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첫 동시대적 영화 ['오펜하이머' #1]
'크리스토퍼 놀란'의 첫 동시대적 영화 ['오펜하이머' #1]
  • 김경수
  • 승인 202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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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원자폭탄은 일란성 쌍둥이일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2023) 크랭크인 소식을 들렸을 때,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보다는 원자폭탄이 처음으로 폭발하는 트리니티 실험의 촬영을 기대했다. 많은 관객이 그러했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 유행한 이 영화에 대한 인터넷 밈이 그 증거다. 평소에 CG를 쓰지 않는 놀란 감독이 트리니티 실험을 촬영할 때 진짜 원자폭탄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담긴 것이다. CG를 쓰지 않는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난 뒤로 인터넷은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 의미심장한 반응이다.

오펜하이머보다 원자폭탄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그가 그간 인간의 감정을 소홀하게 다루는 편이었으며, 그 빈자리를 도덕적 딜레마와 이야기 구조, 시각적 스펙터클에 치중해서가 아닐까. 게다가 놀란은 캐릭터를 섬세하게 연출하는 데에 서툴다는 단점이 있는 감독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1957)처럼 한 여성이 실종되어야 캐릭터의 감정과 행동 동기가 생기기 시작하는 놀란 특유의 작법은 종종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놀란은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그려내야 할 상황에서 언제나 운명에 초점을 두었고 거기에는 비극적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시피 했다. 놀란 영화 속에서 운명적인 상황을 마주하는 캐릭터의 표정은 굳어 있거나 경악에 빠진 경우가 다수다. 전작 <테넷>(2020)에 이르러서 형식 실험의 극한까지 간 이 감독이 과연 전기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특히, 프로타고니스트(존 데이빗 워싱턴)와 닐(로버트 패틴슨)의 굳은 표정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한 의혹이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건조한 순간은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는 순간이다. 뉴멕시코 사막의 칠흑 같은 어둠, 거기에 흐르는 적막 가운데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은 전혀 위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크나이트>(2008)에서 등장하는 온갖 폭발이 훨씬 박진감 있고 위력적이다. 폭약을 개조해서 만든 특수효과는 마치 특촬물을 찍는 듯한 감흥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IMAX 스크린을 모두 채우는 데에서 오는 경이로움이 있기는 해도, 원자폭탄이 안기는 감정은 신성함에 더욱 가깝다. 이 신성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트리니티 실험 현장에 있는 '여러 사람의 반응'이다. 원자폭탄이 느릿한 속도로 번져가는 가운데, 고글을 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이는 원자폭탄의 폭발로 인해서 나는 빛과 거기서 생기는 버섯구름을 경이로운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놀란 감독은 관객의 시점 숏을 두어서 관객도 그 관람 행위에 참여하게끔 한다. 이때 감독은 원자폭탄을 마치 상자 안에 있는 듯이 그려낸다. 매체학자 폴 비릴리오는 원자폭탄이 '빛 무기'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원자폭탄이 터지는 순간 1500만분의 1초 동안만 지속되는 그 빛을 쐰 인간이 증발된 채 흔적으로만 남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는 '빛에 의한 판화술의 방법, 신체가 자기 자신의 광도 효과로 제 흔적을 각인시키는' 카메라의 속성과 이어진다고 본 것이다.

놀란의 원자폭탄은 카메라 옵스쿠라 혹은 암실에서 빛 이미지가 생기는 영화의 이미지와 더없이 닮아있다. 트리니티 실험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모든 과학자에게도, 관객에게도 영화 관람의 메타포가 된다.<오펜하이머>는 놀란의 역사철학이 담긴 작품이기도 하며, 거기에 그의 예술론이 얽혀 있는 영화다.

 

ⓒ 유니버셜 픽쳐스

놀란이 전기를 각색하는 법

<오펜하이머>의 서사는 원작 『아메리카 프로메테우스』를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다. 다만 천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모두 따라갈 수 없으므로 영화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했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실험 물리학에 재능이 없어서 이론 물리학으로 가는 시점부터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는 영화의 주제의식과 이어져 있다. 이론과 실험부터 시작해 온갖 이분법 사이의 괴리가 오펜하이머에게 연달아 닥치기 때문이다. 그는 동생을 따라서 공산주의 진영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학계의 폐쇄성에 맞부딪힌다. 한편으로 공산주의자인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와 섹스파트너로 지내면서 키티(에밀리 블런트)와 결혼한다. 나치가 원자폭탄을 만들기 전에 원자폭탄을 만들어 평화를 지키겠다는 오펜하이머의 야심은 곧장 무너진다. 수소폭탄이라는 강한 무기를 개발해 평화를 유지하려는 대통령이 그 야심을 짓밟는다. 이처럼 영화는 세계를 이론으로 보려는 오펜하이머가 실패하는 과정에 초점을 둔다. 세계는 어떠한 공식이나 이론으로 정리되지 않는 난장판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는 영화의 불친절함과도 이어진다.

영화 오프닝에서 놀란은 영화를 지탱하는 세 에피소드를 배치한다. 우선 핵폭탄이 터지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이미지로 암시된다. 그다음에는 오펜하이머는 전후에는 핵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1954년에 그를 시기한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음모로 공산주의자로 몰린다. 심지어 비공식 청문회에 불려 나가서 보안 재인가 신청까지 거부당한다. 스트로스는 1959년 청문회에서 에드워드 힐(라미 말렉)의 양심 고백으로 인해서 몰락한다. 놀란은 맨해튼 프로젝트와 오펜하이머의 1954년의 비공식 청문회와 1959년 스토로스의 청문회를 교차해 편집하면서 실화를 재구성한다. 다만, 이 중에 무엇 하나 친절히 설명되는 경우가 없다. 

전작 <테넷>처럼 <오펜하이머> 속 대사는 영화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에 복무하지는 않는다. 대사에 담긴 과할 정도의 정보와 수많은 에피소드의 배치를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는 것은 그의 출세작 <메멘토>(2000)를 떠올리게끔 하는 박진감 넘치는 컷 편집이다. 정보를 쏟아낸다고 할지라도 두 번, 혹은 세 번 이상 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오펜하이머에 대한 단편만 안고 영화관에서 나오게 한다. 이때 반복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킬리언 머피의 얼굴을 계속 드러내 전작보다 감정이 축적되는 과정을 선명히 보여준다. 휘몰아치는 감정은 여러 겹으로 형성되어서 원자폭탄에 이르러서 폭발하고, 관중이 신발을 툭툭 치는 사운드로 전환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전환된다.

<오펜하이머>는 마치 <테넷>의 '불문율인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가 반복되는 셈이다. 더욱이 IMAX와 여러 화면비를 오다니는 연출은 오펜하이머의 내면의 불균질함을 드러내는 데에 복무한다. 이처럼 영화는 논리로 설명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 유니버셜 픽쳐스

놀란은 영화 한가운데에 트리니티 실험을 배치하면서 영화를 1막과 2막으로 구성한다. 1막이 닐스 보어(케네스 브레너)부터 시작해 아인슈타인까지 맨해튼 프로젝트와 연루된 과학자와 그들을 통솔해야 하는 정치가와 군인 등을 중심으로 한 서사라면, 2막은 오펜하이머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스트로스의 정치 복수극을 다룬다. 1막은 오펜하이머가 경험한 여러 에피소드를 혼란스레 나열하는 구성인 데에 비해서, 2막은 흑백을 교차하는 편집으로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 사이의 정치 복수극을 그려낸다. 오펜하이머를 둘러싼 감독의 관점과 오펜하이머를 판단하려는 대중의 관점이 대비되는 형식이다.

<오펜하이머>는 놀란의 세계관에 담긴 '비극적 운명론'을 역사 전반으로 확장하는 첫 영화다. 놀란은 이전에 <다크나이트 라이즈>(2012)에서 월가 시위와 빌런 베인(톰 하디)를 겹쳐 보이게끔 연출한다든지, <테넷>에서 환경 운동가의 과격한 행동을 빌런으로 그려낸 적이 있다. 놀란의 비극적 운명론은 말 그대로 S.T.A.Y라고 외친들 무엇도 달라지지 않는, 역사적 진보를 부정하는 태도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오펜하이머>에서는 흑백으로 교차되어서 드러나는 스트로스와 상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매카시즘을 비판한다. 이는 세계를 흑백으로 보고, 진실을 왜곡하는 포스트-트루스(Post-Truths) 시대를 연상하게끔 한다. 또 캔슬 컬처 등 동시대의 낙인찍기 문화를 형식으로 그려낸다. 숱한 대사가 쏟아져 나와 진실을 판단하기도 전에 숏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는 이같은 과잉된 미장센은 그야말로 정보의 바다에 휩쓸리는 온라인의 풍경과도 같다. 거기서 진실을 가려내기란 불가능하다. 진실을 도저히 알기 힘든 시대는 양자역학의 세계와도 닮아있다. 놀란은 인과가 분명한 딜레마가 오가는 도덕책의 세계가 아니라 동시대적 감각을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다만, 놀란은 이 동시대적 감각을 잘 살리지는 못했다. 인과가 분명치 않은 시대를 그려내면서도, 놀란은 여전히 인과에 갇혀 있는 듯하다. 2부에서의 스트로스의 캐릭터가 이를 드러낸다. 스트로스의 질투가 시작된 시점은 그래도 흥미롭다. 스트로스는 처음에 재판장에서 오펜하이머에게 조롱당한 것을 불쾌해했다. 그 뒤 오펜하이머에게 처음에는 호의를 지니려 했다. 스트로스는 아인슈타인이 오펜하이머와 대화한 후 자신을 무시한 것으로 오인해 오펜하이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 사이에 오간 대화는 영화의 초반과 후반에 한 번씩 삽입되고, 나중에야 그 맥락이 풀린다. 이는 놀란이 주로 쓰는 서사 기법이기도 하다. 한순간 생긴 오해가 나비 효과가 되어서 그 인물을 옥죄는 것. 이는 그리스 비극에서 비롯한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저도 모르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것처럼, 놀란의 인물도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절대 모른다. 파국에 이르러서야 그 행동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놀란은 이처럼 자신이 모르고 한 작은 행동이 자신을 구하든, 자신을 파멸로 이끌든, 그 인물이 그것을 모르게끔 한다. 놀란의 세계관이 잔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모든 행위의 책임을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세계가 된 셈이다.

 

ⓒ 유니버셜 픽쳐스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한 개인이 자유주의자로 우뚝 서려면 자신이 하는 행동의 잔인성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보았다. 놀란도 한 개인이 그 자신의 잔인성을 자각하게끔 해 자유에 대한 책임을 막중히 부과한다. 이는 그의 영화의 구조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의 영화는 인물마다 시간을 나누고 편집으로 그 시간을 한 데에 모이게끔 한다. <인셉션>에서는 코브가 맬을 구하러 갈 때 림보에 갇힌 시간이 50년이라 설정하고 개인이 서로를 구하는 데 드는 시간을 가장 길게 설정해두었다. 한편으로 코브가 세계를 구하러 가는 시간은 3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설정해두었다. 개개인이 다른 시간에 갇혀 있고, 저마다의 갈등을 해결할 때 세상이 잘 돌아가리라는 태도가 영화 구조에 반영된 셈이다. <덩케르크>도 개인이 개인을 구하는 시간, 개인이 국가를 구하는 시간이 따로 나뉘어 있다. <오펜하이머>에서도 마찬가지로 오펜하이머는 진 태트록이 버린 행위로 그녀가 자살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군인 그로브스(맷 데이먼)와 오펜하이머가 나누는 대화는 원자폭탄이 처음 터지는 순간까지 극중 캐릭터 사이에 극한의 서스펜스를 만든다. 원자폭탄의 폭발을 기점으로 수소핵융합반응이 시작되면서 지구의 대기가 통째로 연소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놀란은 이러한 윤리적 태도를 비극적 상상력과 결합하면서도 이를 영화의 세계관 전체에 스며들게 한다.

놀란이 처음으로 만든 단편 <두들버그>(1997)는 이를 잘 드러낸다. 벌레를 죽이려는 남성의 이야기를 담은 이 단편은 급작스레 인물이 죽이려 하는 벌레가 그 자신이라는 반전을 드러낸다. 그것도 남자가 벌레를 죽이는 순간에야 진실이 드러난다. 놀란은 이 단편이 끝날 즈음 인상적인 연출을 드러낸다. 벌레를 죽이는 순간에 영화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벌레를 죽이는 순간에 내가 벌레를 죽임으로 나 자신도 1초 뒤에 죽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A(남성)-A`(벌레를 죽인 남성)-A``(벌레를 죽인 남성을 죽인 남성)의 구조를 통해서 놀란은 자신이 무심코 한 행동이 만드는 비극을 구조화한다. <메멘토>와<인터스텔라>(2014)의 S.T.A.Y의 순환 구조, <인셉션>에서 드러나는 모리츠 에셔의 그림은 죄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그의 세계관을 잘 드러낸다. 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대에서의 과거와 달리 행동은 능동과 수동으로 나뉘지 않고, 책임이 분산된 중동태의 형태로 있어서다.

<오펜하이머>는 처음으로 한 개인이 시대에 희생당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비극성을 두 층위로 그려낸다. 오펜하이머가 핵폭탄을 터뜨려서 세계를 멸망하게 할 가능성을 불러일으키는 비극성, 그리고 스트로스와의 오인으로 인해 자신이 고통받게 되는 데에서 오는 비극성이다. 전자는 오펜하이머의 딜레마로 잘 풀려가는 데에 비해서 후자는 전혀 아니다. 매카시즘 아래서 오펜하이머라는 개인이 어떻게 희생당하는지, 그리고 그 내면의 혼란을 그려내기를 포기해서다. 대신에 스트로스 개인에게만 책임을 몰기에 바빴다. 오히려 이 영화는 더 흩어져야만 하는 시점에 급작스레 드라마를 한 데에 모아서 실패한 영화이기도 하다. 놀란은 동시대 문제를 다루려는 데에 비해서, 오펜하이머가 매카시즘 시기의 마녀사냥에 희생당하는 서사를 오직 스트로스의 질투로 탓해서 실패한다. 이러한 지점이 이 영화의 서사를 실패로 만든다.

 

ⓒ 유니버셜 픽쳐스

놀란이 자신만의 문체로 쓴 『칼의 노래』

<오펜하이머>를 볼 때 생각난 작품은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다. 대의명분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조선, 실리를 통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일본 사이에서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상상으로 쓰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놀란의 <오펜하이머>가 담는 정신은 김훈의 도저한 허무주의와 닮아있다. 미문으로 쓰인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언어는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의 야만을 포착할 수 없다는 데에서 더욱 그러하다. 또 역사가 진보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도 여기에 뒤섞여 있다. 김훈이 재해석한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오펜하이머는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영웅이라기보다는, 되려 그를 규정하는 목소리에 의해서 휘말리는 자다. "나는 이제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는 인용구는 오펜하이머의 수동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데에 일조한다. 오펜하이머가 진 태트록과 성교하는 동안에 이 인용구를 입밖으로 내뱉는 씬은 용서할 수 없을 정도지만 태도는 선명히 인식됐다.

이는 곧장 '왜 놀란이 오펜하이머를 다루어야 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 인터뷰에서 놀란은 "오펜하이머가 가장 모호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어린 시절을 다루지 않는다. 영화에서 원작에서 묘사된 오펜하이머의 유년기는 기껏해야 한두 줄의 대사로 처리된다. 졸부가 된 부모의 과잉보호 아래에서 신경쇠약이 걸렸으며, 공산주의 사상을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사립학교에 다녔으며, 6개 언어를 독학한 오펜하이머의 성장 배경을 일부러 제한 셈이다. 어떤 인간이 살아갈 인생을 유년기에서 모티프를 발견해서 재단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이 태도는 영화의 스타일로도 이어진다. 유년기를 배제하는 대신에 감독은 웅덩이를 보면서 수심에 잠긴 오펜하이머의 얼굴을 제일 먼저 드러낸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함께 등장하는 킬리언 머피의 얼굴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이윽고 양자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등 추상적인 이미지로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카오스에 가까운 이미지로 드러내려고 한다.

이는 놀란이 평소 존경해 마지않는 테렌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2011)에서 인간과 인간이 소거된 태곳적의 이미지가 교차해 드러나는 이미지다. 또한 타르코프스키의 <거울>(1976)의 오마주로 보인다. 자연 이미지는 언어화될 수 없는 이미지다. 양자역학의 세계가 그것을 관찰하기 전까지 결코 전모를 아예 알 수 없듯이 오펜하이머의 무의식을 언어화될 수 없는 이미지로 드러내려는 야심으로 보인다. 이는 오펜하이머를 우연적인 존재로 보는 자유주의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인간은 우연성을 지니고 태어났으므로, 어떤 사상에도 구속될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프로메테우스이면서도 동시에 시지프스로 두는 셈이다. 부조리한 바위에 계속 굴려져서 살아가더라도 그 실존만은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

원자폭탄이 하나의 영화로 그려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놀란은 <프레스티지>(2006)에서 두 마술사 사이의 권력의 암투를 그려내면서 큰 화두를 던졌다. 기술이 과연 완벽한 마술을 만들 수 있을까? 놀란은 오랜 질문에 이제야 대답을 만든다. 놀란은 마술처럼 원폭이 아름답게 그려지더라도 얼마든 위험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놀란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품이다. SNS 시대에서 영화는 얼마든지 원자폭탄이 그러하듯이 네티즌 사이 분쟁의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핵폭탄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안 셈이다. <오펜하이머>는 동시대의 혼란을 마주한 노 감독의 참회록일지도 모른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유니버셜 픽쳐스

오펜하이머
Oppenheimer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Christopher Nolan

 

출연
킬리언 머피
Cillian Murphy
에밀리 블런트Emily Blunt
맷 데이먼Matt Damon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
플로렌스 퓨Florence Pugh
조쉬 하트넷Josh Hartnett
캐시 애플렉Casey Affleck
라미 말렉Rami Malek
케네스 브래너Kenneth Branagh

 

배급|수입 유니버셜 픽쳐스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80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8.15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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