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8월 28일
[이상용의 영화일기] 2023년 8월 28일
  • 이상용
  • 승인 2023.09.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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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양식과 시작하는 영화들 그리고 월말에 남긴 영화"

8월이 끝나갈 무렵이 되니 확실히 서늘해졌다. 과거에는 종종 8월 초에 열리는 로카르노에 있었다. 유럽의 숙박업소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에어컨이 없는 경우도 많았고, 선풍기는 <강변의 무코리타>에서 주인공 야마다가 강변에서 주워 온 것과 흡사한 낡고 덜덜거리는 물건이었다. 2019년쯤인가 체인점 호텔에 머물렀을 때 가장 반가운 것은 에어컨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오래된 리조트형 건물이다.

냉방이 잘되지 않아도 괜찮은 기억으로 남은 것은 아침에 일어날 때의 공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큰 테라스의 창을 열면 산의 서늘한 기운이 강변 쪽으로 밀려 내려왔다. 로카르노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한 시간 조금 넘게 차로 이동하는 거리였지만, 스위스임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로비 앞에 있던 조그만 수영장에 들어간 적은 없지만(그곳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기는 했다) 서늘한 아침의 기운이 한낮의 더위를 견디게 했다. 한국 못지않은 폭염일 때도 많았고, 젤라또(스위스 남부는 이탈리아가 주언어인 문화권이다)라도 사서 더위를 잊고자 해도 줄줄 녹아내리며 콘을 적셨지만, 그늘은 괜찮았다. 끈적이는 더위가 아니라 그랬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언젠가부터 손풍기를 챙겨 갔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유럽인과 남미 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물건인 탓인지 낯선 물건이었지만 부채를 대신해 선물삼아 들고 가기도 했다. 

 

ⓒ 영화 <모던 타임즈>(1936)

로카르노를 떠올린 것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연을 위해 찰리 채플린의 세 번째 부인이자 <모던 타임즈>(1936)의 주인공이었던 '폴렛 고다드'의 행적을 확인하던 중 로카르노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개선문』,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작가로 알려진 레마르크와 결혼을 하기도 했는데(결혼 경력으로만 따지면 채플린에 버금가는 남성 편력이다), 이들이 말년을 보낸 지역이 스위스의 로카르노였다. 정확히 아스코나라고 하는데, 로카르노에 간 첫해에 얻은 숙박지가 아스코나 끝자락이어서 이곳의 지형을 기억하고 있다. 영화제까지 가려면 4~50분 정도 걸리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그때의 불편함은 이루말할 수 없었지만(마지막 버스 시간 때문에 늦은 밤에 시작되는 상영작을 보기 힘들 때도 있었다) 덕분에 지리 공부는 꽤 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채플린이 마지막으로 여생을 보낸 곳도 스위스였다. 흔히 스위스 로잔이라고 소개되지만 정확히는 로잔과 이웃한 '브베'다. 레만 호수 북쪽에 위치한 이 지역은 호수길을 통해 로잔에서 멀지 않다. 차량으로 30분 정도 떨어진 위치다. 채플린은 네 번째 부인이자 유진 오닐의 딸이었던 '우나 오닐'과 8명의 아이를 낳고 살았다. 그의 말년은 다산과 안정이었지만 미국에 불어닥친 매카시에 의한 것이든, FBI 후버의 모략 때문이든 더 이상 미국에서 살 수 없었던 망명객의 삶이기도 했다.

불행한 어린 시절과 화려한 전성기로 구성된 채플린의 전기에서 후기는 개략적으로만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망명자의 위치가 그의 풍성한 가족의 모습을 채운 아이러니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망명기 초입에 만든 <라임라이트>(1952)는 채플린이 지닌 향수가 집약된 걸작이다. 채플린은 칼베로라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어린) 여성에 대한 집착은 여전한 핵심으로 등장하지만 그의 과거 이력이 담긴 영국 시절의 무대와 경험은 영화의 장면마다 생생하게 묘사된다. '라임 라이트'는 영국 뮤직홀이나 극장에서 쓰였던 석회를 원료로 하는 조명을 일컫는 말이라고 하는데, '석회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라이트의 흐릿한 광채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이름은 영국 시절의 무대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채플린의 삶과 영화에서 고집스럽게 주장했던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였다. 이 때문에 꽤나 오랫동안 무성 영화의 스타일과 흑백을 고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흑백과 무성이 영화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채플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작품과 중기 영화에서 사운드와 컬러의 도래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모던 타임즈>는 교묘하게 사운드를 등장시키면서도 부정한다. 공장 사장의 음성이나 식사 로봇을 소개하는 이들의 소리가 등장하지만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들의 소리는 모두가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기계로 녹음된 사운드임을 강조한다.  떠돌이 찰리가 술집에서 공연하는 장면은 채플린의 음성이 고스란히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음성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배우 정성훈이 SNL 프로그램에서 가짜 중국어를 하듯이 채플린이 노래하는 대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스페인어와 불어의 톤이다. <모던 타임즈>의 어떤 한글 자막본은 자막을 내보낸 경우가 있는데, 제대로 따지자면 말도 안되는 자막이다.

 

ⓒ 영화 <라임 라이트>(1952)

<라임 라이트> 역시 흑백 영화다. 193,40년대에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들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테크니 컬러'의 강렬한 색을 뿜어내는 영화들을 제작한 데 반해 50년대 초입에도 흑백영화를 내보이는 채플린은 참으로 고집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심지어 채플린의 음성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성 영화의 톤을 유지하고 있으면, 영화의 절정인 돌아온 칼베로의 공연 장면은 한 번 정도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보드빌 시절의 무성 슬랩스틱을 재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장면에서 칼베로 아니 채플린은 자신과 함께 무성 코미디의 쌍벽을 이루었던 버스터 키튼을 무대의 파트너로 등장시킨다. 두 사람은 보드빌 공연의 현역에서 이미 은퇴를 했을 나이지만, 공연이 시작되면 피아노 악보 때문에 허둥대는 키튼의 코미디와 오른쪽 발이 펴지지 않아 몸부림을 치는 채플린의 슬랩스틱은 여전함을 과시한다.

반복되는 초반의 코미디가 슬슬 지루해질 무렵 피아노를 치는 키튼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채플린의 연기는 엄청난 박진감을 선사한다. 그것은 과거 무대를 고스란히 재현해내는 동시에 여전한 그들의 물리적 육박감으로 구현해 낸 아름다운 순간이다.

두 사람의 세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채플린과 키튼 중 누가 더 좋은지 내게 물으면 어김없이 키튼의 손을 들었지만 요사이 채플린의 손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세월이 흐르며 키튼의 위대한 무표정(great stone face)과는 다른 채플린의 파토스(영어로 페이소스)가 끌리는 탓인지도 모른다. 파토스(pathos)는 20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설명한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와 파토스 그리고 로고스를 수사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꼽는다.

이 개념들은 그리스의 비극을 위한 수사학으로 사용되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에토스는 신뢰와 지속을 주는 캐릭터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기준으로 하면 장님 예언가 테이레시아스가 에토스적 인물에 해당한다. 파토스적인 캐릭터는 누가 뭐래도 오이디푸스다. 테베에 역병이 돌고, 아폴론 신탁을 통해 왕을 죽인 범인을 색출한다고 나선다. 오이디푸스는 이 난국을 자신이 해결하겠다며 앞장서는 격정적 인물이다. 파토스는 감정적이고 변화하는 캐릭터다. 심지어 테이레시아스 앞에서도 자신이 훨씬 지혜롭다고(왜냐하면 그 어려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나설 정도다. 하지만 진실의 화살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자살을 하자 그의 파토스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오이디푸스는 눈 뜬 진실 앞에서 자기 눈을 찌르며 파토스의 절정을 고한다.

무성코미디의 시대에 스톤 페이스로 유명한 버스터 키튼이 신뢰와 어리숙함을 오가는 에토스적인 코미디를 펼쳤다면 채플린은 감정적이고 격정이 넘치는 파토스의 세계를 대변한다. <모던 타임즈>에서 떠돌이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단순하고 충동적이다. 두 사람은 출근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며 자신들이 살 행복한 집을 꿈꾼다. 백일몽에 해당하는 이 장면 역시 감정의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키튼은 <셜록 주니어>(1924)에서 연인에게 다가갈 때는 수줍고 어색하며 자주 꾸물거린다.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위대한 무표정일지 모르겠지만(그래서 키튼의 영화는 많은 경우 도심에서 벌어진다), 오늘날의 현실은 기이한 분노와 충동으로 가득차 있음을 목격한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비극적 현실, 아니 너무나 기묘해진 현실의 코미디들은 무성 영화 시대의 두 거장이 뒤엉킨 모습일 지도 모른다. 이제는 위대한 무표정으로 무심히 견디기보다는 <모던 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래도 잘될 거야" 라면 새벽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적어둔다. 너무나 낭만적인 결론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망각해 버린 파토스가 아닐까.

 

ⓒ 영화 <모던 타임즈>(1936)

로잔 혹은 부베와 로카르노 혹은 아스코나는 스위스의 북과 남에 위치한 탓에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 채플린과 고다드가 스위스에 거주하면서 왕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말년의 장소로 스위스를 선택했다는 것은 우연은 아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 유엔 사무소가 있고, 로잔에는 IOC 사무국이 있다. 국제기구들이 모여있고, 채플린이나 레마르크와 같은 예술가들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불어닥친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피해 스위스에 터를 잡고 말년의 예술을 행한 것은 이곳이 제 3 지대이자 망명객들의 국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스위스는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망명지에서 그들은 자신의 언어를 여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는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라는 유작을 남겼다. 이 작품은 그가 죽기 전까지 집필하였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지인과 아내에 의해 완결된 작품이다. 사이드가 유작으로 내놓은 '말년의 양식'은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에게 가져온 말로써 시대착오, 예외,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고집하는 예술가의 형식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다뤄지는 아도르노, 슈트라우스, 장 주네, 람페두사, 모차르트와 같은 이들의 말년은 어떤 모순과 예외로 이뤄졌는지 고집스럽게 탐구한다. 그것은 망명객의 삶을 살았던 지식인 사이드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스위스로 건너온 채플린의 영화도 시대착오적인 무성영화를 유지한다. 사이드는 말년의 양식 중 하나로 '망명성'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에 거주하지만, 현재에서 벗어나 있는 시대착오성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것은 현재와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의 고결함이다.

채플린은 미국 시절에도 이미 망명객으로 살았다. 흔히 <모던 타임즈>를 현재성을 다룬 작품으로 거론하지만 이 영화의 양식은 시대착오적이다. 사운드가 도래한 지 오래이지만 무성 영화의 스타일을 고집하면서 부조화스럽게 사운드를 끌어온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사운드나 부재하는 컬러 이외에도 부조화의 절정이 빛나고 있다. 컨베이어 벨트 안으로 끌려 들어간 떠돌이 찰리가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회전하는 모습은 꽤나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관객들을 깜빡 속인다.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 컨베이어벨트에 끌려들어간 노동자는 죽거나 최소한 다쳤기 때문이다. 거대한 기계장치 안으로 끌려들어간 채플린이 톱니바퀴를 거꾸로 돌려 컨베이어벨트에서 나오는 장면은 노동자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채플린의 바타협적인 방식이었다. 이후 그의 영화들은 현실의 코미디가 아니라 비타협적인 코미디로 일관했다. <위대한 독재자>(1940)는 독일과의 대립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서로가 소통하고 손을 잡기를 호소했으며(이 영화가 표적이 된 것은 그가 독일을 비꼬는데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인광 시대>(1947)에서는 영화사상 가장 인기 높았던 캐릭터였던 찰리의 분장을 벗고 맨얼굴과 맨 목소리의 채플린을 선보인다. 채플린의 후기 영화들은 과거의 향수만이 아니라 망명객의 위치에서 다시금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여덟 개의 산> ⓒ 영화사 진진

스위스에 대한 한 마디를 덧붙이면 9월 후반에 개봉 예정인 <여덟 개의 산>(2022)은 꽤나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지리적 위치와 스위스를 오가는 설정은 '루가노' 지역 혹은 로카르노 근방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리적 상상력을 품고 있다. 행여 그 사실을 모르더라도 이 영화는 자연과 인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단순함이 힘 있게 뿜어져 나온다. 누군가는 이안의 <브로큰 백 마운틴>(2005)과 비교하겠지만 피상적인 차원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작가 파올로 코네티가 쓴 동명 소설 『여덟 개의 산』이 원작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소설이 더 궁금해진다. 공식적으로 절판이라고 하니 영화를 보기 전에 서둘러 중고 서점들을 확인해 볼 필요도 있다. 아무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기로 하자.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아직 9월이 오직 않았으니까.

 

<비닐하우스Greenhouse>이솔희|2022

<지옥만세Hail to Hell> 임오정|2022

영화 <비닐하우스> ⓒ 트리플픽쳐스

이미 OTT로 넘어간 <비닐하우스>(2022)와 극장 개봉 중인 <지옥만세>(2022)는 모두 한국영화 아카데미의 영화다. 봉준호, 장준환 등이 졸업생이었다고 운운하는 것은 이제 다 지나간 이야기다. 장편 제작 과정이 만들어지면서 한때 한국의 새로운 감독들 운운하던 것도 옛날이야기다. 매년 전주와 부산 국제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이 되긴 하겠지만, 요즘은 그렇게 소개되는 차원에서 끝이 난다. 그런지 좀 됐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이 영화들은 부산의 루트를 따라 로테르담이나 베를린에, 전주의 루트를 따라 로카르노와 산세바스티안에 가지 못한다.

이러한 흐름이 절대적 기준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국의 독립영화 혹은 아카데미의 장편영화를 바라보는 안과 밖의 시선에 온도 차이가 일어났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독립영화들이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볼 것은 넘쳐나는 탓만은 아니다. 한국 영화의 중요한 피로는 플랫폼이 OTT로 넘어간데 있는 것만도 아니고, 투자되지 않는 상업영화 시장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영화가 왜 필요한지를 설득시키는 작품들이 어느새 줄어들기 시작했다.  

두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단어는 꽤 작위적이라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자극에 자극만을 부여한다. 머리로만 쓰여진 시나리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야기에 녹아든 구체적 경험을 따지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이 영화들의 상상력은 문자적으로만 보일 뿐 물리적 실체가 느껴지지 않는다. 관조적이고 대상화된 시선으로 인물과 사건을 바라볼 뿐이다. 

무엇보다 두 영화 속 인물은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정작 이들의 고통이 체감되지가 않는다. 그것은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최근 한국영화 전반에서 느껴지거나 보이는 상황이기도 하다. 뜬금없이 체 게바라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혁명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도 그랬듯이, 영화의 생생함을 위한 리얼함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영화는 수사적 자극으로만 남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선례를 떠올려 본다. 흔히 언급되는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도 과거 한국영화와의 연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없던 것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은 언제나 적극적인 단절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단절은 무엇일까?' 벤야민이 새겼던 브레히트의 말. "좋은 옛날 것 위에 건설하지 말고 나쁜 새로운 것 위에 건설하라." 새로운 영화들에게 던지는 말이 아닐까. 

 

<퀴어 마이 프렌즈Queer My Friends> 서아현 |2022

ⓒ 영화사 그램

서아현 감독의 <퀴어 마이 프렌즈>는 게이가 된 친구를 감독이자 친구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같은 대학에 다녔고,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하며 지내온 강원의 관계는 기이한 실패의 여정이다. 송강원이 미국의 군대를 자원하고, 국적을 옮기며, 한국의 주한 미군부대 근무를 거쳐 독일까지 미군으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모습은 수많은 퀴어 다큐멘터리에서 대안적인 삶을 고민하는 주인공의 떠올리게 한다. 자국중심주의적 입장을 지닌 이들에게는 꽤나 예민한 문제일 수 있지만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완고한 현실은 인간의 선택임을 강변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그가 군대에서 제대를 한다.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뉴욕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카메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 강원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건강상의 문제가 등장하지만 그 역시 사태의 전부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제 강원은 춤을 배우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불안해 보이던 강원은 서울에서 새로운 직장을 찾고, 퀴어 축제 무대에 올라갈 춤 연습을 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이 될 거라고 예상했던 퀴어 축제의 무대 행사장에 강원은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군 복무 문제, 기독교 문화와의 충돌 등이 자연스럽게 담기지만 <퀴어 마이 프렌즈>는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거나 충돌시키는 다큐는 아니다. 강원의 가족을 보여주는 장면도 최소화하면서, 미군을 선택한 후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인물을 따라가면서, 흔들리는 카메라를 보여준다. 강원은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공존하거든."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영화의 전제이자 영화 전체이기도 하다. 두 개의 정체성,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삶이 충돌하면서 강원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 순간 카메라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한다.

 

ⓒ 영화사 그램

카메라를 든 아현은 강원에게 "이상한 친구 관계이긴 해. 오빠랑 나랑."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감독의 고백에 해당한다. 두 사람의 진지한 대화가 끝나갈 무렵 두 사람의 관계를 돌아보는 아현의 말을 강원은 카메라를 들고 찍는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강원만이 아니다. 졸업생 백수로서, 또 다른 소수자로 볼 수 있는 아현이라는 개인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전되는 카메라가 뒤집어 보여주기나 역지사지 이상의 무엇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영화 또한 그 정도에서 끝난다. 강원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그 친구에 대해 <퀴어 마이 프렌즈>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멈춘다. 카메라는 아무리 친밀하다고 해도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친구와 번민에서 감독 자신의 고민으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멈춰선다. 아마 이 영화가 '퀴어 마이 프렌즈'가 아니라 '퀴어 아워 프렌즈'가 되기 위해서 혹은 친구라는 존재성을 넘어서는 한 인간의 보편성 위에 서려면 더 깊거나 더 멀리 나아가야 했을 것이다. 감독 자신에게로 돌아와 스스로를 비추는 자화상은 거울 효과에 숨는 두려운 고백처럼 보일 뿐이다.

영화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오래전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단편영화 중에서 기억나는 작품이 있다. 연세대 학생 이야기였고, 커밍아웃으로 인해 고민되는 상황을 다룬 작품이었다. 기억나는 대목 중 하나는 부모님이 커밍 아웃을 한 아들에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라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었다. <퀴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커밍 아웃을 한 그를 따라다닐 뿐 그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저 친구의 입장에서 뭔가 안타깝고, 뭔가 도와주고 싶고, 뭔가 이상하고 애매한 채 서성일 뿐이다. 이 영화는 서성이는 카메라다.

시대는 이미 변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다. 그 사이에 이 영화는 어느 틈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일까? 모두 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메라를 들고 친구만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와 내가 "이상한 친구 관계"라는 인식을 넘어서야 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퀴어영화의 흐름도 벌써 20년 ―최소한 이송희일 감독의 단편이 등장한 시점으로 보자면― 이 되었고, 이상한 친구를 넘어선 다양한 친구들을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담긴 대상이 누구이든, 그 대상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윤리성의 고민 이상으로 끝내 문제가 되는 것은 '어째서 그에게 카메라를 들이 밀어야 하는가'에 대한 감독 나름의 답을 찾는 일이다. 그것은 개인 간의 우정을 넘어서 세상의 모든 우정을 담고자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피아노 프리즘Piano Prism> 오재형|2021

ⓒ 필름다빈

<피아노 프리즘>은 실험영화라고 하는 것이 제법 친절한 가이드가 된다. 하지만 상업적 장르 영화의 규범과 달리 실험영화라고 하는 것만큼 폭이 넓고 유연한 것도 없다. 이 영화는 피아노, 그에 따라 당연한 음악, 장소, 미술, 회화적 이미지의 퍼포먼스가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영화가 개봉하는 것에 대해 무척 반가움이 든다. 무엇보다 일종의 유행이 되어버린 음악 영화들(실황 공연 영화, 모리꼬네와 같은 음악 세계를 다룬 영화, 마에스트로처럼 전기와 음악을 뒤섞는 영화 등)이 범람하는 시대에, 거장과 마스터들의 향연으로 가득 채워진 음악 영화의 편협함 속에서, 음의 사용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유희적 성찰의 한국영화가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몇 개의 음을 통해 뛰어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척이나 드물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도 이야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는 능동성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몰입도를 보여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않기로 하자. 오재형 감독은 이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인물이고, 좀 더 밀도 높고, 좀 더 친화적인 스타일로 언젠가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극장의 화면만이 아니라 재현되는 실황으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경계가 무너진지는 오래다. 휴대폰의 스크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과 영화의 경계가 오래전에 허물어졌고, 극장의 내부뿐만 아니라 온갖 장소가 스크린이 된다. <피아노 프리즘>의 지향점은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사운드의 이미지'다. 결국 영화의 순수한 영역으로 볼 수 있는 시각적으로 남게되는 이미지의 뼈대가 무엇일까. 최소한 그것이 있다면 우리는 영화로 다가설 수 있다. 

하나로 모인 <피아노 프리즘>의 화면들은 최소한 10년 이상 오재형 감독이 단편의 형식으로 이곳저곳에서 작업했던 것을 한데 모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많은 실험영화들이 그러하듯이 다큐멘터리 작업이자 지난 시간에 대한 감독 자신의 다이어리다.

 

<볼코노코프 대위 탈출하다Captain Volkonogov Escaped> 나타샤 메르쿨로바, 알렉세이 츄포브|2021

ⓒ 슈아픽처스

<볼코노코프 대위 탈출하다>는 마치 스릴러 장르 영화처럼 소개되고는 하는데 그러기에는 장르적 성격이 부족하다. 스탈린 시대의 비밀경찰 이야기인데 도심을 가르는 거대한 비행선이 지붕 가까이 나는 장면에서 연대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1938년'.

<볼코노코프 대위 탈출하다>는 잘 만든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설득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부족해 보이는 영화다. 제작국가로 나오는 러시아, 프랑스, 에스토니아에서는 이 시대를 잘 알지 모르지만 유럽을 벗어난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스탈린의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30년대 후반의 시대상에 대한 기본 정보가 입력되어 있을지는 의문이다. 뭐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볼코노코프 대위의 배신이다. 그는 어째서 비밀경찰의 서류를 들고나와 직접 희생자의 가족들을 만나러 다니는가? 몇몇 대화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구체적인 이유는 없다.

영화의 기본 구조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 편집하여 보여주는 장면들인데, 현재의 볼코노코프는 도망을 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관여했던 숙청 당한 사람들의 가족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현재의 가족을 만나거나 연결되는 장면에서 플래쉬백으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탈출하려는 자의 장르 영화가 아니라 죄의식을 씻고자 하는 한 남자의 구원을 향한 메타포에 가깝다. 그렇게 보지 않는다면 그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살기 위해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죽기 전에 자신의 과오를 씻으려고 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대위는 끝내 지붕위에서 추격을 당하다가 뛰어내린다. 그것이 이미 계획된 최후였다. 

<볼코노코프 대위 탈출하다>를 구원을 향해 몸부림치는 자의 영화로 본다면 좀 더 작가적인 태도들을 읽을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의 여정은 꽤나 반복적이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느슨하게 풀어보이는 것은 스탈린 시대의 초상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죽이도록 만드는 전체주의 사회의 끔찍한 단면들. 탈출한 볼코노코프는 자신의 연인을 처음에 찾아가지만 곧바로 배신했음을 직감한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 찾아간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시험을 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부터, 대위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상식적으로 이 남자의 행동은 이상하다. 하지만 끝내 설득시키지는 못한다. 이 시대가 이처럼 기이한 시대였음을 보여주는 데 그칠 뿐이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있을 법한 영화지만 제대로 끝내지 못한 영화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남자A man> 이시카와 케이|2022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영화를 보면서 일본 사회파 소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령 미미상의 『화차』와 같은 작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 소설을 옮겼다. 한국 관객들이 확실히 좋아할 만한 영화다.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문제를 얽고 있어서 단순한 스릴러의 차원을 사회파 소설의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훌쩍 확장한다. 더군다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변호사 키도는 재일한국인 3세로 설정되어 있다. 영화를 보면 알만한 유명한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가 맡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정체성 문제가 사건의 실상과 연결된다. 『화차』를 언급한 것은 정체성을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사고로 죽는다. 그 남자는 홀로 이 마을에 와 사별한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고, 이들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하지만 나무 베는 일을 하던 그는 사고를 당한다. 그런데 평소 가족관계를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형이 도착하여 하는 말이 '그'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키도는 이 사건을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사실 변호사가 그런 일까지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정체성을 바꾸었고, 나아가 한 번 더 바꾸었음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신분 세탁을 하던 인물을 만난다. 그는 투옥되어 있다. 그는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처럼 키도를 약 올리며 몇 가지 단서를 던져준다. 이 캐릭터의 문제는 여기까지라는 데 있다. 어느 순간 이 인물은 영화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스릴러 영화라고 보기에는 치명적 약점이다).

아무튼 그렇게 진실을 밝혀내는데 성공하지만 이를 통해 바뀌는 것은 없다. 다만, 죽은 남자가 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몇 년 동안이 오히려 그 남자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진술을 확인하는 것이 귀결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화차>를 슬쩍 뒤집어 버린다. 뒤바뀐 정체성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연인이나 가족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정체성을 바꾸며 살아가는 인물들을 추적하면서,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살기위한 필연적인 몸부림이었다는 결론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사회적 사건의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SNS에서 정체성을 바꾼 채 살아가는 동시대인을 슬쩍슬쩍 가리킨다. 무엇보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변호사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역시 이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현재의 아내를 선택했고, 현재의 삶을 선택했다는 결론이다. 그것은 과연 나쁜 일일까. 할 수 있다면 많은 동시대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가리기 위해 새로운 SNS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결론은 동시대 관객들에게 위안과 공감을 줄까. 새로운 종류의 피로를 더할까. 꽤 준수한 대중영화이지만 애매하게 피해가는 결론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스릴러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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