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에 각인된 얼굴 ['오펜하이머' #2]
핵에 각인된 얼굴 ['오펜하이머' #2]
  • 이현동
  • 승인 2023.08.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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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다룰 것인가. 감각을 다룰 것인가"
예능 프로그램 《알뜰별잡》 ⓒ tvN

최근 tvN 예능 프로그램 《알뜰별잡》에 출현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필름 사용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필름을 고집하는 이유는 필름의 화질과 질감이 눈이 보는 것과 비슷하게 세상을 포착하기 때문이죠. 관객이 영화를 통해 현실의 감각을 느끼길 바랍니다"

놀란이 말하는 '현실의 감각'이란 무엇일까. 놀란의 영화를 보는 누군가에게 '현실의 감각'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십중팔구는 필름의 질감이라기보단 스펙터클한 장면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 영화에서 포착될 때 더욱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조건은 현실적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가정'이다. 영화란 무의식과 의식을 동반한 감각의 매체이긴 하더라도, 감각만이 오로지 영화감상을 대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영화평론가 장 미트리가 말한 것처럼 실재를 경험하고 있다는 느낌은 연극에서 훨씬 강하다.

 

영화 <다크나이트> ⓒ 해리슨앤컴퍼니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발명품'으로 재현의 원리에 접속해 있던 영화는 언제부턴가 현실의 감각(쉬이 정의될 수 없는)을 위해 과거의 촬영방식으로 회귀하는 감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 쿠엔틴 타란티노, 리차드 링클레이터, 데미안 셔젤 등이 그 예다. 얼핏 보면 이들은 디지털이 아닌 여전히 아날로그 세계에서 감각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작가처럼 보인다. 다만, 이런 아날로그가 단순히 본인의 노스텔지어를 표현하기 위한 순수한 욕망일지라도, 놀란 감독은 분명 지나칠 정도로 과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는 대형 트레일러가 뒤집히는 장면을 위해 피스톤을 사용하고, 실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선박과 비행기를 구비하거나 심지어 옥수수밭을 불태우는 장면을 위해서 실제 1년 동안 작물을 재배하는 등 등 놀라운 집착을 보인다.

놀란이 갖고 있는 이러한 무구한 특성에도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지점은 앞서 말한 현실 감각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런 장면들이 제작되는 과정이나 의도를 명백히 알게 될 때 관객은 이 현실 감각을 스크린으로 깊게 체감한다. 예를 들어 톰 크루즈의 무모한 바디액션이 허구성을 뚫고 스크린으로 진격할 때 이미 정보를 수집한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현실 감각을 더욱더 느낄 준비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김경수 평론가가 지적했던 바(「'크리스토퍼 놀란'의 첫 동시대적 영화 ['오펜하이머' #1]」)와 같이 놀란의 영화가 단순하게도 언제나 운명에 초점을 두고, 비극적 감정이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감각의 반경이 장르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필두로 '현실 감각'이란 곡예를 펼치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객이 간파하고 있는 현실 감각이란 사실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어트랙션의 쾌감을 조금 더 가까이서 느낄 뿐이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만약 컴퓨터 그래픽 혹은 가상현실이 실사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다면 과연 아날로그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마 현실 감각을 호소하는 것 이상의 큰 의미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날로그와 디지털에는 어떤 심원한 구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더 '현실적'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설령 그게 다큐멘터리라 할지라도 모종의 형식만이 감지될 뿐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현실)감각'이 아닌 '현실'을 다룬다는 말이 더욱 적합하다.

 

ⓒ 유니버셜 픽쳐스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실 감각을 중시하는 놀란이 이번에는 픽션이 아닌 전기영화를 연출했다는 사실에서 모종의 불안감을 벗을 수 없었다. 게다가 원자폭탄 개발을 진두지휘했던 오펜하이머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그러했다. 폭발 신이 얼마나 관객들에게 파급력 있게 전개될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치중하고 강조하던 아날로그 효과에 대한 우려가 컸다. 이제 아날로그 사용은 단연 그의 한계를 평가할 수 있는 주요한 지표였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지만 <오펜하이머>는 '호'에 가깝다. 다만 감각 경험에 길든 관객들에게 놀란 영화에 대한 기대 심리는 실상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우선 <오펜하이머>(2023)는 놀란의 초기작인 비선형적인 구조를 기억이란 테마로 맵핑한 <메멘토>와 슈퍼히어로와 조커, 그 사이에서 배회하는 검사의 고뇌를 다룬 <다크나이트>(2008)를 결합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특히, 많은 이들이 놀란의 최고 작품이라 평가받는 <다크나이트>는 슈퍼히어로의 캐릭터 문법을 살리면서도 윤리적 딜레마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캐릭터가 지닌 관습을 변용하고 특성을 적절히 배합했다. 이를 <오펜하이머>와 비교해 본다면 세계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핵 개발이라는 선과 악의 문제를 다시금 씨름하게 하면서도 더 나아가 자신이 갖고 있었던 허식과 과잉을 조금이나마 덜어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영화에서 텍스트로만 폭파된다. 실사 이미지, 어떤 희생자의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오펜하이머의 상상 속에서 잔혹한 폭발의 여파가 구현된다. 트리니티 실험도 마찬가지다. 폭발을 감상하는 관객에게 감각의 대상으로 주어진 건 기대했던 무시무시한 스케일이라기보다 '얼굴'이다. 분열과 융합 사이에서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인물의 얼굴은 무엇보다 놀란이 갖고 있던 아날로그적 특성을 축소하고, 감정을 갱신하는 데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유니버셜 픽쳐스

분열과 융합으로 읽어내는 '얼굴'

<오펜하이머>(2023)에는 <인터스텔라>(2014)나 <테넷>(2020)에서처럼 '과학자'들에게 담론을 일으킬 만한 요소는 없다. 양자역학, 원자력 등의 단어와 개념이 등장하지만, 그건 영화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큰 방해 요소는 아니다. 영화는 알려진 바와 같이 2005년도 출간된 『아메리카 프로메테우스』를 모티브로 삼는다.

영화는 삶 전체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그의 업적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맨해튼 프로젝트 시기와 그 이후에 파란을 일으켰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 누명을 씌워 청문회를 받게 하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시대적 사명으로 치부됐던 나치 타도를 위한 핵 개발과 냉전 시기에서 특정 사상에 대한 적개심은 삶의 맥락을 소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인 내연녀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와 그의 형제와 처제 사이에서 배회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애국과 충성을 버리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가장 미래의 이야기를 다룬 스트로스의 에피소드는 흑백으로 진행되고, 청문회가 시작되는 순간에 그의 과거를 플래쉬백 하는 분할 구조는 시간과 공간, 서사의 기본 구조에 균열을 낸다. 마치 이 스토리텔링은 양자역학이라는 적확하게 파악될 수 없는 모호한 과학이론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우린 영화가 말하는 (핵) 분열과 융합, 즉 수없이 나열되는 관계와 오펜하이머의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대학교 시절에 신비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던 오펜하이머는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폭발에 대한 가공할 만한 열망과 고뇌로 가득 차 있음을 표명한다. 침대에 누워 핵을 상상하는 장면에는 어떠한 긍정의 카타르시스도 없다. 미래를 향한 비극적 예언으로 얼굴이 그려진다. 이 초상은 그가 지속하고 있었던 혼란스러운 자극을 계속해서 가시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핵을 성공적으로 개발하고 난 이후 군중들 앞에 서서 자신의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도 동일하다. 혼란스러운 내면은 바깥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계속 얼굴에 축적된다. 특히나 영화의 후반부, 청문회에서 그는 심문받으면서 다양한 얼굴을 선보인다. 억지스러운 주장에 한탄하기도 하고, 반대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 유니버셜 픽쳐스

끝에 이르러 <오펜하이머>는 '진정한 얼굴의 영화'가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1928)가 떠올랐던 건 우연은 아니었다. <잔다르크의 수난>에서 재판 과정에서 사용되는 클로즈업과 순교자로서의 숭고함은 비견 <오펜하이머>가 당하는 심문 장면과 유사하게 독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오펜하이머 역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파괴의 연쇄반응이 시작된다는 말과 동시에 그의 얼굴은 마지막에서도 꽤나 일관적으로 감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드레이어는 "인간의 얼굴은 그 탐구가 결코 질리지 않을 대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킬리언 머피를 경유하여 조직된 오펜하이머의 얼굴과 제스처는 아무리 실존 인물인 오펜하이머를 모방했다고 하지만, 수정되고 가공된 얼굴이다. 유효한 건 얼마나' 킬리언 머피가 몽타주로서 조합된 오펜하이머가 탐구의 대상으로 지각될 수 있느냐'다.

<오펜하이머>는 '영화에서 킬리언 머피가 얼마나 '오펜하이머'에 근접한 모습인가'로 보는 것이 아닌, '영화가 얼마나 일관적으로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다루고 있는지'로 보아야 하는 작품이다.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감정과 냉전 시대의 냉엄하고도 혼재된 감각, 그리고 양자역학이라는 연구와 유산, 그 자체를 연출해낸다. 그렇기에 관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구조 또한 오히려 일관성을 지닌다. <오펜하이머>는 '분열과 융합이라는 주제가 얼굴이란 감각을 통해 전개되고 있는지'를 유심히 보아야 작품이다. 이는 '현실 감각'도 아니고, 더 나아가 '시대적 감각'도 아니다. 얼굴에서 폭파되고 있는 감정의 감각을 읽는 사람만이 이 영화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분명한 건, 이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유니버셜 픽쳐스

오펜하이머
Oppenheimer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Christopher Nolan

 

출연
킬리언 머피
Cillian Murphy
에밀리 블런트Emily Blunt
맷 데이먼Matt Damon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
플로렌스 퓨Florence Pugh
조쉬 하트넷Josh Hartnett
캐시 애플렉Casey Affleck
라미 말렉Rami Malek
케네스 브래너Kenneth Branagh

 

배급|수입 유니버셜 픽쳐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80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8.15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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