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영화 편지 이완민 #1] '누에치던 방' 침묵한 과거의 균열을 볼 수 있다면
[한국독립영화 편지 이완민 #1] '누에치던 방' 침묵한 과거의 균열을 볼 수 있다면
  • 김민세
  • 승인 2023.10.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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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민이 공동의 기억을 발굴하는 방식"
ⓒ 무브먼트

<누에치던 방>이 과거와 기억을 호명하는 방식은 이상하다 못해 괴상하다. 이완민은 잠실이라는 변화의 한가운데 있던 공간 속에 자신의 사적인 추억과 공동체적인 기억을, 누에가 뽑아내는 실처럼 뒤죽박죽 엮는다. 그렇기에 시간은 겹쳐지고 분화되며, 기억은 불명확한 구조 아래서 현재와 관계 맺는다. 더불어 영화가 핵심적인 두 인물의 과거를 불러올 때 인물은 A인 것처럼 보였다가, B가 되어버리기도 하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곤 한다.

<누에치던 방>의 시간의 구조를 이루는 두 축은 이러하다. 서른에 접어들어 연인과 이별하고 고시 공부를 포기한 '미희'(이상희)와, 정치적으로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극단에서 일하며 '익주'(임형국)와 동거하는 '성숙'(홍승이)의 시간(현재). 그리고 각자의 단짝 친구와 다사다난한 고교 생활을 보내는 학창 시절의 어린 '미희'와 '성숙'(이주영)의 시간(과거, 또는 누군가로부터 재구성된 회상). 전자의 시간은 흑백에 가까울 정도로 희미하고 무채색으로 남아있고, 후자의 시간은 한겨울의 추위를 잊게 할 정도로 따스한 풍광으로 가득하다.

수시로 과거로 플래시백하는 영화의 구조는 현재와 과거의 두 축을 겹쳐놓고, 미희와 성숙이 겪은 각자의 역사를 겹쳐놓으며, 두 여성의 역사를 한국 근현대사가 지닌 공동체적 상흔으로 엮어낸다. 지극히 평범해질 수 있는 이 구조가 이완민의 기이하고도 과감한 전략으로 인해 해독하기 난감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 무브먼트

<누에치던 방>에서 가장 먼저 따져볼 수 있는 부분은 우연과 미희의 만남이 성숙과 미희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미희는 수상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뒤를 쫓다 성숙의 집에 도착하게 된다. 미희는 성숙에게 자신이 10년 전 성숙의 가장 친한 단짝 친구임을 주장하고, 성숙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마지못해 미희와 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인 척을 한다. 그리고 영화는 학창 시절 성숙과 우연이 살고 있는 10년 전으로 플래시백한다. 여기서 문제는 1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누군가'의 회상에 대한 응답으로 따라오는 플래시백의 전략이 편집의 관습에 크게 반하고 불규칙하기에, 스크린이 투사하고 있는 과거의 주체를 쉽게 착각하게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앞선 일련의 시퀀스를 픽션의 규칙과 가정을 떠나 우리가 직접적인 형상으로서 지각할 수 있는 '배우'의 이름으로 호명해 다시 적어 내려가 보도록 하자. 이상희는 김새벽을 만나게 되고, 김새벽의 뒤를 쫓다 홍승이의 집에 도착하게 된다. 이상희는 홍승이에게 자신이 10년 전 홍승이의 단짝 침구임을 주장하고, 홍승이는 이상희의 친구인 척을 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주영과 김새벽이 살고 있는 10년 전으로 돌아간다. 이런 과정을 픽션의 전제 없이 표면적으로 따라갔을 때, 김새벽의 시간과 함께하고 있는 이주영은 누구의 과거가 될 수 있는가. 또는 누구의 과거인 것처럼 보이는가.

이상희와 김새벽의 만남은 이상희의 미행으로 인해 이상희와 홍승이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상희의 만남의 경로, 즉 욕망의 경로는 김새벽에서 홍승이로 전이된다. 그렇기에 미희가 소녀를 따라가 성숙을 옛 친구로 여기는 과정은, 이상희가 홍승이에게서 보고자 하는 것이 김새벽임에 증거가 된다. 그래서 이상희의 욕망을 따라온 우리에게 뒤이은 플래시백은 이상희-미희의 것이며, 이주영은 이상희-미희인 것처럼 보인다. 서사의 욕망, 서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욕망과 서사를 잠깐 멈추어 또 다른 시간을 불러오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일련의 서사 안에서 일관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 욕망에 상응하여 따라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 무브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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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의 서사가 흘러가면 알 수 있다시피 이주영은 홍승이-성숙의 과거다. 10년 전 김새벽의 단짝 친구는 성숙이며, 이상희는 그저 김새벽에게서 수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홍승이에게 자신이 당신의 친구임을, 또는 당신이 나의 친구임을 주장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처음부터 이상희-미희의 욕망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시간을 멈춰세우고, 그 욕망의 대상으로 홍승이-성숙의 과거를 제시한다. 그렇기에 과거의 시간 속에 있는 김새벽-유영은 이상희-미희의 욕망에 대응하고 있다고 착각된 존재이자, 사실은 홍승이-성숙의 회상으로 제시된 대상이고, 결국은 관객이 잘못 지각하고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김새벽-유영의 존재는 착각에 둘러싸인, 욕망의 관계와 경계가 모호하게 지워진 대상이 된다.

여기서 미희의 착각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곧 관객의 착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나 이것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감춰진 미스터리의 이면을 들추는 것이 아니다. <누에치던 방>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과거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누군가를 현재의 시간 속 모호한 존재로 억지로 봉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축에서 일어나는 뒤늦은 만남에서 우선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연대와 화합이 아닌 투박한 봉합 사이 균열로 가득한 '언캐니'(uncanny)함이다. 그리고 영화는 착각의 경로 끝에 10년 만에 친구와 재회한 미희에게 그 어떠한 미래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영화를 끊어버린다. 이 분절된 10년간의 간극을 둘러싸고 있는 기억과 욕망, 존재와 지각 사이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실패하는 불쾌감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영의 과거는 모두의 역사를 대변할 수 있는 이상한 시공간에 놓인다. 사실 영화에서 미희와 성숙의 과거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미희가 왜 극도의 신경증적 증세를 보일 정도로 부모를 원망하는지, 성숙이 어떻게 지금의 정치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연인 사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익준과 동거하고 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을 대변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유영이고, 학교에선 배울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는 유영이다. 그리고 영화는 누군가의 회상 또는 시선이라고는 절대 부합할 수 없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씬을 유영에게 부여한다. 그 씬에서 유영은 학생 신분으로 남자친구와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강압적으로 혼이 나고 있다. 아버지는 수치스러운 말들을 단조롭게 내뱉고 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글썽인다. 유영의 침묵은 미희와 성숙의 것 그리고 모두의 것이다. 죽음을 뒤로하고 있는 현재의 축에 놓인 이들은 뒤늦게 부모라는 세계 앞에서 절규하고, 거리라는 사회 한가운데서 소리 지른다.

 

ⓒ 무브먼트

이완민이 기억을 돌이켜 보는 방식은 특별하다. 그녀는 투박하고 불명확한 구조를 통해 욕망하는 대상, 즉 기억하는 대상을 누구에게나 얽매이지 않는 공동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누에치던 방>이 기억을 발굴하는 것은 마치 개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석 일부분을 비교하고 이어붙이는 그저 무의미하고 막막한 작업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이 과정은 단순한 오독 또는 착각일까. 이완민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불러올 균열을 알고 있고, 영화는 이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 균열을 목도하고 뒤늦게 착각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제야 숨겨진 지층을 다시 한번 파헤칠 수 있게 된다. 이완민은 이 시대에 그런 착각이 필요하다 믿는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 무브먼트

누에치던 방 
Jamsil
감독
이완민

 

출연
이상희
홍승이
김새벽
이선호
임형국
이주영
최진혁
정원
김승현

 

제작 윈드웰러스 필름, 영화사 잠, 키스톤필름즈
배급 서울독립영화제, 무브먼트
제작연도 2016
상영시간 12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8.01.31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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