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쓴 글 「[MUBI] '일층 이층 삼층' 비우고 채워지고 멀어지고 가까워지고」에서 다음과 같이 난니 모레티를 설명했다. "20세기의 모레티가 자신의 견해나 신념을 도발적이고도 분방하게 풀어냈다면, 21세기의 모레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비극을 비교적 진중하게 연출한다" 20세기와 21세기 연출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줘 온 모레티는, 신작 <찬란한 내일로>를 통해 20세기의 과감하고도 솔직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OTT 스트리밍 서비스에 의해서 급변한 제작 및 배급 환경에 대한 견해를 이번 신작에서 그야말로 신랄하게 논평한다.
가장 먼저 모레티는 1인 제작 시스템으로 일평생 지향해 온 자신의 '예술론'을 되짚어본다. 그 과정에서 전작 <일층 이층 삼층>에서 탐구한 빛과 어둠, 낮과 밤에 관한 탐구를 이어간다.
영화의 도입부, 지상에 어스름이 깔리자 이탈리아 공산당원들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며 활동을 시작한다. 그들은 오후 내내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던 밋밋한 장벽에 영화의 제목과 동일한 구호를 칠한다. 낮과 빛이 '오늘'을 항구적으로 유지했다면, 어둠과 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새로운 변화나 '내일'을 불러온다. 어둠을 거쳐야만 무언가를 탄생시킬 수 있고, 그것이 영화에선 20세기의 신 이념인 '사회주의'로 대표된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어둠은 친숙한 '현재'를 몰아내어 낯설어진 '과거'를 소환하고, 뻔한 '현실' 대신 생경하고 신선한 '예술'도 길어온다. 특히, 영화에서 어두운 영역은 현재 및 현실과 분리된 상태다. 영화에서 '밝은 숏'은 주로 현실에 상응하고, '어두운 숏'은 과거나 '영화 속 영화'에 상응한다. 더군다나 밝은 숏과 어두운 숏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통합되거나 조화되는 일이 드물다. 모레티는 현실과 분리된 어둠을 손 놓고 방치하지 않는다. 초반부까진 건재하던 주인공 지오반니(난니 모레티)의 영화 촬영이 순탄하게 흘러갈 때, 그는 어둠 속에서 영화를 창조하고 이를 현실에 이식시키기에 이른다. 현실과 영화가 컷으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프레임' 안에 영화가 현실로, 현실이 영화로 공존하며 말이다. 그가 전동 퀵보드를 타고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며 영화를 촬영할 장소를 열심히 물색하는 이유는 현실과 분리된 허황한 만족에 그치기 위함이 아니다. 따분하게 흘러가는 현실에 새로움을 일깨우기 위해서, 심지어 부정한 현실을 대체하기 위해 그토록 어둠을 조물조물거리며 무언가를 주조하는 것이다.
모레티가 어둠 속에서 길어오는 것들, 밤이 열어젖히는 내일은 '진실'을 품고 있다. 이로써 사실이 추방당한 현실에 진리를 되찾아온다. 그런 점에서 모레티가 투영된 배역 지오반니는 주세페(주세페 스코디티)란 젊은 감독에게 불만이 아주 많다. 지오반니의 영화는 일반적인 대중들이 모르는 진실을 어둠 속에서 건져내어 전달한다. 독재 및 전체주의로 변절한 스탈린주의 이전 '사회주의의 본령'을, 소련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인도적인 공산주의자'를, 메카시즘 때문에 흔적을 숨긴 '서방의 사회주의자'를 밝힌다. 반면 주세페의 영화는 대중들이 머릿속에서 그려만 본 것들, 심지어 너무 상스럽고 추악해서 차마 생각조차 꺼리게 되는 '저열한 욕망'을 기어코 실현하고야 만다. 둘의 영화 중 후자가 전자를 잠식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후자는 거짓말로 가득한 주제에 '네오리얼리즘' 계보를 잇는다고 설쳐대며, 진실을 위해 파시스트들에게 맞선 20세기 위대한 선배들의 이름을 더럽힌다. 이에 지오반니는 화가 나서, 그의 영화는 인간의 진실을 조금도 반영하지 않는다며, 건축학자나 수학자들을 불러와 논박한다. 뿐만 아니라 네오리얼리즘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승한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1960)이 영화에 직접 인서트되기도 하고, 현실과 꿈·상상을 오가는 펠리니의 연출을 모레티가 형식에 반영한다. 더욱이 펠리니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소재 '서커스'를 영화의 중심 소재로 다루며, 그를 잇는 것은 주세페와 같은 '골빈 감독'이 아니라 자신임을 천명한다.
모레티는 자전적인 영화를 개척한 펠리니에게 헌사를 바치며, 또한 예술은 창작자의 주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영화에선 지오반니란 옷을 모레티가 걸치며 감독 본인을 영화와 분리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지오반니가 말하는 것들은 배역의 발화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모레티답다. 그 지오반니는 영화에서 "인용 대신 자기 생각을 말해줘"라며 주관성을 높게 산다. 외에도 영화 속 지오반니를 지지하는 피에르(마티유 아말릭)를 통해 프랑스의 자본을 끌어오는 모습은 '까이에 뒤 시네마'를 필두로 프랑스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모레티를 반영한 것이고, 파울라(마르게리타 부이)와의 불화는 <악어>부터 그의 작품에 빼놓지 않고 참여해온 뮤즈, '마르게리타 부이'와의 관계를 투영한 것이다.
모레티는 타인의 저열한 욕망과 거짓말로 얼룩져가는 예술이, 다시금 진실과 창작자의 주관을 반영할 수 있도록, 찬란했던 예술이 다시 깨어나기 위해서 필히 거쳐야 하는 암흑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하지만 올해로 70세인 모레티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길어내기는커녕, 어둠에 파묻혀 '퇴장'하는 형국이다. 그간 뮤즈이자 부인으로서 지오반니의 비위를 맞춰주던 파올라는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그래서 지오반니가 생각도 않고 있던 이혼을 그에게 먼저 통보한다. 또 20대가량으로 추정되는 딸 엠마(발렌티나 로마니)는 지오반니보다 더 늙어 보이는, 백발의 노인 예르지(예지 스투흐르)와 결혼하겠단다. 지오반니가 엠마에게 의뢰한 OST를 의뢰인이자 아버지인 자신보다 예르지가 먼저 접했다. 더욱이 지오반니는 영화 촬영에 앞서 '의례'처럼 자크 드미의 <롤라>(1961)를 다 함께 모여 감상하는 습관이 있는데, 지오반니가 <롤라>를 감상하는 프레임에서 파올라와 엠마 모두 화면 바깥으로 퇴장한다. 즉 그간 제 삶을 엄격하게 지배하던 지오반니, 곧 모레티의 영향력이 저물어가고 있음에, 더욱이 타인이 그에게 호기심을 더는 보이지 않음에 모레티의 '사적인 영화'는 암초에 부딪힌다.
더불어 영화 제작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지루함을 조금도 참지 못하는, 오직 '도파민'만을 생성하기 위한 자극적이고 오락적인 컨텐츠가 범람하는 오늘날에 '모레티의 영화'는 관객들에게 외면 받아 자금 조달에 난항을 겪는다. 이런 와중에 '넷플릭스'가 지오반니에게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제작비를 거저 주진 않는다. 넷플릭스는 190개국에 그의 작품을 배급하기 위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와 오락적인 도입부로 선회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주세페는 손에 메가폰을 쥐고 있는 반면, 자신의 영화가 190개국 사람들에게서 겨우겨우 찾아낸 공통점으로 만든 통속적인 영화로 전락하길 원치 않는 지오반니는 주세페의 촬영 현장을 무기력하게 관찰하는 '구경꾼'으로 추락한다. 그러다보니 감독으로서 모레티의 진두지휘에 균일이 일기 시작한다. 그간 모레티의 영화는 현실을 대체할 정도로, '현실보다 더 정확한 진실과 비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를 거부하는 오늘날의 제작 및 관람 환경이 그의 창작에 자꾸만 어깃장을 놓는다. 1960년대를 재현하는 지오반니의 영화 세트장에 자꾸만 전자 담배나 헤드폰 등 2020년대의 '첨단 기기'들이 침투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모레티는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만의 영화를 고집한다. "아첨할 바엔 차라리 영화를 찍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가 주세페의 촬영 현장에서 '꼬장'을 피우는 시퀀스에서 완고함이 강하게 드러난다. 딱 한 테이크만 더 촬영하면 영화 촬영이 끝난다. 그 와중에 지오반니는 주세페의 영화가 폭력적이기만 할 뿐, 인간에 대한 조금의 윤리와 예의가 없다며 난동을 부린다. 단 1분이면 끝날 촬영을, 밤부터 아침까지 몇 시간을 지연시킨다. 그 과정에서 태초의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과 작가주의를 이끈 거장들의 말을 인용하여 “영화는 진실을 반영하고 주관적인 독특함으로써 특별해야 한다”라는 제 가치관을 묵묵히 설파한다. 그러나 지오반니가 벌인 소동은 그저 '꼰대'의 투정에 그쳤고, 끝끝내 주세페의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와 달리 지오반니의 영화는 완성까지 난항을 겪는데, 그런데도 묵묵히 버텨내며 외세에 타협하지 않은 영화를 연출하고야 만다. 그가 제작사의 기준에 따를 것이 아니라, 기어코 제작사가 창작자를 존중하게 만든다.
모레티는 '영화다운 형식'을 동원한다. 타 예술과 차별화되는 영화만의 '편집'은 현실을 과감하게 잘라내어 영화, 곧 '꿈'을 이어낸다. 이렇게 이어진 꿈에 지오반니의 '각본'과 '디렉팅'대로 연기하는 '젊은 배우'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지오반니가 생각하는 인간다운 사랑과 철학을 발화나 행동으로 옮긴다. 이로써 그가 생각하는 진리가 내일로, 곧 미래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또 그의 감정이 담긴 노래와 춤을 만인이 따라하며 공감해주길 꿈꾼다. 주세페의 영화가 공감 없는 '폭력'으로 얼룩져 현실을 오염시킨다면, 지오반니는 인간의 유대가 다시 회복되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지오반니는 조금도 타협할 수 없는, 현실에서 지워진 인간다운 진실을 거짓말을 자르는 편집으로써 이어낸다.
또 주관적인 예술을 지향할 때, 예술다운 형식이자 카메라만의 움직임인 '줌인'이 부각된다. 파올라가 감정에 솔직하기 위해서 이혼을 결심할 때, 영화 촬영이 재개된 지오반니가 미소를 지을 때 그들의 표정을 줌인한다. 그럼으로써 현실보다 더 가깝고도 상세하게 인간의 심리나 영혼을 가시화한다. 영화가 완성된 이후 만인이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결말에서도 모레티는 줌인에 준하는 '클로즈업'으로 그들 각각의 주관을 일일이 부각한다. 그 무수한 주관성의 총체가 영화다. 제 연기 철학을 결코 꺾지 않는 배우 베라(바보라 보불로바)부터, 지오반니의 견해를 무작정 수긍하지 않는 제작진 등 다양한 주관성의 총합이 혼자서 만들 수 없는, '공동 창작물'로서 영화다. 이 무수한 사람들이 하나의 영화를 다르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예르지와의 만찬에서 환상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지오반니는 자신만의 닫힌 결말을 모두의 '열린 결말'로 수정하여, 영화에 참여한 모든 주관성이 반영될 수 있게끔 처리한다. 이렇게 영화가 영화다워지는 식사 및 퍼레이드 시퀀스에선 그 누구도 멈춰있지 않다. 모두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영화의 본질이자, 모레티가 오마주하는 펠리니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운동'이 부각된다. 그 운동은 영화가 담아낸 진실로 한 발짝씩 나아간다.
전 지구적인 배급 시스템을 구축한 OTT 스트리밍 서비스는 분명 기술의 미덕이다. 그러나 초국가적인 OTT 기업이 제작에도 적극 관여하여 80억 인구의 보편적인 입맛과 구미만을 맞춘 단순한 결과물만 양성하고 있다. 모레티는 OTT 기업에 의한 영화가 전 세계인의 공통된 본성만을 쫓으며 저속해질 것이라고, 이로써 인간의 다양한 진실을 반영하던 지난 세기까지의 예술이 모두 저물게 될 것이라며 2010년대에서 2020년대로의 이행을 염려한다. 이런 와중에 모레티는 20세기의 도발적인 모습을 되찾아 변화를 거부하는 꼰대를 자처한다. 21세기엔 비교적 정숙하던 모레티가 도발적인 '악동'으로 되돌아가서 말하고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예술이란 솔직하고도 진실하며 자유분방하게 꿈꾸는 것이라고.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찬란한 내일로
A Brighter Tomorrow
감독
난니 모레티Nanni Moretti
출연
난니 모레티Nanni Moretti
마르게리타 부이Margherita Buy
실비오 올란도Silvio Orlando
바보라 보불로바Barbora Bobulova
마티유 아말릭Mathieu Amalric
배급 에무필름즈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95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4.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