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소년이여, 현실을 꿈꾸어라!
[Critique] 소년이여, 현실을 꿈꾸어라!
  • 이상용
  • 승인 2023.11.01 13: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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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여기, 지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언급할 때, 대부분의 언론이나 미디어는 두 가지 반응을 전달하면서 어떤 객관적 위치를 찾고자 한다. 수용자 반응의 전달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입장(난해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하야오의 모든 것이 집약된 걸작이라는 견해다. 

개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너무나 분명하게 메시지를 반복하며 전달하고 있어서 "난해하다"는 반응은 도대체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지 궁금증이 생겼고, 하야오의 걸작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에 대한 존중감은 공감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꼽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이웃집 토토로>(1988), <모노노케 히메>(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그리고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었던 <미래소년 코난>(1978)이 있다. 다행스럽게 여긴 지점도 있는데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가장 가까이 놓여 있는 <바람이 분다>(2013)보다는 훨씬 좋았다는 것이다. 벌써 십 년 전에 유작으로 발표했던 작품이다. 

 

두 세계(현실과 환상) 보다 핵심적인 두 개의 문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직접적으로 시대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태평양 전쟁,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다. 엄밀히 말해 두 시기는 다르다. 2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을 기점으로 잡지만,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1941년을 기점으로 잡는다. 자막을 통해 미군의 도쿄 공습이 펼쳐지는 때는 태평양 전쟁 3년째 되던 해임을 알려준다. 집과 건물이 화염에 휩쌓이고, 주인공 '마히토'는 잠에서 깨어난다. 하인들은 불을 끄기 위해 분주하게 다니는 가운데 병원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곳에는 병든 어머니가 있다. 마히토는 어른들의 만류를 뒤로한 채 서둘러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선다. 화염으로 뒤덮인 영화의 시작은 어떤 작품보다 더 어둡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전쟁의 끔찍함은 절정의 순간에 등장했다.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의 모습을 흐릿한 형체로 보여주는데, 이러한 모습은 탑의 내부로  들어간 마히토가 '이세계'(異世界)를 경험할 때 등장하는 죽은 이들의 모습과 연결된다.

공습(폭격)으로 인해 마히토는 어머니 히사코(어머니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보다는 대부분 '엄마'로 등장한다. 그에 반해 어머니를 대신할 인물은 주로 본인의 이름으로 불린다. 하야오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꽤나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이름에 대한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제목으로도 나타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에도 등장한다. 하울이 받는 초대장에는 여러 이름이 있다)를 잃는다. 

 

ⓒ Studio Ghibli

이듬해, 마히토는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시골로 내려간다. 마히토와 아버지가 도착한 곳은 '사기누마역'이다. 이곳은 도쿄에서 멀지 않은 가와사키시에 속해 있고, 요코하마항이 가까이 있다. 도쿄 공습으로 인해 도쿄와 멀지 않은 곳에 설치해야 했던 군수공장을 성격을 감안하면, 또한 역사적인 사실로도 가와사키 지역은 태평양 전쟁의 군수물자를 제조하는 지역이었다. 역에는 나츠코라는 여성이 기다리고 있다. 마히토는 그녀를 보자 내레이션을 통해 "그 사람은 엄마를 똑 닮았다."라고 한다. 어째서 엄마와 똑 닮은 것인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기에 다소 미스테리하기도 하다. 아버지는 나츠코를 보고 애정넘치는 반가움을 표현한다. 아버지는 곧바로 군수공장으로 향하고, 나츠코가 타고 온 자전거 인력거에는 마히토만이 함께 오른다. 나츠코는 어릴 적에 본 마히토를 떠올리고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배에 마히토의 손을 가져다가 얹는다. 그녀는 임신을 한 상태였다. 엄마를 닮은 나츠코가 누구인지는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데 그녀는 마히토의 이모, 즉 죽은 엄마의 동생이었다.

이 사실이 인지되는 순간 좀 기묘해진다. 엄마의 죽음 이후 아버지가 어떻게 이모와 사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나 관련된 장면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증을 뒤로 한 채, 마히토의 입장에 서보면 어머니의 죽음 이후 1년 만에 임신을 한 이모 혹은 '새엄마'의 등장에는 충격이 있다. 이사를 간 저택에서 보내는 첫날 밤 방을 나온 마히토는 공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목격한다. 아버지를 나츠코가 다정하게 맞아준다. 그 모습을 마히토는 몰래 훔쳐본다. 시골과 저택이라는 낯선 환경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낯선 것은 나츠코와 새로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인력거를 타고 저택으로 오는 길에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하나 있다. 출정식을 하는 군인들을 보는 것이다. 나츠코와 마히토는 다급히 멈춰 서서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어머니의 상실과 더불어 마히토가 대면해야 하는 문제는 전쟁의 현실이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냄새는 11살짜리 소년을 결코 피해가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이 있었고, 전장으로 나가는 남자들이 눈앞에 있다. '이세계'에 도착한 마히토가 초반에 목격하는 것도 죽음과 관련된 것들이다. 고인돌 무덤들이 보이고(이 이미지는 나중에 큰할아버지를 대면했을 때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돌의 모습과 연결되기도 한다), 황금색 철문에는 "나를 배운 자는 죽는다."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밀려드는 펠리컨 무리 때문에 문을 열게 되면서, 이를 도우러 온 키리코와 만나게 되는데, 핵심은 죽음 혹은 죽음의 문을 함부로 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키리코는 이세계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지만 죽은 자가 조금 더 많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것은, 거꾸로 소년이 살고 있는 현실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버지는 군수공장에서 제작하는 전투기용 캐노피를 잠깐 집에 옮겨두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자 이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이를 운반하는 사람들이나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는 '끔찍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물건이다. 이러한 역설의 장면과 설정 그리고 현실과 사물의 교차점들이 이 작품에는 반복적으로 표현되는데(거짓말쟁이 역설을 비롯하여), 마히토에게 있어 전쟁의 현실은 도쿄에서도, 시골에서도, 심지어 이세계에서도 끊임없이 대면해야 하는 지독한 현실이다.

 

ⓒ Studio Ghibli

저택에 막 도착한 마히토는 커다란 왜가리를 목격한다. 왜가리는 복도를 향해 날아오면서 마히토를 스쳐 간다. 나츠코는 왜가리가 집으로 들어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이상히 여긴다. 자신의 방을 안내받고, 잠시 잠이 들고, 저택 주변을 둘러보며 큰할아버지가 세운 탑을 보는 일련의 과정은 이상한 나라, 즉 이세계로 가는 행로를 예비한다.

그런데 이세계로 가기 전에 마히토를 둘러싼 두 개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제시가 된다. 하나는 마히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문제, '엄마의 죽음과 새엄마의 등장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엄마의 죽음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시골에 내려와서도 소년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전쟁의 현실'(더군다나 아버지는 군수공장을 운영한다)에 대한 문제다. 11살 소년 마히토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산다는 것은 <모노노케 히메>를 비롯하여 하야오의 작품에 깔린 주인공의 기본적인 태도다) 이를 대면하고 해결해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두 개의 문제는 작품 속 이야기의 목표이자 과제가 된다.

마히토에게 주어진 두 개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용어로 구별해 볼 수도 있다.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마히토의 공적 영역 혹은 공적인 문제는 태평양 전쟁이고, 사적 영역 혹은 사적인 문제는엄마의 죽음 혹은 새엄마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엄마의 죽음도, 새엄마의 등장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영역에 따른 문제 해결을 위해 자연스럽게 주요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적 영역의 문제는 나츠코(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이세계의 히미)와의 대면으로 진행된다면, 공적인 문제는 탑을 지었다고 알려진 '큰할아버지'와의 대면 혹은 대결 속에서 등장한다. 이세계로 들어간 마히토는 나츠코를 찾으러 다니거나 큰할아버지와 대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전개가 핵심을 이루는 통상적인 멜로드라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판타지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유바바의 온천장처럼 하야오의 작품에서 이세계는 주인공을 모험하게 만들고, 성장시키며, 끝내 사건을 해결하는(부모를 되찾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20세기 영국의 판타지 작가인 톨킨이나 루이스는 환상의 공간을 '2차 세계(secondary world)'라고 불렀다. 톨킨은 '중간땅', 루이스의 '나니아'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탑' 혹은 '탑의 안쪽'에 해당한다. 중요한 것은 환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이세계에서 모험을 하는 주인공을 통해 문제에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해 모험하며, 성장하게 되는 과정이다. 

 

이세계 혹은 거울의 나라

왜가리를 따라서 '이세계'에 들어간 마히토의 사적인 목표는 나츠코를 구하는 것이다. 히미와 함께 도착한 '산실' 에는 나츠코가 마치 백설공주처럼(확실히 이 작품이 연상되는 이미지와 설정이다.) 누워있다. 그런데 깨어난 나츠코는 마히토를 몰아치며 함께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마히토는 그러한 나츠코를 붙잡으며 설득하지만, 그녀는 "난 네가 정말 싫어"라고 외쳐댄다. 마히토는 그녀를 붙잡고 "나츠코 엄마"라고 부른다. 소년의 외침은 방안을 가득 채우며 엄마, 나츠코 엄마 등으로 여러 번 반복된다. 마히토가 엄마라고 부를 때 나츠코의 얼굴은 흔들린다.

마히토의 사적인 문제의 해결 방식은 나츠코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엄마의 자리를 대신하는 호명이며, 나츠코를 엄마로 인정하는 것이며, 나츠코를 구원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마히토가 '산실'에 도달하기까지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어부 키리코(그는 현실 속 7인의 할머니 중 하나이기도 한 이세계의 캐릭터다)와 함께 출생을 위해 하늘로 오르는 공중으로 와라와라를 돕는 '히미'다. 펠리컨들이 나타나 와라와라를 잡아먹기 시작하면서 키리코의 손이 해결하지 못할 무렵 바다 가운데서 나타난 히미는 불로 쫓아내 버린다.

이후 키리코와 헤어진 마히토는 히미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마히토를 도와 나츠코를 구출하는 데 동참한다. 히미는 나츠코를 구하러 간다는 말에 동생을 구하러 가는 거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정체성을 드러내지만, 단박에 소녀의 모습이 마히토의 엄마라는 사실과 일치하도록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무튼 히미의 모습은 나우시카 공주나 마녀배달부 키키처럼 하야오의 초기작부터 일관되게 등장한 소녀의 쾌활함을 지니고 있다(상대적으로 어른 여성 혹은 어머니는 아프거나 부재한 경우도 많다. <이웃집 토토로>의 메이와 사츠키 자매가 시골로 이사 온 것은 엄마의 요양원 때문이었고, <바림이 분다>의 아내도 병이 든 채 누워 있는 후반부를 보여준다).

그런데 히미의 그림체는 기존의 소녀와는 조금은 다르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쓰인 오리지널 삽화와의 유사성도 느껴지는데, 여러 모델들을 활용하는 것이 지브리의 방식이다보니 몇 가지가 혼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앨리스와 관련하여 더 중요한 것은 마히토에게 잼을 발라주는 대목에서다. 잉꼬들로부터 죽을 뻔한 마히토를 구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히미는 빵에 딸기잼을 듬뿍 발라서 주는데, 볌에는 'tomorrow'라는 라벨이 붙어 있다. '내일의 잼.' 이 잼은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장난 중에 등장한다. 거울나라에서 만난 여왕은 일자리를 제안하며 조건을 말하는데 1주일에 2펜스를 주고, 이틀에 한 번 잼을 준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내일의 잼과 어제의 잼'은 있지만 '오늘의 잼'은 없다는 것이다. 잼을 언제 먹을 수 있을까 싶었던 앨리스가 "그러다 가끔 '오늘'의 잼을 먹을 수도 있잖아요."라고 따진다. 그러자 하얀 여왕은 "잼은 이틀에 한 번씩만 먹을 수 있어. 오늘은 '오늘이 아닌 날'이 될 수 없어"라고 말한다. 결국 앨리스는 결코 잼을 먹을 수 없다.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말장난 속에 잼은 사라져 버린다. 무슨 소리인가 할 수 있겠지만, 작가 루이스 캐럴은 원래 수학자였고, 논리학자였다. 그리하여 수학적 명제에 해당하는 대화나 진술들이 앨리스가 모험을 펼치는 이상한 나라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논리적 모순인 패러독스, 즉 역설을 다루고 있는 '거짓말쟁이 역설'이 대화 중에 등장한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작품 속 이세계의 형상이 루이스 캐럴의 역설을 다룬 '이상한 세계'과 은근히 닮아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세계의 전도된 모습들이다. 원래 동화적 세계관에서 펠리컨은 아이를 운반하는 역할로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아이를 잡아먹는 존재로 변화시킨다. 잉꼬는 평화의 상징과 부부 사이를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폭력적이고 식탐이 많은 존재로 뒤집혀 진다. 큰할아버지가 만든 이세계는 기존의 질서조차도 뒤집혀진 '이상한 세계'다. 그리하여, 큰아버지가 자신이 만든 세계를 폐기하고, 마히토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라고 하는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평화로운 세계를 꿈꾸었지만 큰할아버지의 세계는 결국 폭력과 죽음의 세계였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고인돌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볼법한(하야오가 종종 활용하는) 이미지이지만 죽음이 떠 있는 이미지로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 Studio Ghibli

전도된 이세계의 설명이 다소 복잡할 수 있지만, 사적인 문제의 고리인 '나츠코-마히토-히미(현실의 히사코)'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은 없다. 히미가 불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능력자라는 점도 화염으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히미가 내일의 잼을 발라주는 장면이 중요한 것은 루이스 캐럴이나 패러독스의 문제가 아니라, 마히토가 그 어느 때보다 맛나고 기쁘게 빵을 먹는 모습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어머니로부터 느끼고 싶었던 위로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야오의 기존 작품들과 달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는 맥락들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 영역의 문제 때문이다. 논리적 패러독스이자 전도된 이세계를 바라보는 출발점은 '전쟁'의 현실이다. 도쿄를 떠나 시골에 와서도 전쟁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출정식이 벌어지는 거리의 모습, 시골 학교에서는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시키고 있다. 군수물자 마련과 무관하지 않은 문제이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군수공장을 운영하면서 전쟁 상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마히토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드러내기 어렵다. 꿈속에서 엄마를 외치는 모습(사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모습)이 꽤 직접적인 것에 반하여 전쟁은 보다 큰 세계이고, 마히토를 둘러싼 미래의 문제로 이어진다. 

통상적인 드라마에서 어린 소년이 전쟁의 현실(공적 문제)과 대면하는 쉬운 방식은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것을 통해 구현할 수 있다. 아버지는 전쟁을 돕는 인물이고, 그것은 어머니의 죽음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 어머니의 죽음을 겪게 된 마히토의 입장에서 십대의 반항이 아버지의 세대로 향하는 것은 가능하다. 실제로 하야오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11살짜리 소년 마히토는 꽤나 내성적이고, 아버지에게 직접 불만을 표출하지 못한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달될 뿐이다. 

 

ⓒ Studio Ghibli

소년이 전쟁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은 '이세계'를 통해서다. 그러니까 이세계는 전쟁의 현실을 치환한 또 하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세계에서 만난 키리코는 이곳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여 살고 있는데 죽은 자가 조금 더 많다는 식으로 말한다. 죽은 자가 넘쳐나는 세계. 그것은 전쟁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이세계를 만든 이는 마히토의 큰할아버지다. 마히토는 왜가리 혹은 왜가리 남자를 따라 들어간 세계에서 모험을 하고, 나츠코를 구할 뿐만 아니라 큰할아버지와 직접적으로 대면을 한다. 그는 마히토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을 권유하고, 돌아가겠다는 마히토에게 모든 것이 망가진 현실 세계를 버리고 이곳에서 너만의 세계를 세우라며 13개의 돌을 보여준다. 여기에 마히토의 돌을 하나 더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하야오의 전쟁에 대한 견해는 그의 대표작들인 <미래소년 코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에서 반복적으로 묘사한 것이지만, 이 작품들은 태평양 전쟁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시작하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머니의 죽음과 상실감으로 시작하여, '이 전쟁의 현실을 어떻게 판타지로 치환해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또렷한 형상이 아니라 역설과 아이러니로 점철된 이상한 세계로만 던져둔다. 큰할아버지가 새들을 왜 데리고 왔는지, 와라와라를 통해 출생이 이뤄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이세계를 대신할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다는 방법론을 강조한다. 그것은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노골적인 훈계이기도 하다.

큰할아버지가 마히토에게 돌을 보여주며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은 권유하는 장면은 두 번에 걸쳐 등장한다. 나츠코를 구하려다 실패하고 깨어난 마히토는 큰할아버지가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마히토에게 이 돌을 하나 더 얹으면 세계는 평화롭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돌의 정체를 간파하고는 악의가 있다며 거부한다. 큰할아버지와 첫 대면은 마치 꿈처럼 사라지고 다시 깨어난 마히토는 잉꼬들에게 잡혀 있다. 히미와 함께 도착한 두 번째 대화에서 큰할아버지는 악의 없는 돌을 찾아냈다면서 마히토에게 이 돌들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마히토가 할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이마에 생긴 상처다. 그것은 시골로 전학 온 마히토가 친구들과 쌓은 후 그들을 혼내주기 위해 일부러 돌로 자신의 이마에 직접 찍은 상처였다.

마히토는 자신이 이미 악의를 저질렀고, 이러한 이유로 순수한 돌을 만질 수 없는 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크게 상관없는 듯 보인다. 중요한 것은 마히토가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데 있다. 마히토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큰할아버지는 현실세계는 전쟁과 폭력의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주변 사람들을 가리키며 친구를 만들겠다고 한다. 이 말에 왜가리 남자가 놀라는 장면이 또렷하게 등장한다(아니, 나를 친구라고 말한다고!?).

선의와 악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다른 태도 등 두 남자의 대화가 팽팽해질 무렵 다소 어이없이 종결되는 것은 마히토에게 불만을 지니고 있었고, 이세계의 실세가 되고 싶은 잉꼬 대왕이 뛰어들어와 돌들을 세우고 칼로 베어버리는 장면이다. 덕분에 이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큰할아버지가 데리고 온 잉꼬는 이세계에서 폭력적인 존재로 변해 있었고, 그것은 큰할아버지의 자업자득인 동시에 이세계의 괴멸로 이어진다. 아마 잉꼬 대왕의 복장과 모습에서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스트의 형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Studio Ghibli

아무려나 이 탑은 큰할아버지에 의해 세워졌고, 그것은 탑을 지탱하는 돌들처럼 새로운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어 냈지만 실효성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마무리다. 큰할아버지는 후계자를 세우기 위해 마히토를 필요로 했지만(큰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왜가리 남자가 마히토가 이세계에 오는 것을 두고 갈등하고 있을 때 멀리서 나타나 이를 수락하는 장면이다), 소년은 구세대가 세운 돌의 힘과 질서를 거부한다. 이는 자신은 불바다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친구들을 만들며(마히토는 현실에서 친구가 없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겠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큰할아버지 혹은 구세대 혹은 탑의 정체를 조금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가 사라져 버린 나츠코(부인)와 마히토(아들)를 찾아 아버지가 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할머니들의 설명이다. 탑을 세운 것은 큰할아버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고, 이 물건의 중요성을 파악한 큰할아버지(엄청나게 책을 읽은 지적인 인물로 설명된다)가 운석을 가리고 탑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가 메이지유신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일본의 근대적(현대적) 세계를 구현하는 메이지유신과 외계에서 온 물건(운석)과 이를 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라는 힘의 논리는 구세대를 둘러싼 질서의 단면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온 메이지 유신은 두 세력 간의 다툼이기도 했다. 왜부의 힘을 빌어 일본을 빠르게 개혁해야 한다는 개항파의 입장과 천황을 옹립하면서 지키려고 했던 막부 중심의 입장이 대립하였는데, 큰할아버지를 보여주는 몇몇 장면 중에는 개항파와 관련된 미국 선박의 사진이 걸려 있는 장면이 있고, 큰할아버지 사진에는 서양식 제복을 입고 찍은 것이 있다. 그것은 큰할아버지가 외부의 힘을 빌려 일본을 혁파하려고 했던 개항파의 입장임을 엿보게 한다.

운석은 개항파가 끌어당긴 서구 열강의 힘 혹은 과학 기술과 연결된다. 하지만 이 힘은 끝내 태평양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야기하였고, 그것은 탑 안의 이 세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큰할아버지는 악의 없는 돌들로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말하지만, 마히토의 입장은 다르다. 마히토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순수하지 않다. 돌의 문제를 거론하자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툰 후 그들을 혼내주기 위해 '돌'로 자신의 머리를 찍었다. 돌은 쉽게 타락의 길로 활용될 수 있다. 어쩌면, 소년의 모험이 보여주는 것은 선의는 언제든지 악의로 전환될 수 있음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능케 한 것은 '판타지 세계' 덕분이다. 마히토는 처음에는 내성적이고, 나츠코에 대한 불만과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소년이었지만 모험을 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그것은 엉망진창인 세계라고 할지라도 이 힘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세속적 각성이다. 이전 세대였던 할아버지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판타지적인 세계관이겠지만, 이를 통해 하야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훨씬 또렷해진다. 자신은 그렇게 살아왔고, 이 시대에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나 홀로 있는 전 세계의 오타쿠들에게 말이다. 뛰어난 지성을 지녔을지 몰라도 큰할아버지의 이미지 대부분은 홀로 있는 모습이다.

마히토의 이름은 한자로 '眞人(진인)'이다. 한 마디로 '참된 인간'이다. '어떻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이 작품의 제목과 함께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전 세대의 질서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세우라는 교훈적인 결론이 담긴 셈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야오가 살아온 세계와 연결된다. 시대적 배경이나 마히토의 모습에 하야오의 가족사가 서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 Studio Ghibli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널리 알려졌다시피 영화의 원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일본의 교과서에도 실린 작품이다. 하야오의 작품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다. 하야오는 이 책을 어머니에게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작품 속에서도 주인공이 어머니가 남긴 유품 중에 이 책을 직접 발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책에는 마히토에게 남기는 엄마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그런데 등장하는 날짜가 쇼와 12년 가을이다. 즉, 1937년 가을이다. 이 시기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지만, 그에 대한 전조라고 할 수 있는 중일전쟁이 시작되였던 해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은 아시아의 패권 국가가 되기 위해 일본이 벌였던 두 개의 전쟁이고, 모두 1945년이 되어서야 종결이 된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미래의 아들에게 걱정과 교훈을 주기 위해 이 책을 남긴다. 그것은 영화 속의 중요한 순간이 되기도 한다. 책을 발견하고 읽어나가던 마히토는 나츠코가 숲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는데, 책을 다 읽은 후 나츠코를 찾는 사람들 때문에 그녀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전까지 나츠코를 병문안 갔어도 형식적으로만 대했던 마히토이지만, 어머니가 남긴 책을 읽고 난 후 적극성을 보인다. 아주 설득력 있게 묘사되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작품의 제목이자 책의 등장은 "어머니=유품=나츠코 실종=모험의 시작"으로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책의 제목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갖게 된 마히토가 모험을 하면서 그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미래의 마히토에게 엄마가 보낸 것이기에 히미가 주는 내일의 잼처럼 소년을 변화시키고 각성시키는 기폭제가 된다.

마히토가 나츠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변 인물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저택에서 집안일을 하는 7명의 노파 중 하나인 키리코는 마히토가 입구를 발견하고 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도련님은 나츠코가 없어졌으면 했잖아요. 근데 왜 거기에 가는 거에요?"라고 반문한다. 그것은 어머니의 유품, 즉 책을 읽으며 깨달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답게 마히토에게도 이 책은 현실적인 메타포가 된다. 그 결과 그녀를 찾아나서야 한다는 변화의 강박이 마히토의 모험을 추동하는 연료가 된다.

 

ⓒ Studio Ghibli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주 친절하게 마히토의 모험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몇 가지 영향을 받은 작품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판타지의 구조 내에서 인상에 남은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돌에 관하여. 13개의 돌은 이미 많은 이들이 언급하고 있다. 큰할아버지가 던져준 13개의 돌이 하야오가 여태껏 직접 각본과 연출한 작품의 편수라고 하는 밈이 돌아다니는데, 그 말에 너무 현혹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인물 간의 대화에 등장하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처럼 세상 그 자체는 패러독스(두 개의 방향이 충돌한다는 뜻, 역설로 번역된다)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선택이든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크레타 사람인 에피메니데스가 했다고 전해지는 거짓말쟁이 역설은 "모든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두고 확정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크레테 사람이 이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크레타 사람이 한 말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어떠한 전제를 놓고도 확정할 수가 없다. 이처럼 두 방향이 모두 충돌하는 것은 'PARA-DOXA', 패러독스 즉 역설이라고 부른다. para는 두 가지 방향을 가리키고, doxa는 견해를 가리킨다. 참과 거짓의 두 가지 견해가 하나 속에 들어 있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점이고, 그 선택에 따라 친구를 만들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제목이자 본질적인 질문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문제를 해결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삶의 방향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는 악의 없는 돌도 존재하지만, 마히토가 자신의 머리를 찍었던 악의가 있는 돌도 세상에는 널려있다. 세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악의 없는 돌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한때 악의를 저질렀을지라도 이를 깨달은 자가 세워갈 수 있는 세상이 있다.

잉꼬 대왕의 돌의 파괴는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의 작품 중 하나인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떠올리게도 한다. 하얀 마녀는 돌탁자 위에 아슬란을 묶고 살해한다. 루시와 수잔은 밤새 곁을 지키다가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서자 돌탁자가 깨어지고, 아슬란의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잠시 후 부활한 아슬란이 나타난다. 이유는 원초적인 계약 때문인데, 결백한 자가 배신자 대신 제물이 되면 돌탁자는 영원히 깨지고, 죽음의 약속도 무효화된다. 에드먼드를 대신해 죽겠다는 아슬란의 약속은 억울한 희생자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원초적 약속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이 설명이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하야오의 작품에서도 판타지의 유명한 판례가 활용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잉꼬 대왕은 산실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를 어겼다며 분노를 표출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후계자 마히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금기인 셈이다. 결국, 탑 속의 세계는 무너지고 마히토의 나츠코는 현실로 부활하며, 새로운 세계의 미래가 펼쳐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아일랜드의 작가 존 코널리의 『잃어버린 것들의 책』으로부터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자료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므로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루이스도 아일랜드 사람이니 많은 부분에 있어 아일랜드 판타지 작가들의 상상력이 이번 작품에 토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소스에서 끌어왔는가 하는데 있는데 보다는 기존에 만들어 온 자신의 세계를 인용하면서도, 이번 작품을 통해 달라진 결들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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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오의 역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등장하는 친숙한 설정들은 마히토의 화살을 맞고 부리에 구멍이 난 왜가리가 자신의 속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것은 하야오의 작품에 자주 쓰이는 본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가까이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설정되어 있는 진짜 이름과의 관계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변신 마법을 쓴 하울이 본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떠올려도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큰 영향을 받은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를 알고 있다면, 본질과 외양의 차이를 통해 판타지를 구현하는 하야오의 감각들을 재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7명의 할머니 중 하나였지만, 이세계에서 젊은 어부로 등장하는 키리코일 것이다. 마히토는 단박에 그녀의 이름을 알아차린다. 그 모습은 『어스시의 마법사』의 진짜 이름을 통해 마력을 발휘하는 게드 혹은 새매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친숙함 속에서 확연하게 달라진 것은 소년 마히토의 모습이다. 그는 <미래소년 코난>의 '코난'이나 <모모노케 히메>의 '아시타카' 같은 인물이 아니다. 한때 지브리 스튜디오에 몸을 담고 있었던 안노 히데야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 속의 '이카리 신지'와 더 닮아 있다. 안노 히데야키는 신지가 각성하게 되는 과정을 끝까지 미뤄두는데 반해 마히토는 어머니가 남긴 책을 읽고,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 모험을 실천한다. 그것의 절정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어머니를, 젊은 소녀 히미로 만나면서 불타오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변화하라, 모험하라, 구해내라, 선택하라"는 듯 보인다.

히미에 의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낸 마히토가 현실로 귀환하는 장면이 있다. 밀려든 잉꼬들 때문에 현실로 잠시 귀환한 마히토는 아버지와 대면한다. 하지만, 아직 나츠코를 구해내지 못했기에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이세계로 귀환한다. 이 순간이 좀 더 갈등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분명이 있지만 어느새 마히토는 달라진 소년이 되어, 자신의 몫을 실천하고, 친구들과 함께 여정의 끝으로 향해간다. 여전히 두려움이 있지만,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왜가리 남자는 현실로 귀환한 마히토에게 아직도 이세계의 기억이 남아있나면서 서서히 잊혀질거라고 말해주었지만, 그 세계를 잊는다고 해도 마히토의 변화는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세계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친구들이,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받아들인 소년이(히미는 헤어지면서 마히토의 엄마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변화를 감내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그대로이지만 소년은 성장하였고, 세계를 보는 감각은 달라졌으며, 그것은 곧 소년이 만들어 갈 세계의 돌들로 쌓여질 것이다. 13개의 돌일지, 14개의 돌일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악의의 돌이든, 선의의 돌이든 하나씩 쌓아올리면서 균형을 잡게 되는 순간 이세계는 이전과는 다른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야오의 새로운 작품은 모험을 즐기는 소년이 아니라 모험을 이제 막 선택하게 된 소년을 통해 조금 더 현실 속으로 발을 들이민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여기, 지금임을 강조한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The Boy and the Heron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Miyazaki Hayao

 

출연(목소리)
산토키 소마
Soma Santoki
스다 마사키Masaki Suda
시바사키 코우Shibasaki Kou
아이묭Aimyon
기무라 요시노Kimura Yoshino
기무라 타쿠야Kimura Takuya

 

제작 스튜디오 지브리
수입|배급 대원미디어|메가박스중앙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23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3.10.25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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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언 2023-11-02 16:30:16
혹시 이 작품 강연은 계획이 있으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