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나는 너를 느껴야해
'이노센트' 나는 너를 느껴야해
  • 박정수
  • 승인 2023.09.19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일자의 경험이 보여주는 역설"

"타인이 고통에 처했을 때, 나는 마치 그 현장에 속한 것, 마냥 몸이 움츠러들거나 파르르 떨린다." 이러한 현상(간접 경험)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퐁티는 내가 상대를 만지고, 상대로부터 내가 만져지는 '이중 감각'을 통해서 나는 자신의 주체임과 동시에 상대에게 대상이 되고, 또 상대에게서 주체성을 확인하는, 일련의 '동일자의 경험'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상대 또한 나처럼 만지고, 나는 상대처럼 만져지면서 서로 동일자로 인식될 때 우린 서로를 간접 경험하고, 또 타인에게 조심스러워져 '존중'의 첫 단추를 끼운다. 내가 감각하는 것, 특히 '아픈 것'을 상대 또한 똑같이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킬 보그트 감독은 신작 <이노센트>를 통해 이러한 이중 감각과 동일자의 경험을 탐구한다.

1974년 오슬로 태생의 '에스킬 보그트'는 노르웨이의 영화감독이자 각본가다.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블라인드>(2014)로 장편 데뷔했으며, 각본가로선 요아킴 트리에의 작품에 꾸준히 참여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필모그래피에서 항상 '비보편적인 타자'를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각본으로 참여한 <델마>(2017)에서는 '핍박받는 여성'이자 '마녀', <블라인드>에서는 '시각장애인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은 보편적인 사람들과 달리 '염력'(<델마>), '상상력'과 '촉각'(<블라인드>) 등 특유한 잠재력을 타자가 지니고 있으며, 이를 '초능력'에 빗댄다. 보그트는 이 초능력을 영화를 감상하는 평범한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가령 <블라인드>에서는 인물의 '눈'이 있어야 할 구도에 '손'이 존재하여, 후각이나 촉각, 청각에 의존하는 시각장애인의 삶을 감각적으로 펼쳐본다. 즉 보그트는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느끼는 동일자의 경험을 필모그래피 내내 펼쳐왔는데, 그 시도가 <이노센트>에서 이어진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주인공 '이다'(라켈 레노라 플뢰툼)와 '안나'(알바 브륀스모 람스타드)의 관계를 묘사한다. 자폐증을 앓는 안나의 언어를 이다나 부모님은 읽지 못한다. 이다가 안나를 아무리 세게 꼬집어도, 신발 안에 들어있던 유리조각을 밟아서 피가 철철 흘러도, 허벅지에 나무 조각이 박혀도, 안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통증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안나의 첫 번째 친구가 되어주는 '아이샤'(미나 야스민 브렘세스 아샤임)는 "안나는 마음으로 말한다"라고 그녀의 언어를 대신 해석해주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이다는 자신은 느낄 수 있는 고통을 안나는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똑같이 느끼는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다는 안나 속에서 자기 자신이 존재했음을 알지 못한다. 그는 타인과 나는 다르다고 인식한다. 그래서일까. 이다는 지렁이를 마구 밟고 개미집을 해치며, 고양이를 높은 곳에서 떨어트린다. <이노센트>는 '아이 영화'로서 동일자 경험을 충분히 갖지 못한, 이로써 내가 느끼는 고통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못하는 사회화 이전 아이의 '폭력적인 심리'를 분석한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에스킬 보그트 감독은 인간이 최초로 이중 감각을 느끼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분석하며, 인간의 유아기에 필요한 동일자의 경험을 고찰한다. 영화 속 가정환경 다수는 '부친'이 부재한다. 아이들은 최초의 남성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로터 자기 자신을 찾지 못했다. 아이들은 아버지, 곧 남성이 느끼는 감각이 나와 똑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 내내 남성은 손쉬운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남성이 느끼는 고통은 아이에게 남 일 마냥 치부된다. 타겟이 되는 남성이 가정을 등질 것을 아이나 여성이 떠밀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 본인이 자처해서 그들과의 이중 감각을 포기하였기에 극 속 아버지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샤는 어머니와 매우 친밀하지만, 벤자민(샘 아쉬라프)은 친모와의 관계가 냉랭하다. 차가운 수준을 넘어서서 벤자민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윽박지르거나 폭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이샤는 아버지와 맺을 수 없었던 이중 감각을 어머니를 통해 보완하지만, 벤자민은 그 어떤 타인에게서도 자신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샤는 '상대방의 감각을 나도 오롯이 느끼는 초능력'을 발전시켜가는 반면, 벤자민은 '타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폭력'을 갈고 닦는다. 아이샤는 상대가 나 자신인 것처럼 소중하게 배려하는 반면, 벤자민은 상대의 죽음이 나와 일절 관련 없다는 듯 테러를 끊이지 않는다. 벤자민은 끝끝내 엄마를 쓰러트려 뇌진탕을 일으키고, 심지어 다리에 화상까지 입히는데, 그녀가 느끼는 고통을 아이샤는 멀리서도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벤자민은 가까이 있는 엄마의 고통에 연민하지 않고, 엄마 없는 자신의 상황에서 슬픔을 느끼는 듯하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이중 감각과 동일자의 경험은 지금까지 '다정함'으로 살아남은 인류의 생존 전략이다. 그래서 이 삶을 앞으로도 계승해나갈 아이들은 어떻게든 많은 타자들 속에서 자신을 느껴야 한다. 이다는 안나의 신발에 유리조각을 넣으려다 미세하게 손이 베여 피가 난다. 이후 안나의 발에서 피가 철철 흐르자, 언니의 고통을 체감하며 살짝 죄책감을 느끼는 눈치다. 또 이다는 벤자민이 고양이를 떨어트릴 때 낙하하면 사망하는 인간과 달리,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눈치다. 하지만 고양이가 추락한 인간처럼 다리를 절뚝거리고, 벤자민이 고양이를 밟아버리며 다음날 사체로 전락하자 경각심을 느낀다. 이후 벤자민이 아이샤의 심장을 마비시킬 때, 이다는 살인이 추가로 발생하지 못하게 저지한다. 이다는 아이샤와 동일자의 경험을 가졌기에, 상대의 의식과 목숨을 내 것인양 수호한다. 즉 이중 감각을 느끼기 전에는 폭력과 죽음으로 얼룩졌다면, 이후에는 모두의 고통을 멀리하고 삶을 보존하려는 시도가 들어찬다.

동일자의 경험은 직접적인 접촉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간접적인 '대화'로도 우리는 타인이 곧 내가 되는 경험을 가질 수 있다고 에스킬 보그트 감독은 말한다. 그간 안나가 왜 스위치를 반복해서 껐다 켰다 하는지, 그 누구도 이해하려 하거나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아이샤는 안나와 마음으로 대화하며 문고리를 딸깍거리는 행위를 따라해 보고, 안나가 사는 공간이 신체에 미치는 여파를 체감한다. 외에도 안나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그녀와 대화하는 아이샤는 주로 '투명한 창문'을 바라본다. 그 투명한 창에 두 사람이 겹쳐지며 공존하는 것이 바로 동일자의 경험이다. 반면 벤자민의 폭력은 닫히거나 갇히는 등 '폐쇄'적인 공간성이 부각된다. 그 안에서 벤자민은 상대의 정신을 지배한다. 즉 타인을 느끼지 않으면 서로 간에 크나큰 장벽이 생기며, 양자의 의식은 공존하지 못하고 결국 한 쪽만 살아남는다.

이렇게 아이들은 갖가지 동일자 경험을 거쳐서 '순수'한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러나 아이들을 둘러싼 '구조'가 동일자 경험 대신 폭력을 보편화한다. 벤자민처럼 대상을 '불순'하게 변형시킨다. 아이샤는 고양이 스스로 불리길 원하는 이름 '수수'를 읽어내어 종족을 뛰어넘어서 대상을 순수하게 존중한다면, 벤자민은 고양이가 원치 않는 '자바'라는 이름을 폭력적으로 낙인찍은 이후 추락시켜 삶을 죽음으로 변형시킨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에스킬 보그트 감독은 구조의 폭력이 부정적인 선입견이나 편견을 덧씌우는 '낙인 효과'나 편협한 틀에 가두어 보는 '프레이밍'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도입부, 투명한 타이틀 너머로 이다의 얼굴이 포착된다. 영화의 제목인 타이틀이 하나의 '프레임'이라면, 여기에 이다의 얼굴이 갇혀서 불순하게 변형된다. 그러다가 서서히 타이틀이 사라져 이다 자체만 포착되고, 직후 카메라는 잠들어있는 이다까지 순수하게 촬영한다. 그러나 이다가 깨어나니 다시 불순해진다. 그녀의 진실을 순진하게 투사하는 꿈에서 이다는 자신으로서 순수했을 것이나, 깨어나서 세상 속에 참여하니 부모는 '안나의 보호자'라는 틀에 가두어 그녀를 재단하고,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는 '자폐증 언니'를 뒀다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씌워져 또래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는다. 또 영화의 중반까지 안나를 제외한 아이들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호명되지 못하고, 대신 안나의 자매, 무슬림 꼬마, 백반증 소녀 등 대상을 왜곡하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부각되었다.

누군가와 건전한 이중 감각을 맺지 못한 채로 곧장 사회에 내던져진 벤자민은 낙인 효과와 프레이밍을 모방한다. 영화의 제목인 innocent가 '악의 없음'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처럼, 벤자민의 폭력성은 그저 순진하게 사회를 모방한 결과라는 것이다. 벤자민은 어머니에게 이해받지 못함은 물론이고, 동네에서는 백인 소년들에게 공을 뺏겼으며, 멍 자국을 보건대 구타당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즉 벤자민은 백인에 의한 진로방해, 그들이 만들어놓은 '무슬림의 테러'라는 악의적인 편견에 갇히곤 하였는데, 소년의 폭력 또한 낙하하는 대상의 '진로를 방해'하기,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강제 이동'시키기, 상대방의 시선을 벤자민의 시선으로 규정하는 것 등이기에, 벤자민은 구조의 메커니즘을 순진하게 따라했을 뿐이다.

이로써 세상에 종말이 닥친다. 벤자민은 백인뿐만 아니라, 나이·인종·성별이 일치해서 동일자 경험을 갖기 더 쉬운 상대마저 살해한다. 즉 이중 감각의 거세는 아주 가깝고 닮은 존재와도 공존할 수 없는 고립과 죽음을 불러온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이중 감각을, 곧 나와 타인 간 '연결'을 포기해선 안 된다. 벤자민이 눈앞의 닮은 대상마저도 끊어낸다면, 아이샤는 물리적으로 연결이나 관찰이 불가능한 대상과도 관계를 이어낸다. 또 피지배 대상의 공간을 고의로 왜곡하는 벤자민과 달리, 아이샤는 안나나 벤자민 엄마가 사는 아파트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제 삶에 투영하여 상대를 순수하게 느낀다. 그런 아이샤를 포착할 때, 영화에선 유사한 속성의 두 숏을 이어내는 '매치 컷'이 동반된다.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이나 낯선 사람이 거리나 장애에 구애받지 않고 유사하게 이어지는 매치 컷을 통해, 우리는 생경한 타인의 감각과 시야를 내 것처럼 바라보고 느낄 수 있음을 가시화한다. 그렇게 아이샤와 안나, 이다는 '네 일이 곧 내 일'이 된다. 나의 의도는 그의 신체에, 또 그의 의도가 나의 신체에 뒤섞인다. 나를 보존하기 위해 상대를 존중한다.

이중 감각은 성장해가며 많은 굳은살이 박여감에 점차 둔감해질지 모른다. 영화 속 어른들이 아이들의 심리를 제 것 마냥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와중에 여전히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아이들이야말로 동일자의 경험을 보존하고 있는 '보고'다. 영화의 결말, 안나와 이다가 벤자민을 치열하게 응시하며 죄책감을 건드린다. 이에 더해 자매의 감정을 알아챈 아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울음을 터트리고, 많은 어린이들은 그녀들과 똑같이 소년을 쏘아보며 벤자민을 쓰러트린다. 즉 공감과 공존을 포기한 오늘날의 '목석 사회'를 아이들이 말랑말랑하게 정화한다. 물론 전복하기 이전의 사회를 순진한 아이들이 모방할 여지도 있다. 그렇지만 에스킬 보그트 감독은 아이들이야말로 폭력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나와 타인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이로써 인류의 다정함을 복원할 수 있는 희망이라 본다. 특히나 그는 아이들과 스크린 너머의 감상자가 간접적인 이중 감각을 느낄 수 있게끔 '클로즈업'을 활발히 사용한다. 만져질 듯 가까운 그들의 살결이 우리의 눈꺼풀을 간지럽히며 촉감을 연상시킨다. <이노센트>는 아이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스크린 너머의 다양한 관객들에게도 이중 감각을 환기하여 만인이 가져야 할 동일자의 경험을 역설한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이노센트
The Innocents
감독
에스킬 보그트
Eskil Vogt

 

출연
라켈 레노라 플뢰툼
Rakel Lenora Flottum
알바 브륀스모 람스타드Alva Brynsmo Ramstad
샘 아쉬라프Sam Ashraf
미나 야스민 브렘세스 아샤임Mina Yasmin Bremseth Asheim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17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9.06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