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모호성이 건드는 성취와 무의식
'너와 나'의 모호성이 건드는 성취와 무의식
  • 변해빈
  • 승인 2023.10.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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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숙한 퀴어 여고생의 세계’를 경유해 사회적 재난과 죽음을 말할 때"

평단과 대중의 고른 지지를 받는 <너와 나>를 보며 영화의 성취와 함께 영화의 무의식을 나란히 떠올렸다. 이 영화가 전한 의미 있는 메시지에 공감하는 한편, 성장영화와 재난영화의 성격을 동시적으로 드러내면서 이 둘을 연관 지으려 할 때, 각 형식적 요건 안에서 쓰여 온 전형성이 있는 그대로 혹은 무의식에 더 가까운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느낌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일단 <너와 나>는 앞서 말한 장르적 성격에서부터 주인공인 '세미'(박혜수)와 '하은'(김시은), 삶과 죽음, 현실과 몽상, 세대의 정서와 재난의 정서까지 두 개의 축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장이다. 이는 영화가 저쪽의 현상을 '경유'하거나 이쪽의 입장에 그것을 '대입'하는 방식으로 세계의 문제를 응시하는 일련의 방법론으로 연결된다. 예컨대 반려견의 죽음을 덤덤히 대하던 하은은 길 잃은 동네 개와 그 주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그 모습을 본 세미는 타인을 이해하는 폭을 확장하고 성장해 간다.

얼마간 개인의 영역에서 작동하던 이 방법론은 세월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관통하기에 이른다. <너와 나>는 세월호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안산, 제주도를 장면에 담아내지만, 동시에 이를 관객이 곧장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가림막 또한 절묘하게 배치해 둔다. 죽음의 형상을 바다가 아닌 들판에서 마주하게 한다든지, 심지어 죽은 인물의 이미지가 꿈인지 실재인지 그 구분을 무척 희미하게 설정한 데서 관객이 죽음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하지 않는다. 버스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속보에 귀 기울이도록 유도하지만 '수색 작업'에서 비롯되는 어떤 재난적 사건을 연상시키되 '세월호' 같은 핵심이 되는 부분은 적절히 감추어 둔 채다. '너와 나'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세미와 하은 중 죽음과 애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구분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 영화임을 자체적으로 피력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단지 세월호 사건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는 사유 안에서 보장되는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이 구분 없음과 이중적 가능성이 매우 윤리적인 방식이며, 지금의 우리가 해야만 하는 애도의 방안을 (강요 아닌) 권유하고 있다고 느끼기 쉽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지금의 관객이 관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공동의 재난을 재현하는 방식, 사회적 죽음과 개인의 성장을 연결 지음으로써 외려 죽음의 보편성이 애도의 개인성을 지워버리는 구조에 대해 '설명이 필요 없음'의 태도를 무의식중에 취하고 있는 것이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회적 재난 이후의 애도의 범주가 어째서 개인의 영역 그 이상을 배제하고 있는지, 자기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 미숙한 청소년을 경유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보다 그것이 하필 퀴어 여고생의 정치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

'미성숙한 퀴어 여고생들의 세계'로 요약되는 <너와 나>는 여성과 아이, 퀴어를 비롯한 소수자성이 중첩되면 중첩될수록 존재는 죽음의 주체로 도드라진다. 여기서 이 죽음이 사회적 재난 혹은 정치적·사회적 갈등에 의한 것일수록 죽음을 재현하는 미디어의 정치적 영향력 안에서 강조 되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우연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말해질 수 없다.

 

ⓒ 그린나래미디어

<너와 나>는 기존의 재현 방식과는 다른 결의 영화다. 먼저, 영화의 성취에 해당할 터 의미적으로 다가오는 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의 시간적 배열과 틈입을 선형적으로 단순화할 수 없지만, 인물들이 수학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날의 이야기로 정리된다.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영화는 하은이 죽는 내용의 불길한 꿈에서 깨어난 세미가 다리를 다친 하은에게 수학여행을 함께 갈 것을 설득하며,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침실에 드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수학여행 하루 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던 당일, 전원 구조 오보 전후에 해당하는 저마다의 일과를 선명히 기억한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러나 아마 하루 전날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현실의 원리 안에서 사회적 재난, 죽음과 상실의 고통은 우리가 그것 이전을 기억하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여기서 <너와 나>는 영화의 시간개념으로 치면 거의 전 시간을 할애하여 우리의 사회를 관통했던 재난 당일과 그 이후의 슬픔에 기운 시선을 '하루 전날'로 이동시킨다. 대부분의 장면은 여고생들의 일상적 대화, 그 안에서 드러나는 보편의 관계와 감정으로 채워진다. 재난적 트라우마를 주는 것이 아닌 '어느 평범한 하루'와 어울릴 법한 풍경이며, 그 속의 크고 작은 일들을 '기억할 무언가'로 새겨내는 힘으로 전환시킨다.

영화는 누군가 죽던 세미의 흉몽이 극 후반부의 태몽 이야기로 이어지고 아이가 태어나던 당시, 눈 내리던 고요한 풍경과 분위기를 더듬는 부모님의 기억을 따라, 누군가 죽었다는 감각의 슬픔은 누군가 살아갈 기쁨으로 이행한다. 내용물이 지워진 채 하은이 죽는 광경의 불안감만이 초과하던 세미의 꿈은 서서히 기억의 단위로 변모한다. 세미는 꿈을 '기억해낸다'. 그 기억 안에서 하은의 얼굴이 우리 모두와 닮아있고, 끝끝내 나의 깨어남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조현철 감독이 어떠한 사건을 정형화된 방식이 아닌 다른 질감의 정서로 교환하고 의미화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이다. 세미의 얼굴을 가능한 최대로 미루어 화면 안에 등장시키는 오프닝은 선언적이다. 운동장에서 교실 내부로 이동한 카메라는 공간 구석 어디쯤에서 고정된다. 화면 안에 잠시간 머물던 아이들이 완전히 프레임 아웃되면, 조현철은 여러 미학적 장치를 통해 그 육안상의 무인 프레임이 '머물렀음'의 과거와 '존재함'의 잠재된 기운을 모두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으로 시선을 이동할 수밖에 없고, 거울에 반사된 세미를 비로소 발견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 연장선에서 조현철은 누군가 '먹다가 남긴' 사과와 물컵을 누군가 '먹을 예정'인 것으로 속성을 전환시키고 이어 붙이는 시도를 반복해 보여준다. 두 사건 사이의 지연된 시간성은 상실과 애도, 그리고 삶으로 이어지는 <너와 나>의 주제 의식을 끈질기게 탐구하는 태도와 연관된다. 반복하다 보면, 아직은 벌어지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응답해 줄 것 같은 앵무새의 은총처럼, 영화는 느리지만 차분하게 인물들의 세계를 펼쳐낸다.

 

ⓒ 그린나래미디어

이렇듯 <너와 나>는 '살아남기' 혹은 생명이 위계화/권력화되던 애도의 정치를 붕괴하였으며 타인의 죽음을 구경거리로 재현하지 않는다. 사랑을 통해 고통을 구원받는다. 이 사랑이 궁극적으로는 소중한 것을 가진 이들 모두에게 해당함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 결말로 향하기 위한 출발점엔 전술했듯 '미성숙한 퀴어 여고생들의 세계'가 버티고 있다. 조현철 감독의 몇몇 인터뷰를 보니, 입시학원이나 브이로그 형식의 영상물을 통해 실제 여고생들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했다고 전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사실적으로 그려낸 여고생들의 세계는 아주 사소하고도 깊은 질투와 서운함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곳이다. 질투와 서운함은 상대를 잃어버릴 것 같은 느낌,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한다는 의미에서 죽음으로 연결된다. 이를 간접화법으로 전하는 요소로 여고생들의 세계는 적절해 보인다. 그룹을 형성한 이들이 그 안에서 짝을 이루거나 삼각관계를 형성해도 ‘자연스러운’ 무언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빙수 가게에서 짧게 다투는 두 친구의 대화라든지, 하은과 친밀한 또 다른 친구 다애(오우리)가 세미와 묘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다든지. 이는 세미와 하은의 퀴어성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여고생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큰 틀로 적용된다. 다른 축에서 말하면, 동일한 상황 설정 안에서 홀수 구성원의 남고생이 삼각구도를 형성한다거나 그들 사이 누군가 질투와 서운함을 느끼는 이미지는 적어도 한국 사회 내에선 '익숙한' 것이 아니다. 한국 남성들에게 적용되는 사회적인 규범/규율의 문제와도 연관될 것인데, 몇몇 관객들이 <파수꾼>(2010)에서 퀴어적 징후를 감지하던 것처럼, 생물학적 성별이 달라지는 순간 관계를 이루는 그 감정선은 퀴어함을 도드라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조현철은 세미와 하은의 퀴어성을 강조할 생각이 없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 자체로 전해지기 위해선 여고생의 세계가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따라붙는다는 점을 무의식중에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로맨틱하지만 그만큼 안전하고 모호하며 매력적인 이미지로서의 소녀들의 사랑. 그 안전함, 모호성, 매력. 영화에 반복되는 대사 "사랑해"가 모든 관계에 포괄적으로 적용가능하게끔 작동하는 건 세미와 하은 모두가 '여고생'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 그린나래미디어

문제는 <너와 나>의 퀴어성은 작중 상황 안에서 '자연스럽게' 위치하지 않는다. 남성 캐릭터들이 극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고괴담>(1998), <써니>(2011), <한공주>(2013), <아가씨>(2016)와 같은 한국 영화에서 여성들의 퀴어함은 위험하고 폭력적인 남성 캐릭터와의 대립 구조 안에서 (성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진지한 태도가 없더라도) 일종의 '안전한' 사랑의 형태로서 인식되는 측면이 있다. 우리 사회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던 상황의 안전함, 바깥 세계의 안전함. <너와 나>는 그와 다를까.

영화의 남고생들은 세미의 '귀여운' 거짓말과 달리 담을 넘어 구역을 벗어난다. 그들은 남의 자전거를 훔치는 비행을 저지르고 그중 한 명은 (관계적 구도가 경직되어 있진 않지만) 하은의 다리를 다치게 한 가해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또래 학생이란 점에서 어느 정도 용인되는 지점이 있다. 문제는 하은의 스토커이다. 영화는 그가 정말 스토커인지 단지 유별난 사람인지 모호하게 흩트린다. 범죄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짊어진 존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영화는 세미의 감정으로 관심을 돌려버린다. 세미는 스토커를 하은의 애인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에서 이상한 안도감과 더불어 알 수 없는 질투심을 느낀다(결국 동성애와 이성애의 어떤 라이벌 구도). 무엇보다 이 장면의 핵심은 스토커 역으로 출연한 배우 박정민의 존재감이나 그의 괴상한 연기 스타일에 반응하는 관객들의 웃음이어선 안 되었다. 첫째로 스토커는 내가 모르던 사이 나를 엄습해오는 공포, 혹은 정확한 언어와 살결로 감지되어야 하는 폭력이 뭉뚱그려질 때의 고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문제와 연관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위험한' 남성 존재와 여고생들 사이의 1:多 구도 역시 중요하다. 한 명의 남성과 맞서기 위해서 이 여고생들은 다 같이 뭉쳐야'만' 한다. 이것은 <너와 나>가 개인의 세계와 감정, 개인이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중시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장면은 혼자서는 불가능하지만 연대했을 때 가능한 현실의 상황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다.

하지만 <너와 나>는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도 좀 당황스러운 방향으로 장면을 마무리한다. 아이들이 하은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대화의 주제를 돌려버리는데, 이 상황을 넓게 보면 근원적인 문제와는 은근하게 거리를 두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위험과 죽음의 상징을 입은 스토커가 "그래서 정말 스토커가 맞아?" 하고 그대로 넘겨버릴 법한, 혹은 넘겨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미성숙한 나이대의 세계, 여고생들의 질투와 서운함의 문제. 그것들이 그 문제를 관대하게 넘겨버리도록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개인의 규모에 집중한 <너와 나>의 선택이 권력의 개입으로 인해 훼손되어 온 애도 작업과 개인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작업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세미와 하은은 어른일 수도 있었지만, 하필 학생이다. 더욱이 그들은 남고생일 수 있었지만, 하필 여고생이다. 그들은 이성애/자매애의 관계일 수도 있었지만 하필 동성애이다. 이것이 전부 우연일까. '하필'이란 표현이 붙는 현상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을 쉽게 기용하면 전형성을 이용하거나 생산하는 셈이 된다. 앞서 필자는 영화 <발레리나>(2022)에 관한 글(「'발레리나' 욕망 없는 도구」)에서 주인공이 '하필' 여성으로 설정된 이유로 생물학적 여성성이 특정 범죄 상황과 연관해 조건 없는 희생자이자 복수자가 되기에 수월하기 때문으로 언급했다. 퀴어성을 차치하더라도 극의 중심을 이끄는 세미는 그 주변의 또래 중에서도 가장 미성숙한 캐릭터로 설정된다. 다애는 이해하는 하은의 방어기제를 세미는 뒤늦게 알아차린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세미는 하은에 비해 부모의 넉넉한 보살핌 아래서 어리광도 부리고,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기보단 자기감정이 우선인 쪽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음을 던져보자. <너와 나>는 왜 '미성숙한 퀴어 여고생들의 세계'를 요청했을까. 이 영화는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되 그것을 직면하진 않는다. 각종 몽환성을 자극하는 상징적 이미지와 미학적 요소까지 가미되면서, 현실적인 죽음의 색채를 짙게 나타내는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떠올려야만 한다. 그것은 개인이 손 쓸 수 없는 거대하고 폭력적인 규모의 재난, 죽음이다. 실재의 사건을 감춤과 동시에 실재와 가까운 감정과 기억을 건드려야 한다면, 재현 가능한 개인의 규모 중 가장 미성숙하고 어리며, 폭력적 질서와 맞설 때 더 큰 감응을 안길 수 있는, 보다 취약한 존재를 대척점에 세우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것이 <너와 나>에선 퀴어 여고생이다. 이들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존재보다 쉽게 아련해지고 더 너무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면서 정치적인 맥락에선 벗어나도 되는 무언가로 미디어 안에서 익숙하게 재현되어 왔기 때문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너와 나
The Dream Songs
감독
조현철

 

출연
박혜수
김시은
오우리

 

제작 필름영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8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10.25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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