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타오름 대신 가시화하는 것 ['어파이어' #1]
불의 타오름 대신 가시화하는 것 ['어파이어' #1]
  • 변해빈
  • 승인 2023.09.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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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의 어려움, 혹은 바라보기를 감행하는 태도"

두 친구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과 '펠릭스'(랭스톤 우이벨)가 인적 드문 도로 위를 달린다. 펠릭스의 우려대로 차가 내려앉고 그들은 숲 인근에 잠시간 고립된다. 짐승의 울음과 헬기 프로펠러 소음이 그들 주변을 서서히 에워싼다. 산 어딘가에서 발생했다는 화재의 기운들은 십여 분 남짓한 거리의 별장에 도착하자 없던 것처럼 사그라든다. 풍향을 직격으로 받아 몸집을 부풀리고 있다는 산불에 대한 소식은 인물들의 대화에서 반복 등장한다. 산불은 하늘을 뒤덮은 붉은 열기와 바람에 떠밀려 온 잿가루, 종국엔 죽음의 형상으로, 계속해서 기척을 드러내고 있지만 정작 영화는 불이 타오르는 현장을 마주하지 않는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보이는 징후와 강렬한 지속, 그리고 생략

'산불'에 대한 위기감을 조성하며 시작된 <어파이어>에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산불이 격정적으로 솟아오르는 모습은 없다. 불을 피해 도망치던 멧돼지의 죽음 뒤로 화염이 붙은 숲의 풍경이 짧게 드러날 뿐, 화면을 압도적으로 휘감는 규모의 불의 위력은 직접적으로 가시화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영화는 대상 또는 사건 중심부를 맴돌며 징후를 끈질기게 좇는다. 시간과 거리감에 대한 파악을 수시로 이어가는 인물들의 언어에는 '금방', '곧', '~정도'의 다가올 미래를 지시하는 표현이 자주 드러난다. 저마다 기한이 정해진 일을 짊어진 그들의 상황을 은유하는 것으로도 확장되는 이 표현들은 이따금 계절의 힘과 말의 활력, 시 낭독에 감탄하는 세속적 풍경과 어우러지며 무언가에 대한 안위를 분별하지 못하게 회유한다. 별장의 뜻밖의 손님인 나디아'(파울라 베어)를 극 안에 들여놓는 방식에서도 그러한데, 먹다 남긴 음식이나 흐트러진 옷가지의 흔적으로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그녀는 어딘지 유령 같은 몸짓으로 레온의 시야에서 매끄럽게 빠져나가길 거듭한다. 밤중의 벽간 소음으로, 겨우 드러나는 뒷모습으로 인식되던 나디아는 동선의 엇갈림을 몇 번 거치고서야 입체적으로 윤곽을 갖춘다.

'레온'은 영화의 중심인물임에도 무언가를 '훔쳐본다'라는 인상이 어울리는 구도와 거리감을 지닌 채 장면을 버티고 있다. 그가 나디아를 바라보던 시선의 문제는 노골적으로 제시되는 편이지만, 그보다 비상하게 작동하는 건 레온이 인물들 주변에 머물며 상황을 '훔쳐보듯 할 때의 시점 쇼트들'이다. 레온은 대체로 그 자신의 무언가에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적정 거리 바깥의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이때의 시점 쇼트들은 먼 거리감에도 그들의 대화를 선명하게 들려주는데, 실은 그 소리가 레온에게는 도달하지 않는 것이며, 소리가 불투명한 이미지에 불과했음이 밝혀진다. 극 후반부, 레온의 출판사 사장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가 자기 병에 대해 알리지 말 것을 요청하던 장면에서 그의 말을 들은 이는 오직 나디아다. 불필요한 정보까지 예민하게 흡수할 것만 같던 레온은 같은 시공에 있으나 다른 이들의 은밀함이나 그들 사이에만 진동하는 어떤 힘이 그 자신에겐 전달되지 않는 위치에서 의심과 단절감을 증폭해간다. 반면 그가 누군가의 흉을 보거나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기를 내던 순간마다 상대방에게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발각당하고, 청자여야 할 주체가 뚜렷한 맥락 없이 청각을 차단하고 있어 중요한 말을 온전히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

중요한 건 관객이 들은 사실을 그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들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드러나는 게 있다. 레온을 제외한 세 인물이 밤의 어둠 속에서 불빛이 나는 배드민턴으로 공을 주고받는다. 그동안 장면을 팽팽하게 지탱하는 기이하고 음침한 기운은 그들을 훔쳐보는 레온의 행위 자체에서 발생한 감각이라기보단, 훔쳐봄의 행위에 의한 인식만으론 도달하지 못한 무언가, 즉 영화적 운동에 기여하는 불안과 혼란, 어떤 외로움의 물질이 이 세계의 징후를 작동시키는 요소 중 하나라는 점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나디아가 함께하길 제안했던) 생체발광하는 밤바다를 바라보는 이가 레온뿐이란 사실은 예견되었다. 누군가 죽거나 떠나고 홀로 남기까지 이 영화의 유령 같은 움직임을 행하는 자가 나디아가 아닌 레온이었단 사실은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가시화된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어쩌면 삼엄하게 지속되는 징후와 그 주변부에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거리감은 저 자신 외 주변의 일에는 무정한 레온의 이기심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때의 거리감은 느닷없는 휘몰아침 속에서 모든 것이 끌어오른 뒤 남은 실체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그토록 지속되던 징후에도 사건의 바깥을 떠돌다 모든 사태가 난국으로 치닫고나서야, 그들이 놓여진 상황을 뒤늦게, 또 단시간 내에 급박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나디아가 레온의 불평에 가볍게 반응하고 문을 나서는 잠깐 사이 눈송이가 흩날리는 대목이 있다. 다시 보니 잿가루인 그것은 마당을 온통 장악한 지 오래다. 펠릭스와 데비드(엔노 트렙스)가 황급히 고장 난 차를 찾으러 떠나자마자 헬무트가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진다. 나디아가 헬무트와 병원으로 먼저 향하면 레온은 길을 잃고 방황하다 죽어가는 것을 차례로 마주한다. 이 모든 게 한 시퀀스 내에서 연쇄적으로 들이닥친다. 비로소 산불이 인물들에게도 도달한 셈이지만, 징후와 끝맺음 사이의 '발생'이 낱낱이 펼쳐진다기보단 낌새를 알리지 않던 다른 사건이 과잉 중첩되면서 영화의 집중력이 엉뚱한 곳으로 분산된다. 펠릭스와 데비드가 불과 맞닥뜨리는 현장도, 나디아와 헬무트가 무사히 병원에 도착하는 과정도 생략된다. 그동안 우리는 레온을 따라 길을 헤매고 방황하는 데 가열된다.

불의 타오름 대신 <어피이어>가 가시화하는 건 '어떤 죽음 이후'이다. 영화는 어떠한 역전없이 결국은 징후적 사건을 발생시키고 마는데, 그에 해당하는 순간의 현현이 제거되어 있다는 게 특징이다. 이와 연관해 컷과 컷을 거칠게 절합한 두 개의 구간을 말해야 한다. 레온이 바다에서 소설을 쓰다 잠든 컷과 그의 위에 담요가 덮어진 컷이 중간 과정 없이 이어 붙는다. 다른 하나 역시 같은 전환 효과가 쓰였는데, 나디아와의 만남을 파토내고 바다에서 휴식을 취하던 레온의 컷과 그 상태에서 잠든 그의 모습을 담은 컷이 중간 과정을 통째로 제거해버린 채로 이어진다. 전자에는 펠리스가 레온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모습이, 후자에는 레온이 잠이 드는 과정이 제거되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컷 전환이 흥미로운 건, 단절된 레온의 시간의 이음매 너머에서 다른 무언가는 끊임없이 지속성 안에 귀속되어 있단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레온이 잠든 사이 담요를 덮어준 것이 펠릭스라는 사실은 펠릭스와 데비드의 입을 통해 두 번 전해진다. 나디아를 잠시도 기다릴 새가 없다던 레온의 생략된 시간은 나디아가 시간의 흐름 위에서 시간을 지키며 등장하는 것으로 강조된다. 공교롭게도 레온을 담은 앞의 컷들은 다른 인물들의 움직임에 비해, 잠이라는 정적인 이미지의 운동을 갖는다. 그럼에도 어떤 경과를 띠는 것으로써 의미 있는 건 바깥의 다른 세계가 운동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어떻게든 한쪽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반대편의 다른 움직임을 전제하는 모종의 징후로 연결되고 있다.

 

'바라본다'라는 행위와 태도

인물들의 대화에선 불 대신 물이 비중있게 다뤄진다. 펠릭스는 예술학교 입학을 위해 사진 포트폴리오를 준비 중이다. 그는 물을 주제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의 초상"을 떠올린다. 그는 바다를 응시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촬영한 다음 그의 앞으로 이동해 정면을 찍고자 계획한다. 이에 대해 레온은 결국 사람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곳이 카메라를 든 펠릭스 일 수밖에 없단 점에서 실패를 예상한다. 하지만 헬무트는 두 장의 사진 사이에 텅 빈, 오직 바다로 채워진 사진을 배치하라고 조언한다. 언뜻 그럴싸하게 들리는 그의 말은 의외로 까다로운 문제를 안고 있다. 사전에 '찍는다'는 합의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레온의 말대로 "결국은 (바다가 아닌 찍는) 너를 보는" 초상이어선 안 된다. 여기서 만약 무작위로 뒷모습을 찍는다면 그때의 사람이 행하는 것이 바다로의 응시가 아니거나, 틈입된 사진 속 바다와 동일한 바다가 아닐 수 있다. 이 모든 문제는 바다와 사람을 공평하게 담은 사진 한 장이면 간단하게 해결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펠릭스에게는 사진에 바다를 담기 위해 사람이 먼저 필요했다. 그는 대상이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보다 '바라본다'는 행위와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극 중 바다와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이면 펠릭스가 계획한 질서를 떠올리게 하는 구도적 배치가 종종 발견된다. 그런데 이를 아주 정교하게 충족시킨 장면을 보여주려는 게 관심사는 아니다. 무엇보다 영화의 후반 시퀀스에서 강조되는 건, 레온이 바다를 혼자 보게 되었단 사실, 그리고 유일하게 앞모습이 촬영되지 않은 나디아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레온이 주변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던 (시점 소트의) 문제에서 관객은 분리시켰던 점을 통해 짐작해보건대 <어파이어>는 응시에서 감행될 수 밖에 없는 실패를 논하는 영화가 아니다. 왜 응시만으로 불충분한지, 혹은 그럼에도 뒷모습의 그것과 같이 어떠한 이면을 읽어낼 수 있을 때까지 눈으로 응시하는 태도는 어떻게 가능한지 고민하는 영화다. 그런데 응시는 단지 시각의 역할만은 아닌 것 같다. 예컨대 수풀의 격한 움직임으로 강풍의 세기를 알아차릴 수 있고, 먼 거리를 극복하고 나타나는 산불의 징후들이, 생략된 시간의 공란이 어떤 경과를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던 영역이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나디아는 주변의 만류에도 옛 연인이던 데비드가 펠리스와 엉겨 붙어 죽은 형상을 직접 목도하길 요청한다. 여기서 해당 장면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쓰였고, 따라서 그들이 '폼페이 연인 화석'을 닮은 상태라는 정보는 사운드 요소만으로도 전달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영화는 나디아가 그것을 봐야만 했던 심정을 그녀를 바라보던 타인의 관점을 경유해 들려주고, 눈물을 가시화하기까지 하여 강조한다. 영화는 나디아를 곁에서 바라보는 레온의 시점을 경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체 일부분을 포착한 그을린 주검보다, 심지어 '나디아'보다, 포착되는 것과 포착만으론 접속할 수 없게 하는 '그녀와의 보이지 않는 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더욱 집중한다. 레온과 우리의 시선에서 일관된 리듬으로 굳건하게 반응하던 그녀가 누구보다 무방비하게 비감에 빠진 맨얼굴을 드러내고 만다. 나디아는 눈물을 조금 흘린 뒤, 레온보다 먼저 그것을 바라보기를 포기하고 돌아 나선다. 데비드의 배신에도 흡사 수호신 마냥 관계의 요철을 바로잡던 나디아는 스스로 떠나는 길을 택한다.

부검의는 펠릭스와 데비드의 사인이 질식사가 아니라고 전한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서서히 죽었다. 서로를 끌어안은 형상으로 발견된 그들은 주검은 '불에 타들어 가는 동안'이라는 진행의 현재성이 우리 앞에 생략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불길 속 고통은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이며 정지된 형태로만 전달되지만, '진행되는 사랑'의 질적인 깊이로 현재에 남는다. 순간을 제거하는 영화의 시도는 닫히지 않는 영원성의 감각을 덧입은 것으로써 다른 무언갈 남긴다. 그러기 위해 그 앞에서 누군가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안내하듯) "슬픔을 느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는 무언가를 뚫어져라 보거나 볼 수 없다는 자체로도 가혹하지만, 그 행위의 끝에 드러나는 무언가를 확인하기 전까지 슬픔도 주지 않는다. 소리와 열기 따위로 전해지던 산불의 위압감은 무언가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주는 위태로움이었다면, 보기를 통해서 순간의 슬픔을 붙잡아 뇌리에 남기는 행위는 그동안 우연히 나타나던 징후의 요소들과 달리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불충분해서 지속되던 영화적 움직임은 나디아에게 이르러 구태여 감정적인 자극의 마지막까지 치달아보려는 태도로 이어진다.

 

인물들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

나디아는 잿가루가 흩날리기 이전, 사랑에 빠지면 죽는 부족에 관한 시를 외워서 두 번 낭독한 적 있다. 처음엔 헬무트와 번갈아가며 구절을 완성했고, 두 번째는 다른 이들의 요청에 따라 나디아 홀로 낭독한다. 이때 레온은 시가 읊어지는 순간에 감동하지 못하고 외딴 감정에 빠져있다. 아이스크림 판매원으로 무시했던 그녀가 고학력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면에는 나디아의 목소리와 그녀를 향해 꽂히는 시선들, 두 감각계가 충돌한다. 시가 주는 감동은 그저 사랑과 죽음의 매혹적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충돌이 발생하는 지점 즉 레온의 질투와 당혹, 발가벗겨진 위선 반대편에서 우아하고 거침없이 자기 기억을 더듬는 나디아의 내면으로의 몰입이 어우러질 때 만들어진다. 펠릭스의 사진에서 중요한 요소처럼, 누가 말하고 누가 듣고 보는지에 따라 이 풍경의 결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쓰임을 되짚어야 한다. 인물들의 심경을 보완하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레온의 시점에서 설정된 것으로 이는 장면의 시제로부터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 그가 쓴 소설의 일부분으로 밝혀진다. 심지어 그 글을 낭독하는 건 헬무트, 레온 본인이 아니다. <어파이어>에 등장하는 시와 이야기는 모두 구술되어 전해지는데 데비드는 유혹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소냐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고, 헬무트는 무산된 레온의 단편소설('클럽 샌드위치')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그걸 직접 소리내어 읽는다. 그런데 정작 소설가인 레온의 목소리로 '들리는' 건 제 하소연에 불과하다. 쉽사리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던 그의 신경증적 불평과 마찬가지로 그의 또 다른 소설(헬무트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목소리로 말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레온의 소설이란 사실은 장면에서 장면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거의 반전 격으로 전해진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또 허구인지 알 수 없지만, 주검 앞에서의 레온의 즉각적인 인상처럼 들리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시간을 거친 뒤의 소회로 변주된다.

무엇보다 해당 시퀀스에서 레온은 실제 자기 이야기(소설) 안에 있으면서 허구가 가미된 소설(이야기) 바깥에 있기도 한 존재이다. 즉 영화의 마지막을 채우는 레온의 소설은 그가 홀로 써낸 글이 아니다. 그가 느끼는 허망함과 외로움의 감각으로 치닫는 구절은 펠릭스와 데비드, 나디아에 관해 이야기한 뒤에 온 결과다. 해당 장면에서 그가 자기 내면의 문제를 응시할 수 있다는 사실은 특정 찰나에 흐르는 나디아의 눈물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헤아리게 된 이후에 찾아온 변화다. 몽상의 감각을 거론하던 '클럽 샌드위치'와 다르게 그의 다음 소설은 관객보다 앞서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이면의 심상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로서 활약한다. 물론 바라보기에 관여되는 감각은 삶을 구성하는 종합적인 관계맺음의 태도이다. 나디아가 떠난 자리에서 상대를 걱정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그의 마음이 보이고, 혼자 본 바다의 텅 빈 감각은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으로 우리에게 당도한다.

 

ⓒ 엠엔엠 인터내셔널

<어파이어>의 응시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 단 하나의 순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인물들 사이 교환되던 사랑과 치기와 두려움이 있고, 누군가 떠난 빈자리에서 죽음의 고통을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이 가시화된다. 영화의 마지막, 나디아의 뒷모습은 관객이 기대할 수 있는 그의 정면이 아닌 그녀를 바라보는 레온의 얼굴을 비춘다. 나디아가 바라본 레온이기도 하다. 그들 사이의 바다(를 담은 사진)는 느리지만 긴밀하고, 위태로운 감정의 굴곡을 끈질기게 버티다 맞닿은 두 개의 시선이 만들어 낸 부정형의 리듬과 그 진동이다. 여기엔 어떠한 합의된 질서도 빗나가리라는 의심도 없다. 결국, 생략된 불의 타오름은 슬프고 아득하지만 간절해서 가능한 그 태도를 바라보기 위한 영화의 필연적 선택이다. 바라본다는 것의 어려움과 고통에도 페촐트의 세계는 직접 바라보지 않으면 그러한 사실마저 알 수 없단 점에서, 이를 감행하는 태도를 관측해 낸 영화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엠엔엠 인터내셔널

어파이어 
Afire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트
Christian Petzold

 

출연
토마스 슈베르트
Thomas Schubert

랑스톤 위벨Langston Uibel
폴라 비어Paula Beer
마티아스 브란트Matthias Brandt
요나스 다슬러Jonas Dassler
엔노 트렙스Enno Trebs

 

수입|배급 엠엔엠 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0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9.13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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