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BI] '퍼시픽션' 백인이 가진 편집의 특권
[MUBI] '퍼시픽션' 백인이 가진 편집의 특권
  • 박정수
  • 승인 2023.08.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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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Take) 안에 갇히거나, 잘리거나"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감독 중 하나는 스페인 영화감독 '알베르 세라'다. 동시에 관객들에게 곤혹과 악평으로 가득한 감독이기도 하다. 알베르 세라는 지금껏 '잘 알려진 이야기'(고전 문학이나 역사)를 영화의 소재로 삼았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해당 이야기의 서사나 인물을 기대하겠지만, 정작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눕기', '산책' 심지어 '대변 누기' 등 지극히 평범하고 무용할 정도로 일상적인 행위뿐이다. 가령 '동방박사의 경배'를 소재로 한 <새들의 노래>(2008)는 성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경배하러 가는 성경 속 현자들의 무료한 나날을 느릿느릿 펼쳐놓을 뿐이다.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한 관객은 세라의 영화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극장 밖으로 나오곤 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알베르 세라를 높게 생각하는 가치는 누구나 아는 과거가 아니라 '덜 알려졌거나 숨겨진 과거'를 정밀하게, 더 나아가 '즉흥과 우발, 잉여의 행위'로 가득한 현실도 고증하는데 있다. 알베르 세라는 과거의 진실에 가장 객관적으로 도달한 시네아스트다. 작품 속에서 항상 '죽음'을 부각하는 세라는 소멸될 위기에 처한 객관적인 과거를 겨우 구조하여 길고 긴 '롱테이크'에다가 보존한다. 그는 죽음을 거슬러 무언가를 보존하려는 숭고한 시도야말로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한다. 객관을 조금도 자르지 않는 그의 롱테이크야말로 진실의 보고다. 

 

ⓒ 영화 <퍼시픽션>(2023)

이런 알베르 세라가 변했다.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신작 <퍼시픽션>에는 그의 시그니처와 같았던 롱테이크가 극히 드물다. 변화의 원인은 '시간'이다. 지금껏 '과거'를 다루던 세라는 <퍼시픽션>에서 '현재'를 다룬다. '과거'는 완결된 운동으로, 그 힘이 어디로 향하고 어떤 결과를 낳을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 값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연출에 이를 반영하자면 과거는 컷으로 조작하거나 무언가를 덧붙일 수 없는, 그 자체로 완결된 롱테이크와 같다. 다른 과정이나 결과를 이어낼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재는 다르다.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또 한 인물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감히 예측할 수 없다. 계측한 기댓값을 너무나도 쉽게 배반하는 시간이 바로 현재다. <퍼시픽션>에서 롱테이크가 아닌 컷을 많이 사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의 운동이 우리의 예측을 가볍게 배반하고 다른 결과를 이어 붙이듯, 이를 반영하는 영화 또한 기존 숏을 자르고 또 자르며 새로운 결과를 이어 붙인다.

물론, 세라가 <퍼시픽션>에서 컷을 적극 사용하는 이유는 현재라는 이유에만 그치지 않는다. 다른 이유는, '하얀 양복'을 갖춰 입고 프랑스 백인으로서의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드 롤러'(브누아 마지멜)와 관련있다. <루이 14세의 죽음>(2016)에서 늙은 태양왕은 자연의 섭리인 죽음이 목전에 다다른 순간까지도, '인위적인 왕가의 법도'를 반영한 롱테이크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신하들은 절대적인 왕가의 예법을 반영한 롱테이크를 감히 끊어서 바깥의 시공간이나 섭리로 초월할 수 없었다. 드 롤러 또한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쭉 이어진, 감히 거부하거나 자를 수 없는 프랑스의 영향력을 폴리네시아에 쏟을 때는 롱테이크에 담긴다. 드 롤러가 한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는 장면에서, 판무관으로서 드 롤러는 축하 연설을 하는데, 횡설수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연설이 담긴 테이크(take) 안에는 그의 통치 아래 놓인 거주자와 원주민은 속해 있어야만 한다. 그의 지배를 거스르거나 잘라서 다른 시공간, 곧 다른 숏을 이어낼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드 롤러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지는 모습을 컷을 통해 나타낸다. 드 롤러를 자르고, 그와 대등한 혹은 대신할 여러 존재들(원주민, 영국인 등)을 이어 붙여진다.

 

ⓒ 영화 <퍼시픽션>(2023)

<퍼시픽션>에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연출은 '편집'이다. 영화에서 원주민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백인을 위한 '성 노동자'인 반면에, 백인은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늙고 뚱뚱한 권력자로 등장한다. 각각의 숏에 담긴 이들의 얼굴이 편집으로 연결되는데, 백인들끼리 만나 대화하고 이후 동행 하는 숏으로의 연결은 유기적이고 매끄럽다. 이전 숏에서 보여줬던 행동이나 시선이 다음 숏에 자연스레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인과 원주민 간의 연결은 어색하다. 정확히는 섬에 새로 도착한 군인과 원주민의 연결이 그렇다. 클럽 내 여자 화장실 부근에서 뚱뚱한 백인 남자가 기다려도, 해군들이 여성 원주민을 바라봐도, 원주민은 그 시선이나 행동에 따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 섬 내에서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드 롤러와 달리, 외부인에 지나지 않는 군인과의 관계는 편집에 있어서 과감히 잘린다.

본격적으로 군인의 힘이 드러나기 전까지 드 롤러와 원주민의 연결이 영화를 지탱한다. 드 롤러가 원주민들과 회의하는 시퀀스에서, 두 가지 안건이 제기된다. 하나는 폴리네시아에 핵실험이 재개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를 저지해달라는 것, 다른 하나는 원주민의 카지노 이용을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이때, 핵실험은 드 롤러가 해석할 수 없는 '폴리네시아어'로 발화되어 그에게 전달되지 않는 반면, 카지노는 그가 즉각 이해할 수 있는 '불어'로 발화되어 그에게 전달된다. 드 롤러는 원주민의 카지노 이용을 저지하는 교회를 찾아가 엄중하게 경고한다. 물론, 이는 단순히 '발화'(언어)의 문제만은 아니다. 카지노의 수익 중 일부가 세금으로 드 롤러의 지갑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는 이익을 잇기 위해 회의장을 뛰어넘어서 교회로 향했다.

<퍼시픽션>에서 관계를 좌우하는 조건은 결국, '이윤'이다. 앞서서 원주민이 해군들의 시선을 깔아뭉갠 이유도 그들이 아직까진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드 롤러의 장광설이 이어지는 롱테이크를 타인들이 중단할 수 없는 이유도 그에게 아첨하여 이익을 뜯어내기 위함이다. 드 롤러의 이득과 하등 상관없는 핵실험 문제는, 그가 본격적으로 지위를 위협받기 전까지는 소문의 진원·당사자들과 이어지지 않는다.

 

ⓒ 영화 <퍼시픽션>(2023)

이후, 드 롤러는 원주민들이 출연하는 '투계 연극'을 연출한다. 세 차례 등장하는 투계 연극 시퀀스는 모두 '드 롤러의 지시'로 좌우된다. 첫 번째 시퀀스의 도입에서 원주민들이 내는 소리나 몸동작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이후 극장에 방문한 드 롤러에게 원주민은 그를 환대하며 연극을 설명해준다. 점차 연극은 드 롤러가 '이해'하는, 또 그의 눈에 '보기 좋게 바뀌어간다. 리허설이 담긴 두 번째 시퀀스는 분명 여러 숏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원주민과 투계는 그들이 서 있는 연극 무대, 닭장, 분장, 정해진 행동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 시퀀스에서도 원주민은 백인만큼 여러 공간을 자유롭게 쏘다니지 못하고, 주로 동일한 시공간만 반복되는 시퀀스에 갇혀있다. 속박된 그들을 드 롤러가 객석에서 바라볼 뿐이다. 이 몽타주에서 백인(드 롤러)은 원주민이 통제할 수 있는 장소에 순순히 머물러있길 바라고 있음을 눈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후 세 번째 시퀀스에서 드 롤러는 원주민에게 더 사납고 난폭한 연기를 주문하고, 그 주문이 반영된 숏 사이사이에는 언제나 드 롤러의 시선이 끼어든다. 드 롤러의 요구대로 연극을 하다가 투계가 중상을 입어 죽을 위기에 놓였다. 그런데도 그는 투계의 모습을 원주민에게 더 극적으로 따라하라고 지시한다. 해당 연극은 관객들에게 원주민의 정체성과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백인(드 롤러)이 연출한 원주민의 전통은 서로 싸우다 죽는 민족, 충동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자멸하는 문화, 이에 합리적인 누군가의 지배가 필요한 역사로 왜곡된다. 즉 드 롤러가 편집으로 잇는 것은 '백인의 지배 합리화'도 포함한다.

그런데 백인의 욕망을 철두철미하게 이어내던 '꽉 짜인 편집'에, 점차 듬성듬성 틈이 벌어진다. 동시에 지금껏 폴리네시아를 엄격하게 통치하던 유럽계 백인들이 나태해진다. 드 롤러, 페레이라, 제독 모두 다 '고주망태'다. 타인을 지배하기는커녕 자신조차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해이해진 백인에 의한 편집은 흐트러지고 느슨해진다. 낮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술을 들이마신 제독은 진탕 취했다. 이후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제독이 향한 곳은 연결되지 않고, 대신 드 롤러가 아침에 바다로 향하는 숏이 단번에 연결된다. 이전 숏에 내재한 백인은 흡사 '필름이 끊기듯' 다음 숏까지 미치지 못한다. 페레이라는 술에 진탕 취해 널브러진 상태로 여권을 잃어버렸다. 그가 의식을 잃은 틈을 타서 원주민이 여권을 갈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을 마이크라는 영미권 남자가 후원한다. 즉 흐느적거리며 저물어가는 유럽의 틈 사이로, 원주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새로운 패권 영·미가 파고든다. 후반부의 드 롤러는 떠돈다. 그는 흠모하는 원주민 여성 '샤나'를 열망하지만, 그녀는 페레이라의 집에 있다. 드 롤러는 샤나를 쟁취하지 못한 채, 페레이라의 집을 나와서 우두커니 길가에 멈춰 선다. 또 드 롤러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히 찾아내야만 하는 핵실험 증거는 어둠 속에 파묻힌 채, 무언가를 밝히고 촬영한 '숏'으로서 연결되지 못한다. 권력을 잃어가는 백인들은 원하는 식민지를 개척하지 못한 채, 미아로 전락한다.

 

ⓒ 영화 <퍼시픽션>(2023)

원주민들은 드 롤러를 신뢰했다. 하지만 후반부의 드 롤러는 "클럽, 곧 정치를 모두 불태워 버려야 한다"라고 입만 나불거린다. 이전 같았으면 그의 말은 행동으로 옮겨져 다음 숏에 이어지거나, 아니면 숏 내에서 충분한 위엄을 뽐냈겠지만, 이제 그는 '허풍'만 놓인 숏에 갇혀 뱅뱅 맴돌 뿐이다. 행동이 실현된 롱테이크는 드 롤러 대신, 마이크의 지원을 받아 폴리네시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 제독이 이끈다. 지금껏 드 롤러가 시작과 끝을 규정하던 롱테이크에 원주민들이 갇혀있었다면, 이젠 제독의 길고긴 파티를 촬영한 롱테이크에 드 롤러가 귀속된다. 그의 롱테이크를 중단해서 다른 걸 이어보려 한다. 제독의 퇴폐적인 클럽에서 퇴장하고 바깥으로 나와 다른 숏을 연결하니 이젠 '현기증'이 인다. 더는 원하는 것을 이어낼 권력이 전무 하다. 드 롤러는 제독의 클럽에서 흰옷을 입지 못한다. 어두컴컴한 양복이다.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드 롤러는 이제 완전한 원주민으로, 핵실험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폴리네시아 정치는 분명 백인의 이익과 결부된다. 하지만 오늘날 백인이 이익을 얻기 위해선 원주민의 '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드 롤러는 원주민 시장이 탄생하는데 일조했고, 샤나의 요구를 묵묵히 들어줬으며, 그 또한 핵실험에 반대하며 폴리네시아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것이 원주민이 일련의 권력을 되찾은 폴리네시아의 현재다. 식민 지배에 처한 과거와 전혀 다른 결과를 이어낼 수 있는 현재, 그러나 핵실험을 소환하는 새로운 패권으로 권력축이 이동한다. 겉으로는 원주민을 지원하는 척, 뒤에서 착취하려는 계략을 숨기고 성큼 다가온 영미권은 폴리네시아에 식민주의라는 망령을 소환한다. 이때 폴리네시아는 새로운 결과를 이어낼 수 없는 롱테이크에 또다시 갇힌다. 무기력해진 원주민은 롱테이크가 잠재하고 있는 핵실험의 위험을 막연히 기다릴 뿐이다.

알베르 세라는 <퍼시픽션>을 통해, 자신의 연출 색채를 변형하면서까지 식민주의를 경고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운 패권보단 나은, 프랑스의 폴리네시아 식민통치를 변호하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가 본 작품에서 오색찬란한 색채를 부각하며 아름답게 승화하는 대상은 백인도 식민주의도 아닌, 폴리네시아와 원주민이 자유로운 순간이다. 식민주의를 거두고 주체성을 되찾을 때.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영화 <퍼시픽션>(2023)

퍼시픽션
Pacifiction
감독
알베르 세라
Albert Serra

 

출연
브누아 마지멜
Benoit Magimel
마르크 쉬시니Marc Susini
세르지 로페즈Sergi Lopez
몬세 트리올라Montse Triola
루이스 세라트Lluis Serrat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65분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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