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th SIWFF] '쇼잉 업' 예술 이전에 사람이 있다
[25th SIWFF] '쇼잉 업' 예술 이전에 사람이 있다
  • 변해빈
  • 승인 2023.09.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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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태도"

도자기를 조각하는 '리지'(미셸 윌리엄스)는 재능에 비해 절대적인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의 조작품에서 큰 감흥을 받는 동료도 있고, 예술가의 길을 먼저 걸어온 아버지(저드 허슈)의 지지도 받고 있지만, 친구이자 집주인이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동료 조(홍 차우)에 비하면 그녀는 무언가가 충족되지 못한 공허함을 지울 수 없다. 두 예술가를 주축으로 한 <쇼잉 업>은 우선 그들의 차이를 근간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조는 리지보다 준비 중인 전시도 하나 더 많지만, 그네를 만들어 탈 일상의 여유도 누린다. 갤러리의 규모도 사물과 살아있는 것들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리지는 자기 생활에 들어온 모든 것이 질서를 갖춰야 하는 반면 조는 하나의 질서와 곁가지 사이의 균형을 중시한다. 안의 깊이를 탐미하는 리지와 바깥으로 확장하는 조의 상반된 성질은 그들이 작업하는 과정에서 작품이 존재감을 발현하는 방식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런 차이가 노동과 비전을 구속한다고 토로하는 얼마간 리지는 질투와 불안, 속물적 욕망 사이에서 냉혹한 현실에 눈떠버린 자처럼 권태에 시달린다.

여기까지 말하면, <쇼잉 업>은 두 예술의 경향이 부딪힐 때 발생하는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어느 예술 수업의 요지처럼 '다른' 두 개가 공명하며 '충격'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자아의 구성물을 고유하게 일으켜 세울 미래가 도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길은 가장 안정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식화된 차이가 불러일으킨 의미에 얽매이게 되면 이 영화가 우리를 잡아끄는 무언가에 접근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리지가 애지중지하던 조각품 표면이 가마 불에 타버린 날, 동료가 그것만의 멋이 있다고 위로하지만 리지는 그 멋을 찾는 데에 실패하고선 그간 쌓인 감정을 폭발시킨다. 어쩌면 극 후반부에 이르러 리지의 전시장에 설치된 불탄 조각품이 우리 앞에 클로즈업되며 실망과 좌절감을 감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한 시도에는 오히려 무관심하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탄 조각품이 지닌 가능성이나 리지는 모르지만 동료는 본, <쇼잉 업>에 감도는 아름다움이 우리에게도 도달한다는 점이다. '켈리 라이카트' 영화들에서 누군가는 이미 그런 전율을 체험해왔을 것이다. <어떤 여자들>(2016)에는 또래의 법대 졸업생 트래비스(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동경 혹은 우애를 느낀 목장주 제이미(릴리 글래드스톤)가 끝내 어그러진 관계를 안고 무료한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그녀가 트래비스에게서 자기만의 무언가를 보았다면, 우리는 그 사실 외에도 제이미만이 주는 모종의 울림을 느낄 수 있다. 묵묵히 반복되는 그녀의 생활이 보여주는 눌러 새긴 듯한 시간의 흐름, 트인 평야 위로 몰려오는 멜랑콜리의 정조, 계획을 벗어난 움직임의 역설 등은 감독의 세계를 공전하며 심상 깊은 곳을 건들여왔다. 범주 주변의 '생활'을 외려 단순성 안으로 들여오면서 불필요한 세속과 거창함을 덜어내고, 소박하지만 무심히 지속되는 움직임을 일구어내는 것으로써 현존하는 몸의 힘, 미학의 실체를 사유하게 한다.

 

영화 <쇼잉 업>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영화의 오프닝, 리지가 그린 스케치 위를 옮겨 다니는 핸드헬드 카메라가 인상적이다. 이 자유로운 무빙은 인간의 역동적인 몸짓을 담은 스케치들을 오랜 시간을 할애해 포착한다. 저마다 다른 신체 밸런스, 굵직한 율동감을 리지의 조각품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해당 컷에 이어 그것을 조각 중인 리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리지를 클로즈업한 화면에는 흙을 매만지는 손끝의 근력과 눈의 운동이 전부이다. 하지만 단지 조각품의 역동성과 대비하듯 배치된 이미지가 아니라 표면 안의 힘을 끄집어내는 시도에 가깝다.

<쇼잉 업>에는 화면 가로로 힘차게 내달리는 몸, 구덩이를 파는 몸, 무용하는 몸과 음식을 섭취하는 몸, 심지어 비둘기의 날갯짓마저 포착되지만, 이 영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는 건 작지만 섬세하게 지속되는 '리지의 운동성'이다. 영화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생활을 충분히 보여줌으로써 몸이 분절된 동작을 연속성 위로 올려놓으며, 삶의 굴절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로 이어 간다. 일상에 거칠게 반응하던 리지가 자연스럽게 도자기 앞에 되돌아가 묵묵히 자기 감각에 엄청난 집중력을 쏟아부을 때의 압도감. 우발과 긍정에 무관심하던 리지가 남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어떤 하나의 무언가를 알아보고, 탐험하고, 의미를 확장해가는 모습이 장면에 우두커니 버티고 설 때, 여백이 존재하는 삶과 어우러지며 예술적 울림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영화는 하나의 조형물과 하나의 사람을 동등하고 동시적으로 묶어 보여주면서 리지와 조, 무수한 예술인과 그것을 보는 누군가, 그 현장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비평적 목소리들이 연결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틈에서 예술이 어떤 특별한 감응이 되어간다고 말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소박한 몸짓을 단순성 이상으로 의미화하게 되는 데는,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는 있지만 예술의 온전한 아름다움은 그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영화 <쇼잉 업>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조형물과 전시, 가시화되는 몸과 감응, 그리고 범용한 일상에서 어떤 의미가 발굴되기까지 <쇼잉 업>에는 직관 이상을 관통하는 힘이 있다. 그것으로 예술의 원대한 의미보단 '불완전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목하지 않는 무언가가 의미를 가진다는 건 무엇인지'. 이러한 근원적 물음에 답해내고 있다.

단지 롱테이크 카메라, 적막한 사운드 같은 관념적인 기술로 유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만으론 불가능한데, 특유의 촉각, 근력의 강도, 집중력이 작동하는 곳의 질감을 만질 수 있다는 착각이라든지, 좀 과장하자면 시공을 유영한 것 같은 이상한 침투력이 영화에 있다. 스크린에 깊이가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시원적이지만 통일성을 가지고 쉽게 정의 내리거나 일치시킬 수 없는 정교한 시선으로 존재를 들여다보는 영화적 집요함은 라이카트가 지닌 재능이다.

라이카트의 영화가 '푼크툼의 영화'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저 우리의 시선과 관심이 미치는 범주와 작용에 따른 무언가에 그치지 않는다. 무수한 삶의 구성물들이 '하나의 그 자신' 안에서 충격을 일으키며 예술인과 예술의 관계를 소박한 건 소박하게, 본연의 물성 안에서 그려내기 때문이다. 인물의 몸에 밴 습관과 품과 태도, 행불행 사이의 역학관계를 대하는 유연성이 그것들끼리만 상호작용하여 발현되게끔 만들고 있다.

 

영화 <쇼잉 업>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억지스러운 이질감 없이 진행되던 영화의 끝, 음험한 기운 하나가 감지된다. 리지의 전시 개막식에 방문하기로 약속한 오빠 션(존 마가로)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오랜 기간 은둔해 온 그는 바로 직전, 집 마당에 사람이 묻혀도 이상하지 않을 거대한 구덩이를 파내며 리지 모녀를 불안에 떨게 했다. 기운의 실체가 정확히 그려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부재를 알아챈 엄마의 창백한 낯빛은 불길하다. 그런데 션의 문제 위로 갤러리의 따분하지만 묘하게 흥분된 분위기가 서서히 교차되더니 인파가 붐비는 틈을 타 그가 등장하며 상황은 태연하게 정리된다.

그 이상한 자연스러움은 션이 갤러리에 갇힌 비둘기가 공간을 휘저으며 방황할 때, 그것을 구출하는 투박하지만 다른 존재의 심정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수렴된다. 한때 천재였고 지금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로 낙인찍힌 이가 급작스런 영화의 혼돈을 바로잡는 교환의 리듬. 이는 리지의 집에서 날개가 부러진 비둘기가 조에게서 발견되고 이들 사이를 오가며 보살핌받던 리듬과도 닮아있다. 아버지가 리지의 조각품을 눈에 새기다시피 보던 대목에서 지속되던 주의력은 새가 날아가는 찰나에 꽂히는 수많은 관람객의 시선으로 교환된다. 이 찰나의 시선은 비둘기의 가벼운 도약과 함께 어디론가 이동했다는 감각뿐인 장면의 건조함과 어우러지며 다시금 분산된다. 아버지의 시선에 시간의 진행마저 거슬릴 정도로 단단한 사랑과 응원의 마음이 담겼다면, 비둘기를 향한 시선은 느슨한 호기심과 우연의 일치로 만들어진다.

리지와 저마다의 관계를 지닌 인물들이 한데 모여드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예술과 일상 사이의 유대를 통해 자기 세계의 견고함과 주변부의 진동이 공존해가는 광경을 펼쳐낸다. 그렇기에 새의 부재를 인식하는 리지와 조의 시점 쇼트는 텅 빈 하늘이거나 나무 아래의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지만, 또한 느껴지는 건 불완전한 것으로써 애틋한 영원에 대한 감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쇼잉 업>이 아름다운 건 언젠가 도래하게 될 것들을 짐작하느라 놓치게 되는 계절과 시간, 그것을 딛고 선 사람의 현재성을 우리의 눈에 넘쳐흐르도록 담아낼 수 있는 이 몸짓 때문이 아닐까.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영화 <쇼잉 업>

쇼잉 업
Showing Up
감독
켈리 라이카트
Kelly Reichardt

 

출연
미셀 윌리엄스
Michelle Williams
홍 차우Hong Chau
마리안 플런킷Maryann Plunkett
존 마가로John Magaro
안드레 3000Andre 3000
제임스 르그로스James LeGros
주드 허쉬Judd Hirsch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8분
공개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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