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th BIFF] '본인 출연, 제리' 어떤 범죄예방 캠페인은 영화보다 아름답다
[28th BIFF] '본인 출연, 제리' 어떤 범죄예방 캠페인은 영화보다 아름답다
  • 김경수
  • 승인 2023.10.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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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실화입니까?(What is true story?)"
ⓒ 부산국제영화제

'라우 첸' 감독의 <본인 출연, 제리>(2023)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가운데 가장 눈여겨 볼만한 작품이다. 75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소재마저도 영화적이지 않다. 은퇴한 한 동양인 이민자 남성의 보이스피싱 피해 경험담이라니. 극장에 상영될 영화라기보다는 공익 광고나 라디오의 시청자 사연, <신기한 TV 서프라이즈> 등 실화 재연 방송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다. 심지어 제리가 전달하려는 교훈마저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더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범죄예방 캠페인에 가까운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제리 슈는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뒤 40년 가까이 가족을 부양하느라 뼈 빠지게 일만 한 가장이다. 만사에 긍정적인 그는 사치와 거리가 먼 인물로 번 돈을 쓰지 않고 모아두기만 한다. 모두 그의 아들이 잘 살아가기만을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가 미래를 우선시하는 인물인 한편, 그의 아내는 현재를 우선시한다. 그는 버는 돈을 족족 쓰는 아내의 소비 패턴을 견디지 못해 이혼했고, 세 아들은 제각기 독립해 있다. 제리 슈는 어느 날 난데없이 중국 경찰로부터 온 전화를 받는다. 그가 탈세 혐의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상대가 보이스피싱 사기단이라는 것을 짐작도 못 한 채 중국으로 송환될 수 있다는 말에 겁에 질린다.

이윽고 보이스피싱 사기단은 제리가 청화라는 범죄 조직과 연루되어 있다며, 제리 슈에게 계속 임무를 부여한다. 제리 슈는 겁에 질려서 움직이면서도 본인이 첩보원이라는 사실에 새로운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제리 슈는 보이스피싱 사기단에게 돈을 조금씩 송금하기 시작한다. 제리 슈는 어느 날 보이스피싱 사기단으로부터 거액의 보석금을 달라는 말을 듣고 좌절한다. 그 돈은 아들의 집을 구해다 주려고 모아둔 돈이기 때문이다. 제리는 아내와 공동명의로 된 계좌와 집까지 팔면서 그 돈을 마련해 송금한다. 그 뒤에야 그는 자신이 사기당한 것을 알고 좌절하기에 이르고, 가족은 그가 자살할까 걱정한다.

<본인 출연, 제리>는 선형적인 플롯을 일부러 택하며, 제리 슈가 사기를 당하는 과정을 그대로 따라간다. 사건을 재연하는 출연진도 제리 슈와 그의 가족이고, 그의 가족이 그 당시 제리에게 한 말을 대사로 쓰기까지 한다. 이 영화는 실화를 그대로 재연하되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이 영화를 실화로 볼 것인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볼 것인가 하는 질문은 영화 전반에서 반복된다. 히치콕의 말대로 이 영화도 가장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인생은 아닐까.

 

ⓒ 부산국제영화제
ⓒ 부산국제영화제

<본인 출연, 제리>는 범죄예방 캠페인을 영화적으로 만드는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관객을 설득한다. 소재와 아이디어에만 기댄다는 인상이 다소 있기는 해도, 그 아이디어를 뒷받침하는 인물의 감정적인 동기가 이 영화를 도저히 미워할 수 없게끔 만든다.

영화는 결국 이것이 범죄예방 캠페인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시작한다. 오프닝 타이틀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오프닝이나 엔딩에서 주로 삽입되는 전형적인 문구를 비튼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로 시작하더니 "이 이야기는 실화에 기반한 영화입니다."라든지, "실화를 각색한 영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로부터 영감받은 영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무조건 실화입니다."라는 자막을 삽입한다. 끝에는 기어이 "무엇이 실화입니까?" 질문으로 끝난다. 오프닝 타이틀은 영화 전반의 주제로도 이어진다. 오프닝 타이틀이 끝난 다음에 감독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어쩌면 이 영화도 실화를 기반으로 한 시각화된 보이스피싱이 될 수 있어서다. 물론, 영화는 프로듀서 제리 슈의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를 기반으로 한다. 엔딩 크레딧에서 영화에서 제리 슈가 당한 범죄가 사실이라는 송금 내역과 통화 내역, 보이스피싱 범죄자가 찍으라고 한 사진 등 여러 물증이 첨부되어 있기까지 하다.

<본인 출연, 제리>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제리와 보이스피싱 사기단이 접촉한 뒤부터의 연출이다. 보이스피싱 사기단이 제리를 범죄조직인 청화 일당의 탈세 혐의를 추적하는 스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를 세뇌한 뒤부터 제리의 혼란스러운 내면이 시각화된다. 중국 경찰로 사칭한 보이스피싱 사기단이 제리의 눈앞에 있는 듯한 연출, 제리의 망상 안에서 은행원이 체포되는 연출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 두 상황은 에스피오나지 장르에서나 볼법한 상황이다. 제리는 그 이미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세 번이나 되풀이할 정도로 그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제리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은행원의 사무적인 말투에서 청화 일당의 음모를 알아차리기도 한다. 이는 음모론이 만드는 심상을 반영한다. 음모론은 개개인을 영웅으로 착각하게끔 만든다. 보통 사람에게 세계의 진실을 그만이 알고 있기에,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소명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세계 곳곳의 신화를 모방하는 할리우드 영웅 서사의 구조와 유사하다. 장르적 문법으로 그려진 제리 슈의 사적인 경험은 음모론과 할리우드 영화를 하나로 포갠다. 감독은 사회 전반의 문제로 확장한다. 본인의 신념이나 음모론에 빠져서 사는 사람은 사회에 가득하다. 감독은 처음부터 진실을 믿지 않기를 권한다. 이때 제리는 진실이 사라진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시대정신을 응집한 인간이 된다. 이 영화가 실화와 픽션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부산국제영화제

<본인 출연, 제리>는 제리 슈가 보이스피싱과 음모론에 세뇌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사회적인 차원이다. 감독은 영화가 끝날 즈음에 홀로 사는 노인의 보이스피싱 피해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노인이 소외되는 사회 분위기를 되돌아보게끔 한다. 제리 슈는 세 아들과 아내와 떨어져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고, 평생을 돈만 벌고 사느라 친구도 없는 이다. 그가 사기를 당하는 와중에도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을 정도로 그는 위험에 잘 노출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는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을 보이기까지 한다. 제리 슈가 이 영화를 찍으며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과도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이 영화를 찍은 셈이다. 사회적 차원만 드러낼 때 이 영화는 좀 잘 만든 공익 캠페인에 가까운 영화다. 문제는 감독이 이 영화 속 영화 앞뒤로 배치한 맥락이다.

감독은 제리 슈가 보이스피싱에 당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차원을 그려낸다. 영화는 오프닝 타이틀 이전에 제리 슈가 찍은 크리스마스 영화 한 편을 튼다. 비디오테이프로 재생된 제리 슈의 영화에는 그의 활기찬 모습이 드러나 있다. 본인이 각본과 주연, 프로듀싱을 한 크리스마스 연극은 꽤 유머러스하다. 제리가 젊은 시절에 혼자 영화를 찍을 만큼 열의가 있기에 보이스피싱 사기단의 영화적인 이야기에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를 몸소 제작하는 제리 슈의 모습이 담긴 메이킹 필름을 삽입하면서 픽션에서 다큐로 영화의 장르가 전환될 때, 제리의 뿌듯해하는 표정은 영화인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느껴진다. 픽션과 실화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면서도 제리의 삶이 거기에 깃들어 있다는 환상을 제공함으로 이 영화는 실화와 삶 사이에 심리적 거리를 무너뜨린다. 제리의 사연을 절대 흥밋거리로 착취하지 않으려 하는 감독의 따스한 태도가 그 기저에 깔려 있다.

또한 제리가 창작욕을 불태우지 못한 이유를 그가 대만 이민자 출신이라는 데에서 발견한다. 대만 이민자 출신이기에 미국에 정착하고, 가정을 일구는 데에만 평생을 바칠 수밖에 없던 그의 처지를 강조하면서부터 영화는 디아스포라 영화가 된다. 아메리칸드림이 허상에 불과했으며, 제리가 미국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트렁크 두 대만 들고 대만으로 귀환하는 뒷모습은 적적한 감정이 들게 한다. 중국에 송환당하기를 두려워하는 그의 공포도 여기에 한몫한다. 내내 웃음을 짓게끔 하는 제리의 긍정적인 성격이 아메리칸드림과 맞물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이 포개지면서 <본인 출연, 제리>는 디아스포라와 픽션과 실화, 포스트 트루스 등의 굵직한 주제를 오가는 영화가 된다.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 않으며, 공익광고에 그치지 않게끔 하는 라우 첸의 균형감각은 그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사기 피해자는 루저로 여겨지기 마련인데 <본인 출연, 제리>는 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데에 성공한 영웅이 된다. 한 인간을 구원했다는 것만으로 이 영화의 값어치는 충분하다. 아니, 시네마의 가치는 충분하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본인 출연, 제리
Starring Jerry As Himself
감독
라우 첸
Lawrence Chen

 

출연
제리
Jerry HSU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75분
공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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