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th BIFF] '한국이 싫어서' 출발이 도착이 되는 풍경
[28th BIFF] '한국이 싫어서' 출발이 도착이 되는 풍경
  • 김민세
  • 승인 2023.10.05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출발이 도착이 되는 노마드의 삶"
ⓒ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이 싫어서>의 죽음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뉴질랜드 학위를 취득한 '계나'(고아성)가 축하의 술자리를 끝내고 향하는 곳은 새벽의 끝자락에 있는 해변이다. 차 뒷좌석에 앉아서 술에 취해 음악을 듣고 소리를 질러대는 계나와 친구들은 술기운과 활력을 가득 머금은 채 차 밖으로 뛰쳐나가 춤을 춘다. 이 활기 넘치고 희망적인 장면이 끝나면 카메라는 난데없이 지금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집어삼킬 듯이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비춘다.

곧 뉴질랜드의 대규모 지진 피해를 알리는 아나운서의 건조한 목소리와 뉴스 자료화면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이어서 한 가정의 죽음을 알리는 보도가 이어진다. 계나가 뉴질랜드에 처음 왔을 때, 함께 지내고 한국말을 맡아 가르친 아이가 있던 한인 가정이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쇼트는 고시에서 수차례 떨어졌던 경윤의 영정 사진이다. 한 국가의 재난, 한 가정의 죽음, 한 청년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쇼트들의 연속은 어떠한 연상의 과정을 거칠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 순식간에 이루어지며, 누군가의 시점을 경유하지 않은 채 파편적으로 제시된 사건 이미지들은 결국 한순간에 경윤의 장례식장에 있는 계나의 클로즈업으로 한 데 묶인다.

이 죽음들은 영화의 외적인 부분들을 보더라도 작위적이고 이례적이다. 장건재의 지난 영화들을 되짚어 보았을 때, 죽음은 때로 서사의 전제로서 기능했지만(<한여름의 판타지아>, <달이 지는 밤>), 서사의 급전을 일으키는 계기적인 사건으로 등장하진 않았다. 장강명이 쓴 동명의 원작 소설에서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죽음이 등장하긴 하지만, 계나라는 인물이 지닌 물리적 동선을 옮겨다 놓을 정도로 인물 개인에 밀접한 죽음은 등장하지 않았다. 실제 장건재는 2017년부터 각국을 다니며, 한국 이민자들과 유학생 등을 만나 인터뷰했다고 밝혔지만, 이 죽음들이 그가 보고 들은 실제 사건에서 기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여러 사람의 실제 증언을 스크린에 새기듯이 이민자의 현실을 그려가던 영화가 인위적으로 죽음을 불러오고 이어 붙일 때, 죽음의 쇼트들은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위치하는가. 그리고 죽음의 쇼트들 뒤에 따라오는 계나의 클로즈업은 무엇을 바라보고 짓는 표정일까.

 

ⓒ 부산국제영화제

장건재의 영화가 번뜩이는 순간은, 서로 다른 세계의 쇼트와 쇼트가 부딪혀 이상한 혼합을 이루어 내는 순간이다. <회오리 바람>(2009)의 태현과 미정이 이불을 덮은 채 사랑을 나누는 생기 넘치는 쇼트와 문 앞에서 방안을 지켜보고 있는 선생님의 쇼트가 부딪힐 때. <잠 못 드는 밤>(2012)의 현수가 회사 사장과 다투는 격정적인 쇼트와 한밤중에 식탁에 앉아 골똘히 고민하는 현수의 쇼트가 부딪힐 때.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의 태훈이 폐교에서 정체 모를 여자아이를 마주하는 다소 공포스러운 쇼트와 방바닥 위에 누워 눈을 뜨는 태훈의 쇼트가 부딪힐 때. 이 불연속적인 쇼트와 쇼트 간의 논리적인 연결은 꿈과 현실이라는 가정으로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하나의 세계와 한 사람의 얼굴이 쇼트와 쇼트로 만날 때, 쇼트 뒤에 오는 얼굴은 꿈에서 깨는 얼굴이다.

장건재의 영화는 무엇보다 쇼트의 힘으로 단단하게 세워져 있으며, 세계 그 자체인 쇼트와 쇼트가 부딪힌다는 단순한 현상으로 '환상을 욕망하는 현실'의 관계를 그려낸다.

<한국이 싫어서>의 쇼트를 세계로 만드는 것은 이미지를 가득 채우는 계절이다. 영화는 여름과 겨울을 드러낼 수 있는 기호를 동원하여 두 세계의 간극을 벌려 놓고, 사계절 내내 여름인 뉴질랜드처럼 한국을 일 년 내내 겨울인 것만 같이 묘사한다. 영화는 수시로 이 두 세계를 넘나든다. 겉옷을 입은 채로 이불을 덮고 추위에 떠는 한국의 겨울에서, 햇볕에 그은 피부가 드러나는 민소매 옷을 입고 날씨를 즐기는 뉴질랜드의 여름으로. 햇볕이 가득한 들판에 놓인 길을 따라 걷는 뉴질랜드의 여름에서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생기 없는 눈으로 담배를 물고 있는 한국의 겨울로. 이때 여름은 마치 겨울이 꾸는 꿈처럼 보인다. 그래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갈 때, 겨울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겨울이 될 때, 다시 말해 서로를 욕망하는 쇼트와 쇼트가 부딪힐 때, 그 세계의 전환은 다분히 촉각적으로 다가온다.

그 세계를 구성하는 틀이 쇼트라면, 서로 다른 세계를 잇는 형식은 플래시백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시간은 뉴질랜드에서의 삶을 이어 나가는 현재를 서술하면서 한국에서의 과거를 플래시백으로 불러오며 교차한다. 가령, 이 플래시백은 생각에 잠기는 계나의 클로즈업에서 과거 한국에서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씬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이 영화의 플래시백은 뉴질랜드에 있는 현재의 계나가 한국에서의 과거를 자꾸만 돌아보는 욕망을 반영한다. 플래시백은 상상적으로 계나를 한국으로 옮겨놓고, 이러한 플래시백의 욕망은 모래 위에 놓인 계나의 발과 뉴질랜드의 바다 이미지가 말라비틀어진 멸치 더미로 디졸브 되어 다시 한국의 집 거실로 돌아오는 일련의 몽타주에서 인상적으로 형상화된다.

 

ⓒ 부산국제영화제

이때쯤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죽음의 쇼트들에서 계나의 클로즈업으로 이어지는 연결이 <한국이 싫어서>가 수차례 보여준 플래시백과 유사한 외형을 지니면서도 사뭇 다른 인상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우선 두 몽타주는 계나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계나의 클로즈업이 위치한 자리가 다르다. 뉴질랜드에 놓인 계나의 클로즈업이 '한국을 돌아보는 쇼트'였다면 한국의 장례식장에 놓인 클로즈업은 '한국을 마주하는 쇼트'다. 선행하는 쇼트로서의 계나의 클로즈업이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쇼트'였다면, 후행하는 쇼트로서의 계나의 클로즈업은 '현재를 이어가게 만드는 쇼트'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갈 때,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도착한 공항에서 영화가 시작되고, 한국과 뉴질랜드라는 두 가지 세계가 플래시백이라는 영화의 마법으로 이어진다. 마법으로 이어지는 세계. 하지만 죽음은 마법이 아니다. 질문으로 돌아와 죽음의 쇼트들은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위치하는가. 그것은 한국을 돌아보던 계나의 클로즈업을 한국에 서 있게 만든다. 계나의 클로즈업은 무엇을 바라보고 짓는 표정인가. 쇼트 뒤에 오는 얼굴은 꿈에서 깨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 앞에 놓인 것은 꿈이 아니다. 타국의 언어로 들려오는 먼 나라의 뉴스, 정체 모를 한 가정의 죽음, 계나를 한국으로 다시 붙잡는 경윤의 영정 사진이다.

계나는 또 다른 의미로 꿈에서 깨고, 공포에 휩싸인다. 이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을 공포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으로의 회귀가 플래시백이라는 영화적 마법을 통해 상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현실로 인해 실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이 싫어서>가 결국 발붙이고 살 곳에 대한 영화라면, 다시 한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계나의 경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계나가 도착하는 곳은 뉴질랜드일까 한국일까. 아니, 계나가 도착해야 하는 곳은 뉴질랜드일까 한국일까.

<한국이 싫어서>는 도착에 대한 인상적인 두 가지 풍경을 보여준다. 오클랜드에 도착함을 알리는 비행기 안내 방송과 함께 뒷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계나의 풍경. 약간의 피로와 기대를 머금은 계나의 몸이 증명하는 것은 여정의 시작과 그 여정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시차다. 이때 계나는 뉴질랜드에 물리적으로 도착한다. 그리고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다운 소리와 환호성과 함께 배 위에 서 있는, 그리고 이내 배에서 내리는 계나의 풍경. 햇볕에 그은 계나의 피부와 꼿꼿한 자세가 증명하는 것은 한국을 떠나온 긴 시간이다. 이때 계나는 정체성은 뉴질랜드에 녹아들어 정착한다. 땅 위를 매끄럽게 스치는 자연스러운 이 두 가지 착륙의 이미지는 계나를 한국으로 잡아끌던 몽타주와 달리 안정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세 번의 동시다발적인 죽음으로 인해 꿈에서 깬, 폭력적으로 한국에 도착한 계나는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영화는 마치 뉴질랜드로 떠나는 공항에서의 첫 장면을 반복하듯 어디론가 떠나는 계나와 그를 마중하는 가족들을 보여준다. 도착지는 뉴질랜드가 아니다. 뉴질랜드에 남아있는 재인의 영상통화 화면, 곧 프레임 속 프레임에 놓인 뉴질랜드의 쇼트는 더 이상 계나의 욕망을 반영하지 않는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노마드의 삶. 몸을 실을 비행기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계나의 뒷모습과 공항 안팎의 풍경은 출발 자체가 도착이 되는 풍경이다. 장강명의 원작이 그 어느 곳도 마냥 긍정할 수 없다는 비관으로 맺어졌다면, <한국이 싫어서>는 여정 자체가 목적인, 다시 말해 출발이 도착이 되는 노마드의 삶을 긍정한다.

[글 김민세 영화평론가, minsemunji@ccoart.com]

 

ⓒ 디스테이션

한국이 싫어서 
Because I Hate Korea
감독
장건재

 

출연
고아성
주종혁
김우겸
이상희
오민애

박승현

 

제작 모쿠슈라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6분
공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