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마스크걸' 오인되는 얼굴에 관하여
[NETFLIX] '마스크걸' 오인되는 얼굴에 관하여
  • 김민세
  • 승인 2023.09.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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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가"

웹툰 『마스크걸』(스토리 매미, 작화 희세)에는 유독 이상한 회차가 있다. 성형 수술로 신분을 숨기고 술집에서 일하게 된 김미모가 자신과 닮은 라이벌 김춘애의 흉내를 내는 장면인데, 이 회차에서 김미모와 김춘애 각각의 정체는 술집 고객들과 사장을 더불어 독자를 속일 정도로 누가 누군지 쉬이 판단할 수 없는 혼돈 속에 놓인다. 이 장면은 『마스크걸』의 서사적 전략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살인극, 추격극, 또는 복수극의 구조 아래 놓인 이 웹툰의 서사에서 누군가의 정체를 규명하는 일에는 계속해서 오해나 착각이 따른다. 이를테면 김모미는 마스크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주오남의 협박 메시지를 회사 동료 상순이 보낸 것으로 오해하거나, 김경자는 김춘애의 사진을 김모미로 착각하고 결국 김춘애를 살해한다. 웹툰 『마스크걸』의 갈등 구조의 중심에는 항상 '오인'(誤認)의 모티프가 있으며, 이러한 오인은 서사 상의 반전 또는 계획된 일이 그대로 풀어지지 않는 급전을 일으킨다.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은 원작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오인의 모티프를 활용하는 데에 끈질기게 집착한다. 웹툰 『마스크걸』의 오인이 외모지상주의로 대두되는 어떠한 한국 사회의 풍경을 그려내는 현실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텍스트로 기능하는 데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시리즈 <마스크걸>은 그것을 굳이 주제화시키기보다는 서사를 운반하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한층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그 미스터리의 이면이 벗겨지는 곳에는 한국 사회의 풍경이라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어떠한 본질적인 통찰이 있다. 이것은 김용훈의 전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면모였으며, 김용훈은 <마스크걸>에서 성공한 웹툰 원작을 최대한 성실하게 실사화하는 것을 넘어서 오인으로 인한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를 통해 자신의 작가적 역량 안에서 명확한 주제를 도출해낸다.

 

김미모(이한별) ⓒ 넷플릭스

오인되는 정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첫 쇼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돈이 든 (것처럼 보이는) 가방과 그것을 운반하는 정체 모를 누군가의 손이다. 이 첫 쇼트로 영화는 '돈 가방을 들고 있는 손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 쇼트를 둘러싸며 펼쳐지는 세 갈래의 서사는 '결국 돈 가방은 누구의 손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여기서 김용훈은 서사 상의 욕망과 등장인물의 욕망이 향하는 대상에 '돈 가방'이라는 죽은 물체, 즉 '정물'을 가져다 놓는다. 그 정물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이동하거나 주인의 자리를 계속해서 뒤바꾼다. 한마디로 김용훈 영화의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를 작동시키는 서사적 동력의 중심에는 '욕망의 대상인 정물이 결국 누구의 것이 되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이러한 '오인되는 정물'의 모티프가 <마스크걸>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때는 김경자가 김춘애를 김모미로 오인하는 에피소드다. 이 오인을 일으키는 것은 김춘애가 걸고 있는 김모미의 목걸이인데 이 목걸이는 마치 김모미의 환유가 되어버린 듯이 김경자의 욕망을 구성하고 결과적으로 김춘애를 김모미로 오인하게 한다. 그 목걸이가 '누구의 손에 어떻게 들어갔는가'라는 미스터리의 진상 또한 김춘애의 거짓말로 인해 또 한 번의 오인을 거친다. 이러한 오인은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이고, 누구의 이야기로 맺어지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의 층위로 나아간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한번 반복되고 한번 변주되는 첫 장면에서 돈 가방과 그것을 들고 있는 손을 팔로우하는 카메라처럼, <마스크걸>의 서사는 회차마다 주인공의 자리를 새롭게 내어주면서 화자와 화자, 화자와 청자 사이의 오인으로 작동하는 이야기의 얼개를 만들어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정물이 돈 가방이라면, <마스크걸>의 정물은 '김모미의 얼굴'이다. 이 얼굴은 주인의 자리를 뒤바꾸고 그것을 붙잡고 있는 손에서 미끄럽게 빠져나가며 유희하는 돈 가방처럼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거나(김모미가 인터넷 방송을 할 때 쓰는 마스크), 누군가에 의해서 오해되고(김경자가 김모미로 착각한 김춘애의 얼굴), 형태를 뒤바꾼다(이한별에서 성형한 뒤의 나나로. 그리고 성형 부작용을 겪은 고현정으로). 즉 <마스크걸>은 '김모미의 얼굴이라는 정물이 누구의 얼굴이 되는가'에 대한 서사이며, 그것이 우리가 <마스크걸>에서 느낄 수 있는 근본적인 서스펜스다.

 

주오남(안재홍) ⓒ 넷플릭스

두 가지 오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미스터리가 돈이라는 유물을 두고 얽히는 인간 군상의 이기심이라는 주제로 벗겨진다면, <마스크걸>의 오인으로 인한 미스터리가 벗겨지는 지점에는 '여성'이 있다. 첫 번째 오인의 주체는 '주오남'이다. 마스크걸의 정체를 처음으로 알게 된 인물로서 김모미의 얼굴의 진실에 가까이 서 있는 주오남이 드라마의 전개를 뒤엎는 결정적인 오인을 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주오남은 김모미가 실수로 기절시킨 남성을 죽었다고 착각해 그의 시체를 대신 처리할 결심을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보는 오인이다. 더불어 그가 여성의 신체를 모방한 인형과 성인용 기구를 사용하는 점은 여성의 몸을 죽은 것으로 대체하는 이상 성욕과 관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오인은 끝내 김모미를 강간하는 순간 극에 달한다.

오인의 주체로서 주오남은 극 속에서 보이는 남성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부용은 김춘애를 자신의 계좌라고 말하고, 마스크걸의 행방을 추적하는 곰돌은 사진 속 여자의 가슴이 '살아있는' 가슴인지 '죽어있는' 가슴인지 분간(성형의 여부)하는 데 몰두한다. <마스크걸>의 남성들의 욕망은 그 오인을 현실화하기 위해 여성을 죽어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에 있으며, 그들은 그 욕망이 실현되는 목전에서 죽는다. 두 번의 살인. 김모미를 강간하던 주오남은 수차례 칼에 찔린다. 김춘애를 폭행하던 부용은 목을 졸려 버둥거린다. 오인의 대상이었던 여성은 살인의 주체가 된다. (이 문장에서 오인과 살인은 마치 같은 말처럼 들린다) 그리고 첫 번째 살인으로 외로운 싸움에 뛰어든 김모미는 두 번째 살인으로 연대의 순간으로 나아간다.

 

김경자(엄혜란) ⓒ 넷플릭스

두 번째 오인의 주체는 '김경자'이다. 김경자에게 붙잡힌 김춘애는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기 위해 김미모와 술집에서 함께 일하는 라이벌 관계였음을 진술한다. 김경자는 김춘애의 말을 믿고 그녀를 풀어주지만, 이야기는 김춘애의 시점으로 이어지며 그 진술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김경자는 김모미의 얼굴이라는 정물에 총구를 겨누지만, 그 욕망의 대상은 (가짜 김모미인 동시에 가짜 가슴을 가진) 오인된 얼굴, 김춘애의 형태로 빠져나간다. 이후 긴 시간 동안 플래시백 되는 김춘애의 과거는 또 다른 여성의 역사로서 기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야기 화자의 자리를 넘겨받음으로써 김모미(들)의 일차적인 승리를 그려낸다.

이 급전이 꽤나 흥미로운 이유는 원작과 동일하게 김미모와 김춘애의 서로 이용하고 배신하는 관계를 설명하다가, 원작에서 방향을 한참 튼 채 마치 처음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다시 쓰듯이 둘의 우정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원작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입장이라면 큰 당혹감으로 다가올 이러한 급전은 여러 차원에서 (시리즈 <마스크걸>이라는 단일한 서사의 차원에서, 그리고 원작과 드라마의 서사 사이 간극이 만드는 상호 텍스트적인 서사의 차원에서) 오인을 낳는다. 전자의 오인은 김춘애의 거짓말로 인한 김경자의 것이지만, 후자의 오인은 김용훈의 다시 쓰기로 인한 관객의 것이다.

<마스크걸>의 두 가지 오인으로 인한 서스펜스와 미스터리가 풀어지는 지점에는 여성이 있다. 그렇기에 '김모미의 얼굴이라는 정물이 누구의 것이 되는가'라는 질문은 곧 '여성의 얼굴(몸)은 여성의 것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동어반복이다.

남성과 살아가는 데 실패하는, 다시 말해 남성의 세계에서 타협하지 않는 여성이 원작에서는 (특히, 2부에서는) 복수의 칼날을 서로를 향해 돌릴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지만, 시리즈 <마스크걸>의 김모미와 김춘애가 만드는 연대는 끝내 남성의 세계를 옥죌 수 있게 한다.

 

김미모(나나) ⓒ 넷플릭스

남자 없는 여자들

원작의 3부에 해당하는 5, 6, 7화는 앞선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하거나 지난 이야기를 되살리려는 것만 같다. 가슴을 드러내며 춤추는, 하지만 주오남의 시선으로 인해 죽는 김모미의 몸은 교도소에서 그저 말 그대로 죽어있는 몸이 된 것처럼 카메라에 담긴다. 김춘애의 죽음으로 깨어진 여성의 연대는 김모미와 단짝 친구 예춘의 관계로 새롭게 재현된다.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김모미의 모습은 주오남의 복수를 위해 신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하는 김경자의 모습과 닮았다. 그리고 둘은 결국 모성애라는 여성의 욕망을 공유한다.

하지만 여기서 <마스크걸>의 5, 6, 7화에 해당하는 후반부를 마냥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저 단순한 복수극으로 이야기가 맺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욕망으로 비롯한 오인을 통해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를 작동시키던 이전의 날카로움은 보이지 않고 그저 인물의 심리를 무엇이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상태에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김미모를 죽이기까지 수차례 갈등하는 김경자의 모습과 신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다가 이내 탈옥을 결심하는 김미모의 모습이 그러하다.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던 김경자는 지나치게 복수를 미루고, 교도소에서의 김미모의 행동이 진정한 신에 대한 믿음이었는지 또는 그저 탈옥을 위한 전략이었는지는 충분히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은 결국 캐릭터가 갖고 있는 욕망의 문제인데 <마스크걸>은 모성애라는 어떠한 본질적인 욕망을 꺼내면서도 그것을 확신하기에는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렇게 욕망에 괄호가 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이 부딪힐 세계, 즉 남성이 없기 때문이다. (5화부터 <마스크걸>의 여성들에게 남성이라는 적대자는 실종한 것만 같다. 새롭게 등장한 김미모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김용훈은 앞선 에피소드를 작가적으로 영리하게 각색한 반면 5, 6, 7화에서는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며 서스펜스와 미스터리의 농도를 한층 낮춘다. 여성 서사에서 모든 남성이 절대악으로 묘사될 필요는 없지만, <마스크걸>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남자 없는 여자들'의 쫓고 쫓기는 지루한 싸움일 뿐이다.

 

김미모(고현정) ⓒ 넷플릭스

<마스크걸>은 '누가 누구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서사다. 주오남은 모니터를 통해 마스크를 쓴 김모미의 얼굴을 보고, 그녀와 대면한 순간에 마스크 뒤에 숨겨져 있는 붕대를 감은 얼굴을 보지 못한다. 김경자는 총구를 통해 김모미의 얼굴을 보지만 그곳에는 김춘애의 얼굴이 있다. 김미모의 얼굴은 사진을 통해서만 김모미에게 닿을 수 있으며, 김모미는 안은숙의 속임수로 인해 사진 속 사람의 얼굴을 김미모라고 믿어야 한다.

<마스크걸>에서 어떤 장애물에 가로막혀 미끄러지는 숏/역숏이 유일하게 마주 보는 순간은 두 장면뿐이다. 김모미와 김춘애의 공연 장면. 이것은 이미 지나간 추억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춤추던 김모미와 김춘애가 부용의 목에 감긴 줄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길 때 김모미의 숏과 김춘애의 숏은 마주 보지 못한다. 부용의 죽음, 또는 춘애의 죽음으로 더 이상 복원될 수 없는 두 얼굴의 쇼트. 그리고 김미모가 김모미의 어린 시절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는 장면이 있다. 이것을 뒤늦은 도착이라고 볼 때, 방점은 '뒤늦은'에 찍혀야 할까, '도착'에 찍혀야 할까. 김미모는 웃고 있다. 이 얼굴을 김모미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마스크걸>은 끝내 여성으로 닫히고 열리는 드라마가 된다.

[글 김민세 영화전문기자, minsemunji@ccoart.com]

 

 

마스크걸
Mask Girl
감독
김용훈

 

출연
고현정
안재홍
엄혜란
나나
이한별
한재이
신예서
김민서

 

제작 하우스 오브 임프레션
제공 넷플릭스
제작연도 20203
상영시간 7부작(410분)
공개 2023.08.18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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