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BI] '일층 이층 삼층' 비우고 채워지고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MUBI] '일층 이층 삼층' 비우고 채워지고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 박정수
  • 승인 2023.09.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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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가"

영화가 탄생한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총망라하여 '가장 독립적인 영화감독'을 선정해본다면, 분명 '난니 모레티'라는 이름이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영화가 독립적이라 하기엔 너무 평범하지 않아?"라며 의아해할지 모른다. 언뜻 보기에 그의 영화는 단순하고 통속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모레티만의 '1인 제작 시스템'으로 완성된 결과이기에 속내는 아주 독립적이다. 그는 권력, 자본의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당당하게 제 할 말 다하는 영화'를 올곧게 연출해왔다. 그것이 20세기의 물불 안 가리는 신랄한 '정치 풍자 코미디', '일기'와 같은 사적 영화였다. 모레티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오직 '자신만 알고 있는 사실'을 영화에 반영하였다.

그런 점에서 모레티는 20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부흥한 네오리얼리즘에서 한 발짝 진보한 감독이라고도 평할 수 있다. 네오리얼리즘을 이끈 시네아스트들이 문화를 검열하는 파시즘 정권에 반발하여 '알지만 말하지 못하는 사실'을 영화에 담아냈다면, 모레티는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그 누구도 모르는, 오직 '나만 아는 사실'을 영화로 승화하기 때문이다. 다만 21세기 들어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실, 이별 등을 보편적인 드라마 문법으로 탐구해왔기에, 경쾌하고 도발적이던 그의 개성은 다소 약해졌다. 이를 두고 관객들의 평가가 엇갈렸고, 특히 그의 개성이 많이 사라진 2020년대의 작품은 반응이 더 극단적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1인 제작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기에, 우리는 모레티만 알고 있는 사유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영화를 여전히 봐야만 한다.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그의 신작 <드디어 새벽>(2023)이 프리미어 됐다. 해당 작품을 살펴보기 전에 안타깝게도 국내에 개봉되지 못한 2021년 작품, <일층 이층 삼층>을 통해 2020년대 모레티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 영화 <일층 이층 삼층>

총 3부로 구성된 <일층 이층 삼층>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총 10년의 세월을 다루고 있고, 그 기나긴 시간은 익숙한 일상을 앗아가는 대신 변화를 가져다준다. 모레티는 시간이 발생시키는 '사건'을 '연출의 운동'에 반영한다. 오프닝 크레딧, 고정된 카메라는 영화의 무대가 되는 3층 건물을 포착한다. 밤이다, 다들 잠들어 있고 빛은 희미하다. 이윽고 배우, 감독, 프로듀서의 이름이 나열된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자 한 호에 불이 켜진다. 동시에 지금껏 멈췄던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이며 '트래킹 숏'으로 바뀐다. 카메라가 이동하는 와중 배우의 이름은 배역으로, 심지어 모레티도 '비토리오'라는 허구의 옷을 입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깨어난 인물들이 발을 떼며 세계에 힘을 가하자, 밟힌 세상은 꿈틀거리고 사건이 발생한다. 안드레아가 음주 운전 사고를 일으켜 누군가를 죽인다. 마치 세상의 이동이란 삶에서 '죽음'으로 향한다는 듯. 동시에 모레티는 진통이 시작된 임산부 모니카를 비추며 '탄생'도 포착한다. 움직이는 시간은 무언가를 '짓밟으며' 소멸시키기도 하지만 '밀어내며' 탄생시키고 꺼내기도 한다는 듯.

이후 카메라는 더 극적으로 움직인다. 비토리오와 도라, 안드레아가 길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트래킹 숏에, 루치오와 프란체스카가 학교로 걸어가며 소통하는 모습은 '달리 숏'에 담긴다. 영화 내내 유려한 카메라 워킹과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한 쌍으로 묶여있다. 움직이며 발생하는 사건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를 관객인 우리 눈앞에 들이미는 것처럼 대화 또한 상대방에게 이동하며 새로운 앎과 국면을 보여준다. 이때 모레티는 일종의 사건에 해당하는 대화를 주로 '제자리걸음'으로 처리한다. 이는 마치 인간이 새로운 현재를 맞닥뜨리기보다는, 익숙하고 친밀한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사건이나 대화를 부정한다. 운동이 부각되는 카메라 워킹뿐만 아니라, 형식이 담아내는 이미지도 루치오와 샬롯이 대화를 나누며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이동이다. 그러나 도착한 장소가 새로운 공간이 아니라 기존의 집인 것처럼,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더라도 더 나아가지 않고, 심지어 '퇴행'한다.

모레티는 전진과 퇴행을 줌인과 줌아웃에 반영한다. 음주 운전 사고를 일으켜 보행자를 죽게 한 안드레아는 집을 떠나 교도소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의 어머니 도라는 떠나야 하는 안드레아 앞으로 다가서며 그와 팔짱을 낀다. 그리운 과거의 아들을 붙잡고 놔주지 않으려 한다. 모레티는 이를 줌인으로 처리한다. 영화 속 줌인은 현재의 흐름을 거슬러 과거로 퇴행하는 형식이다. 더욱이 그는 줌인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사별한 비토리오의 목소리가 남겨진 자동응답기에 답하는 도라의 행위가 무의미한 '독백'인 것처럼, 과거의 아집에 상응하는 줌인은 진실을 거부하고 거짓을 믿는 덧없는 행위다.

이와 달리 줌아웃은 과거와 작별하며 멀어지고, 대신 현재 닥쳐온 사건과 가까워진다. 프란체스카는 목욕을 하며 "아빠 거기 있어요?"라고 묻는다. 루치오는 거기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줌아웃으로 포착된다. 프란체스카가 기억하는 아빠는 멀어졌다는 듯이. 이후 프란체스카는 부부의 침실에서 같이 잠을 청한다. 프란체스카와 부모는 가까워지면서도, 영화의 형식은 동시에 멀어진다. 루치오는 현재의 딸과는 가까워졌지만, 기억 속의 딸과는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말에선 영화를 구성하던 세 가구 모두 다 집에서 줌아웃으로 멀어진다. 가득 채워졌던 3층 건물은 멀어지면서 텅 비어간다. 모레티가 보여주는 건 지금 여기의 상대방과 가까워지거나, 현재 나의 자아와의 밀착이다. 우리는 사건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공장과도 같은 현재에 살지, 가만히 멈춰선 박물관과 같은 과거에 살지 않는다. 그는 과거를 줌인하면서 현재를 줌아웃 할 것이 아니라, 과거를 줌아웃하고 현재를 줌인 해야 한다고 말한다.

 

ⓒ 영화 <일층 이층 삼층>

모레티는 <일층 이층 삼층>의 사건을 주로 '밤'에 발생시킨다. 교통사고, 모니카의 출산, 레나드와 프란체스카 실종, 사라와의 불화, 정전, 모니카의 사라짐 등 영화 속 주요한 사건들은 밤에 발생한다. 특히 2부에서 발생한 정전은 안 그래도 어두운 밤을 더 칠흑같이 만들고, 그렇게 화면이 새까매진 이후에 국면은 뒤바뀐다.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세세히 밝히는 오후와 달리, 추상적인 어둠으로 뒤덮여 상상력을 자극하는 밤은 무엇을 들이거나 비워낸다. 반면 '낮'은 주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규명한다. 안드레아의 죄와 레나드의 노망 증세, 사라와 루치오의 불화 등을 확인하는 시간이, 밤의 베일을 빛으로 들추는 낮이다. 하지만 낮 또한 적지 않은 변화가 발생한다. 밤에 떠난 대상이 낮에 돌아기도 하니 말이다. 즉 밤과 낮은 특정 역할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존 상태에서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며 사건을 일으킨다. 현재는 밤과 낮을 오가면서 사건을 만들어낸다. 좋든 싫든 낮과 밤을 오가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모레티는 어떻게 변화를 수용해야할지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영화 속 사건의 주체는 남성으로, 그들은 이동이 자유롭다. 안드레아는 사고를 일으키고, 조르지오는 항상 집을 비우며, 루치오는 레나드를 협박하거나 샬롯과 외도한다. 심지어 남성은 자신이 일으킨 사건의 책임에서 도망칠 정도로 자유롭다. 반면 그들의 책임을 무기력하게 감당하는 쪽은, 남성에 비해 이동이 제한된 여성이다. 안드레아에 의해 사망하는 보행자가 여성이요, 어떻게든 이를 뒷수습하는 대상도 그 자신이나 아버지 비토리오가 아닌 도라다. 사라 또한 루치오가 일으킨 문제를 전전긍긍 수습하고, 모니카는 조르지오에 의해 강제로 독박 육아를 떠안았다. 그런 여성은 '귀'가 열려 있어 변화를 수용하지만, 사건을 일으키면서도 변화를 거스르는 독단적인 남성의 귀는 닫혀 있다. 루치오는 사라와의, 조르지오는 모니카와의 소통을 원치 않으며, 비토리오와 안드레아는 대화의 가능성조차도 원천 봉쇄한다. 특히 비토리오는 현재의 꼴통 안드레아는 없는 셈치고, 어린 날에 사랑스럽고 귀여웠던 안드레아만 그리워한다. 반면 모니카는 집에 로베르토가 방문했음을 밝히거나, 샬롯 또한 루치오와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함에 거리낌이 없다. 사라는 루치오의 고백을 들어주고, 대화를 거부하는 안드레아의 물꼬를 어떻게든 트는 사람은 도라다.

대화 가능한 여성과 불가능한 남성, 변화를 짊어지지 않는 남성과 그 몫을 대신 떠맡는 여성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이념은 '가부장제'다. 영화 속 남성 대부분이 집안의 '가장'이고, 여성은 가장을 보필하는 '아내'다. 모레티는 남성의 심리가 현실의 변화 대신 머릿속에 기대한 '가정의 모습'에 집착한다고 분석한다. 앞선 사례 모두 다 가정이 원하는 데로 통솔되지 않으니 남성은 더더욱 귀를 닫고 아집이 심해진다. 변화를 거스르는 남성들은 현재에 고립되고 불완전해진다. 반면 대화하는 여성들은 현재로 이동하여 문제를 극복하고, 또 타인에게 참여하며 연대하고 보완한다. 그녀들은 서로의 방문을 긍정한다. 레너드와 지오반나에겐 사라가, 홀로 육아를 하는 모니카에겐 도라와 로베르토가 찾아온다. 방문한 이들은 프란체스카를 돌봐주거나 말동무를 해주고, 또 육아를 보조해주며 침입한 까마귀를 내쫓아 준다.

 

ⓒ 영화 <일층 이층 삼층>

3부 도라의 동공에 변화를 거부하는, 난민 혐오 여론이 들끓는 이탈리아의 현주소가 비친다. 또 도라는 비토리오와 안드레아 어느 누구도 없이, 여성으로서 제 한 몸만 남은 상황이 불안하다. 프란체스카는 스페인 유학을 원하지만, 이와 동시에 새로운 환경이 걱정돼서 신경이 곤두선다. 하지만 바로 그 변화로 가득한 것이 현재다. 우리의 삶은 현재에 산다. 모레티는 우리가 맞닥뜨린 현재를 카메라로 똑똑히 응시하며, 이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 변화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여성에게, 희망이란 가부장제의 철폐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결말에서 대다수의 여성들은 자아를 찾고, 남성들은 변화를 긍정한다. 여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때, 남성은 귀를 열어 내팽개친 책임과 외면한 변화를 수용할 때, 현재를 거부하며 비롯된 많은 우환들을 비로소 타개한다.

2020년대의 모레티는 시간의 흐름에 집중한다. 더욱이 2010년대까지는 '한 가족'에게 발생한 변화에 귀를 기울였다면, <일층 이층 삼층>에서는 '여러 가족'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일일이 주목한다. 2010년대의 작품에는 통통 튀는 주관이 연출에 반영되어 있었는데, 자신을 아예 거두고 타인과 세계에 집중하는 <일층 이층 삼층>에서는 그런 가벼움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진지해지고 묵직해진 모레티의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다. 피상적으로 보기에도 <일층 이층 삼층>은 여타 드라마와 별 다를 바 없는 통속적인 구성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모레티는 이 통속성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통속극을 구성하는 사건들은 어째서 발생하고, 이는 우리네 삶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며, 여기엔 어떤 성 역할과 관행이 반영되어 있는가?" 여전히 1인 제작 시스템으로 영화를 창작하는 모레티는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제기한 질문에 솔직한 답변을 한다. 즉 모레티가 체감하는 현실과 시대는 여전히 그의 영화에 반영되고 있기에, 그 사실은 모레티를 제외하곤 누구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독보적인 주관성을 자랑하는 그의 영화는 분명히 감상해야 할 가치를 지닌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영화 <일층 이층 삼층>

일층 이층 삼층
Three Floors
감독
난니 모레티
Nanni Moretti

 

출연
마르게리타 부이
Margherita Buy
리카르도 스카마르시오Riccardo Scamarcio
알바 로르워쳐Alba Rohrwacher
아드리아노 지안니니Adriano Giannini
엘레나 리에티Elena Lietti
알레산드로 스페르두티Alessandro Sperduti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19분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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