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K ABOUT] 한국영화 #1 : "SF장르의 필요성을 스스로 답해내고 있는가"
[TALK ABOUT] 한국영화 #1 : "SF장르의 필요성을 스스로 답해내고 있는가"
  • 변해빈
  • 승인 2023.10.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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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을 보며 한국영화 속 SF 장르의 위치를 가늠하다"
영화 <더 문> ⓒ CJ ENM

<더 문>의 도입부, 유인 달 탐사선 '우리호' 발사 프로젝트를 홍보하는 영상물이 배치되어 있다. 여기엔 이런 물음이 나온다. "우리는 왜 달에 가야 하는가" 영상물 속 진행자는 달에 지하자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이것은 달이라는 배경을 떠올린 김용화 감독의 아이디어에 던질 법한 중요한 물음이다. <더 문>은 왜 '달'이어야 했을까. 이 질문은 극의 후반부, 우리호의 유일한 생존자인 황선우(도경수)를 향한 물음으로도 다시 반복된다. "황선우 대원은 왜 달에 갔습니까?" 황선우 대신 그의 귀환을 돕던 다른 이가 이유를 늘여놓는다. 더 큰 고통을 향한 인간적 욕망과 한계를 실험하기 위해서? 5년 전 실패한 달 탐사 프로젝트 책임자인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무언가 때문에? 황선우는 그에 대해 어떠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의 묵언을 강한 긍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아니지만,

영화가 그러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위 물음은 맥없이 흩어진다. 황선우가 달 지하에서 결정체를 추출하는 모습이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그 짤막한 컷만으로 영화가 지하자원을 발견하는 여정을 극 중심에 두었다는 말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영화에는 그들이 강조한 지하자원에 관한 기본적인 과학적 설명부터 턱없이 부족하다. 해당 장면에서도 지하자원을 발견한 즉시 황선우에게 닥치는 유성우 추락과 그의 고립에 방점을 찍고 있어서 극이 심화되어 갈수록 지하자원의 존재는 흐려지다가 나중엔 완전히 잊혀진다.

<더 문>은 앞서 진행자의 대사를 통해 자답했던 것과 달리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와 결부해서 새로운 자원과 삶의 수단을 찾아내기 위해서 달에 간 게 아니다. 황선우라는 인간을 안전하게 살려서 지구로 귀환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인물은 달에서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달로 갔으며, 과거의 문제를 풀기 위해 오지 않은 미래의 위기를 남용하고 있다. 감독은 여기에서 작중 5년이란 기간을 이용해서 어떠한 변화가 있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나 그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과 연결되는 흐름이 아닌 오류를 발견하고도 묵인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인간의 태도로 성취되는 쪽에 기울어 있다. 더 큰 문제는 국가적인 전략 마냥, 아버지의 실패를 아들의 성공으로 전환시키는 이 정치적인 이미지를 고스란히 전시하는 <더 문>의 작중 사회 내 풍경이 작금의 한국 영화가 SF 장르를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황선우는 왜 달로 갔는가' 보다 더 궁금한 건 '황선우는 어떻게 달에 갈 수 있었는가'이다. UDT(해군 특수전전단) 출신에 분자 물리학을 전공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 캐릭터 설정은 그의 생존에 있어서 어떠한 필요성을 갖추지 않고 있다. 황선우는 과학에의 비상한 지식을 갖췄거나, 낙후된 환경에서의 생존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도 없고, 자기 임무에 대한 이해도도 없다. 황선우가 위기에 봉착하면 항공우주센터에 모인 기술자들이 시스템을 조정해서 그를 구출해내는데, 분위기를 격양시킨 뒤 대사 몇 개로 쉽게 처리해버린다. 그동안 황선우는 갈팡질팡하는 감정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위치에 놓여진다. 자살한 아버지의 동료 김재국(설경구)의 조력에 일련의 거부감을 품고 그렇게 사느니 명예로운 희생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기가 무섭게 우주선이 전복되자 구조신호를 보낸다. 5년 전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선 안 되는, 그 중요한 프로젝트에 황선우와 같은 어리숙한 인원이 투입되는 상황을 보며 관객이 확장해야 할 사유가 SF 장르 안에 귀속되어 있다는 말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시리즈 <택배기사> ⓒ 넷플릭스
시리즈 <택배기사> ⓒ 넷플릭스

영화의 결함을 '장르'에 떠넘긴다

지금의 한국 SF 영화와 시리즈들을 보며 드는 생각. 먼저 SF 장르를 입고 있지만 SF 장르를 제거하더라도 상관없을 만큼 장르를 헛돌고 있다. 낯설고 새로운 시도에서 전달되는 장르의 활력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인물들은 미래에 대한 확장된 사유보단 여태 우리가 보아왔던 여타 장르 공식 안에서 과거의 응어리를 풀어나가는 데 에너지를 소진하고, CG로 도약한 시공간적 설정을 포토월처럼 세워둔다. 예컨대 2071년의 디스토피아를 우리 앞에 불러온 시리즈 <택배기사>(2023). 이 디스토피아적 배경은 극 초반부 대기 오염으로 사막화된 풍경을 보여주는 데에 활용된 뒤로는 스토리 진행에 있어 장르적 쓸모를 잃어버린다. SF가 아니라 현대 난민 문제를 추적하는 모험/스릴러물로만 분류되었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듄>(2021)의 경우, 장르의 고전적 특징이 눈에 띄는 건 아니었다. 이야기의 거대한 스케일이나 조밀한 정보력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온 영화도 아니다. 절제되고 황량한 세계의 광경이 관객을 먼저 극으로 유입시켰고 오히려 이야기는 그에 화합하며 공허하게 디자인되었다. 그런데 <더 문>이 특별히 강조하는 프로덕션 디자인 요소는 지금의 관객에게 얼마나 신선한 이미지로 다가가는지 모르겠다. 사실상 달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 시퀀스보다 항공우주센터와 달 탐사선 내부 시퀀스가 더 많았다. 한국적인 무언가가 딱히 존재하지도 않는데 달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더 문>을 통해서 봐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학 이론이나 설정이 정교해지면 문제가 풀릴까. 관객들은 <더 문>과 <택배기사>가 SF 장르로서 부족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장르의 조건을 이탈한다는 지적이 단순히 장르의 모호성이나 뒤섞임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입증되지 않은 과학적 이론을 토대로 구축하는 게 SF 장르의 유연함이고 <멜랑콜리아>(2011), <언더 더 스킨>(2013), <산책하는 침략자>(2018)처럼 장르 문법을 비틀어버리는 시도가 주는 쾌감을 겨냥하는 수도 있다. 흥행과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성공했거나 비평적으로 활력을 불러온 국내 작품들, <지구를 지켜라!>(2003), <괴물>(2006), <초능력자>(2010), <인류멸망보고서>(2012), <설국열차>(2013), <인랑>(2018), <마녀>(2018) 정도이다.

 

시리즈 <고요의 바다> ⓒ 넷플릭스

KOFIC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한국영화연감" 영화별 흥행기록,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역대 박스오피스 순위를 누적관객수 기준으로 분류했을 때, 그중 상위 30위 안에 속하는 SF 장르물을 보면 <인터스텔라>(2014)를 제외하곤 스릴러, 모험, 액션, 판타지 등이 섞인 복합장르다. 순위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영화는 <어벤져스> 시리즈인데, 마블 스튜디오의 두터운 팬덤과 OSMU 전략의 성공적 사례이지 SF 장르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킨 결과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최근 호평받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재난 서사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나 판타지 액션 시리즈 <무빙>(2023) 역시 SF 장르와 공유되는 지점들이 많지만, 오히려 장르를 융통성있게 다루되 다른 요소를 강화한 점이 활력을 띠게 된 경우다. 정리하면 '과학 이론을 정교하게 고증했는가'의 여부가 흥행에 미치는 영향은 여러 요소 중 한 면에 불과하다.

오히려 장르적으로 부족하다는 말이 영화 전반의 부족한 완성도를 감춰주고 있다. 호평받던 최향용 감독의 40분짜리 단편 영화 <고요의 바다>(2014)가 8부작 시리즈 <고요의 바다>(2021)로 오면서 외면받은 이유는 일단 작품 세계관 내에서 의미 있게 확장된 설정을 찾아보기 어려워서다. 확장되지 않은 원작 설정 안에서 캐릭터의 개수만 늘어났다. 그들은 차례로 감염되고 죽으며 최후의 주인공이 남기까지의 시간을 늘리는 역할만 수행한다. SF 장르의 실패가 아니라 한국 콘텐츠의 위기 안에 SF 장르가 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이른바 흥행 보증수표로 언급되던 감독과 배우, 이제는 자본 규모로 홍보되는 장르가 그 자리에 위치하는 차례가 왔다.

 

장르에 대한 강박이 세계관과 충돌한다

한편으로 국내 SF 콘텐츠의 부진함은 단순히 장르에 대한 허술한 접근만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과도한 강박이 공존한다. 시각특수효과로 받은 주목받은 <승리호>(조성희, 2021) 전후로 SF 장르는 감독들이 넘어서야 하는 무슨 관문처럼 여겨지기에 이르렀는데, <사냥의 시간>(윤성현, 2020) <서복>(이용주, 2021) <외계+인 1부>(최동훈, 2022) <욘더>(이준익, 2022) <정이>(연상호, 2023) 그리고 개봉 또는 제작 중인 <원더랜드>(김태용), <스펙트럼>(김보라), <종말의 바보>(김진민), <닭강정>(이병헌) 등의 공통점은 모두 일정 부분 성취를 거둔 감독들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구조상 잘 만드는 감독들에게 투자배급이 될 수밖에 없는 전후 사정이 있지만, 일단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영화 <더 문> ⓒ CJ ENM
<외계+인 1부> ⓒ CJ ENM

감독의 기존 세계관과 장르 사이에 척력이 심한 경우. <더 문>은 황선우가 위기를 만들어내면 그것에 리액션하는 지상 사람들을 향해 곧장 이동해 버리는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관객들을 이 리액션의 위치에 배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황선우의 생존이 관객에게 어떤 의미 있는 사건으로 각인시키는 것부터 영화는 실패했다. 죽음으로 얼룩진 5년 전의 실패로부터 재기하는 스토리의 소재를 위해 일방적으로 달 탐사선에 올려진 존재에 불과해서다.

이는 지난해 개봉한 <외계+인 1부>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에는 다수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최동훈의 세계관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2022년 서울과 1391년 고려 말을 거듭 타임슬립하는 설정에, 현대에선 외계인 죄수를 관리하고 과거에선 신검 쟁탈전이 벌어진다. 최동훈 영화는 중심 사건(목표)이 분명한 것에 비해 캐릭터들이 다양하고 관객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그걸 파악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데 <외계+인 1부>는 여전히 개성 강한 여러 캐릭터가 뛰노는 곳인 데다 SF 설정도 불필요하게 많다. 시간여행, 외계인, 로봇, 도술을 섞은 초능력 설정마저 접목되니 극 초반 시퀀스에서 정돈되어야 할 세계관이 정돈이 안 된다. 거기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액션은 해외 블록버스터물에서 이미 본 것들이고 그나마 극 후반 시퀀스, 고려 말로 시공이 좁혀지자 그제야 캐릭터들의 개성을 살린 액션이 보이기 시작한다. 2부를 염두에 둔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장르가 살려면 감독의 개성이 죽어야 하는, 혹은 그 반대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과학 가설이나 상상력이 부족한 게 문제의 핵심이라기보단 감독의 세계관에 맞는 하위 장르가 잘 맞붙지 못한 것 같다.

장르에 발이 묶이니 이상하게도 관객들이 장르에 기대하는 바를 겨냥하려던 시도도 핀트가 어긋나버린다. <정이>에서 유일하게 관객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정이(김현주)와 그의 딸 서현(강수연)의 관계성 혹은 그들을 연기한 배우의 상징성이었다. 그런데 정교하지도 않은 뇌 복제 실험 과정이나 권력을 쥔 거대 기업의 압력 등이 거의 강박적으로 개입되면서 장르적 설정이 캐릭터가 지닌 장점마저 놓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영화 <서복>(2020) ⓒ CJ ENM
시리즈 <욘더>(2022) ⓒ CJ ENM

가장 난처한 건 <서복>(2020)과 <욘더>(2022)다. 이상하게도 장르 이론은 비교적 잘 정립된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두 작품이 관심을 가진 인문학적 화두, 삶을 말하기 위해 죽음을 경유하는 스토리가 한국 관객들에게 매력적이지 않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해진 경우다.

<서복>은 시한부인 전직 요원 민기헌(공유)이 생체 실험용 복제인간 서복(박보검)을 구출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민기헌의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있고 이 전환점엔 과거 누군가의 죽음을 묵인했던 죄의식이 관여되어 있다. <욘더>는 사이버 추모 공간이 보편화된 세상. 불치병에 걸린 이후(한지민)가 죽은 후 그의 남편 재현(신하균)이 가상 공간에서 일종의 아바타로 재탄생한 아내를 만난다. 애도의 (불)가능성이 천국인가, 지옥인가를 무게감 있게 다룬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관객들은 죽음을 상정한 주인공 이야기를 반기지 않는다. 아무리 희망 회로를 돌려도 결국은 둘 중 하나가 죽거나(<서복>), 온전한 애도를 위해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결말(<욘더>)로 끝나기 때문이다. 물론 SF 장르에서 생명 연장 등의 논의는 중요하게 다뤄져온 소재이지만 둘 다 시작부터 결말이 읽힌다. 이용주 감독은 주요한 두 캐릭터 자체를 삶과 죽음의 관계처럼 노골적으로 대비시켜버리면서 관습을 피하지 못했고, 감정으로 이야기하던 이준익 감독은 세계관 설정을 일일이 설명해낸다. 감독의 기존 세계에선 SF가 낯설지 모르겠지만 장르적으로는 다 아는 설정이라는 것. 여기에 가로막혀서 관객들은 이야기 후반부로 넘어갈 흥미를 잃어버린다.

그러고 보면 한국 SF 콘텐츠는 유독 디스토피아 정서에 묶여있다. 희망이 제거되거나 기술이 불온한 무언가로 귀결된다. 기술 발전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로 인문학적인 사유가 부딪히는 장을 만들기보단 비판의 입지가 크다. 서복의 자살, '욘더' 시스템의 파괴처럼 장르를 상징하는 요소를 의도적으로 지워버리기까지 하니 한국 영화에 SF라는 장르가 불시착했다는 생각도 든다. 왜 SF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걸까. 지금 한국 영화에 이 장르가 왜 필요한지, 미래엔 그것을 영화 스스로가 답해내는 걸 보고 싶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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