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잿더미로 만드는 기후 위기라는 불 ['어파이어' #2]
예술을 잿더미로 만드는 기후 위기라는 불 ['어파이어' #2]
  • 김경수
  • 승인 2023.09.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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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아니라 '미래'를 그리다"

올해 8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는 산불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UN사무총장은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의 시대를 선포했지만, 세계적인 이슈가 되지는 않은 듯하다. 살을 익히는 듯한 폭염을 피부로 느끼는데도 보통은 기후 위기라는 단어에는 아직 머나먼 거리감을 느낀다. 그 참상을 보아야만, 아니 <투모로우>(2004) 정도 스펙터클은 되어야만 재난으로 실감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어파이어>는 기후 위기와 멀고도 가까운 인류의 내면 풍경을 그려내는 영화다. 그간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두 남녀의 격정적인 사랑이 담긴 멜로드라마의 문법에다가 유령처럼 배회하는 독일의 역사적 상흔을 그려내는 영화를 찍었다. <어파이어>는 역사가 아니라 '미래를 그린다는 점'에서 페촐트의 새로운 장을 여는 작품이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어파이어>는 오프닝부터 시각과 청각의 불일치를 통해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을 드러낸다. 소설가인 '레온'(토마스 슈베르츠)과 그의 친구 펠릭스(랭스톤 위벨)는 함께 해안가에 있는 별장으로 가는 중이다. 레온은 출판사 사장 헬무트에게 두 번째 소설에 대한 피드백을 들으러, 펠릭스는 포트폴리오에 쓸 사진을 찍으러 간다. 문득 자동차가 고장이 나고, 펠릭스는 인근에 그 별장이 있는지 확인하러 간다. 레온은 펠릭스가 사라진 숲에 홀로 서 있다. 어두컴컴한 숲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하다. 정체 모를 짐승의 소리, 헬리콥터가 오가는 소리 등 여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소리가 어디서부터 들리는지 보려던 즈음에 레온의 뒤로 펠릭스가 등장한다. 별장의 거리도 “생각보다 가깝다”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페촐트는 오프닝부터 자연과 기계 등 비-인간 행위 주체가 인간의 시각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드러낸다.

<어파이어>의 서사는 단순하다. 감독이 바캉스 영화라고 부르듯, 이 영화는 길어봐야 일주일 동안 휴가지에서 생긴 일을 다룬다. 레온과 펠릭스는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나디아(파울라 베어)가 펠릭스의 별장에 함께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레온은 두 번째 소설이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어서 모든 것에 예민하다. 레온은 해안에 놀러 가자는 펠릭스의 제안에도 짜증과 소설 걱정이 한창이다. 무엇보다 그를 짜증나게 하는 것은 특히 새벽마다 윗 층에서 성행위를 하는 나디아의 소음이다. 레온은 그 소음이 싫어서 밖에서 잠들면서도 의문에 싸인 나디아를 궁금해한다. 레온은 이틀 뒤 새벽, 별장을 어슬렁거리는 구조요원 데이브(엔노 트렙스)를 보고 그를 나디아의 남자친구라 의심한다. 데이브는 곧장 펠릭스와 친해져 나디아와 셋이 함께 어울리게 된다. 레온은 바쁘다는 이유로 그 셋 사이를 겉돌 뿐이다. 더군다나 레온은 나디아와 헬무트로부터 악평까지 들어서 정신이 완전히 붕괴된다. 그날 헬무트는 나디아와 레온, 펠릭스, 데이브까지 다섯이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진다. 이때 산불이 번지기 시작하고, 이 다섯에게는 각자의 파국이 들이닥친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어파이어>를 구상할 당시에 '에릭 로메르 영화와 체호프의 단편 소설을 보았다'고 말한다. 영화에는 둘의 스타일이 영화에 강하게 뒤엉켜 있다. 페촐트는 인터뷰에서 독일에는 바캉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드물기에 이 영화를 찍게 되었다고 한다. 가령 로메르의 <사계절 이야기> 연작에서 반복되는 자연 풍경, 우연적인 만남과 어떠한 가치를 논하는 인물 사이의 철학적인 대화가 그러하다.

특히, 페촐트는 레퍼런스로 이야기한 체호프의 단편 『메자닌이 있는 집』에서 '집 인근에 산불이 번진다'는 배경을 주로 가져온다. 더욱이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에서도 '철거로 무너지는 벚꽃 동산의 이야기'가 그려지는데, '자연 풍경이 무너진다'는 설정은, 그의 소설 전반에 반복되는 '자연의 무심함'과도 이어져 있다. 체호프 소설에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자연은 인간과 별개의 논리로 움직이기에 인간사에 무심하고 거기서 아름다움이 깃든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서 구로프가 호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순간이 그러하다. 그의 소설에서 자연의 파괴는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유토피아의 파괴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모티프 중 하나인 범속성(평범하고 속된 성질)이라는 주제와 사랑하는 여성이 떠난 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각한다는 구조도 여기서 비롯한다. 페촐트는 두 이야기를 기후 위기의 맥락으로 이야기한다. 로메르와 체호프에게 자연은 윤리적인 삶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레온이 두려워하는 것은 작가로의 자아를 상실하는 상황이다. 그가 블루칼라라 할 수 있는 데이브에게 화내는 이유도 본인이 어렴풋하게 느끼는 공포를 거기에다가 투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나디아에게도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 점원 가게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프랑스어와 러시아어에서 평범과 악은 같은 어원을 지닌다. 체호프 소설은 이 평범함을 악으로 여기는 지식인이 참회하고 범속성이 지배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어파이어>는 체호프의 주제의식을 한층 더 심화한다.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레온의 나르시시즘과 영화가 대비를 이루어서다. 나르시시즘은 물웅덩이에 비친 자신에게 반해서 죽은 나르키소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단어다. 레온은 시종일관 그가 쓴 텍스트를 마주하고 있다. 철학자 김상봉은 나르시시즘이 서양의 시각적인 사유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상대방을 눈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존재로만 두려는 사고가 상대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가두는 나르시시즘과 이어진다. 이는 한편으로 레온이 나디아의 학력을 듣고 놀라듯이, 학력 등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상대방을 볼 수 있는 지식의 오류로 이어진다.

레온이 상대를 오해할 때마다 영화는 레온의 시점에 이입한다. 레온이 볼 수 있는 시각적 오류를 관객에게 드러내면서도 청각으로 분명히 둘 사이에 어떠한 대화가 오갔는지를 드러낸다. 레온이 헬무트와 나디아가 병원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는 순간에 이 둘 사이의 연출이 두드러진다. 레온은 볼 수 있되,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존재다. 그에게는 오로지 시각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어파이어>는 사운드스케이프를 통해서 시각과 청각의 대결을 일으킨다. 끝내 청각적 사고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벌레와 기계 등 레온의 세계에 침투하게끔 해서다. 벌레와 기계, 산불 등 화면 너머에 있는 것은 인간의 시각으로 다 가늠하기가 힘들다. 특히, 레온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옥상에 올라가 산불을 마주할 때, 카메라는 산불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는다. 산불은 그저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붉은 하늘로 드러날 뿐이다. 이를 텅 빈 이미지나 불안의 외재화로 보아도 되겠지만 되려, 레온의 청각적 세계에는 모든 것이 과잉되어 있다. 이는 기후 위기를 과잉객체(hyperobject)라고도 부르는 최근의 인류세 담론으로도 이어져 있다. 기후 위기는 그 흐름도, 그 크기도 가늠하기가 힘든 무한의 대상이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페촐트의 영화를 흔히들 멜로드라마로 이야기한다. 통속적이면서도 과잉된 정념에 사로잡힌 남녀의 사랑이 그의 필모 전반에 반복된다. 다만, 멜로드라마는 감정으로의 사랑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되려 너무도 선명한 둘의 사랑을 가로막는 사회적, 심리적인 장애물을 전면에 드러낸다. 멜로드라마의 사랑은 시련의 크기에 비례해 폭발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전작인 <운디네>(2021)에 이어서 멜로드라마라의 원형을 그대로 쓴다.

<어파이어>에서 레온이 마주하는 것은 나디아다. 별장에 간 첫날에 나디아의 방을 샅샅이 뒤져서 그녀가 새벽에 성행위를 할 때 들은 음반을 몰래 듣는 등 레온은 분명 처음부터 나디아를 짝사랑한다. 이는 체호프가 『메자닌이 있는 집』에서 화가가 처음 리디아에게 반한 순간을 오마주한 것이다. 페촐트의 영화에서 동독과 서독의 역사, 아우슈비츠 등 역사적 사건이 빗대어 드러난 데에 비해서, <어파이어>는 다른 논리 구조를 지니고 있다. 특히, 둘의 사랑은 역사적 상흔을 치유하는 상상적인 치유로 나아간다. 이 영화는 나디아를 짝사랑하면서도 외면하는 레온의 이야기를 기후위기를 외면하는 우리의 나르시시즘으로 빗댄다. 그리고 이 로맨스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라는 비관주의로 나아간다. 헬무트에게 박사 학위 논문으로 하이네 시에서의 사랑의 진동을 쓰는 나디아는 『아스라』를 낭송한다. 아스라는 사랑을 통한 상상적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사랑하면 갈망에 죽고 마는 아스라. 이는 이미 나디아는 이 사랑의 운명을 직감하고야 만다. 이제 사랑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어파이어>의 가장 문제적인 장면은 후반에 등장한다. 헬무트(마티아스 브랜트)가 소설가 레온(토마스 슈베르츠)의 신작을 낭독하는 나레이션이 나오는 장면이다. 헬무트의 나레이션이 시작되는 순간은 레온에게 여러 파국이 잇따라서 생긴 순간부터다. 헬무트가 암에 걸리고, 레온은 짝사랑하는 나디아(파울라 베어)와의 관계를 어그러뜨린다. 마지막에야 제 마음을 나디아에게 뒤늦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실패한다. 그때 번지는 산불을 끄러 경운기를 몰고 간 펠릭스(랭스톤 위벨)와 그의 애인 데이브(엔노 트렙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나디아와 이 둘의 시체를 확인하러 경찰서에 간다. 레온은 펠릭스와 데이브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죽은 것을 보고는 폼페이 유적을 생각한다. 헬무트의 나레이션은 눈앞에 그려진 이미지와 시간대가 일치하지 않는다. 레온이 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쓴다고 할 때, 이 이야기를 쓰는 데에 얼마만큼 시간이 걸린 것인지 정확히 진술되지 않아서다. 그저 머나먼 미래라는 것만이 암시될 뿐이다. <어파이어>는 어쩌면 처음부터 미래 시제에서 쓰인 이야기일 수 있다.

더 과감히 상상해보자. <어파이어>의 공간은 천국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나레이션의 활용은 <트랜짓>(2018)에서도 등장한 것이다. <트랜짓>은 안나 제거스의 『통행비자』에 등장한 1940년대 망명객의 이야기를 현재형으로 쓰는 영화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자동차는 모두 현재의 것이다. 그러나 <어파이어>는 미래형이다. 페촐트의 유령은 두 인물이 이미지를 두 눈으로 보는 데에는 성공해도, 그 실체가 거기에 존재한 적 없다는 스산함으로부터 나온다. 나디아가 유령으로 등장한 순간에 영화는 곧장 끝난다. 그 이름을 부른다든지, 그 존재를 보러 나간다든지 하는 리액션도 없다. 그저 나디아가 유령이 된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난다. 예술은 거기서 끝난다. 예술을 잿더미로 만드는 기후 위기라는 불에 불타버려서.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엠엔엠 인터내셔널

어파이어 
Afire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트
Christian Petzold

 

출연
토마스 슈베르트
Thomas Schubert

랑스톤 위벨Langston Uibel
폴라 비어Paula Beer
마티아스 브란트Matthias Brandt
요나스 다슬러Jonas Dassler
엔노 트렙스Enno Trebs

 

수입|배급 엠엔엠 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9.13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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