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th BIFF] '뮤직' 예언과 힘겨루기하는 인간, 그리고 영화
[28th BIFF] '뮤직' 예언과 힘겨루기하는 인간, 그리고 영화
  • 박정수
  • 승인 2023.10.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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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되지 않는 순수 영화의 가능성"

그리스 신화 속 예언의 힘은 아주 강력하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신들이 내린 결정을 감히 거스를 수 없다. '오이디푸스'는 예언에 따라 아버지 라이오스를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대 독일 예술영화를 선도하는 '베를린파'의 일원으로서, 매번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영화 문법을 물색해온 '앙겔라 샤넬렉'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뮤직>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앙겔라 샤넬렉의 <뮤직>은 그녀의 필모그래피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예언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그녀는 이전 작품들에서 예언의 '불가항력'적인 속성만큼 강력한 사회의 '젠더'나 '관행'을 고찰해왔다. 특히, 가부장제에서 '어머니'이자 '전업주부'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운명을 연출로써 가시화하였다. 또 예언과도 같은 '원전' 및 '각본'이 영상화에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을 계속해서 탐구하였다. 분명 샤넬렉의 영화는 여성이라는 젠더와 사회 규범, 원전의 그늘에서 온전하게 자유롭진 못하다. 그 불가항력이 영화의 거대한 뼈대를 구성한다. 그러나 샤넬렉은 그 뼈대를 은밀하게 변형하고, 어떻게든 자유를 추구하는 인물을 담아내며, 예언에 반항하는 인간의 초인적 의지를 부각한다. 당연하게도 샤넬렉은 오이디푸스 신화를 온전하게 영상화하지 않는다. 

 

ⓒ 부산국제영화제

일단 예언의 힘을 도입부의 '산'과 '안개'를 대비하며 보여준다. 아주 견고하고 무거우며 구체적인 것이 산이라면, 안개는 추상적이고 가벼우며 그저 나풀거리기만 하는 공허한 것이다. 바로 이 덧없는 것이 억겁의 세월을 축적해 온 산을 손쉽게 뒤덮는다. 육중한 산을 규정하는 부질없는 안개가, 곧 인간에게 내려진 예언의 '모순적인 무게'와 같다. 일순간 사제의 입에서 새어나왔다가 사라지는 공허한 몇 마디 문장이 육중하고 웅대한 존재들의 일생을 손쉽게 좌우하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안개가 산을 모조리 은닉한 이후엔 '천둥'까지 내려친다. 번개가 동반되는 천둥이라면 실질적인 위해와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번개 없는 천둥은 그저 소리만 클 뿐 아무것도 아닌, '허풍'과 같은 것이다. 그 아무것도 아닌 천둥이 영화에선 위협적이다. 그리스 신화 속 최고 신인 제우스의 상징이 번개와 천둥인 것처럼, 천둥은 신의 음성이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잘 들리는 거부할 수 없는 신의 음성이, 드넓은 범위를 순식간에 뒤덮는 안개처럼 인간을 따라다닌다.

샤넬렉은 세계 전체를 뒤덮는 말 한마디의 힘을 '하이 앵글 구도'에서 촬영된 '롱숏'과 '익스트림 롱숏'에 반영한다. 저 하늘 위에서 지상을 묵묵히 내려다볼 수 있는 누군가는 천상에 자리하며 예언을 내리시는 절대자, 곧 신이다. 예언을 받은 인물들은 이 절대적인 시선과 손아귀에서 어떻게든 도망치고자 몸부림친다. 샤넬렉은 안개가 산을 뒤덮은 숏 직후에 어둑한 숲을 촬영한 롱숏을 이어내는데, 거기엔 오이디푸스에 해당하는 '이언'(알리오샤 슈나이더)이 버림당하는 모습이 담겨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전의 라이오스에 해당하는 '루키안'(테오도르 브라카스)은 아기 이언을 버리고 '프레임 바깥'으로 달아나려고 하지만, 결코 달아날 수 없다. 예언이 지배하는 롱숏과 익스트림 롱숏은 매우 '드넓어서' 작고 나약한 인간이 아무리 도망쳐도 프레임 바깥으로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다. 설령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한들 샤넬렉은 '편집'으로 예언에서 달아난 존재를 다시 프레임 안에 가둬내며, 인간이 아무리 거부해도 끝끝내 이어지는 예언의 불가항력을 가시화한다. 그가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한 직후 이어지는 숏엔 프레임 안으로 진입하는 이미지들이 담긴다. 아무리 달아나고 또 달아나도 절대자가 구축해놓은 예언의 세계 '정중앙'으로, 곧 예언의 핵심에 근접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끝끝내 루키안이 이안에게 살해당하는 숏은 영화에서 일어나고야 만다. 즉 롱숏과 편집은 예언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반영한다.

예언이 실현된 직후 이어지는 '클로즈업' 또한 신들의 힘을 증명한다. 절대자의 손아귀에서 끝끝내 탈출하지 못한 인물들은 체념하며 프레임 안에 다소곳하게 클로즈업된다. 예언을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프레임 바깥으로 도주하려는 '운동'에 반영된다면, 예언에 순응한 자는 '부동'하며 절대자가 자신에게 가할 결말을 고스란히 기다린다. 그렇게 예언의 결과만이 확실하게, 또 신들의 눈에 보기 좋게 확대된다. 그래서 <뮤직>의 카메라는 어떻게든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신들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예언이 적중하여 클로즈업되는 피사체에는 '주검'도 포함한다. 전 인류가 공통되게 처한 예언은 '유한',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예언에서 도망치지 못해 목숨을 거두는 타나토스의 손아귀에 붙잡힌 주검이 클로즈업되며, 운명을 연출에 반영하는 샤넬렉의 법칙을 강화한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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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렉은 연출뿐만 아니라, 카메라로 담아낸 '시공간의 성질'로도 예언의 가공할만한 힘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된 시간은 '밤'이다. 어둠 속에선 그 무엇도 확실하게 보이지 않고, 예언의 성사여부를 감시하는 절대자의 '시야'도 약화된다. 루키안은 밤에 예언으로부터 도주할 수 있길 희망한다. 그러나 편집은 예언을 극복한 결과가 아닌, '다음날 아침'을 이어낸다. 그 아침은 산과 바다를 밝힌다. 예언이 존재의 앞날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듯, 아침·낮은 존재가 '무엇'임을 확실하게 단언한다. 그 낮에 예언이 실패하기 위해선 필히 죽어야 할 이언이 한 농부에 의해서 발견되어 거둬진다. 낮은 예언을 구체화한다. 이후 이언은 '바위'가 많은 바닷가 인근 산골에서 길러진다. 비교적 탁 트여있지만 성질 자체는 단단하고 폐쇄적인 공간이, 이안이 루키안을 죽이게끔 유도한다. 이후 이언은 산골보다 더 폐쇄적인, '철창'이 사방을 에워싼 '교도소'에 수감된다. 거기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이성은 원전의 이오카스테에 해당하는 '이에로'(아가트 보니처)로서, 이언은 그녀와 눈에 맞아 교제를 시작한다. 즉 예언에서 달아나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예언이 실현될 수밖에 없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옮겨지며, 더더욱 예언에 가까워진다.

예언에 반발한 사람들은 고의로 발걸음을 튼다. 이들은 예언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도리어 예언에 가까워진다. 만약 이언이 루키안의 키스를 그냥 받아들이고 발을 멈춰뒀다면, 당장 부친을 살해할 일도, 모친 이에로와 만날 일도 없었다. 즉 무심결에 뗀 발걸음이 예언에 다가가고 있었다. 샤넬렉은 이를 촬영과 편집에 반영하는데, 바로 클로즈업된 '발'로 이어지는 연결이다. 일반적으로 인류는 '눈'으로 본 다음에 손을 건네거나 발을 뗀다. 무언가를 인지하여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판단한 이후 행동을 시작한다. 그런데 샤넬렉은 바라보고 판단하는 눈이 달린 '얼굴' 대신에 전작 <꿈길>(2017)에서는 '손'을, <뮤직>에서는 발을 클로즈업한 숏들을 이어내며, 판단에 따른 이동이 아닌 예언에 따른 자동적이고 관성적인 연결을 가시화한다. 이언은 눈이 멀어간다. 자신의 눈앞에 무엇이 펼쳐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 반사적으로 발을 뗀다. 이언과 이에로의 만남은 눈보다 빨랐던 두 사람의 발이 관성적으로 맞닿으면서 결정됐다. 결말에서 이언은 눈이 완전히 멀었다. 그런데도 불현듯 발이 움직이며,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피비를 구했다. 이에로가 자살하는 장면에서도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발이 포착된다. 이에로의 발은 원전에서 자살하는 이오카스테의 운명을 반사적으로 따라간다. 얼굴과 눈이 담긴 숏은 움직인 이후에야 연결되어 나타난다. 본 작품에서 눈은 발이 저지른 행동을 뒤늦게 확인하거나, 그 결과를 후속 조치하는 수동적인 기관이다.

이처럼 영화에서 인간은 예언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또 하나의 자명한 사실은 이를 조금이나마 미룰 수 있다는 점이다. 이언이 지금 당장 피비의 죽음을 막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좀 뒤로 늦춘 것처럼 말이다. 샤넬렉은 거스를 수 없는 예언의 힘을 부각하면서도, 그 예언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롭고자 빈틈을 찾는 인간의 의지 또한 부각하는데, 이를 '물'에서 찾는다. 영화에서는 바다에서 아기 이언을 돌보거나, 장성한 이언이 친구들과 수영하거나, 이에르와 함께 손을 씻거나, 수영하러 간 이에르를 찾으러 이언과 피비가 해변에 가는 등, '물과 접촉하는 행위'가 수차례 반복된다. 물과 상반되는 속성은 예언에서 달아나면 달아나려 할수록 점차 예언이 개인을 에워싸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빽빽한 마을이나 철제 트럭 등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물에 뛰어들어 예언을 씻어내고, 유동적이며 흐르는 속성을 빌려와 잠시나마 예언을 변형한다.

 

ⓒ 부산국제영화제
ⓒ 부산국제영화제

영화는 제목처럼 '음악'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예언이 담긴 청각은 시각을 일방적으로 좌우한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된 예언은 어떻게든 실현되어 시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시각은 예언이 지시한 것을 무조건 조각하고 그려서 보여준다. 이에로는 동료 간수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친다. 해당 사물은 무조건 특정한 기표로만 불러야 하고, 청각이 의미한데로 보여야 한다. 이에로가 아브라함과 통화할 때, "이에로 맞지?", "루키안을 죽인 게 이언 맞지?" 등의 청각에 따라 시각은 그런 모습으로 위치한다.

그런데 시각으로 승화할 수 없는 '오페라'가 눈이 먼 이언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고유한 청각적 형식미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기악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 해당 음악이 침투하기 전에 이에로는 소피아에게 빨간 구두를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이후 음악이 본격적으로 재생되자, 샤워실에 있는 이언이 자신이 신던 신발을 되레 벗고 내팽개치는 숏이 이어진다. 물론 이에로는 이언에게 신발을 가져오라한 게 아니었고, 이언이 벗은 신발은 구두도 빨간색도 아니지만, 이에로가 말한 것과 정반대의 시각이 연결된 것임은 자명하다. 슈베르트의 <송어>를 듣고도 송어의 구체적인 형상이 연상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그만큼 추상적이고 자율적인 청각은 무수한 형태의 시각으로 발현될 수 있고, 여기에 하나의 시각만을 강제하는 예언을 거스르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을 거스를 순 없기에, 영화의 결말도 오이디푸스 신화를 따른다. 이언은 아들들과 결별하고, 딸들과 함께 어디론가 떠난다. 하지만 예언을 따르는 그들은 물로 가득 찬 강 주변을 걸어가며 추상적인 노래를 부른다. 아들들과 헤어지지만, 험악한 분위기로 이별하진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물처럼 흘러가고 저 자신에게 충실한 노래를 부르며, 예언을 조금이나마 유예하고 자유를 찾는다.

예언의 허점과 틈새를 찾아내려는 인간의 의지를 물과 음악에서 발견한 샤넬렉은 이에 더해 각본, 곧 '문학'을 영상화하는 영화의 운명 또한 극복하여 매체의 자유를 되찾으려한다. <뮤직>이 오이디푸스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이상, 관객인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게 된다. 즉 각본이라는 예언이 영화의 방향을 예정한다. 그러나 샤넬렉은 원전의 구체적인 설정을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이리저리 비튼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부은 발목'은 갓 버려졌을 때 생긴 것인데, 영화에서는 장성한 이언의 발에 상처가 난 것으로 다르게 처리한다. 또 자신의 패륜을 인지한 이후 두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와 달리, 영화에서 이언의 눈은 자연적으로 멀어간다. 심지어 서로 적대하던 이언과 루키안의 관계를 동성애로 변형하고, 루키안과 이에로의 관계는 다소 모호하다.

샤넬렉의 재해석은 내용 비틀기에 그치지 않고 편집에도 반영된다. 원전의 서사를 재현하기 위한 탄탄한 개연성 대신, 오히려 전개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듬성듬성한 연결이 <뮤직>의 특징이다. 즉 샤넬렉은 이전과 이후에 종속되지 않는 각 '숏의 자유', 원전이나 각본에 지배되지 않는 순수 영화의 가능성까지 엿본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뮤직
Music
감독
앙겔라 샤넬렉
Angela Schanelec

 

출연
알리오샤 슈나이더
Aliocha Schneider
아가테 보니체르Agathe Bonitzer
아지리스 사피스Argyris Xafis
마리샤 트리안타필리두Marisha Triantafyllidou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8분
공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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