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 아침' 행복도 슬픔도 모두 길지도 짧지도 않으니
'어느 멋진 아침' 행복도 슬픔도 모두 길지도 짧지도 않으니
  • 박정수
  • 승인 2023.09.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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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서로를 보존하는 힘"

미아 한센-러브의 영화는 '보편적인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아 한센-러브만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항상 흥미롭다. 첫사랑, 부모님 이야기, 권태기 등 한센-러브 자신이 겪은 풍랑을 스크린에 묵묵히 담아낸다.

물론, 자전적 이야기에는 난점이 있다. 주관이란 나 자신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타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센-러브는 바로 이 난점을 극복하며 영화를 연출한다. 철학 교사였던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녀는 보호자임과 동시에 스승이었던 그들에게서 배운 철학, 특히 특정 본질에 멈춰있지 않고 물처럼 흘러가며 변화하는 인간의 삶을 밝혀낸 '실존주의'를 사적 경험에서 건져낸다. 이로써 그녀만의 주관을 보존함과 동시에,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겪을 수 있는 객관적인 교훈과 진리도 함께 얻게 된다.

이는 한센-러브가 사적인 이야기를 담지 않은 <에덴: 로스트 인 뮤직>(2014)과 <마야>(2018)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매 순간 다른 상태를 불러오는 '시간'은 멈추지 않고 일정하게 흘러간다. 그녀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강물'처럼 말이다. 오래 머물고 싶은 순간과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순간,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과 별로 중요치 않은 순간, 가릴 것 없이 시간은 중립적으로 똑같이 흘러간다. 그래서일까. 한센-러브는 작품 속 '숏의 분량'을 모두 일정하게 처리한다. 즉 그녀는 편집에도 실존과 이를 가능케 하는 시간의 절대적인 흐름을 반영한다.

신작 <어느 멋진 아침> 또한 마찬가지다. 사적과 공적 영역,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슬픈 순간과 사랑을 나누는 순간까지 모든 숏의 길이가 치우치지 않고 균일하다. 행복과 고통이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게, 잠시 동안 머무르다가 다른 국면으로 뒤바뀌며 그저 유유히 흘러갈 것이라는 듯 말이다. 더욱이 한센-러브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행동이 미처 다 완결되기 전에 숏을 잘라낸다. 관객의 입장에서 그들은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하나의 행동으로 항구적으로 닫히지 않고 여러 갈래로 흘러갈 수 있다는 듯, 이로써 새로운 국면을 불러올 수 있다는 듯 말이다.

 

ⓒ 찬란

실존은 <어느 멋진 아침>의 촬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주로 고정되어 있는 반면, 주인공 '산드라'(레아 세이두)는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카메라가 틸트나 패닝을 하며 산드라를 어떻게든 촬영해보려 노력하지만, 이곳저곳 바삐 쏘다니는 그녀를 온전히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그녀는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서 '가까이', '커다랗게' 이따금 보일지라도, 다시금 '멀어지거나' '작게' 소외되곤 한다. 이러한 형식에 비추어보자면 실존이란 가까웠다가 멀어지는 것이자, 그 반대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도대체 그녀는 무엇과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것일까.

도입부의 산드라는 아버지 '키엔슬러'(파스칼 그레고리)에게 방문한다. 그녀는 과거 철학교사였던 위풍당당하고 현명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익숙하다. 하지만 거산과도 같은 그 풍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나약한 아버지가 남겨져있다. 그녀는 자신의 '보호자였던 아버지의 얼굴'과 멀어진다. 이제는 그녀가 아버지를 보호해야 하기에 보호를 받던 소녀였던 자신과도 멀어진다. 산드라는 아버지를 돌보느라 딸 '린'(카밀 르방 마르탱)에게 가야할 시간을 놓치는 등 일상마저 흔들린다. 우린 좋았던 과거가 현재에도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시간은 묵묵히 흐르고, 결국 모든 것은 바뀐다.

한센-러브는 분명 변화를 긍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도, 그녀에게 실존주의를 가르쳐준 어머니가 등장하는 전작 <다가오는 것들>(2016)에서도, 실존을 인지한 인간이라 한들 변화의 물결을 긍정하지 못한다. 인간의 일생은 실존과 이를 부정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 찬란
ⓒ 찬란

실존은 가까웠던 대상을 멀게 하면서, 멀리 있던 대상을 가깝게 만든다. 잘 알고 친밀하던 서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변화하는 우리는 대상이 낯설어지고 어색해진다.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시선 앞에서 가까워지고 멀어짐을 반복한다. <어느 멋진 아침> 속 인물들의 관계 대부분은 가족이다. 육체며 정신이며 쏙 빼닮았고, 태어나면서부터 가까이 위치하였기에 서로 동일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닮았던 서로는 점차 다른 구석이 아주 많은 '타자'로 변해 있다. 산드라는 아버지를 향한 감정이 여전히 긍정적이다. 그래서 그와 함께했던 즐거운 기억을 자신과 닮은 엄마 '프랑수아'(니콜 가르시아)에게 꺼내본다. 그러나 프랑수아는 키엔슬러와의 결혼 생활이 불행으로 얼룩져서 그와의 추억 대부분을 망각한 상태다. 똑같다고 생각하던 모녀는 멀어진다. 린 또한 마찬가지다. 산드라는 딸의 안위를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린은 산드라의 딸임과 동시에, 부모와 무관한 별개의 존재로서 변한다. 그래서 린은 산드라와 가까우면서도 거리를 둔다. 키엔슬러가 더는 혼자서 생활할 수 없을 거란 판정을 받자, 식구들과 친지들이 한데 모여 그의 집에서 작별한다. 키엔슬러라는 성을 공유하거나, 그를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닮은 그를 자신처럼 여기며 가까이 모인다. 하지만 키엔슬러는 죽어가는 한편, 모인 사람들은 창창한 삶을 여전히 이어가야 한다. 그래서 그의 우환이 곧 나의 것인양 슬퍼하다가도, 차 안에서 각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논하는 '정치 이야기'를 하며 그와 멀어진다. 

이렇게 멀어질 때, 상대방도 나도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가까이 있을 땐 닮은 상대로서 존재했다면, 다름을 느끼고 멀어지면서 비로소 나 홀로 우뚝 선다. 한센-러브는 이를 '프레임 구성'에 반영한다. 프레임에 함께 담겼던 인물들은 각자 독립하기 위해 프레임을 분리하고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산드라와 린은 그녀들이 쏙 닮은 프랑수아와 휴가 계획까지 일치시켜,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함께 보낸다. 그러나 산드라는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보단 '클레망'(멜빌 푸포)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크다. 다 함께 별을 보다가도, 잠자리에 일찍 들겠다는 이유로 산드라는 먼저 방에 들어간다. 이후 클레망이 보내준 편지를 읽는다. 프랑수아, 린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외부의 소음이 원천 차단되어 '진공 상태'에 빠진다. 외부의 개입을 절대적으로 불허하는 그녀만의 프레임에서 슬그머니 차오르는 것은 오직 그녀만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클레망의 편지'다. 프랑수아와 린이 함께한 세계와 산드라의 세계가 분리되며, 산드라는 자신을 되찾는다. 그런 산드라는 '번역가'다. 가족끼리 있을 때도 그녀의 입은 식구들을 위해 헌신하지만, 공적 장소에서도 그녀의 입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통역해야 할 원본에 의해 수동적으로 그녀의 발화가 결정되고, 청중이나 관객을 위해서 언어를 정돈한다. 사적 영역, 공적 영역 너 나 할 것 없이 타인에게 잠식되어 제 존재를 잃어버린 그녀는 자기만의 언어와 입을 되찾고 싶어 한다.

영화를 지배하는 실존은 익숙하고 좋았던 것들을 소멸시켜 사라지게 하기에 인간을 허무하고도 '쓸쓸'하게 만든다. 시간의 흐름은 산드라에게 남편을 앗아가고, 듬직하던 아버지까지 데려갈 예정이니 말이다. 그래서 한센-러브는 변화가 필연이긴 하지만 인간이 맞닥뜨리기 싫을 수도 있고, 이에 대항하는 '사랑'이야말로 언제나 좋은 것이라 본다. 덧없는 소멸과 상실의 연속에서 함께 프레임에 머물려는 연인들이 서로에게 충만한 마음을 선사한다. 사랑이란 꽉 채우는 것이자 머무는 것으로서 인간이 느낄 공허를 일순간 극복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두 연인에게도 변화의 순간이 찾아오기에, 한센-러브의 전작 <베르히만 아일랜드>(2021)처럼 신성하던 사랑은 진부하게 식어만 가고 프레임은 분리된다. 특히나 한센-러브의 무수한 작품에서 남성들이 먼저 바람을 피우거나, 여성 곁을 떠나기에 한 연인이 제공하는 충만한 순간은 짧고 또 짧다.

한센-러브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두 연인 간의 항구적인 정착이 아니다. 그녀에게 시간은 사랑 또한 길게 머물지 못하게 제한되기에, 매번 새로운 연인을 찾아서 끊임없이 헤매는 일련의 '여정'이자 끝나지 않는 '진행형'이다.

 

ⓒ 찬란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충만한 마음을 제공하는가. 딸이자 엄마, 번역가로서 산드라는 타인을 이해하지만, 정작 타인은 산드라를 헤아려주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산드라가 재회한 연인 클레망은 그녀의 삶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느끼려는 존재, 말하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그녀를 궁금해해주는 자다. 산드라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땐 침해받는 불편함을 느껴서 프레임을 분리하려 했지만, 클레망과 함께한 프레임에선 안정적이고 평온하게 정착한다. 즉 사랑의 요건 중 하나는 함께 있더라도 서로에게 잠식되지 않는 것이다. 외롭지 않음과 동시에 나를 보존해 주는 대상만이 연인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다. 클레망이 산드라를 보존함과 동시에, 산드라 또한 클레망을 보존한다. 그에게서 북극 이야기를 들은 날 밤, 산드라가 잠을 청하니 영화에선 '디졸브'가 발생한다. 현실 속 산드라의 육체에 관념으로서 클레망의 이야기가 포개진다. 하지만 둘 중 어느 하나가 상대를 잠식하지 않고, 둘은 생생히 공존한다. 실제로도 그들의 관계는 자신을 위해 상대를 희생하지 않는다. 산드라는 사별했지만, 클레망은 아직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기에, 산드라는 이를 존중하려 그를 기다려준다. 이렇게 사랑이란 무한히 변화하고 상실되는 세상 속에서 서로를 보존하는 힘이다.

산드라와 클레망의 육체적 사랑, 곧 '에로스'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다. 영화의 일상 속에서도 '존경'이나 '가족애' 등 서로를 보존하는 사랑의 유형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로써 우린 좋은 것들을 평소에도 보존하며 살아왔다. 키엔슬러의 가족들은 그가 소장한 무수한 책들을 따로 보관할 여유가 없다. 좋아하는 일부 서적만 나눠 갖거나 병원비 조달을 위해서 처분을 결정한다. 이 와중에 키엔슬러의 강의가 너무 좋았던 제자가 자신의 집에 그의 이름을 딴 미니 도서관을 만들어 책을 보존해준다. 시간의 흐름은 키엔슬러가 더는 철학교사일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제자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학자로서 그의 흔적을 보존해주며, 이로써 사랑은 상대에게 좋은 것을 대신 해준다. 크리스마스에 어른과 아이의 관계도 그렇다. 어른들은 아이를 위해서 산타클로스가 온 것처럼 연기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성인의 엉성한 연기를 홀딱 속아준다. 아이를 위한 어른들의 연기, 어른들을 위한 아이들의 믿음, 모두의 애정이 보존한다.

인간에게 실존은 필연이며,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유일무이한 진실이다. 그런데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냉정한 운명을 엄숙하게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끝끝내 부질없는 일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사랑으로, 또 영화라는 예술로써 변화와 상실을 한번 거슬러 본다. 한센-러브는 지금까지의 모든 작품에서 20세기에 성행한 매체, 곧 '과거'에 상응하는 35mm 필름으로 지나간 순간들을 붙잡고 재현했다. 감독 개인의 감정을 듬뿍 담아 35mm 필름 특유의 부드러운 진주색 빛살을 스크린에 가득 채우고 소중한 것들에게 사치스러운 햇살을 따스하게 선사하며. <어느 멋진 아침>에서는 산드라가 린, 클레망과 함께한 행복한 결말을 '프리즈 프레임'으로 냉각한다. 그와의 연애도, 어린 린과의 사랑스러운 추억도, 애정이 잠시 동안 지켜주겠지만, 이는 결국 흘러가야만 할 것이다. 한센-러브는 영화에 나풀거리며 덧없는 인간의 운명을 그토록 냉정하게 반영하지만, 그 실존을 마주한 인간, 심지어 자기 자신의 나약한 반응까지도 함께 투사한다. 그녀의 영화에는 인간의 운명적인 실존과 이를 부정하는 모순적인 태도까지, 그야말로 인간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찬란

어느 멋진 아침
One Fine Morning
감독
미아 한센 러브
Mia Hansen Love

 

출연
레아 세두
Lea Seydoux
파스칼 그레고리Pascal Greggory
멜빌 푸포Melvil Poupaud
니콜 가르시아Nicole Garcia
카밀 르방 마르탱Camille Leban Martins

 

배급|수입 찬란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3.09.06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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