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 참을 수 없는 정체성의 무거움
'한 남자' 참을 수 없는 정체성의 무거움
  • 김경수
  • 승인 2023.09.23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체를 숨겨야만 살아갈 수 있다"

<한 남자>(2021)가 전작<우행록:어리석은 자의 기록>(2018)에 이어서 베니스 오리종티 부문에서 초청되면서 '이시카와 케이'는 주목받는 일본의 젊은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하지만 이시카와 케이는 하마구치 류스케와 미야케 쇼, 후카다 코지 등 일본의 뉴웨이브 감독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이시카와 케이는 철저히 장르 영화의 틀에서 머물러 있는 감독이다. 사회파 추리 영화로 제작된<한 남자>도 마찬가지다. 츠마부키 사토시, 안도 사쿠라, 구보타 마사타카 등 국내에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일본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데다가 원작자는 일본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다. 이 영화는 상업 영화의 흐름과 재미를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깊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차분한 톤으로 담는다.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 남자>는 어떤 남성이 바에서 누군가에게 사건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액자 형식으로 제작된 영화는 곧장 '리에'(안도 사쿠라)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리에는 아이와 아버지를 연달아 떠나보낸 뒤에 거기서 생긴 마음의 상처로 인해서 남편과도 이혼해 있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작은 문구점을 운영한다. 그녀가 기댈 곳은 아들 유토뿐이다. 리에는 그 문구점을 매일 들락날락거리는 남자 다니구치 '다이스케'(쿠보다 마사타카)가 마음에 걸린다. 그는 마을에서 임업 노동자로, 과묵하고도 친절한 성격으로 환영받는다.

리에와 다이스케는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되어서 마음의 상처를 서로 고백하고 부부로 지낸다. 다이스케는 이윽고 나무에 깔리는 사고로 죽는다. 그의 1주기가 되는 날에 다이스케의 형인 다니구키 쿄이치가 그의 영정 사진을 보더니 다이스케가 아니라 이야기한다. 리에의 이혼을 도운 적이 있는 변호사 기도(츠마부키 사토시)가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남편인 줄 안 다이스케는 X로 불리기 시작하고, 리에와 기도는 남편의 정체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기도는 재일교포 3세로 어딜 가든 미시적으로 차별당하고 있기에, 이름을 교환하면서까지 정체를 숨기려고 한 X에게 깊은 연대감을 느낀다. 기도는 SNS 등을 동원해 다이스케의 전 여자친구 미스즈부터 시작해, 온갖 사람을 만나고 X를 둘러싼 큰 비밀(연쇄살인마의 아들로 낙인찍힌 자)을 알아차린다.

<한 남자>는 원작의 플롯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뼈대가 되는 플롯을 그대로 이어가되, 영화로 다루기에 잡다한 에피소드를 제거한 편이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원작에서는 오프닝에서 등장하는 회화를 영화 엔딩에 삽입하는 선택이다. 바로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복제」다. 정장 차림의 남성이 거울에 비친 그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을 그린 작품이다. 실현이 불가능한 이미지다. 거울에서 우리는 거울을 보는 우리 자신의 얼굴만을 볼 수 있어서다. 이 이미지는 소설과 영화 둘 다에서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원작에서 마그리트의 그림은 작품 전체를 보는 틀로 작동한다. 이 그림을 틀로 앞으로 쓰일 이야기를 해석하기를 바라는 셈이다. 반면에 영화에서 마그리트의 회화는 기도가 한 이야기의 결론이다. <한 남자>는 소설 『한 남자』의 시작을 결론으로 만든다. 여기가 원작의 메시지가 정반대로 뒤집히는 지점이다. 물론, 장편 소설이 영화로 각색될 때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지만, 소설 『한 남자』의 수많은 서브플롯이 중첩되어가면서 생기는 원작의 감흥이 사라져 버렸다.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 남자>는 재일교포 기도의 이야기를 전면으로 드러낸다. 재일교포는 일본 영화에서 가장 진보적인 소재 중 하나이기도 하고, 이를 소재로 하는 자체가 일본 우익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과거에도 오시마 나기사 등 급진적인 좌파 감독의 핵심 주제이기도 했다. 다이스케의 이야기와 기도의 이야기를 잇는 데에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도, 이 둘 사이의 접점을 충분히 이미지화한다. 바로 TV와 신문을 통해서다. 기도와 다이스케는 둘 다 이제야 막 결혼생활을 시작한 터다. 기도는 촉망받는 직업 중 하나인 변호사로, 다이스케는 정체를 숨긴 채로 익명의 노동자로 살아간다. 또한 본인이 누구든지 간에 사랑할 둘은 어쨌든 본인의 정체를 숨겨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데에서 이어져 있다. <한 남자>는 둘 사이의 정치적 연결고리를 마련하나 여전히 피상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

원작은 이를 실존적 차원에서 이야기한다. 원작인 『한 남자』에서 기도와 다이스케의 존재론적 불안을 일으킨 것은 SNS다. SNS에서 타인에 의해서 해석되는 수많은 나가 내가 누군지 정의하는 데에 혼란을 준다는 식이다. 또한 인터넷에서는 그 개인을 둘러싼 정보가 소멸되지 않기에, 개개인의 삶을 절대 잊히지 않게 한다. 이는 한 개인의 자아를 붕괴하게끔 하는 요인이다. 과거가 축적되어서 생긴 나 자신은 더는 현대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다. 개개인의 자아는 단절된 프로필의 나열로 대체될 뿐이다. 이는 여러 정치적 문제를 일으킨다. 다이스케가 북한에 납치되었다든지 하는 혐오 재생산이 대표적이다. 이는 조선인이 관동 대지진 당시에 독을 풀었다는 가짜뉴스가 지금도 반복된다는 주제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도 이를 TV에 넌지시 드러내기는 한다. 기도가 변호사 배지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변호사 배지야말로 그의 정체성을 하나로 고정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이를 조금 더 드러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원작은 스마트폰과 SNS 등 매체가 만드는 존재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정치적 사유를 도출한다.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 남자>는 정반대로 시작한다. 곧장 정치적인 여러 이슈가 한 개인을 불안하게끔 한다고 보는 식이다. 이는 일본 사회 전반에 깔린 매뉴얼 문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이상일의 <유랑의 달>(2020)도 비슷한 주제의식을 공유한다. 일본은 질서 중심적인 사회로, 한 개인이 자신이 속한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는 감수성이 관통해 있다. 영화가 건드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살인마의 아들은 살인마의 아들대로, 다이스케는 다이스케대로 살아야만 한다. <유랑의 달>이 (홍경표 감독의 유려한 촬영으로) 일그러진 광각 렌즈로 인물을 드러낸다면, <한 남자>는 정반대로 폐쇄적인 일본 사회를 드러내고자 좁디좁은 공간을 프레임으로 연출한다. 다만, <한 남자>는 '일본의 폐쇄적인 문화가 타인의 인생을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드러내나 정치적 쟁점으로 데려가지는 않는다. 이러한 문화로 인해서 개개인의 정체성이 분해된다는 감독의 배치는 원작의 보편성을 특수적인 차원으로 끌어다 내린다. 오히려 원작에서 파편처럼 등장하는 여러 이슈가 더 매력적이라고 느껴진다.

영화의 장르는 미스터리이지만 사건만 나열된 나머지 그 사건 너머의 감정이 생략되어 있다는 단점도 있다. 특히나 다이스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둘러싼 체육관 관장 등 여러 캐릭터의 반응이 지극히 개인적일뿐더러 기도를 둘러싼 여러 맥락이 툭툭 끊겨 나가서다. 거기다 기도와 기도의 아내 사이의 관계가 소원한 것이 기도가 3.11 동일본 대지진 봉사를 하러 가서라는 맥락이 사라져버려서 관객이 이 둘의 관계를 깊이 사유할 틈이 없다. 또 기도를 비웃고, 다이스케가 두 번씩이나 제 정체성을 전환할 수 있게끔 도운 브로커의 존재도 그러하다. 브로커는 말 그대로 차별을 과장하고 연극적으로 드러내고자 등장한 캐릭터에 가깝다. "왜 있는 그대로 못 보냐"는 브로커의 언술은 이중적으로 읽히기보다 너무도 직접적인 정치적 이슈를 지칭하게 된다. 이처럼 정치적 주제를 이야기하는 데에 급급해, 현대인의 파편적 자아를 설명하는 데에는 정작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다. <한 남자>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그저 서로서로 외면하는 사회를 암시하는 장치로만 그려낸다. 안타깝게도 원작은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프로필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데에 비해서, 영화는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에서 겨우 일본 문화에 깃든 전체주의로 이어지는 억압을 고발하는 데에 그친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기도는 다이스케를 흉내내게 된다. 이는 원작 중간에 등장하는 장면이고, 이를 원작의 도입부와 이어서 만든 숏이다. 이는 감독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이는 정치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현대인의 초상일 것이다.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를 보고 눈물이 흐른 것은, 우리 모두가 상대의 과거 일부를 잘라다가 낙인찍기를 하는 문화에 중독되어가고 있어서다. 이 영화는 잠시나마 그것을 돌아보게끔 한다. 우리는 가끔 정치적이든, 정체성을 지니든, 주홍글씨가 적히든 잠시나마 거기서 벗어나고자 한다. 참을 수 없는 정체성의 무거움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대체하는 잠깐의 순간이 필요한 셈이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한 남자
A Man
감독
이시카와 케이
Ishikawa Kei

 

출연
츠마부키 사토시
Tsumabuki Satoshi
안도 사쿠라Ando Sakura
쿠보타 마사타카Kubota Masataka
세이노 나나Seino Nana
마시마 히데카즈Mashima Hidekazu
코야부 카즈토요Kazutoyo Koyabu
야마구치 미야코Miyako Yamaguchi
키타로Kitaro

 

배급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2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9.30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