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현실'이라는 말, 이는 흔히 사랑만으로 존립하기 어려운 부부 관계를 역설할 때 쓰인다. 여기서 '현실'은 제도적 합의로 서로를 예속한 이들이 맞닥뜨릴 수많은 난관을 함축한다. 유재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잠>의 두 주인공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는 신혼부부다. 상대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서로에 대한 애정과 관계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과연 이런 부부에게도 결혼은 현실일까.

수면 장애를 겪는 남자와 그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가 있다. 오프닝 장면이 그리는 두 인물의 구도는 <잠>의 서사를 이루는 핵심이다. 영화는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현수의 수면 장애로 두 부부가 문제 상황에 봉착한 모습을 보여준다. 2장에서는 문제의 원인에 대한 관점 차이로 갈등이 고조된다. 3장에서 끝내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지만, 여차저차 문제가 해결된다. 이러한 영화의 작법은 그다지 새로운 것 없는 여느 드라마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잠>은 간결한 구성을 취할지언정 보기보다 단순한 영화가 아니고, 바로 그 지점에서 고유의 신선함을 획득한다.

<잠>은 부부에게 닥친 현실을 외부의 관점에서 투명하게 묘사하기보다, 서로의 관점이 충돌하는 양상과 이를 내부적으로 돌파하는 그들만의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잠'의 시간마다 발생하는 공포로 장르적 긴장이 연출되는 가운데, 영화는 기묘한 방식으로 부부 관계의 아이러니를 환기하기도 한다. '결혼'은 내가 아는 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서의 상대와 마주하는 과정이고, 동반자의 관계로 여겨지는 '부부'는 의외로 동등한 층위를 보장받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하지만 정작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차라리 내가 보는 당신을 보는 것, 당신이 보는 나 자신이 되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는 관계의 핵심이다. 영화는 이러한 부부 관계의 아이러니와 수면 장애라는 극의 설정이 만나 비로소 '결혼은 현실'이라는 통념을 재구성한다.

"누가 들어왔어"

현수의 증세가 나날이 심각해지면서 부부는 힘든 시간을 겪는다. 물론 더 힘든 쪽은 수진이다. 자신도 모르는 새 위험천만한 상황의 중심에 서는 현수의 처지도 딱하지만, 수진은 임신부의 몸으로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프닝 장면에서 그녀의 공포가 다분히 심리적 징후에 그쳤던 것과 달리, 1장의 끝에서 반려견 후추의 죽음이 암시되며 상황은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딸이 태어난 후 진짜 엄마가 된 수진의 불안은 더욱 가중된다. 이에 주변 인물들은 그녀에게 이혼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지만, 수진은 가정을 지키려는 의지를 더욱 확고히 보여준다. 그녀의 방식은 가족 중 누구도 그들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수진은 현수가 집을 나가는 일에 끝내 동의하지 않고, 그녀의 불안이 일으킨 꿈에서 아기는 쓰레기 봉지에 담겨 집 밖으로 폐기된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가훈에 대한 수진의 신념은 이쯤 되면 다분히 집착에 가까워서, 수진의 고집이 단순히 현수를 향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수가 자신의 증상을 계속해서 의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과 달리, 언젠가부터 수진은 이를 무속의 차원에 기대어 해석하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다시 살펴보자. 잠결에 일어난 현수는 대뜸 누군가 들어왔다고 말한다. 놀란 수진은 남편을 불러보지만, 잠에 빠진 그는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다만 다음날 현수는 이를 자신이 참여하는 작품의 대사라 설명한다. 반면에 무당의 말을 믿기 시작한 수진은 이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그녀에게 '누구'란 아래층에 살던 박춘기의 혼이고, 침입의 장소는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 현수의 신체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기 전에 극 내부의 사정과 다른 층위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보탤 수 있을 것 같다. 부부의 집에 들어온 누군가는 결혼 생활 중 어느 날 돌연 난입한 불청객이 아니라, 그들의 결혼과 동시에 이미 예견되었던 '현실'적 문제의 일환으로서 '경제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영화가 이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과 별개로, 히스테리에 가까운 수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얼마간 이러한 해석이 요청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수진에게 딸의 생명과 가정을 위협하는 것은 남편 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잠결에 행하는 폭력일 수도 있지만, 미래가 염려되는 그들의 경제적 처지이기도 하다.

직장에 다니는 수진과 달리 현수는 수입이 변변치 않은 단역 배우다. 어느 날 현수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연기를 그만두고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겠다 말한다. 이에 수진은 현수의 연기력을 치켜세우며 여전히 그의 꿈을 지지한다. 물론 여기서 수진의 진심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하물며 그들에게 난관은 현수의 경제력과 전혀 무관한 영역에서 닥쳐온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수진의 마음 한구석에 있을지 모르는 불안의 가능성까지 배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무엇보다 영화는 수진의 친정 엄마가 사는 주택과 부부의 신월동 아파트를 번갈아 비추며 사뭇 다른 두 동네의 외관을 비교하게 한다. 이러한 비교의 구도는 다른 장면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수진은 비 오는 날 집 천장에 번지는 곰팡이 자국과 의사의 하얀 가운에 묻은 얼룩을 겹쳐 본다. 그러다 의사의 애매한 입장에 격분해 그를 향해 약통을 냅다 던지며 속으로 상스러운 욕을 갈긴다. 상대의 비겁한 태세 전환이 얄미울 만도 하지만, 이는 현실적 문제를 돌파하지 못하는 상황에 느끼는 그녀의 답답함이 히스테리로 표출된 결과처럼 보인다.

배우의 일과 빙의라는 경험 사이 묘한 연관을 고려했을 때, 상술한 해석의 가능성은 더욱 강화된다. 현수이지만 현수가 아닌 상태라는 점에서 극 중 현수가 행하는 잠결의 몸짓과 그의 직업상 행위인 연기는 동일한 원리를 공유한다. 다소 늦은 지적이지만, 현수는 영화 내내 자신이 이름이 아닌 '오빠'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갓 태어난 부부의 딸 하윤과 하다못해 무당인 해궁 할매마저 고유명사로 불리는 마당에 영화의 주인공인 그가 멀쩡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다는 사실은 꽤 놀라운데, 이 사실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건 무엇보다 그가 '오빠'라는 호칭에 은연중 요구되는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경제적 주체로서 집안의 가장은 수진에 가깝고, 현수는 다정하고 나름대로 성실해 보이지만 수진에 비해 어딘가 무력해 보인다. 무엇보다 현수는 '이름 없는 단역'을 맡는 무명 배우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들의 집을 찾은 해궁 할매가 그에게 붙은 귀신의 이름을 알아야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오빠' 현수는 '죽은 박춘기'라는 배역을 부여받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수진은 자기파괴를 넘나드는 폭력적 징후를 보이는 남편의 증상을 자신에게 이식한 후, 텅 빈 현수의 신체에 '박춘기'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결국 그녀는 세상이 남편을 알아주지 못하는 현실 대신, 그가 꿈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그들만의 현실을 만든다. 그렇게 쇼는 현수로부터 시작되지만, 수진의 광적인 믿음과 추진력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수진이 완성한 무대에서 현수는 인생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고 수진은 그 현장의 열렬한 관객이 된다. 이처럼 수진은 상대가 돌파하지 못한 현실을 밀어붙여 그의 자아실현을 완성케 한다는 점에서 최고의 파트너다. 하지만 이를 다소 무섭게 말한다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수진은 현수로 하여금 연기라는 일의 끝장을 보게 만든다. 섬뜩한 그의 연기는 너무나도 극적이고 완벽한 나머지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그런 점에서 수진이 연출한 현수의 데뷔 무대는 마치 그의 라스트 댄스처럼 보인다.

<잠>은 초반에 흩뿌려 둔 설정을 회수하면서 공포물과 가족 드라마를 결합한 복합적 장르로서의 서사를 갈무리한다. 꽤 심각한 상황의 연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두 부부간 의심과 반목을 두드러지게 묘사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은 서로의 정체를 의심하기보다 각자의 관점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데서 그친다. 그리고 종국에는 한쪽의 방식에 다른 한쪽이 응하는 방향으로 끝이 난다. 그러니 글의 초반에 언급했던 이 영화의 간결한 구조는 다시 말해져야 한다. 의식의 수면 아래 잠겨있던 문제가 기묘한 방식으로 현실의 표면에 떠오르고, 각자의 해석이 부딪힌 끝에 비로소 한 길로 수렴되는 결말. 이야말로 <잠>의 구조에 대한 보다 명확한 표현이 될 테다. 그렇게 두 주인공이 비로소 완연한 한 쌍의 부부가 되면서 일종의 혼인 소동극으로서의 영화는 닫힌다.

결혼과 임신 그리고 출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칠수록 현실의 그림자는 부부에게 더욱 짙게 드리워지기 마련이다. 영화가 '집'이라는 가족 내부의 장소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는 것처럼, 수진과 현수 역시 관계 내부에서 시작된 문제를 철저히 내부에서 돌파한다. 그러니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을 <잠>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보자. 결혼은 두 사람만의 현실이고, 부부는 둘만의 현실을 짓는다. 그리고 수진과 현수에게 현실은 서로에 의한, 서로를 위한 역할극으로 완성된다. 영화는 부부에게 닥칠 현실적 곤란을, 수진의 심연을, 일련의 사건 이후 현수의 선택을 꼬집어 말하지 않는다. 다만 수진이 연출한 무대 위에서 제 배역을 훌륭히 소화한 현수로 인해 부부 관계와 그들의 결혼은 지속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결말은 갸륵한 로맨스의 완성인 동시에 가련한 비극의 출발인 셈이다. <잠>은 다소 환상에 가까운 결말로 끝을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그들에게 비로소 제대로 된 현실이 펼쳐지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포섭할 수 없는 타자로서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는 행위의 이상에 가깝다면, 상대가 나를 보는 틀에 나 자신을 맞추는 방식은 매우 세속적이고도 성숙한 사회적 관계의 필요조건이다. 극 중 어느 한 장면에서처럼, 하나가 죽이는 시늉을 한다면 나머지 하나는 죽는시늉하는 것. 누구보다 가까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도, 상대를 상대로서 바라보기란 불가능하다는 규칙을 애써 모른 척하는 것. 이로써 유지되는 미묘한 관계를 미덥게 보아야 할지, 드리워진 현실의 그림자에 울상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그들 사이 보이지 않는 빨간 실의 매듭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를 사랑이라 부를지는 관객인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글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함윤정

badasal2@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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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