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천국을 원하는 자, 추락을 각오하라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천국을 원하는 자, 추락을 각오하라
  • 박정수
  • 승인 2023.09.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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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코노고프가 보여주는 저항 정신"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스탈린 대숙청 시기'의 혼란스러운 소련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또한 오늘날에 '대숙청이란 역사를 왜 불러와야 하는지' 몸소 증명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2021년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뒤 2년이 지난 2023년에야 겨우 각국에 개봉하였다. 202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된 작품 다수가 2021~2022년 사이에 개봉을 마친 것을 생각하면 참 의아한 일인데, 영화의 개봉이 밀린 이유는 '제2의 대숙청'을 감행하고 있는 푸틴의 심기를 건드려 배급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국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개봉하지 못했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을 연출한 '나타샤 메르쿨로바'와 '알렉세이 추포프' 콤비는 자신들의 운명을 예측이라도 한 듯, 지금까지 연출한 장편에서 항상 러시아의 '검열'을 비판해왔다. 이들 작품 속에서 당국이 검열해온 것은 이성의 배후에서 은밀하게 삶을 지배하는 '리비도'다. 인구 증진의 유일한 수단인 성은 출산율을 관리하는 러시아 당국에 의해 쾌락은 거세되고, 흡사 '가축'처럼 번식의 소임만 떠안게 되었다. 가축이 인간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끼만 치다가 잡아먹히는 것처럼, 당국에 의해 성을 착취당하는 인간 또한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는데,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신작에서 성의 비중은 대폭 축소하고, 대신 스탈린 시대의 검열을 중점적으로 분석한다. 대숙청 시기에는 엄금되고, 오늘날엔 푸틴이 단속하는, 극악무도한 독재자들이 두려워하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 슈아픽처스

영화의 도입부, '로우 앵글' 구도로 스탈린의 비밀경찰(NKVD)들을 흡사 거인처럼 웅장하게 포착한다. 몸집이 충분히 거대한 그들이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한 듯, 배구를 하며 자꾸 저 위로 '상승'하려 안달이다. 이들을 천장에 매달린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운 '샹들리에'가 내려다보는 듯하다. 궁전 '꼭대기'에 위치한 샹들리에에 비견하는 존재는 오직 스탈린밖에 없다. 그만이 비밀경찰을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비밀경찰들의 배구공이 자꾸만 샹들리에를 건드리다가, 끝끝내 가지에 걸리고야 말았다. 비밀경찰들은 공을 가져오기 위해서 샹들리에(지위)에 접근한다.

지금껏 비밀경찰들은 스탈린의 '애완견'이었다. 가령 '볼코노고프'(유리 보리소프)와 그의 친구 '키도'의 장난이 스탈린과의 주종관계를 상징한다. 볼코노고프는 '주인'을, 키도는 '애완견'을 연기하는데, 애완견은 콩고물을 받아먹기 위해서 주인을 맹목적으로 따라한다. 주인에게 순종하는 애완견은 무해하다. 그런데 애완견이 주인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주인을 따라서 위협적인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사냥개'로 훈련됐기 때문이다. 스탈린을 위한 군견이 된 비밀경찰들은 인민에게 누명을 씌워 '진실'을 조작할 수 있는 힘, 그들의 목숨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무시무시한 힘을 쥔 이들은 어느덧 자아가 생겨나며 주인의 머리 위로 올라선다.

볼코노고프는 여군에게 성희롱을 저지를 정도로 오만해진 어느 한 비밀경찰의 머리 위에 아주 무거운 '바벨'을 올려서 경고한다. 이는 명령이기도 하다. 명령을 따르던 존재들이 명령을 하는 모습을 본 스탈린은 위기감을 느낀다. 이에 그는 가장 충실한 사냥개 중 하나였던 '그보드제프' 대령에게 누명을 씌운다. 그는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한다. '골로브냐'에겐 힘을 마음대로 남용하지 못하게끔, 오직 스탈린의 명령만 순순히 따르게끔 한다. 이렇듯 감독은 스탈린이 대숙청을 시작하게 된 '자승자박'과 그 이후의 경과를 상세히 분석한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인간을 지배하는 '절대자'임과 동시에, '절대자 위의 절대자'인 스탈린에게 착취당하는 가축으로서 비밀경찰의 '양가적인 정체성'을 '이중적인 미장센'으로 가시화한다. 비밀경찰들이 위치한 장소는 궁전처럼 호사스럽다. 이 우아한 공간엔 아름다운 합창과 무용이 가득 들어찬다. 그런데 고혹적인 궁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볏짚'이 바닥에 널려있고, 여기엔 '피'까지 묻어있다. 흡사 '축사'에서 가축을 도축한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도 볏짚 위에서 스탈린은 가축과 같이 인민들을 살해하라 지시했다.

 

ⓒ 슈아픽처스
ⓒ 슈아픽처스

볼코노고프는 더는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도망친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연출을 변화시켜 그의 도주를 가시화한다. 그의 탈출 이전까진 스탈린이 수여한 권력에 안착한 사냥개들처럼, 카메라 또한 권력의 '안정감'에 비례하는 '스테디캠'에 올라탔었다. 볼코노고프는 바로 이 안정감을 거부한다. 스탈린의 손아귀에 상응하는 스테디캠은 이내 곧 그의 목숨을 조여 올 것이므로, 스탈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벗어 던진다. 그런 볼코노고프에게 남는 것은 오직 '몸뚱아리' 하나뿐이다. 이에 권력이 보장하는 안정성과 상반되는, 불안정하게 헐떡거리는 몸뚱이가 파생하는 운동인 '핸드 헬드'로 카메라 워킹이 변한다. 또 지금껏 트래블링 숏은 수동적으로 움직였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의 명령만을 천편일률적으로 따르는 비밀경찰의 동선은 예측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코노고프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였고, 예상치 못한 그의 빠른 발걸음을 어떻게든 따라가고자 카메라 워킹은 능동적이고도 다급하게 변한다. 또 비밀경찰들이 예상한 볼코노고프의 동선이 다음 숏에 이어지지 않는, 단절적인 편집으로 뒤바뀐다. 키도 또한 볼코노고프를 위해 명령에서 탈출하여, 상관을 속이고 거짓 자백을 했기 때문이다. 이 형식들은 아름답지 않다. 거칠고 당혹스럽다. 그러나 예측이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여러 가능성이 열려있고, 이로써 해방감을 동시에 띤다. 볼코노고프는 시한부 부귀영화를 거부하고, 오직 자유를 위해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볼코노고프는 무엇을 위해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가. 그는 '회개'하기 위해 도망쳤고, 이로써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라 말한다. 이 회개는 '이중적'인데,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상승과 하강의 운동으로 이를 탐구한다. 천국으로의 '상승'에만 주목했을 때 회개는 폭력적이다. 밟고 올라가기 위해선 '디딤돌'을 높다랗게 쌓아야 하는데, 그 돌들이 영화에선 '인간의 목숨'이다. 볼코노고프가 키도의 '목마'를 타고 샹들리에 근접하는 것처럼, 처형된 사람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묻은 대지 위에 볼코노고프가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말에서 볼코노고프는 하늘과 가까운 '지붕' 위에서 골로브냐와 추격전을 펼치기에, 천상에 조금이나마 걸친 셈이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볼코노고프는 왜소증에 걸린 유약한 노동자의 술을 '빼앗거나', 민간인을 인질로 붙잡아 '협박'하고 권총에서는 '오발탄'이 발사되어 상해를 입히는 등, 타인을 아래로 끄집어 내리고 쌓아서 위로 올라갔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대상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오직 나 자신만 천국에 가기 위한 독선적인 회개는 스탈린의 대숙청과 별 다를 바 없다고 진단한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가 생각하는 진정한 회개는 '추락'을 자처해야 함이다. 키도가 주스를 핑계로 '동전'을 건네주며 볼코노고프의 탈출을 돕고, 이후 처형당하면서까지 친구를 숨겨주는 것처럼. 땅 아래로 추락하게 된 키도의 헌신으로 볼코노고프는 탈출한다. 이후 그가 향하는 곳도 인민들이 혹사를 당하고 있는, 숭숭 구멍이 뚫려있어 허물어지기 직전인 '낮은 지대'다. 본래 '병원'으로서 높았을 수도 있는 장소들, 그러나 현재는 버려진 건물이거나 시체 안치소 등으로 격하됐고, 그 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래의 직업을 잃고 스탈린의 흠을 지우는 '청소부'로 전락했다. 장의사이거나 무언가를 태우는 사람들, 권력자들과 달리 위생이 좋지 못한 사람들로 등장하니 말이다. 그들 덕분에 천상에 올라선 권력자들은 뒤돌아보거나 내려오지 않는다. 반면 볼코노고프는 과거를 '플래시백'하며 낮은 곳으로 되돌아간다. 이는 단순한 회고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희생자들과 유사한 환경에 직접 처하며 '매치 컷'으로 죄책감을 곱씹고, 키도의 죽음을 상상하며 친구의 고통을 체감한다. 처형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담긴 '서류 뭉치'를 되찾으러 궁전에 잠입하고, 손을 데어가면서까지 모닥불에 떨어진 서류 뭉치를 집는다. 최종적으로 볼코노고프는 인질들을 위해 기꺼이 추락한다.

 

ⓒ 슈아픽처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에서 스탈린 치하의 위협적인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도 연약한 나체가 간간히 등장한다. 볼코노고프의 연인, '라야'가 그의 진실 고백을 들었을 때, 그녀는 옷을 벗고 나타난다. 일순간 진실하고도 자유로워진 볼코노고프 또한 속옷만 입고 그녀와 정사를 나누나, 라야가 그를 밀고한 사실이 탄로 나자 섹스는 중단되고 다시 옷을 껴입는다. 또 볼코노고프에게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 어느 한 여인 또한 탈의하여 나체로 나타나는데, 어떤 옷도 입지 않은 '날 것의 육체'를 '진실'에 빗댄다. 반면 볼코노고프가 신분을 밝힐 수 없을 때 몸에 옷을 겹겹이 덧대거나, 골로브냐가 폐질환 사실을 '손수건'으로 숨기는 것처럼, 영화에서 '옷'이란 누명이자 거짓, 은폐다. 볼코노고프는 자신을 희생하여 인민들이 입게 된 '누명'이란 옷을 벗겨 내고, 소음장치에 감춰진 살벌하고도 잔혹한 처형 사실을 폭로한다. 딸이 누명을 쓰고 사망한 것을 알게 되어 식음을 전폐하는 노파의 몸엔 흡사 딸이 쓰게 된 누명, 곧 '오물'이 묻어있다. 볼코노고프는 노파의 오물을 씻겨내서 결백이라는 진실을 드러낸다. 결국, 그의 희생으로 구원된 인민들은 '나체'를 회복한다.

동시에 볼코노고프는 '어린아이'를 보존한다. 영화에서 클로즈업된 소련 인민들의 얼굴은 표정 없이 텅 빈 채로, 곧 '영혼'이 표상되지 않는다. 공허한 얼굴엔 상부의 명령이 새겨져, 그들에 의해 발화·목적지·행동 등 모든 것이 결정된다. 가령 대중교통에 탑승하고 있던 인민들은 비밀경찰이 하차하라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는데도 군말 없이 내려야 하고, 아무 죄가 없더라도 볼코노고프를 생포하기 위해서 인질로 전락한다. 운명을 사악한 독재자에게 떠넘겨야 하는 체념적인 인질들의 물결이 이어지는 가운데서, 제 기분에 솔직하여 '미소'를 짓는 순진무구한 아이가 있다. 외에도 다수의 인파가 독재자를 위해 뻣뻣하게 봉사할 때, 그 옆에서 어린이들은 유연하게 '공놀이'한다. 볼코노고프가 만난 유족의 딸은 차마 궁금해해선 안 되는 질문들을 그에게 묻는다. 이렇게 아이는 제 영혼의 반응을 충실하게 따르고, 볼코노고프는 회개 과정 중 아이의 천진함에 솔직하게 반응해주며, 특히 결말에서 풀려난 여러 인질 가운데서 키가 작은 아이들이 꽤 많다.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볼코노고프가 끈질기게 폭로한, '특수한 방식'으로 '아무나 고문'하던 스탈린 시대의 끔찍한 진실을 널따란 2.39:1 화면비에 클로즈업 및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진실을 커다랗게 확대하는 연출의 당위성은 영화 내적으로는 인민들이 차마 사실을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전해들은 유가족은 정신병에 걸려서 볼코노고프의 말을 외면하거나, 죄책감에 자살하고야 만다. 소련 내 모든 공화국의 수도를 줄줄 외우는 영특한 소녀조차, 진실은 망각하고 불태우니 말이다. 또 영화 외적으로는 오늘날의 독재자가 당대의 진실을 지금까지 검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장편에선 '동시대'를 비추던 메르쿨로바와 추포프가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에서 처음으로 '과거'로 향한 이유이기도 하다. 본 작품에 담긴 스탈린의 외압을 푸틴이 쏙 빼닮았음과 더불어, 주인이 사냥개를 팽하는 과정 역시 최근 불거진 '푸틴-프리고진의 갈등'을 연상케 하기에, 독재자들은 제게 누가 되는 진실을 은폐한다. 이에 악순환되는 러시아의 역사 및 정치, 그러나 탄압에 굴복하지 않는 메르쿨로바와 추포프는 오늘날에 소환해야만 하는 과거를 기어코 길어오며, 볼코노고프가 보여주는 저항 정신을 몸소 실천한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슈아픽처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
Captain Volkonogov Escaped
감독
나탈랴 메르쿨로바
Natalya Merkulova
알렉세이 추포프Aleksey Chupov

 

출연
유리 보리소프
Yuriy Borisov
티모페이 트리분체프Timofey Tribuntsev
알렉산더 야첸코Aleksandr Yatsenko
니키타 쿠쿠시킨Nikita Kukushkin
블라디미르 에피판체프Vladimir Epifantsev
나탈리아 쿠드리아쇼바Natalya Kudryashova

 

배급|수입 슈아픽처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26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8.23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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