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볼 때면 이런 고민에 빠진다. "이것을 영화가 아닌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피해 간 영화는 지금껏 한 작품도 없었다. 그의 모든 장편영화가 그랬고,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상영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23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인디비주얼≫을 통해 공개된 수많은 단편영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조금 더 나아가 이번 상영회에서 공개된 작품은 그가 다룬 영화가 아닌 것들의 집합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의 영화가 가진 이질적인 측면을 부각하며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건 결국 구획에 관한 문제이며, 영화의 존재와 정의에 관한 선언이 될 것이다. 때문에 당장 아피찻퐁의 영화를 이야기 하기 위해 필요한 건 그의 영화 안에 있는 이질적인 것들의 정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물음은 달라져야 한다. 정체에 관한 물음이 아닌 그보다 선행해야 하는 "영화가 아닌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 말이다. 이에 답을 하기 위해선 그의 영화를 경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피찻퐁의 영화를 떠올려보자. '아피찻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태국의 정글'이고, 다음은 '영적인 존재'일 것이다. 전자는 그의 영화가 발 딛고 있는 땅이 어디에 있는지를 의미하는 동시에 작품의 배경이다(2019년 이후 더 이상 태국에서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현재 해외 로케를 기반으로 촬영한 작품은 두 작품뿐이다). 그리고 이 배경은 영화가 포괄하고 있는 맥락 전체를 끌어안는다. 이 포옹이 후자가 등장했을 때의 정당성을 보장한다. <엉클 분미>(2010)에서 죽은 아내의 유령이나 검은 인간 형상이 예이다. 태국이라는 나라이기에 들지 않는 이질감. 감독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다만 본격적으로 문제시되는 건 감독의 영화들에 달린 이미지는 과연 어떻게 탄생하였는가이다.
데뷔작인 <정오의 낯선 물체>(2000)부터 아핏차퐁은 우리가 익히 영화라고 일컫는 형식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얼핏 푸티지의 모음집으로 보일법한 그의 영화는 <열대병>(2004)과 <엉클분미>에서 더욱 과감해졌다. 서사를 읽어내기 어려운 건 당연하거니와 하나의 영화 안에 두 개의 영화가 등장하고 공간과 시간의 흐름을 관객이 기대한 지점과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놓는다. 뿐만 아니라 영상 퀄리티는 카메라 렌즈를 닦지 않은 듯 흐리고 화면의 암부에는 피사체의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다. 밝을 때조차 불순물을 용해해 놓은 듯 노이즈가 화면을 어지럽게 부유한다. 마치 수면에 비친 상을 보듯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아직 말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물'은 그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미지이다.
아핏차퐁의 영화에서 물은 늘 등장했다. 장소로 나타나고, 소리로 나타나고, 질감으로, 냄새로 나타난다. 이는 그의 영화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토대인 정글이란 공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물은 액체이지만 강으로, 호수로, 폭포로, 공기 속에 섞여 비가 되기도, 안개가 되기도 한다. 그의 영화 속 물은 늘 모습을 바꾸며 나타났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아피찻퐁의 '물'을 설명하기란 충분치 않다. 아핏차퐁의 영화는 물을 다룬다기보다 물 자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의 흐르는 속성과 같이 그의 영화는 어딘가에 담기기를 거부하고 흐른다. 서사와 시간의 순서를 무시하고 흐른다. 중력에 이끌려 낙하하기도 하지만 때론 중력을 거부하듯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린다. 그의 영화는 물이라는 액체의 속성이 지니는 낙차를 통해 영화라 불리는 것들을 파격 한다. 물론, 그의 영화가 기존 영화들을 훼손시킨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라는 관념, 그 자체를 천천히 변형시킨다. 그의 영화가 침식시키는 건 현실의 영화가 아닌 우리 내면의 영화다. 아핏차퐁의 영화는 우리 안으로 스며든 뒤 기존의 개념을 흔들어 놓는다.
결국, 아피찻퐁의 영화를 보며 느꼈던 영화가 아닌 것은, '물이 되어버린 영화 그 자체'이다. 필름의 묶음이라기보다 흘러 내려버리는 액체로, 스크린 위에 또렷하게 반사되는 빛이라기보다 수면 위에서 일렁이는 사물의 그림자로, 장면을 우리 안에 깊이 각인 시키려는 관성이 아닌 자꾸만 증발해버리는 특성으로. 그의 영화는 자꾸만 스크린으로 스며들고 우리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추상적인 설명을 늘여놓을 수 밖에 없는 이유 또한 언어의 그물이 포획할 수 없는 액체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특히,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23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인디비주얼≫에서 상영된 아핏차퐁의 단편들은 그 특성을 계속해서 증명해 보였다.
1999년작 <제3세계>은 흑백의 강한 대비로 물을 포착한다. 컨트라스트가 강하고 색이 없기 때문에 관객은 화면 속 물체에 구체적인 속성을 파악하긴 어렵다. 화면 안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대상을 파악하는데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너무 강한 대비 때문에 화면 속 인물과 집조차 부피를 잃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납작해진다. 화면 속 모든 건 만 레이의 초현실주의 사진처럼 본래의 모습을 잃고 명과 암으로 모습을 바꾸어 그림자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시각에만 집중하다가는 물이라는 영화에 용해되어 있는 수많은 감각을 놓치고 만다. 집중할 또 다른 부분은 소리이다. 아핏차퐁의 영화의 또다른 특징은 영상이 자꾸만 소리와 불화한다는 점이다. 영상 속에서 응당 발화되어야 할 소리는 관객에게 도착하지 못하고 자꾸만 엉뚱한 소리가 관객을 찾아온다. 영상과 소리는 서로를 증명하기 위해 복무하지 않고 오히려 대립한는 모습을 보인다.
<제3세계>에서는 러닝 타임 초반 어린 조카가 으깨어 죽었다는 내용을 담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래이션으로 들려오는 이 설명에 앞서 시각으로 등장하는 건 강가 위에 설치된 집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된 후에도 그 어떤 시각적 내용도 언어로 설명한 조카의 죽음과 연관된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불화를 질 들뢰즈는 영화적인 아이디어라 말했고 또한 영화이기에 가능한 것이라 말했다. 아핏차퐁의 영화에서 영상과 소리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틀 안에 담겨 있지만 정작 둘은 서로 상관하지 않고 해류처럼 각자의 방향으로 흐른다.
2010년작 <엠파이어>에서는 들뢰즈가 말한 불화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깊은 물 속 암굴에서 진행되는 영화는 무언가를 찾는 누군가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누구의 시선으로 진행되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는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화면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광원은 그의 손에 들려있는 랜턴이다. 영화의 시야를 통제할 권능을 가진 그조차도 영화 안에서 행할 수 있는 활동에 제약이 걸려있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세계 속에서 유영하는 한 명의 인간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인상이다. 다만 생각해볼 부분은 있다. 다큐멘터리는 세계의 어떤 진실을 포착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고 이는 어떠한 사실 혹은 특별한 사실에 기반한다. 하지만 <엠파이어>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다큐멘터리는 목적성과 정당성 그리고 대상(그것이 피사체든 피사체를 경유해 도달하고자 하는 무엇이든)에 어떤 판단을 해야 한다. 하다 못 해 탐구하고자 하려는 시도라도 비춰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그 모든 것이 부재하다. 영상과 소리는 일치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내면과 영화가 불일치한다. 우리가 2분 동안 지켜 보는 건 랜턴 빛에 비춘 암굴의 일부이며 작은 조개껍질이다. 동기와 목적이 증발해버린 영화의 자리에 남아있는 불순물만 우리의 기억의 바닥에 눌어붙어 있다. 우리는 영화의 흔적만 메 만질 뿐이다.
그의 영화적 특징에 미루어 이번 상영에서 가장 흥미로운 영화는 2005년작 <아시아의 유령>이 아닐까. 카메라는 해안가를 떠돌며 어린 아이를 담는다. 화면 밖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화면 안에는 또 다른 아이가 움직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 등장하는 어린이가 어떤 말을 하면 화면 내부에 있는 아이가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긴다. 아니, 그 반대라고 생각해도 어색함이 없다. 화면 안에 등장하는 아이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또 바라보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반대로 목소리로 등장하는 아이는 편집 이후의 영상을 보며 녹음한 것인지 아니면 제목처럼 유령으로 존재하며 목소리만 영화에 얹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화면 안에는 먹고 마시고 자는 태국 해안의 일상적인 행동 양식을 보여주지만 연기라는 행동 자체를 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카메라라는 존재와 (아마도) 녹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목소리는 자꾸만 영화 바깥에 있는 관객을 진동하게 한다. 이 진동은 영화가 가진 파동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파동을 파도라고 이름 붙일 때 우리는 영화가 만들어진 공간적 배경을 상기하게 된다. 영화 설명에선 2004년 발생한 쓰나미를 시작점으로 만든 영화라고 한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밀려오는 파도는 평화롭다. 아이들(화면 안에 등장하는 아이와 목소리로 등장하는 아이 모두)도 평화롭다. 이 들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목소리나 행동으로 영향을 준다. 마치 게임을 하는 듯 보인다. 감독의 영화에서 영혼으로 등장했던 이들의 목소리와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영혼이 이렇게 다시 한번 모습을 바꾸어 등장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파도에 젖어간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이후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 장면은 없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관객의 내면 안으로 투습(침투)하지만 기억 안에 화면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증발) 버린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는 영화적 아이디어의 실험에 의의를 두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메모리아>(2021)에서 주인공 제시카 홀랜드(틸다 스윈튼)를 괴롭히는 소리를 "우물 안에 무언가가 빠지는 소리"라고 묘사한다. 영화의 끝자락에서야 어렴풋하게 알게 되는 소리의 정체는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이지를 재확인하게 한다. 물리적인 논리를 제멋대로 뛰어넘는 상황을 목격한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분명 보았음에도 우리가 본 것이 정말 맞는지 의심한다. 하지만 이 의심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말한다. "영화는 단절된 상태와 연결을 시도하는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저와 여러분 그리고 제작진들의 감각을 열어주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아피찻퐁은 영화로 현재의 상태(단절)에서 다른 상태(연결)로의 전이를 이루려 한다. 이 감독은 영화가 증발한 사라진 자리에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말한다.
[글 배명현 영화평론가, rhfemdnjf@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