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9월 12일
[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9월 12일
  • 이상용
  • 승인 2023.09.22 12: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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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그날을 떠올려봐요"

"Try to remeber the kind of September"

하도 많이 리메이크된 노래 중 하나인지라 오리지널이 헷갈리기도 하지만(검색해 보니 성시경 버전이 뜬다. 여명 버전은 희미하게 기억하고, 나나 무스쿠리 버전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모두 오리지널은 아니다.) 노랫말처럼 "9월의 그 날을 떠올려 봐요."라고 한다면 이제 더위가 될지도 모르겠다. 여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 영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얼마 전에 아트나인에서 열린 정지영 감독님의 회고전 오프닝에 다녀왔다. 개인적으로 리셉션 행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감독님이 보내주신 문자와 이런저런 상황이 겹쳐서 참가해 보기로 했다. 덕분에, 그리고 간만에 많은 (아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영화제 규모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여전해 보이는 정지영 감독님 이상으로 반가운 것은 오프닝 작품이었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거의 30년이 다 되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마주했다. 

영화가 일종의 거울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적인 차원에서 개인(관객)과 스크린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한 사회의 집단 무의식이나 대중의 욕망을 반영한다는 '반영(거울)이론'에 따른 통찰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두고 거울 운운한 것은 30년의 시차와 과거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30년 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흥미로움과 지금의 내가 영화와 마주했을 때 어떤 차이가 일어나는가? 

이때의 스크린이라는 거울은 투명하게 반사하는 거울이 아니다. 어딘가 닮아 있지만 불투명하고 모호한 채 나를 비춘다. 불투명한 가운데도 유달리 눈길을 끄는, 투명하다고 착시를 일으키는 부분들이 보인다. 그곳을 응시하면서, 어쩌면 세상의 모든 영화는 불투명하고 모호한 것인데, 어느 곳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마치 투명한 것처럼 '비평'을 적어내려갔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30년의 시간은 거울의 다른 곳에 텅 빈 공백으로 있음을 보여준다. 그 작품의 빈 곳이 유달리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 다만 거울을 보는 내가 달라진 것이다. 그것이 모호한 거울, 영화의 실체다. 불투명성은 시간을 달려 우리를 스크린 속으로 삼투시킨다.

여전히 좋은 장면은 좋았고, 좋지 않은 장면은 좋지 않았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좋은 장면은 학창시절이다. 할리우드 키드인 임병석의 성인 버전은 최민수이지만 학생 버전은 김정현이 맡고 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식으로 방앗간집 아들이자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된 윤명길의 성인 버전은 독고영재지만 학생 버전은 홍경인이다. 이듬해 개봉한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까지 홍경인은 이 시기에 작두를 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면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친구들 역시 준수한 조연을 소화해 낸다. 이들이 모여 극장에 몰래 들어가기 위해 온갖 작당을 벌이는 장면은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도 한국영화의 향수이자 그 시절에나 가능했던 낭만으로 남을 것이다.

 

ⓒ 영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오늘날의 작당은 이러한 방식이 아니라 온갖 할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각 사이트의 영화관 쿠폰, 카드사의 결제 할인, 핸드폰 사용자에 따라 제공되는 월별 관람권 등 복합적인 결제 방식이나 제공되는 쿠폰으로 영화 관람을 선택한다. 한때는 여기에 조조할인을 더하면서 거의 공짜로 들어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카드 사용의 급증과 멀티 플렉스가 팽창하던 시기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과거의 영화광들이 무조건 몰래 들어간 것만은 아니다. 병석도 유사한 방식을 친구들에게 알려준 적이 있다. 영화 포스터나 광고를 거리나 식당에 마구잡이로 붙이던 시절에 식당에서 붙여주는 영화 포스터마다 쿠폰이 붙어 있었고, 이를 일정하게 모으면 영화 한편을 볼 수 있다고 비법을 자랑한다. 오늘날 커피 쿠폰 모아 커피를 마시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아무튼 영화를 싸게 혹은 공짜로 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시대의 방식 속에서 찾아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극장에 몰래 들어가는 일은 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그러한 사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출입구에서 티켓을 확인하는 이들이 없을 때도 꽤 많다. 널리 소문이 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드물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과거와 현재의 또 다른 차이는 과거에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누구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좋아함이 그것만이 전부라는 절대성의 영역에 가깝다면 후자의 좋아함은 N분의 1이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같은 단어'에서 일어난 의식의 변화와 현상을 통찰하는 일은 드물다. 최근의 사례를 언급하면 <너의 이름은>(2016)을 최애 영화라고 말하던 사람에게 <스즈메의 문단속>(2023)을 보았냐고 물어보았을 때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브레송의 <소매치기>(1959)를 좋아한다면서 <사형수 탈옥하다>(1956)를 보지 않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요즘의 풍토는 <너의 이름은>은 <너의 이름은>이고, <스즈메의 문단속>은 <스즈메의 문단속>일 뿐이다. 영화라는 것의 '연결'이 사라지는 가운데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연결'이 본질임을 설파하고 있지만 뭐…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영화관람 풍경이 개인적으로 더 실감났던 이유는 물리적 장소인 '극장'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극장이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고,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영화는 방송 검열에 의한 삭제와 검열이 만만치 않았다. 물론, 극장 검열도 극악한 측면이 있었지만 ― 임권택 감독의 <아벤고 공수군단>(1982)을 초등학교(정확히는 국민학교) 단체 관람으로 보았을 때 정윤희 배우의 뒷모습이 전라로 노출되는 장면에서 스크린의 불을 어둡게 조정해서 검열하던 순간이 기억난다. 고학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 켜요!"― 흐릿하게나마 오리지널을 가까이 봤다는 자족적인 만족감이 있었다. "영화를 본다."라는 말보다는 "극장에 간다."라는 앞서던 시절이었다. OTT 시대에는 극장에 간다는 말이 무용해진다.

극장은 사건의 장소인 동시에 사고의 장소이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몰래 영화를 보려고 하다 도망을 치던 중 친구들 중 하나가 추락사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이 장면의 묘사를 보고 어떤 이는 "거봐, 인터넷이 안전해! 싸고, 확실하고."라며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장면이 힘을 주는 것은 죽음의 비극이 아니라 극장이라는 장소에 있다. 영화에 빠진 아이들에게 극장은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가야하는 장소였다. 실상, 극장은 모든 금기가 집약된 장소였다. 담배, 섹스, 미성년자 관람불가, 마릴린 먼로의 치마가 들춰지는 장면까지 그곳에는 세상의 금기와 욕망이 모여 있었다. 이러한 태도로 극장을 바라보는 영화 중 하나가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1988)이다.  

그러니까,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은 이 시절의, 한국의 '시네마 천국'인 셈이다. 그리고 토토가 영화감독이 되었듯이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속 인물들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녀 주인공이 나오는 러브 스토리임에는 분명하다. 이 무렵부터 영화 속에 여학생이 추가된다. 동시에 청춘과 영화라는 항목이 형성된다.

 

ⓒ 영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영화가 젊음과 관련을 맺는다는 것은 많은 작품들이 반복해서 고백한 것이다. 영화 속 장면을 흉내내는 <몽상가들>(2003)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감독들이 영화에 대한 사랑과 청춘 시절의 사랑을 겹쳐서 고백해 왔다. 그 가운데는 혁명의 기운도 있다. 무라카미 류의 원작을 바탕으로, 이상일 감독이 만든 <식스티 나인>(2004)에서는 고다르와 트뤼포 흉내를 내면서 영화를 찍는 장면이 등장한다. 

<식스티 나인>은 유럽으로부터 불어온 프랑스 68혁명에 대한 로망을 흉내내는 것과 고다르 흉내내기를 겹쳐서 그려내고 있는데,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미국으로 가겠다는 병석의 모습은 할리우드에 대한 환상으로만 가득 차 있다. 68혁명에 대한 모방이 나을지, 아메리칸 혹은 할리우드 드림에 대한 환상이 나을지는 세밀하게 따져봐야 하는 문제이겠지만,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영화를 둘러싼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감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럽 영화를 흉내내며 가려했던 한국의 본격적인 영화 감독은 '하길종'이다. 1970년대의 청바지와 포크송(통기타로 대변되기도 했다) 세대에 속했던(이것은 미국의 60년대 말 반전 운동과 우드 스탁과 히피 세대의 모방이다) 하길종은 파졸리니의 <테오레마>(1968)를 참조하여 <화분>(1972)을, 안토니오니의 <확대>(1966)의 결말 장면을 <속 별들의 고향>(1978)의 오프닝 장면으로, <속 병태와 영자>(1980)의 구조와 약혼식장에서 연인을 데리고 도망치는 장면을 유럽 영화에 영향을 받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대표작 마이클 니콜스의 <졸업>(1967)을 가져와 사용한다.  

냉정하게 본다면 표절 시비에 걸릴 만한 것들이 다분하지만, 유신 시대의 억압적인 현실과 영화 현장의 상황 속에서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노골적인 장면의 인용을 통해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다. 격문을 쓰던 하길종 감독의 문장투를 빌리자면, “그따위 영화를 만들 것 같으면 파졸리니든, 안토니오니든, 니콜슨이든 차라리 베끼란 말이다.” 쯤이 되지 않을까.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가장 궁금할 수밖에 없는 대목은 작품의 대사는 물론이고 한 장면, 한 장면을 고스란히 말로 옮길 수 있었던 영화광들은 어떻게 성장했을까하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보여주는 통찰은 크다. 그들은 결코 제대로 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병석은 성인이 되었지만, 군복무를 거부하며 지방을 떠돌며 숨어지내거나 군대의 폭력으로 인해 정신병원에서 보내며 현실도피적 삶을 맞이한다. 정신병원에서 지내던 병석은 한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그것은 충무로를 전전긍긍하던 명길의 손에 쥐어지고 이 작품은 흥행과 찬사를 동시에 이끌어 내며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온갖 부문의 상을 휩쓰는 걸작이 된다.

하지만 영화 혹은 두 사람을 향한 찬사가 절정에 달할 무렵 명석은 뒤늦게 진실을 발견한다. 식당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던 영화를 보던 명길은 병석의 시나리오가 온갖 영화들의 짜집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텔레비전 속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 표절을 의심하는 명길의 모습은 그다지 설득되지는 않지만(그 정도로 알아차릴 수 있다면 진작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할리우드 키드들은 자신들이 매혹된 영화에 빠진 나머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안정효의 원작 소설이든, 정지영의 영화이든 두 작가가 공통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영화 혹은 극장은 청춘의 해방구이자 새로운 꿈을 꾸게 했던 장소였지만 이들은 영화 혹은 극장을 끝내 '우상'으로 만들었고, 섬겨 버린 탓에 영화가 무엇인지를 망각했다는 씁쓸한 현실 인식이다. 그곳에는 자신들만의 문화(영화)가 없다. 충무로 키드가 합심하여 만든 영화는 사람들에게 신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이르지만 진실은 자신들의 우상 혹은 과거를 짜집기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문화(영화)를 만드는 일은 우상을 파괴하고, 신의 죽음을 선언하며,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일일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를 통과했던 안정효 작가와 정지영 감독이 다뤘던 것은 우상에 속아 신이 되어 버린 남자들의 비극이다. 그것은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에서 모범생 주인공이 친구를 동경하게 되고, 이소룡을 흠모하면서 그 흉내를 내다가 무너져버린다는 결말과 상통한다. 충무로 키드들은 교복을 입고 군부독재 시절의 한 가운데서 영화를 만나게 되고, 영화를 통해 아버지(권위)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어느새 영화가 이들의 이상한 아버지가 되어 버렸다는 결론이다.

 

ⓒ 영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권위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을 추가해 본다. 과연 병석의 시나리오가 단순히 '컨트롤 C+V'를 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복제란 무엇인가? 발터 벤야민의 가장 유명한 글 중의 하나인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상당 부분 오독하는 경우 중 하나가 영화의 등장으로 인해 '아우라'의 붕괴가 일어나는 현실을 벤야민이 비판했다는 식의 읽기다.

전혀 그렇지 않다.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 작품』은 독일어로는 3번이나 쓰여졌고, 별도로 작성한 프랑스어 판본도 있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3판본이 쓰여진 1930년대는 히틀러가 기세를 떨치던 시기였고, 벤야민은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복제 덕분에 더 이상 오리지널이 중요해지지 않은 시대가 왔음을 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리지널의 아우라는 권위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판본에 추가된 '부기'에는 '총통 숭배'라는 현상에 대해 쓰고 있으며, 벤야민은 정치를 예술화 하는 총통의 프로파간더 전략에 맞서 예술을 정치화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 예술의 정치화는 정치의 예술화에 맞서기 위한 방책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권위에 맞서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복제'다. 그것은 더 이상 원본(original)을 중시하지 않는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완성된 영화가 병석의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카피를 하였으며, 이를 통해 세상을 조롱하거나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자신의 동경을 조소하는 것이었다면(명길이 짜집기에 대한 사실을 알았을 때 보였던 반응은 자신을 조롱한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것이 병석의 목표였다면 어땠을까? 세상에 대한, 충무로에 대한, 한국 사회에 대한 조롱. 너희들은 이 짜집기 영화에 작품상을 주느냐는 조롱이 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이 작품은 어마어마해졌을 것이다. 연민의 결말이 아니라 조롱의 결말이 보여주는 힘.) 그것은 예술의 정치화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현실보다 영화를 선택한 이들은 그저 도피처에 안주하였고, 끝내 영화의 예술화가 아니라 새로운 아우라라 부를 수 있는 '영화의 권위(아우라)'에 빠져버렸다. 벤야민은 이를 두고 '사이비 아우라'라고 부른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권위를 둘러싼 우상에 대한 탐구다. '우상의 시대.' 이 말은 꽤 오랫동안 한국 문학과 일부 한국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한 주제가 된다. 아마 제대로 된 편집본이 나왔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를(가정법은 참으로 부질없다) 이수진 감독의 <우상>(2019)이 탐구하려고 했던 점이다.

아무려나 이 시절로부터 한참을 지나버렸고,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개봉한지 거의 3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시대를 둘러쌓고 있는 공기임을 절감한다. 

결국, 바라보던 스크린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거울은 불투명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핑계일지 모른다. 내 앞에 거울이 있다면 그 거울은 깨어져야만 한다. 그래야 새로운 거울을 찾거나 만들 수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노센트The Innocents> 에스킬 보그트|2021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꽤 흔한 제목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을 포함하여 이 제목을 달고 있는 영화들이 여럿 지나간다. 영화를 보면서도 특별함을 느끼지 못한다.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영화는 한 가족이 외곽 지대의 아파트로 이사 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다와 안나 자매와 그들의 부모가 있다. 안나는 자폐다. 이다는 그러한 언니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언니로 인해 자신이 돌봄의 대상에서 소외되는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이다는 아파트 공원 놀이터 그네 위에 언니를 둔 채 여기에 사는 소년 베냐민과 어울려 다닌다. 이 소년은 주변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북유럽의 이민자 가족의 일환으로 보인다. 베냐민은 이다를 만나자 신이 난 듯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보여준다. 병뚜껑에 집중을 하여 이동을 시킨다. 이 놀이가 끝나자 길에서 만난 고양이를 잡아(아이샤라는 또 다른 아이가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 높은 곳에서 떨어뜨린다. 그래도 죽지 않자 발로 고양이를 학살한다. 이다는 베냐민의 모습에 섬뜩함을 느낀다. 

엄마와 살고 있는 아이샤는 백반증이 있는 소녀다. 아이샤는 홀로 있는 안나에게 다가가 마음을 읽는다. 나중에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이용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안나가 말을 할 수 있도록 이끌기도 한다. 베냐민의 능력이 다른 사람을 조정하거나 사물을 움직이는 능력이라면 아이샤의 능력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이다는 특별한 능력이 없다. 그런데 아이샤가 베냐민의 마음을 읽고 나서는 말하기를 꺼린다. 아이샤는 베냐민이 아파트 곳곳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사건을 저지를 때마다 이를 가장 먼저 느끼는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 속 아이들의 초능력은 일종의 놀이처럼 시작된다. 하지만 베냐민이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지고, 아이샤를 중심으로 이를 막으려는 소녀들이 결성된다. 굳이 비유하자면 <엑스맨>의 현실버전이나 북유럽 아이들 버전이다. 주변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에 이들의 능력을 탐하거나 지배하고자 하는 일은 없다. 그랬다면, 자연스럽게 장르물로 전환이 되었을 것이다. 그저 아이들 세계에서 벌어진 초능력이고, 이를 통한 대결 구도가 펼쳐진다. 

이 영화를 두고 아이들에게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공포를 이야기하는 것은 피상적인 진단이다. 그것은 '아이들은 순수하다'는 관습을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아이들은 가치 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들이 어떻게 능력을 지니게 되었고, 이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 폭력과 살해 그리고 대립과 전투의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거나 설득하는 일이다.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는 존재가 어떻게 기이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가 하는 것이 드라마가 되고, 이들이 벌이는 사태가 세계의 경이로움이 되며, 이 작품이 흥미로울 수 있는 가치가 된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그러나, 이 작품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 그리고 이 힘을 그토록 폭력을 향해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피상적으로 던져진다. 이러한 방식은 동시대 영화(마블이든, DC이든)보다는 웹툰이나 웹소설에 가깝다. 그냥 생겨났다. 이 "그냥"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논리적인 드라마'는 불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의 개연성이라 불리는 논리가 필요한 것은 이를 통해 이 세계의 불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변해버린 아이들에 대한 어떤 감정이 들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만이 마지막의 초능력 대결 장면이 일정한 '파토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대결 장면을 보면서 피상적인 선악구도 이외에 소년에 대한 연민도, 자매의 협력도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물론 파고들면 희미하게 아이들을 둘러싼 세계의 그림이 있다. 한국의 아파트와는 달리 유럽의 아파트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선택지다. 영화 속 인물 중 안나와 이다를 제외하고는 편모슬하다. 베냐민은 주변 남자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심지어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막 깨어난 초능력을 사용해 복수를 가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글쎄? 이 복수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베냐민의 괴로움이라는 것, 고통이라는 것도 몇몇 단순한 장면으로 던져질 뿐  폭발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게 만들지 않는 탓에 아무런 설득이나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급기야 베냐민은 엄마를 가해하고, 죽도록 방치해 두며, 자신과 실랑이하던 동네 형을 어른을 움직여 가해한다. 이러한 벤야민의 행동에 대해 공포를 느낀 아이샤가 저지를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안나는 부모의 통제로 인해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상황이다. 베냐민을 제외하고 아이들 중 가장 강한 힘을 지는 존재는 안나로 보인다.(자폐아에게 이러한 힘을 부여하는 이유는 없다. 이 또한 뻔한 설정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를 눈치챈 베냐민은 아이샤의 엄마를 움직여 칼로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민자 출신이고, 경제적 여건이 떨어지며, 아이를 돌보기 어려운 가정 환경이 이 아이들을 험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민자에 대한 통찰이나 부모 세대와 아이들 세대의 갈등이 제대로 그려지는 것은 거의 없다보니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아이샤가 죽은 후 유일하게 초능력이 없는 이다는 베냐민에게 비행기를 날리자고 유혹하여 다리 위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하지만 베냐민은 쉽게 죽지 않는다. 쓰러진 채로 베냐민은 환상을 만들어 내고 이다가 차에 치일 뻔하도록 유도한다. 이제 살아남은 이다는 안나와 함께 벤야민과 초능력 대결을 펼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이다의 각성이다.이다는 홀로 나간 안나를 돕기 위해 손도 대지 않은 채 소리를 질러 발을 감은 깁스를 깨부순다. 좀 흥미로운 장면이지만 역시 특정한 개연성이 작용하지 않는다. 각성이 필요하니까 각성을 하는 정도다. 

최후의 대결이 펼쳐진다. 평화로운 휴식의 풍경 속에서 다른 어른들과 아이들은 이 대결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만의 싸움이 펼쳐진다. 이 설정은 흥미로운 몇 안되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그들만의 대결은 이 세상이 알아차리지 못한 갈등이라는 어떤 상징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이들의 대결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스캐너스>(1981)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크로넨버그의 영화가 약물 중독 시대와 관련된 염력의 메타포를 만들어 냈다면, <이노센스>의 배경은 메타포에 이르지 못한다. 아이들은 왜 그래야 했는가에 대한 통찰이 없다면, 얼룩진 순수성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통찰할 수 없다면 '순수성'은 도구화된 설정일 뿐이다. 아이들은 순수해, 가 아니라 그들의 순수성이 왜 이토록 파괴되었고, 폭력과 살인으로 얼룩졌는지를 말해야 한다. 베냐민의 분노는 “나 화났어” 이상의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안녕, 내일 또 만나 So Long, See You Tomorrow> 백승빈|2021 

ⓒ 안다미로

백승빈 감독과의 개인적인 인연은 꽤 깊다. 아카데미 시절 그의 첫 영화를 부산에서 상영하기도 했고(<장례식의 멤버>(2008)), 오랜만에 만들었던 <나와 봄날의 약속>(2018)을 전주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간헐적으로 영화를 내놓긴 했지만 이번 영화는 아주 오래전의 백승빈을 생각하게 할 만큼 뒷심이 있었다. 그의 단편 <프랑스 중위의 여자>(2007)를 알고 있다면 이 작품이 존 파울즈의 동명 소설에서 가져왔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문학적 담론과 영화적 표현사이를 오가는 것이 백승빈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 중에 하나인데, 이러한 방식은 <장례식의 멤버>에서도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구현될 뿐만 아니라 <나와 봄날의 약속>에서는 감독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와 펼쳐지고 있는 영화 사이의 간극을 통해 구현된다. 성공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경계 속에서 어디론가 확장하고자 하는 작가이자 연출자의 욕망이 또렷하게 느껴졌을 따름이다. 

<안녕, 내일 또 만나>에도 숨은, 아니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영문학이 있다. 윌리엄 맥스웰의 『안녕, 내일 또 만나』가 그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오래전 고등학교에서 지나쳤던 친구에게 사과문의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후회, 회한, 미련, 죄의식 등의 감정이 문장마다 깔려 있다. 백승빈의 이번 영화도, 예전 영화도 마찬가지다. <장례식의 멤버>에 모인 이들이 나누는 대화야말로 윌리엄 맥스웰의 문장을 연상시킨다.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은 매번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일 것이다. 이번 작품에는 평행이론도 등장한다. 1995년 가을 대구를 시작으로, 2020년 가을 대구와 2020년 가을 서울과 2020년 가을 부산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반복되고, 접히고, 주름지고, 구부러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평행이론의 근본이 무한히 확장하는 것에 있다면 백승빈의 영화는 과거의 한 점, 1995년을 향해 있다. 

상반된 감정을 단 한번 에 집약한다는 것을 불가능하기에, 여러 번 반복하여 되새김질하는 것. 이 또한 카메라를 통해, 평행이론이든, 양자물리학이든 어떤 이름이든 빌려와서 해 볼 만한 차이와 반복의 화술일 것이다. 

 

<어느 멋진 아침One Fine Morning> 미아 한센 러브Mia Hansen Love|2022

ⓒ 찬란

이 영화 좋다. 너무나 프랑스적인 영화지만 그래서 더 좋은 걸 수도 있다. 제작 및 배급사가 로장쥬다. 에릭 로메르 영화의 팬이라면 영화를 볼 때마다 초반에 마주하게 되는 로장쥬의 로고. 미아 한센-러브의 영화는 점점 로메르스러워진다. 여기에 전작이었던 <베르히만 아일랜드>(2021)의 베르히만도 꽤 많이 집어 넣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아주 살짝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뿌려두어야 겠지. 하지만 이 모든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제 꽤나 묵직한 중견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이를 증명한다. 

먼저 편의적으로 나눴던 영향력에 대해 적어둔다. <어느 멋진 아침>의 대부분 이야기는 파리에서 펼쳐지고, 파리의 장소들이 꽤 많이 나온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거대한 '수련'(모네)도 나오고, 튈르리 정원이 등장하며, 영화의 마지막에 세 사람이 모여 가는 장소는 몽마르뜨다. 이외에도 단박에 알지는 못하는 파리의 몇몇 장소들과 거리들, 그리고 많은 지하철 역이 지나간다. 

로메르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했던 파리처럼(예를 들어 <녹색광선>(1986)은 파리와 휴양지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영화였다. 그래서 몇몇 휴양지들은 눈에 들어왔고, 델핀이 간 곳이 어딘지 찾아보기도 했지만(영화의 마지막에 녹색광선을 보는 장소는 프랑스 남서부이자 스페인 국경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다. 델핀은 비아리츠 기차 역에서 한 남자를 만나 그와 함께 생장드뤼즈로 간다. 거기에서 녹색광선을 본다.), 오히려 흥미로웠던 곳은 파리였다. 그중 하나가 초반 뤽상부르 공원(궁전)에서 친구와의 만남이었다. 

<어느 멋진 아침>은 인물들의 작은 아파트와 파리의 거리들이 자연스럽게 뒤엉켜 있다. 그런 점에서 <어느 멋진 아침>은 '파리의 에릭 로메르'이기도 하다. 연인들의 만남이 있고, 아버지의 요양원이 있으며, 친구들과 딸 아이로 인해 다녀와야 하는 장소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델핀이 그러했듯이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다(혹자는 이 영화가 다루는 불륜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는데 뭐…)

베르히만적 요소는 가족이다. 베르히만의 많은 영화들이 가족을 다루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멋진 아침>과 비슷한 결의 <다가오는 것들>(2016)의 주인공을 생각하면 레아 세이두가 연기하는 산드라의 주요한 관계들은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가 뭐래도 아버지 키엔슬러일 것이다. 아버지는 철학 교수였지만 점점 더 가족과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다. 어쩔 수 없이 요양원을 권유 받는다. 이를 위해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이 모여든다. 자식들은 물론이고, 전부인과 현재의 여자친구가 함께 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역시 프랑스 혹은 파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영화에서는 보지 못할 가족적 풍경이다.

 

ⓒ 찬란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제목('어느 멋진 아침')이다. 산드라가 발견한 아버지의 메모 속에 이 제목이 들어있다. 산드라는 아버지가 계획했던 자서전의 제목으로 '어느 멋진 아침'을 제안한다. 아버지의 메모는 철학 교수답게 철학적이면서도, 영화 전체의 핵심을 가리킨다. 단순히 읽어두어도 좋아 옮겨 본다.

"희귀병 속으로 걸어가다. 퇴행성, 퇴화, 악화, 지진, 쓰나미, 은밀하게 기어들어 온 뱀, 카프카, '변신', 뜻밖의 신체상태에 갇힌 죄수, 의문과 불안. 어떻게 될까? 어떡해야 할까? 의사들, 의학과의 첫 접촉, 주치의는 내 병을 모르는 듯하다. 살페트리에르 병원으로 날 보낸다. 다음 단계는 심리 검사. 고통스러운 시간. 첫 MRI와 안과검진. 난 이상한 시각 증상을 느낀다. 결과는, 이상없음. 더 상세한 두 번째 MRI. 감마선 진단법, 요추 천자. 두 번째 결과 후두피질위축 발견. 여러 증상이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벤슨 증후군. 의사는 내 병이 알츠하이머가 아니라 신경퇴행성 질환이자 시각신경 질환이라는 걸 진찰 중 거듭 강조했다. 난 평생 아플 것이다. 이런 관찰을 어찌 생각해야 할까. 

결과는 다양하다. 눈에 틀린 명령을 내리는 뇌. 보통 수준을 넘어서는 기억 상실. 눈앞에 멀쩡히 있다 사라지는 물건들. 난 내 새로운 상태와 변화에 적응 중이다. 지하철은 타지 않는다. 사물의 아이러니. 이 병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나를 벌한다. 독서. 많은 것을 상실했고 상실하고 있다는 인식. '다신 그런 일 없을걸' 깊은 심연의 느낌. 다른 이들과 멀리 떨어져 세상 밖에 있는 느낌. 내 목표는 글쓰기를 통해 병을 딛고 일어나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것. 그것은 승리가 될 것이다. 빛이 있을까? 보이지는 않지만 배제하지 않겠다. 최악은 명확하지 않은 법.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이해하고 벗어나기 위해 한동안 항복해야 한다. 그 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가 쓴 병을 발견한 것에 대한 노트가 아버지의 음성으로 화면 가득 흘러나오고, 산드라의 일상이 펼쳐진다. 지하철을 타고, 딸과 함께 이동하며, 밤에는 옛날 흑백 영화를 보고 있는(통역사인 산드라가 번역하는 일일 수도 있다.) 장면 속에서 아버지의 절망감과 조금의 희망이 일상적인 장면들과 함께 뒤섞인다. 그것이 베르히만의 시네마인 동시에 '미아 한센-러브의 영화'가 된다. 

그리고, 올리비에 아사야스적 요소는 오랜 친구였지만 연인이 된 클레망과의 이야기일 것이다. 클레망은 아직 유부남이다. 산드라는 때로는 질투를, 때로는 화를, 때로는 이 상황에 대한 감내를 선택한다. 그 어떤 것도 정답은 없지만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영화의 마지막에 클레망이 산드라와 딸과 함께 몽마르트의 계단을 오르는 장면일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적인, 어느새 그것을 모두 수용하고 있는 이 감독에 대해 더 하고 싶은 말들을 묶어 둔 채 일기의 마지막 문장을 고민한다.

사는 게 그렇지 뭐. 

일기를 쓰기 시작할 때는 무척이나 더웠는데 며칠째 비가 계속 오고 있다. 이제는 좀 춥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반팔과 반바지 차림이지만 산드라가 입은 색색의 스웨터를 보니 스웨터의 계절이 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기를 다 쓰고 나니 좀 춥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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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d 2023-09-22 15:28:41
미아 한센 러브 영화가 그렇게 좋았는지 느끼지 못하였는데 써주신 글에 로메르나 베르만적이라는 건 고전영화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