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 그 짧고 뒤늦은 환멸의 순간
'거미집' 그 짧고 뒤늦은 환멸의 순간
  • 변해빈
  • 승인 2023.10.0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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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영화와 파괴된 것들"

전반적으로 과열되어 있는 <거미집>에는 그 열기가 잠잠하게 구는 두 순간이 있다.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을 크랭크업한 김 감독(송강호)이 영화를 다시 찍으라는 계시와 다름없는 악몽에 시달린 뒤, 새벽 마당에서 조용하게 고뇌하던 순간. 다른 하나는 결말을 바꾼 시나리오대로 촬영을 끝낸 김 감독이 사람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세트장에 남아 이상한 여운에 휩싸인 순간. 극의 시작과 끝이기도 한 두 구간은 검열과 예술적 열망을 관통하는, 의미적으론 분명 거대한 차이를 품고 있지만 영화의 공간, 곧 물리적인 화면을 지탱하는 하나의 영혼육은 의외로 공통되는 지점을 갖는다.

<거미집>에는 김 감독의 내레이션과 환각, 그 없이는 시작도 종료도 불가능한 촬영 현장의 서사상의 이해관계까지, 그를 많은 면에서 보충하는 장치들이 끊임없이 개입되어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주어진 보충 장치가 김 감독과 우리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내는 것이라기엔 이상한 틈이 존재한다. 극 마지막에 드러나는 진실과도 연관될 터인데, 화면을 장악하는 김 감독의 열기는 그가 호소했듯 '진심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자기 세계에 대한 극단적인 몰두거나, 그와 반대로 자기 세계를 외면하는 쪽이라는 의심을 야기한다. 또 약물과 불안, 자기도취(“나는 나를 믿는다”)에 빠진 김 감독이 얼마나 현실과 잘 붙어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갈망에의 눈 멈과 선명한 현실 사이, 소명을 받드는 자아와 멜랑콜릭한 자아 사이, 그가 간극의 어디쯤 위치한 존재인지 확신하기란 간단치 않다.

 

ⓒ 바른손

<거미집>이 단지 김 감독의 영화 '거미집'의 뒤바뀐 결말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란 것쯤은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그의 작품 안에서 확인되는 1970년대 영화의 흔적 자체가 지금의 우리에게는 새로운 무엇으로 다가오는 건 아닐 것이다. 이 영화가 대사로 거듭 제시하는 것과 달리, 플랑 세캉스(원신 원숏) 기법으로 촬영된 엔딩 하나를 보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는 사실도 미리 언급해야 한다. 소위 볼거리 넘쳐나는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컷을 나누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유려한 엔딩으로 칭송받는 대목이 아니다. <거미집>은 조각조각 재촬영된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찢긴 형상들에 근거한 파편의 영화다. 그리고 '거미집'의 각 장면이 파편으로 제시되어도 우리가 연상하는데 거리낌 없는 1970년대의 실재 작품 세계와의 닮음의 조건과 같이 파편의 형상과 닮아있는 김 감독이라는 존재를 살펴야 한다. 극에서 짧고 뒤늦게 그를 찾아왔지만 결국 묵인되는 어떤 환멸의 순간에 주목해야 하는 영화다. <거미집>과 '거미집' 두 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소명을 제대로 태워버리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심연으로 파고들지도 못한 인간의 파괴된 세계를 주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거미집'의 존재 방식

먼저, 김 감독과 작품의 관계성부터, 그가 '거미집'에서 바꾸고자 한 것, 그 결과는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는가. 그는 이민자(임수정)가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설정이 남편 강호세(오정세)의 여성 편력과 가부장적인 시대의 논리에 따라 그녀를 희생된 존재로 낙인찍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민자가 집안을 상대로 복수하는 설정으로 바꿔 신여성이라는 상징성을 부각하려 한다. 그것이 여하간 <거미집>의 배경인 1970년대에는 김 감독의 주장대로 관객이 본 적 없던 강렬한 무언가일 것이다. 문제는 결말을 바꾸려면 연관된 극 사이사이의 장면을 전체적으로 수정해야 하는데, 명백한 그의 목표와 달리, 영화에는 개연적인 관계성이 와해된 지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재촬영 버전에서 목을 매달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사는 것은 강호세의 첩 한유림(정수정)이며, 그런 그녀에게 이민자가 복수에 가세할 것을 제안하는 설정이 추가된다. 이민자에 신여성의 상징을 씌우려거든 자살을 무르고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는 장면에 그녀를 단독으로 기입해도 되었다. 물론 이민자가 한유림을 이용해 강호세와 시어머니(박정수)를 좀 더 수월하게 살해하고 집안의 재산을 탈취하려는 계획에서 여성 연대의 느슨한 흐름을 읽어낼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들이 서로를 속이며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다가 대형 거미의 먹잇감이 된다는 살이 붙은 결말은, 신(新)여성은 고사하고 차라리 최국장(장광)의 심기를 맞추려 거짓으로 지어낸 반공 영화에 근접해 보인다.

또한, 통상적으로라면 바꾸고자 한 이민자의 자살 장면을 관객에게 전면화하여 제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거미집>이 오프닝을 할애해, 심지어 설정을 도중에 바꿔 두 번이나 강조해 보여주는 장면은 이민자가 누군가를 위협하는 서늘하고 괴기스러운 복수의 감정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음산한 밤, 이민자가 한 번은 맨손으로 다른 한 번은 식칼을 움켜쥔 채 (강호세로 추정되는) 그 누군가의 방문을 깨부순다. 영화를 모두 본 뒤 돌이키면, 이민자의 복수를 상징하는 오프닝은 김 감독의 꿈속에서 영사되었다는, 다시 찍으면 고통을 잊을 수 있지만 외면하면 죄악인 바로 그 장면에 해당한다. 이때 해당 장면에서 플랑 세캉스 효과를 느슨하게 경험할 수 있는데, 식칼을 드는 것으로 설정이 바뀔 때, 영화 속 영화에서 김 감독의 촬영 현장으로 컷이 전환되는 경계부를 노출하지 않고 길게 이어낸다. 엄연하게는 카메라가 패닝할 때 교묘하게 컷과 컷을 이어 붙이는 편집술으로 '만들어진' 이음 효과이지만, 의미적으론 유사한 시각적 교란을 형성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거미집>의 오프닝에선 '누군가'가 강호세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모습이 붙어있지 않고, <거미집>의 후반부에 위치한 (플랑 세캉스 엔딩을 촬영하던) 세트장 장면과 그렇게 해서 완성된 엔딩 촬영본에는 이민자가 문을 부수고 복수의 주축이 되는 강호세를 죽이는 오프닝 대목이 제외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민자가 강호세를 죽이는 광기와 희열과 서글픈 욕망이 분출되는 순간은 완결성을 갖추지 못하거나 여타 장면 토막들과 연결되지 못하고 단독으로 찢겨 있다. <거미집> 속 사건의 기폭제이자 신여성의 상징이며, 갈망으로 들끓는 꿈이었던 이민자의 복수(장면)는 김 감독이 수정한 시나리오의 장면들과 서로 교류되지도, 교감을 이루지도 못하는 조각으로 존재한다.

 

ⓒ 바른손
ⓒ 바른손

그런가 하면 <거미집>의 오프닝이 김 감독이 간밤에 꾼 꿈이 아니라, 그것이 재촬영 당시의 리허설 장면에서 잘린 일부이며 촬영 현장 중 선행해 우리에게 전해지도록 편집된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만 똑 떼어 놓았을 때, 자칫 저항과 자기 구원을 위한 이민자의 복수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보단, 위협적인 육신의 광기와 퇴폐적인 이미지만이 부각된 상태로 전해진다. 그녀가 누구이며, 어떤 이유로, 누구를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아무런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소 허무하지만, 결국 <거미집>의 오프닝은 무언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보다 정확히는, 뜻하지 않은 변화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것으로 김 감독의 외부적 압력을 타파하는 의지, 또는 내현적 자기애에 현실을 탕진하는 어느 영혼육을 지지하는 편향된 어떤 장치 같다. 이민자의 맨손이 칼로 바뀌는 상황이 시나리오상의 계획된 변화가 아니며, 충동적인 변주가 더 그럴싸한 가능성을 도모하는 이미지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는 <거미집>의 진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우발과 대안의 각종 상황의 발생으로 거듭 제시된다.

반복 제시되는 또 하나의 장면. 한유림이 덫에 걸려 발목을 다친 채 다시는 남자를 믿지 안겠다고 분노를 표하던 '거미집' 장면을 촬영하는 현장이다. 리허설이거나 여러 테이크로 다시 촬영되는 과정은 한유림이 여러 이유를 핑계로 허술하게 연기할 때, 이것이 불만스러운 미도(전여빈)가 그녀를 대신해 배역을 맡겠다며 최국장 앞에서 엉성한 연기를 펼치던 때, 주변의 요청에 못 이기는 척 등장한 한유림이 그제야 제대로 된 연기를 해낼 때, 세 번 반복된다. 게다가 각 대목은 미도와 한유림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어서 김 감독은 거의 부차적인 배경처럼 무수한 스태프 중 하나로 섞여 들어 있다. 드문드문 끼어드는 그의 대사가 불필요하게 느껴질 만큼 현장에서의 카리스마나 자기주장과 결단력을 발휘하는 형상도 아니다. 물론, 그 대신 검열 논리를 앞세워 권력을 행사하는 최국장의 만행, 그 지저분한 권위적 힘을 상쇄하는 미도의 엉성한 연기력과 그에 따른 웃음이 있다. 그리고 남성 권위자 앞에서 남자를 믿지 않겠다며 사랑을 버린 여자의 사나운 다짐이 현장의 침묵을 버티고, 동시에 다친 영혼의 절뚝거림이 뒤따르는 애환에 의한 충돌도 의미가 없진 않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픈 건 그 모든 것들이 반복의 가능성 안에서 형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때의 반복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별 분위기의 전환은 광대하고 복잡하게 설계된 세트장 그리고 영화의 세계를 알량하게 좌절시켜 버리는 보이지 않는 체계의 압력이, 마치 카메라의 방향을 트는 매끄러운 움직임과 같이 조금만 눈을 돌렸더니 태연하고 자율적인 어떤 것으로 변모해 그들에게 의미적인 활동으로 전진한다는 사실이다.

 

'이면을 욕망하는' 욕망과 외면한 것

그와 대비해 반복이 허용되지 않는 플랑 세캉스의 문제가 남았다. 김 감독의 '거미집'의 엔딩에 사용되는 플랑 세캉스 장면은 시신을 은닉하기 위해 공간에 불을 질러 세트가 태워지는 설정이 가미되므로 반복이 물리적으로 불가하다. 그런데 <거미집>이 말하는 플랑 세캉스는 연결과 연속에 의한 (그 공간 안에 있는 듯한) '사실적인 감각의 구현'보단 '철저히 짜여진 설계'를 추구하는 쪽이다. 플랑 세캉스를 위한 속임수와 거짓으로 합의된 동선이 중요하다. 말끔하게 구현된 플랑 세캉스를 보여주고 싶다면 굳이 설계 노선이 다 노출되는 촬영 현장을 선행해 보여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플랑 세캉스는 감춰지곤 하던 '이면'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점철되는 영화적 장치를 포괄하는 상징으로 확장해 이해된다. 이를테면 전술했다시피 컷과 컷을 이어 붙인 편집술이 있다. 특히, 각별하게 떠올리고 싶은 건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거울과 문을 활용하는 기법이다. 식당 장면에서 각각 물리적으로 대각선에 착석한 김 감독과 영화평론가 무리를 한 프레임에 담는 방법은 벽면의 거울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을 트여주는 그 거울은 보이지 않는 여러 개를 한 번에 담으려는, 한눈에 소유하려는 김 감독의 의지 내지는 욕망과 닮았다. 앞서 언급한 두 번의 잠잠한 순간을 제외하면 그에 관한 내부의 명령은 관객에게 들리는 내레이션으로, 관객에게 보이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하여 바깥으로 드러난다. 문제는 그의 이면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환시는 때로 과도하게 설명적이고 지겹도록 반복적이다. 반복하건대 여타 인물에겐 없는 것들인데 우리가 김 감독에 대한 친밀성을 쌓아올리는 장치가 되는 것 같지도 않다. 숨겨진 사실을 전하기보다 이조차 의미적으로 일종의 플랑 세캉스의 욕망을 성사시키는, '의지와 욕망 모두를 지니고자 하는' 것으로써 결국 욕망이 덮쳐버린 형국이 되기 때문이다.

 

ⓒ 바른손
ⓒ 바른손

<거미집>의 문은 대부분 닫히고, 극도로 무겁고 소음공해를 유발한다. 그런데 동시에 계속 열린다. 촬영에 혈안이 된 미도의 지시에 따라 세트장의 철문은 굳게 폐쇄되지만 시나리오 심의 결정권자들은 거듭 그 문을 손쉽게 부수거나 호통치는 목소리 하나로 열어젖힌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 그들은 그 문을 촬영이 끝날때까지 어떤 이유로든 빠져나가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사냥꾼 역을 맡은 배우(정인기)와 박수자(장남열)가 그러한데, 미도는 방해가 되는 그들에게 술을 먹인 뒤 결박해 세트 천장에 가둬버린다. 문은 거울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확장하는 어떤 것이지만, 한편으론 영화의 고정된 프레임에 결박된 문은 거울과 달리 쌍방의 시선을 허용하는 쪽은 아니다. 나만 그쪽을 볼 수 있는 문제에 해당한다. 거울이 반대편의 무언가를 비추는 것인데 비해, 문은 같은 방향에 위치한 너머를 상상하게 만드는 쪽이지 자기 뒷모습을 자기 눈앞에 드러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전술한 <거미집>의 오프닝, 방문 너머를 들여다보는 이민자의 얼굴 앞의 대상(강호세)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다. 거울이 플랑 세캉스의 기능을 의미적으로 확장한다면 문은 플랑 세캉스의 물리적 한계를 가리킨다. 돌이키면 플랑 세캉스로 촬영된 <거미집>의 후반 장면들에서 인물들은 유독 그 자신의 뒤편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취약하지만 다른 이에게 노출되긴 쉽다. 자기 뒤를 돌아보거나 들여다볼 수 없다. 이민자와 한유림이 상대의 뒤통수를 노리는 노골적인 설정이나 세트장에 혼자 남은 김 감독이 그의 뒷모습을 보는 시선의 주체(미도)와 동일한 시선을 가지지 못하는 대목들이 그렇다.

<거미집>은 김 감독의 얼굴을 가장 말 없는 이미지로 남긴다. 이에 앞서 이쯤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세트장의 풍경 중 배우들의 분장을 강조하고 있음을 말해야 한다. 주연 배우들의 분장실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미싱 공장의 여공으로 출연하는 엑스트라 배우들이 단체로 촬영 시작 전 손에 쥐고 있던 거울을 내려놓는 제스처는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본인에게 맞지 않은 분장을 한 미도의 대역 사건. 이는 김 감독이 감금된 사냥꾼 역 배우를 대신해 그의 대역을 맡은 사실과 연관해 상기해야 한다. 미도의 분장이 터무니없으며 대역의 실패로 이어진 사실은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 김 감독은 스스로의 사냥꾼 연기는 그럴듯하다고 판단하며 그대로 촬영을 이어간다. 미도의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가리던 김 감독은 자기 얼굴의 생김새가 다르단 점은 너그럽게 허용한다. 어찌 되었든 드러난 모습만으론 김 감독과 미도가 크게 다르진 않다. 그런데 사냥꾼 분장을 한 김 감독은 출연한 장면 안에서 흡사 신적인 존재로 행동한다. 울거나 죽으려던 두 여인을 구해주고 “고통은 살아있음의 증거다” 식의 상투적인 말을 읊으며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려 하고 스스로 감탄한다. 시종 신의 도움을 요청하던 그는 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기보다 그것을 바깥으로 흉내내고 있거나 외부와 공유하지 못하는 자기 안의 소리에 고립된 이처럼 보인다.

 

ⓒ 바른손

환멸감을 외면하다

그 인상의 근거는 김 감독이 자기도 모르게 흉내를 내는 것이 배역 사냥꾼이 아니라 그의 스승인 신 감독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세트장에 실제 불을 피우는 시도는 그가 조감독 시절 죽은 신 감독의 영화적 열망을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그는 뿌리부터 신 감독 아래에 심어진 존재다. 화염에 둘러싸여 신 감독이 죽던 날, 김 감독이 훔친 그의 시나리오가 데뷔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흉내내지 못한 것이 있다. 그는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게 할 순 있어도 불이 번진 세트장 한 가운데 직접 뛰어들지는 않는다. 대신 불구덩이에 들어간 것은 본의 아니게도 무너진 천장에서 추락한 진짜 사냥꾼 역을 맡은 배우가 된다. 사냥꾼 역 대역의 실패는 자기 작품 안에 들어가는 일의 실패이며, 신 감독과의 동일시의 실패는 작품 외부를 구성하는 세계를 잃는 일이다. 다소 지루한 접근이긴 해도, 환시로 나타난 신 감독의 타오르는 어떤 것은 김 감독의 오랜 죄의식을 그 자신의 불운함과 좌절감으로 신화화하는 방어기제다. 김 감독의 영화가 사실상 그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비롯된, 그가 제대로 느껴야 하는 그 절망감을 잘 외면하게 조력하는 '자기 파괴'라는 신화를 구성하는 물질로서 불의 강렬함에 유혹되게 한다.

김 감독은 자기 밑바닥을 바깥으로 분출하지 않기에 태워지지도 못한 욕망의 상징이며, 외부의 간섭이 아니라 자기 절망으로 유입하지 못하기에 남루한 꿈이다. '거미집'의 달라진 장면들이 신 감독의 것이었다면, 김 감독이 그토록 벗어나려 한 소위 치정극이 그의 진짜 재능이면서 그의 세계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거미집>의 마지막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그 영화는 김 감독 스스로가 파괴한 자기 세계의 부서진 형상이다. 물론 스스로를 탕진하고 파괴하는 것에서부터 작품이라는 물신이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거미집'이 그의 뜻대로 '걸작이 될 수 있는가/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건 그의 과거, 곧 환멸의 순간이 뒤늦게 찾아와서 아주 찰나 동안 비치고선 말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촬영을 마친 세트 안에 홀로 남은 김 감독에게 찾아온 여운은 그의 과거가 유실되지 않도록 감싸 안은 막이다. 그가 이 순간 본 장면은 극 시작부 환각과 꿈으로 영사되지 않은 과거이며 혼선 없는 실재의 사실이다. 그러나 넘치던 작중 열기에 비해 과거 장면은 단숨에 털고 일어나는 김 감독 그 자신에 의해 가장 은밀하게 묵인된다. 과거 장면은 '거미집'이 극장 스크린에 오르는 데 어떠한 곡절을 가할 수도 없이 존재감을 상실하고 말았다. 비로소 찾아온 환멸감에 대해 일절 발언하지 않으며, 해석을 불허하는 오묘한 표정으로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순간'으로 화하는 김 감독이야말로 주체와 분리된 허상의 얼굴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바른손

거미집
Cobweb
감독
김지운

 

출연
송강호
임수정
오정세
전여빈
크리스탈
장영남
박정수
차서현

 

제작 엔솔로지 스튜디오
배급 바른손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32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9,27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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