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카메라'는 돌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
[Critique] '카메라'는 돌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
  • 이우빈
  • 승인 2023.10.25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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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하라 유이의 모든 밤을, 그리고 '사람'을 기억하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부산국제영화제

"카메라는 누군가의 시선을 대신하지 못한다. 카메라는 촬영이란 '행위'를 할 뿐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남긴 하마구치 류스케의 말에 따라 카메라의 한계를 생각해 본다. 위 어구는 두 마디로 나눠 있을 뿐 아니다. 두 개의 주제를 담는다. 시선과 행위라는, 어쩌면 영화 이미지의 전부를 내포한 두 가지의 조건이 두 마디에 담겨 있다. 살짝 바꿔 말하면 카메라는 카메라만의 시선만 갖고 있다. 또 카메라의 행위는 촬영뿐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는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감독 본인의 말을 입증한다. 직앙각(extreme low angle)에서 카메라가 긴 시간 동안 전진 트래킹한다. 프레임엔 나무와 하늘이 고고하게 흐른다. 혹시 아핏차퐁의 <메콩 호텔>(2012)의 마지막처럼 이 정경의 지속이 생각보다 길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러던 찰나 조금의 변화가 인다. 화면에 파란 옷을 입은 한 여자아이가 등장하고, 카메라는 걷고 있는 그를 따른다. 그런데 여자아이가 돌연 프레임 위로 솟아오르며 카메라를 벗어난다. 하지만 카메라는 함께 틸트업하거나 상승 트래킹하여 따라가지 못한다. 대신 컷이 롱숏으로 전환되고, 여자아이가 나무 밑동 위에 스스로 올라갔음이 밝혀진다. 아이는 부지불식 (몸으로) 상승했고, 카메라는 그러질 못했다. 달리 말해, 아이는 촬영 외의 행위에 성공했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러지 못했다.

다시 말해, 카메라의 역량이 사람을 이기지 못했다. 단순히 그것이 도구여서는 아니다. 사람도 영화라는 전체에서 피사체란 도구에 가깝다. 영화가 전체라면 그곳에서 카메라와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지닌다. 연출자의 성향은 그 두 개의 역할 중 무엇에 더 집중할 것인지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분명 후자를 택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는 주인 없는 시선 숏이 자주 등장한다. 카메라는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여 인간의 시선을 대리하지 않는 화면을 일군다. 이것은 카메라의 독립성을 강조한다기보단 그것과 사람 간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잠시간의 반항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이미 프레임에 공공연히 자리 잡아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 사람들은 카메라를 뒤로 한 채 또 다른 세계로 도망친다. 그렇기에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깎고 깎으면 늘 '사람'이 남는다. 그들 사이의 대화와 움직임, 그것이 만든 시간의 총량이 뇌리에 남는다.

카메라와 사람 사이의 저울질, 단순히 한 쪽으로 손을 들긴 힘들다. 이건 성향의 문제다. 다만, 카메라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의 분명한 가치를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기요하라 유이'의 <모든 밤을 기억하다>(2022)에서도 느낀다.

 

영화 <모든 밤을 기억하다> ⓒ 부산국제영화제

사람은 돌을 든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늘 많은 것을 내포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내포하지 않은 <모든 밤을 기억하다>의 첫 시퀀스는 거의 쓸모 없다. 이곳에서 뻗어 나가는 심상이 뚜렷하지 않다면, 뒤의 2시간은 지리멸렬하게 산개되기 마련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처음처럼 <모든 밤을 기억하다>의 오프닝 시퀀스는 카메라의 한계를 절감하게 만든다.

수평으로 차가 움직인다. 기차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사람은 아래에서 위로 걸어간다. 가지각색의 움직임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움직임들의 무(無)목적성이다. 탈것 혹은 인간들의 목적지나 방향성은 딱히 고려 대상이 아니다. 차든, 기차든, 사람이든 프레임의 상하좌우를 자유로이 통과하며 움직임의 시간을 쌓는다. 관객은 화면에 드러난 대로의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모든 밤을 기억하다>를 본 이들이 무언가의 '움직임'에 인상 깊어하는 일은 우연 아니다. 기요하라 유이는 무척 의도적으로 그 움직임의 다양성을 긴 시간 동안 그린다. 하지만 그 많은 비-생명체와 생명체의 움직임 중에서 카메라만은 움직이지 않고 촬영하며 그것들을 담기만 한다. 그러다가 이윽고, 뚜렷한 목적과 방향성을 지닌 커다란 움직임이 포착된다. 한 노파가 집 대문 앞에서 빗자루질한다. 그러더니 허리를 굽혀 문 앞에 놓인 돌을 손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노파의 빗자루질 후에 찾아오는 장면부터 언급해야겠다. 무언가 답답한 로우와 아이 레벨 앵글의 중간쯤, 공원 나무 밑에서 악기를 다루며 소소히 놀고 있는 대여섯의 청년이 미디엄숏에서 풀숏의 모호한 사이즈에 잡힌다. 안정적이라기보단 이상하게 어색하다. 그리고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유롭게 패닝과 틸트로 움직이며 청년들을 번갈아 보여준다. 일상의 대화가 오간다. 이내 청년 한두 명이 자리를 뜨고 먼 후경의 숲 너머로 떠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마지막쯤과 같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들을 직접 쫓지 못하고 다시 이상하고 불규칙적인 패닝, 틸트를 계속하며 남아있는 인물들을 가늠할 뿐이다. 그러다가 돌연 인물들을 아예 벗어나 좌패닝한다. 패닝 중의 후경엔 벤치에 누워서 기묘한 체조 중인 남자가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에게 멈추거나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다시 왼쪽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사람 없는 숲의 정경만이 보일 때 카메라는 움직임을 멈추고, 결국 오프닝 타이틀이 오른다.

요컨대 기요하라 유이의 카메라는 사람을 거부했다. 혹은 거부하기 이전에 거부당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모두, 혹은 끝까지 쫓을 수도 없고 사람은 자율적으로 카메라를 떠나간다. 후경의 인간마저 카메라의 시선을 무시하고, 카메라 역시 그의 무시를 하릴없이 받아들인다. 결국 카메라가 택한 것은 자연, 숲이다. 근본적으로 카메라란 세계에 일어난 자연적 현상을 기록하는 장치다. 그러니 인간보다 자연을 택한 카메라의 취향은 응당 당연하겠다.

 

영화 <모든 밤을 기억하다> ⓒ 부산국제영화제

다시, 빗자루질하다가 돌을 드는 노파의 움직임으로 돌아가고 싶다. 여기서도 카메라는 겸손하게 혹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바라만 본다. 왠지 모르게 수동적인 카메라의 애상이 느껴지는 동시에 인간의 활동성에 대한 감탄이 일어난다. 프레임 속에 일어났던 수많은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들을 가만히 담던 카메라. 그중에서 사람만이 유일하게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다. 화면 속 가만히 있는 다른 피사체, 즉 돌의 상승을 성공시킨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하나가 나무 밑동 위에 쉬이 올라갔던 일과 다름없다. 홀로 피사체의 상승에 성공한 것이다. 반면에 카메라가 아무리 응시하더라도 돌은 움직이지 않는다. 설령 돌들이 말할 때까지 그것을 호명하더라도 그것들은 응답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분명히 느껴진다. 기요하라 유이 또한 카메라가 아닌 '사람'을 택했다는 사실을.

사실은 밝혀졌다. 그리고 그 현상에 더 할 만한 해석이 노파의 바로 다음 행동에서 등장한다. 돌을 들어 올리고 나서, 노파는 풀을 뜯는다. 잡초인 것 같다. 이 역시 지면의 풀을 뜯어 어딘가로 들어 올린다는 의미에선 예의 피사체-상승과 유사한 행동이다. 그런데 단지 들어 올린단 것과 뜯어 없앤다는 행위 사이엔 커다란 질적 차이가 있다. 돌의 위치를 기껏해야 여기서 저기로 옮겨 봤자 자연의 풍경, 자연의 법칙엔 큰 의미가 없다. 들어 올린다는 것이 중력이라는 자연법칙에 반하는 일이긴 하나 이것은 단순한 조정에 가깝다. 그 이상의 파격을 지니진 않는다. 그러나 풀을 뜯는단 행동은 분명 자연의 생을 거역하는 일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을 무척 손쉽게 죽이기도 한다. 이 역시 카메라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인다는 것, 생에 반한다는 것은 곧 자연 섭리에 저항하는 일과도 같다. 이를 바꿔 말하면, 자연주의적 기록 매체인 카메라에 인간이 반기를 드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상상해 보고 싶다. 카메라가 아니라 사람을 믿는 감독들은 카메라를 포함해 모든 자연적인 것들에 저항하고 싶어 하는 로맨틱한 반골들이 아닐까.

장 르누아르는 존 포드의 영화를 보고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단 뜻이다. 그것은 물론 '사람의 움직임'이다.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았을 때도 존 포드의 프레임 속엔 인간들의 움직임이 가득하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의 풀숏에서 수많은 사람이 너나 할 것 없이 추는 춤, 거의 모든 영화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주먹질 싸움, 언제든 술 마시는 손과 총을 꺼내는 손, 그리고 <말 없는 사나이>(1952)에서 문 바깥의 풍랑에 저항하며 서로를 끌어안는 존 웨인과 모린 오하라의 시선 맞춤까지···. 카메라는 퉁명스럽고 화면엔 사람이 움직이며 그들은 서로를 본다. 그곳에서 정서가 발현된다.

기요하라 유이는 존 포드의 계를 잇는다. 외견상 가끔 느리고 시니컬하되 인간의 따스함을 제대로 다룰 줄 안다. 인간적이고 로맨틱한 반골이다. 첫 장편이자 전작인 <우리 집>(2017)에서도 그랬다. <우리 집>은 미지의 정념과 초현실적 구조로 둘러싸인 형식주의적 작품이었다. 그러나 주인공 네 여인에게 오가는 정과 활기만큼은 풍만한 부피감을 잃지 않았었다. 어떤 이야기든, 어떤 인물이든, 어떤 움직임이든 기요하라 유이의 저항적 따스함만은 한결같다.

 

ⓒ 영화 <우리 집>(2017)

누가 밤을 기억하나

<모든 밤을 기억하다>의 제목엔 주어가 빠져 있다. 영어 제목 역시 <Remembering every nights>다. 그렇다면 이 기억의 주체는 누구인가. 하나의 명제를 알기 위해선 명제의 부분을 뒤집어 보는 일이 제법 도움이 된다. 그렇게 두 개의 명제를 만들어 본다. 먼저 기억의 객체는 누구인가, 그리고 망각의 주체는 누구인가. 후자엔 명확히 답할 수 있다. 망각을 주조하는 이는 시간이고 자연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에서 기억을 붙잡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에의 답변은 기요하라 유이가 상기 오프닝 시퀀스에서 밝힌 주장과 같은 궤에 있다. 당연히 '사람'이다.

<모든 밤을 기억하다>에는 대략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름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그 정도로 영화는 인물들의 파편적인 서사를 취한다. 이들의 아주 소소한 일상들은 구구절절 설명하기조차 힘들다. 먼저 20대 초반 여성 나츠가 있다. 주인공 격이다. 이외 중년 여성 치즈는 새 직업을 찾기 위해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30대 초반 여성 사나에는 가스 검침원인 것 같은데,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돕기도 한다. 치즈와 사나에, 나츠는 같은 마을에서 움직이며 종종 같은 동선을 밟는다. 공원에서 춤추는 나츠를 치즈가 따라 하기도 하고, 노인을 돕는 사나에의 맞은편으로 자전거 탄 나츠가 휙 지나가기도 한다. 움직임들이 중첩되고, 그 중첩을 주재하는 것은 물론 사람이다. 심지어 치즈는 나무 위에 올라타 아이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려 한다. 여기서도 당연히 카메라는 멀찍이 떨어진 롱숏에서 그 상승의 움직임을 바라볼 뿐이다.

위 움직임들은 대개 낮에 일어난다. 영화의 90%가량은 낮의 이야기다. 이 낮에 쌓이는 움직임과 움직임, 그것들의 우연한 마주침으로 점철된 낮의 끝 무렵··· 기요하라 유이는 저의를 드러낸다. 알고 보니 나츠는 절친한 친구(혹은 연인)였던 남자 A(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를 잃은 상태다. 그는 죽은 A의 어머니를 찾아가고, A가 마지막으로 남긴 필름을 얻어 사진관에 맡긴다. 그러나 사진관 직원 남자 B는 너무 훼손된 필름이어서 복원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다소 걱정에 찬 나츠는 떠나고, 이내 사나에가 사진관에 찾아와 (아마 짝사랑 중인) B를 만난다. 암실에서 둘은 이야기 나누고, B는 열심히 디지털 메모리와 필름들을 복원한다. 이윽고 나츠의 주문인 A의 필름이나 영화의 내용과는 아예 무관한 일련의 홈비디오가 화면 가득 재생된다. 아이들의 생일 파티, 가족들의 나들이, 아무튼 행복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기억이 이어진다. 그리고 중요한 것, 영상 귀퉁이에 기록된 촬영 당시의 시각들은 대개 PM이다. 즉 B와 사나에는 밤을 기억하려 하는 주체이고, 이들은 '인간'이다.

 

영화 <모든 밤을 기억하다> ⓒ 부산국제영화제

이강현의 <보라>(2010)를 떠올린다. 망가진 하드디스크를 고치러 온 사람들, 병을 고치는 의사처럼 그것들의 증상을 묻고 치료법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두운 방에서 그들은 하드디스크의 기억을 우주의 원리로까지 사유 확장한다. 그 원리, 기억의 조각을 고치고 붙잡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며 손이다. B의 행위도 그렇다. 홈비디오(카메라)는 그저 촬영하고 기록했다. 이는 자연의 산물이자 자연적 물질로 남는다. 그리고 디지털 데이터 매체와 필름이 바래고 못 쓰게 되면, 즉 자연의 시간이 그들을 괴롭히면 망각이 시작된다. 인간의 뇌도 다를 것 없다. 늙어가며 우린 많은 것을 잊는다. 그렇기에 (영화 만드는) 인간은 자연과 인위의 모호한 결합체인 카메라를 통해 그 망각에 꾸준히 저항한다. 이에 관해 독일 작가 W. G. 제발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억들은 몇 달, 몇 년 동안 우리 마음속에서 잠자면서 소리없이 점점 더 자라나다가, 결국 어떤 사소한 일을 계기로 되살아나 기묘한 방식으로 삶을 향한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그 때문에 나는 얼마나 자주 나의 기억들과 이 기억들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굴욕적이고, 결국은 저주할 만한 일로 느끼곤 했던가. 하지만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 우리는 가장 단순한 생각조차 정리하지 못할 것이고, 풍부한 감정을 지닌 심장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존재는 무의미한 순간들의 끝없는 연쇄에 불과할 것이고, 과거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비참한가. 온갖 잘못된 상상들로 가득하고, 거의 우리의 기억이 내미는 환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만큼 무의미하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격리의 감정은 점점 더 끔찍해진다." ―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그러니, 카메라의 눈이 때때로 인간의 그것보다 월등할지라도 결국 모든 밤을 기억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A의 밤을 기억하려 하는 것도 나츠다. 나츠는 복원에 성공한 A의 마지막 사진을 B에게 받는다. 그런데 웬걸 그 사진엔 A의 모습이 없고, 외려 나츠와 친구의 모습만 담겨 있다. 사실 A는 어느 밤에 불꽃놀이 중이었던 나츠와 다른 친구를 찍었을 뿐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의 시선, 그 시선의 발로만이 기록된 셈이다. 이렇게 나츠의 기억하기가 실패하는 것인지란 아쉬움에 잠길 찰나, 나츠는 사진 속 친구와 함께 다시 불꽃놀이를 한다. 과거 A와 함께했던 행위, 그 움직임을 인간의 몸으로 반복한다. 카메라, 필름, 기록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여 기억이 불가능하진 않다.

나츠는 다시 불꽃놀이를 한다. 카메라의 능력 밖에 있는 자신의 심상을 상승시켜 A를 기억한다. 인간이 밑동에 직접 오르거나 돌을 들어 올리며 중력에 저항하듯, 나츠는 망각이라는 자연의 애상에 저항한다. 기요하라 유이는 이런 인간을 좋아한다. 인간이 자연에 반항하는 것을 좋아하고, 본인의 영화와 카메라를 인간의 반항을 돕기 위해 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지가 베르토프)보단 <카메라맨>(버스터 키튼)에 가까운 이 낭만적이고, 인간 편향적으로 로맨틱한 반골에게 빠지지 않을 길이 없다.

[글 이우빈 영화평론가, 731dnqls@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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