은행에서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없게 했다. 돈은 백인의 표적이기에 돈을 가지고 있는 원주민 또한 그 표적에 해당한다. 돈을 가지고 있는 인디언은 백인의 힘에 의해 살해당한다. 스코세이지는 역사 귀퉁이에 겨우 쓰인 힘의 참혹한 비극을 <택시 드라이버>(1976), <갱스 오브 뉴욕>(2002),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 <아이리시맨>(2019)과 함께 미국의 뿌리와 현재의 위치에 나란히 배치한다. 그는 주변에 적힌 문제를 중심으로 가지고 왔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몰리(릴리 글래드스톤)가 금치산자임을 자처하는 건 킹이 말했듯 영민한 원주민이기 때문임을 상상해볼 수 있다. 버크에게 인슐린과 함께 주사한 약물이 무엇인지 묻는 말과 안정제라는 버크의 대답에 자리를 박차는 행동을 통해 그녀는 계략의 배후까지 인지하고 있었음을 영화는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음에도, 왜 몰리가 순순히 주사를 맞았는지이다. 이 이해 불가한 영역은 영화의 초반 춤 시퀀스와 동일한 반복이다. 다만, 영화는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 쇼트와 씬과 시퀀스로 넘어가 버린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감독의 태도와 연결되어있는 걸로 추측할 수 있다. 원주민에게는 미국인-(세계 시민으로써의)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사고가 있으며, 이는 우리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이해 불가능을 그저 우매함으로 치부하며 그들의 삶과 터를 빼앗은 과거의 우리들이 저지른 잘못을 보라는 자세, 그들이 선택한 땅에서 나온 기름을 '노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세이지 부족용 비용이 따로 존재하며,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범죄를 모른 척 넘어가는 백인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스콜세지의 태도로 말이다.

이러한 <플라워 킬링 문>을 만들어 내는 태도에 불현듯 영화(film, cinema, movie)가 끼어든다. 작품 속 문득 끼어든 기록 푸티지가 보인다.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는 흑인의 모습이 푸티지 안에 있고 원주민이 등장한다. 이 푸티지를 바라보는 인물은 다름 아닌 킹이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푸티지를 본다. 우리와 그는 같은 푸티지를 바라보고 있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다른 푸티지를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그가 사는 세계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시차와 역사적으로 배치된 위치의 차이 그리고 이 차이가 만들어 낸 낙차가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가 푸티지를 보고 있을 때 함께 등장하는 인물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영상이 상영되는 암실 안에는 기득권 혹은 기득권에 동조하는 인물밖에 없다. 우리는 기록 영상에서 서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저 사실을 담담하게 담았을 뿐이라고. 하지만 기록 영상의 서사는 이러한 방식으로 서사를 가지게 된다. 사실을 담는 카메라의 프레임으로 한 번, 영사되는 움직임이 누구에게 상영되는지로 두 번 그리고 관람하는 인물이 엮어내는 방식으로 한번. 히토 슈타이얼이 『스크린의 추방자들』에서 말한 다큐멘터리와 <플라워 킬링 문>은 분명 무관하지 않다.

 

ⓒ Apple TV+

스코세지는 한 발 더 나아 간다. 영화의 끝 마지막 시퀀스의 시간을 1950년대로 옮겨버린다. 영화 전체의 서사를 라디오 드라마를 공연-녹음하는 무대에서 펼쳐진 이야기로 전복시키는 것이다. 순간 우리의 앞에 디카프리오가 사라져버리고 이야기를 낭독하는 인물이 보인다. 그는 정의로운 이야기는 이렇게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대와 리버스쇼트으로 대응되는 자리에 수트를 멀끔히 차려입은 백인들이 보인다. 이야기의 낭독은 계속된다. 각종 효과음이 실시간으로 녹음되며 이야기의 리듬은 놀랍도록 유려하다. 이를 보는 재미는 이전 러닝타임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에 스코세이지 감독이 직접 나와 인물의 정보를 읽는다. 건조하고 객관적인 사실의 나열. 그 나열의 사이사이에 지금까지 숨겨진 폭력과 고통이 배어있다. 우리는 이 정보를 더 이상 정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가 읽는 정보는 사실의 기록이 아닌 '서사'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코세이지의 맞은편 리버스 쇼트의 자리에서 <플라워 킬링 문>을 보았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 불능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다시 상영되고 낭독된 이야기로 우리는 그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로 삽입된 원주민들의 원을 그리는 움직임과 반복되는 북의 소리는 계속해서 같은 리듬을 유지한 채 상영되고 상영된다. 우리는 결코 <플라워 킬링 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플라워 킬링 문
Killers of the Flower Moon
감독
마틴 스콜세지
Martin Scorsese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Leonardo DiCaprio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
제시 플레먼스Jesse Plemons
릴리 글래드스톤Lily Gladstone

 

제작 Apple TV+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206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3.10.19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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