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왜 그 순간에 PPT발표를 했을까 ['잠' #2]
그녀는 왜 그 순간에 PPT발표를 했을까 ['잠' #2]
  • 배명현
  • 승인 2023.09.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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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방, 두 개의 잠 그리고..."

<잠>은 한 문장으로 '<악마의 씨>(1968)와 한국의 유부남 밈을 결합해 비튼 혼인 생활 스릴러'이다. 문장의 뉘앙스로 느껴지는 가벼움 때문에 작품의 가치를 깎아 내려는 의도로 읽힐 수도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잠>이라는 작품이 발굴해낸 성취는 괄목할만하며, 그 성취의 토대는 서사의 원전이 되는 <악마의 씨>에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닌, 냉소적인 위트에서 출발해 독창적인 의미심장함을 건설해낸 시나리오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두 사람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곧이어 "누가 들어왔어"라는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대사는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말에는 현재 있는 이곳은 우리만 출입할 수 있도록 구매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잠입했다'는 함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영화 속의 인물을 소유권자와 잠입자로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이 대사가 도드라지는 이유를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징에 말미암은 대사가 아닌, 한국 영화가 집을 소재로 자주 다루어온 소유 욕구(가장 최근작으로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있다.)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잠>은 근래 한국 영화가 집요하게 다루었던 집을 소유하려는 싸움이 아닌, 이미 소유하고 있는 집, 그중에서도 방에서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영화는 이를 증명하듯 두 사람의 경제적 상황을 가늠할 만한 씬을 보여준다. 대기업의 팀장 '수진'(정유미)은 남편 '현수'(이선균)가 무명 배우임에도 월세나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현수가 나가 살겠다며 보여주는 매물은 45만 원의 월세를 지불해야 하지만 수진이 이를 거절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부부로서의 연 때문이고 공인중개사를 공부하겠다는 남편을 말리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두 사람에게 집을 소유해야 한다는 욕망은 지나가 버린 관심이다. 또한 그렇기에 영화는 집에 대한 소유 욕망 이후에 시작할 수 있었고 인물 관계에서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고 있다.

덕분에 수진과 현수 그리고 후추의 삶을 편안하게 우리는 관람할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초반에 보여지는 이들의 삶은 일상적이며 사랑이 넘치며 공고하고 조화롭다. 이 단단함에 균열을 내려는 몽유병이 잡입해 들어왔지만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는 가훈의 말처럼 수진과 현수는 문제에 힘을 합쳐 저항하고 대항한다. 두 사람에게 몽유병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정의되고 상정된다. 둘은 의사의 말에 따라 처방받은 약을 먹고 날카로운 물건을 치우고 침낭에 몸을 넣어 잠결에 누군가를 해할 가능성을 줄이려 한다. 하지만 가훈이 언급한 '둘'에 들지 못한 반려견 후추는 몽유병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영화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문제가 본격적으로 심각해지는 건 2장에서부터이다. 딸이 태어났지만, 현수의 몽유병은 조금도 괜찮아지지를 않는다. 딸에 대한 걱정으로 수진의 신경은 더더욱 예민해지고 의사의 말 또한 신뢰성이 떨어져 보인다. 여기서 이 가정에 외부인이 적극적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수진의 엄마와 무당이 들고 오고, 무당을 통해 아랫집 할아버지의 평소 언행이 드러난다. 수진은 무당으로부터 들은 말을 확인하기 위해 아랫집 민정의 집에 내려가 확인한다. 이때 민정의 아들이 할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모든 우연이 겹겹이 중첩되며 사건의 모든 정황이 무당의 말과 정확히 같은 방향을 향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며 수진은 할아버지의 영혼이 현수에게 빙의되었다는 확신하게 되고, 수진은 침대 아래 부적을 두자 현수는 아무 일 없이 잠을 자게 되는 모습까지 확인한다. 결국 그동안의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가 폭발한 수진은 현수를 기절시키고 칼까지 들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장인 3장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영화는 폭주한다. 현수는 수면 클리닉을 통해 완치 판정을 받게 되지만,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수진은 이전과 달리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각하게 미신을 신봉하게 된다. 방안 모든 벽과 가구를 뒤덮고 있는 부적과 빨간 라이트는 기괴하고 으스스함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블랙코미디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잠>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수진이 현수를 앞에 두고 PPT 발표를 진행하게 한다. 자료 화면 안에는 현수의 나신과 문신으로 보이는 어떤 한자가 보인다. 우리의 눈앞에는 현실 감각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수진이 보인다. 수진은 현수에게 할아버지 귀신이 12시가 되기 전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부터는 우리가 영화에서 본 대로 현수의 빙의인지 연기인지 모호한 연출이 보여지고 두 사람이 잠든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러닝타임이 끝나면 많은 관객들이 영화의 끝에 '현수의 행동이 빙의인지 연기인지'를 이야기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하지만 현수가 보여준 행동의 진실을 이야기하기 전에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우리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돌출된 숏을 면밀히 들여보아야 한다. 바로 '수진이 현수를 앞에 두고 PPT를 발표하는 장면' 말이다. PPT는 설득을 위한 수단이고, 수진은 남편인 현수 혹은 빙의된 아랫집 할아버지를 설득하려 했다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상하다. 러닝 타임의 중간중간에 복선처럼 롯데푸드에서 팀장으로 일하는 수진이 PPT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부적이 잔뜩 붙어있는 집에서 스크린을 펼쳐놓고 발표하는 모습은 분명 생경함, 그 이상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감각은 자료 안에 있는 내용에 의해 발생한 것이기도 하지만, 발표라는 행위성, 그 자체가 유발하는 기묘함이다. ​​​​그녀는 왜 그 순간에 PPT발표를 했는가.

 

ⓒ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가 마주한 비현실적인 상황에 다가가기 위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다. 수진은 대기업 팀장이다. 대기업에서 발표는 그저 발표가 아니다. 부서가 도맡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돈을 얻기 위해선 상대(임원이든 투자자든)를 설득해야 한다. PPT란 진행하려는 사업의 존망이 달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발표 자료 안에는 비전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자료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보았던 수진의 PPT안에는 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비전(퇴마)이 있고, 근거자료(현수의 나신)가 있다. 심지어 현수의 등에는 여전히 굿을 한 문양이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는 도저히 이 광경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단순히 우리 관객이 토테미즘을 믿지 않아서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잠>은 영화라는 사실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오컬트 영화에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오컬트적 근거들은 관객이 극장에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를 믿게 만든다. 하지만 <잠>은 수진이 오컬트의 세계를 절실하게 신봉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관객이 그녀의 행동 동기를 이해하도록 만들었지만(심지어 1장과 2장은 수진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발표의 순간 수진의 설득과 행동은 무력하고 '진정성'만 남는다. 그녀의 진정성은 절실하지만, 진정성은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담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녀의 진정한 동기에 설득되지 않는다.

수진의 실패로 폭로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토대가 얼마나 엉성한가'이다. 예컨대 PPT로 대기업의 인재들이 어마어마한 자본을 이동시키지만, 정말 그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의 세계관이 자본주의이기에 돈을 움직이는 힘은 곧 세계를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세계를 움직여 온 힘의 깊숙한 곳에는 우스꽝스러운 PPT가 있었다. <잠>이 3장에서 시점을 현수로 바꾼 것도 세계관(세계를 바라보는 시점)에 대한 시선을 거울처럼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 롯데엔터테인먼트

<잠>의 재미있는 점은 폭로만으로 영화는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는 데 있다. 영화는 수진이 설득에 실패하고도 현수를 움직이게 만든다. 화장실에 포박해 둔 민정을 포로 삼아서 말이다. 처음부터 설득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선택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타인이기 때문이다. 이 타인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우리를 포악스럽게 물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수진은 현수를 보며 빙의된 할아버지를 퇴마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말이 현수를 향한 말인지 아니면 빙의된 할아버지를 향한 말인지 모호하다. 현수 또한 수진을 대화가 통하지 않는 완벽한 타인의 상태로 인정해버린다. 상호간의 소통 불가능은 서로를 절벽으로 밀어 위태롭게 만든다. 결국, 드릴이 민정의 관자놀이를 파고들어서야 현수는 수진이 원하는 바에 따라 움직인다. 그(현수-할아버지)는 굿을 시작하고 일련의 행동을 수행한 뒤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 입을 연다. "다 끝났어." 현수를 바라보며 수진은 되묻는다. "정말 끝났어?" 우리도 다시 현수를 보며 생각한다. "정말 끝났나?"

<악마의 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1인칭으로 진행하며 '잘 안다고 생각한 타인이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존재였다'는 사실을 전달했다면, <잠>은 타인의 존재를 비튼다.

영화는 수진으로 시작해 현수로 시점이 바뀌고, 현수의 눈으로 수진을 이상하게 바라보지만 마지막에 가서 다시 현수의 말을 믿기 어럽게 만든다. 이 어지러운 전환은 한 방에서 침대를 공유하는 가장 밀접한 존재인 사랑의 상대는 물론이고 자신조차 혼란스럽게 만든다. 시점을 바꾸어 타자를 이해하는 동시에, 시점의 주인공이었던 나조차 타자화 시켜버린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가고자 하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 관객인 우리는 이 두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있지만 우리가 믿어야 할 중심이 부재한 상태이기에 누군가를 온전히 믿기 어렵다. "다 끝났어"라는 대사에 잠시간은 안도할 수 있겠지만, 현수는 수진의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을 기억하며, 수진은 현수가 빙의를 확신했다. 기억의 힘은 강력하기에 두 사람의 삶에 자꾸만 침투해 들어갈 것이다. 영화는 잠든 현수와 수진을 보여주며 끝을 내지만, 결국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격한 불신과 불행을 누구의 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수진은 빙의를 내쫓고자 광기어린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그녀에게 연이어 벌어진 우연은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반대로 현수의 몽유병이 만악의 근원이긴 하지만 여기엔 현수의 그 어떤 의도나 동기도 들어가 있지 않다. 스트레스가 렘수면 장애를 일으켰다는 의사의 말을 빌리면 현수 또한 피해자의 일원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피의자로 지목받아야 하는 것은 PPT를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스템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반복해서 말하자면, 수진은 대기업의 일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며 자식까지 낳은 상태이다. 현수는 자신의 무능함을 비관하며 공인중개사를 공부하려 한다. 이 상황에서 무당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 둘을 키우고 있구만" 할아버지의 빙의가 사실이든 아니든 확실히 수진은 남편을 키우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수진은 엄마인 동시에 가장이다.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와 다르게 움직이는 가정이다.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가 큰 한국에서 어떻게 여성 한 명의 벌이로 가정이 유지될 수 있을까. 심지어 육아가 필요한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직 들여다보지 않은 바깥의 사람들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수진의 엄마가 혼자 주택에 살고 있다는 점을 통해 수진의 경제적인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가 부적과 굿의 영향처럼 수진에게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3장의 시작에서 현수가 육아까지 위탁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부모의 경제 상황을 대물림하는 사정은 민정에게도 일어난다. 아버지가 죽자 이혼한 딸이 아들과 함께 들어가 산다. 이 세 가정 모두 기존의 가부장이란 시스템에서 벗어났지만, 부의 대물림은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서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는 결혼의 고전적인 가치가 완벽한 허구임을 재확인한다.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결혼생활에 자본과 타인에 대한 신뢰가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파악했을 때, 영화의 첫 대사는 의미심장하게 변주된다.

"누가 들어왔어." 그리고 이 대사는 보다 정확하게 다시 고쳐져야 한다. "누가 들어와 있었어."

결혼생활에 얽힌 대물림과 시스템은 두 사람이 오직 두사람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 가정에 침투하게 만들고 영향을 끼치게 만든다. 두 사람이 발을 딛고 설 수 있게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 그리고 이 피해는 두 사람이 오롯이 견뎌야 한다.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정의 삶이 유지되기 위해 외부의 도움이 간절하지만 동시에 이 영향 때문에 불신하게 되는 역설은 결혼에 대한 밈을 떠올리게 만든다. "일단 사과해라, 잘못한 게 없어도." 현수의 경제적 무능력은 수진의 말에 따르게 만든다. 그리고 수진의 집안에 따르게 만든다. 때문에 현수의 마지막 행동이 연기든 빙의든 중요하지 않다. 결혼생활에 있어 사실과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눈앞에 닥친 문제를 우리 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체'하는 것이고, 이 믿음은 둘만의 사랑의 결실이 아닌 결혼을 둘만의 사랑으로 유지할 수 있게끔 한다. 일단 사과하면 현실에서 눈 돌려 꿈을 꿀 수 있다. <잠>의 마지막 잠은 그래서 더 달콤하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

 

ⓒ 롯데엔터테인먼트


Sleep
감독
유재선

 

출연
정유미
이선균
김금순
김남우

 

제작 루이스 픽쳐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4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9.06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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