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구축되는 방식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구축되는 방식
  • 함윤정
  • 승인 2023.08.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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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유예되는 재난 이후의 시간"
ⓒ 롯데엔터테인먼트

대한민국의 아파트 신화를 한눈에 훑는 각종 자료 화면에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도시'라는 극의 배경을 연결 짓기까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세계관을 공표하는 몽타주가 펼쳐진 후, 영화의 인물이 본격적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그는 어스름한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난 '민성'(박서준)이다. 민성은 베란다 창 너머로 이미 황폐해진 도시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다. 이토록 단도직입적으로 제시되는 영화의 재난은 동시대 한국영화가 그려온 각양각색의 재난과 비교할 때, 상식적 차원을 뛰어넘는다. 그래서일까. 이는 '인재(人災)'에 가까운 사건을 끌어와 영화의 텍스트에 한국이라는 장소를 의도적으로 겹치는 범상한 일례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의지처럼 보인다. 말 그대로 '세상이 뒤집히는' 자연재해를 선보인 뒤, 자신만의 재치와 화법으로 이후를 살아가는 문제적 군상을 그린 엄태화의 야심은 그 굳은 의지만큼이나 강한 추진력으로 스크린을 안팎을 관통하고자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황궁 아파트 103동이 어떻게 무너지지 않았는지'에 관한 설명보다, 이러한 설정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픽션의 내부로 진입하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한다. 이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운동은 무엇보다 작품 전체의 얼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앞서 언급한 장면을 더욱 구체적으로 복기해 보자. 곤히 잠든 아내 '명화'(박보영)를 두고 거실로 나온 민성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창가로 다가간다. 베란다 창밖에서 민성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가 점점 그로부터 멀어지자, 비로소 굳건히 서 있는 아파트 한 채와 모든 것이 무너진 주위의 풍경의 대비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핵심은 인물이 보는 바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의 방식에 있다. 여기서 카메라는 숏-리버스 숏의 연결로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사이를 구획하는 대신, 초점을 맞추었던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며 인물이 보고 있는 풍경 속에 그를 위치시킨다. 

끝내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무화되는 형국은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세계의 작동 원리'를 표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카메라의 운동은 영화의 엔딩에서 새로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구축될 때, 일견 유사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로 변주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비약과 아이러니의 미학

타이틀 시퀀스 이후 카메라는 현관문 밖을 나서는 민성을 비춘다. 그의 짧은 외출 장면은 기존의 시스템이 무력해진 세태를 요약하는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명화는 잠에서 깨어나 식량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그녀의 모습 뒤로 베란다 문을 닫고 걸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생수를 든 민성이다. 이러한 장면 연결은 현관문을 열고 나갔던 인물이 별안간 베란다를 통해 집안 내부로 들어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물론 이때 화면 내에 도입된 모종의 비약은 몹시 사소해서 영화에 유의미한 균열을 가하지 못한다. 이때의 미약한 균열은 오히려 외부의 현실과 평생 꿈꿔온 이상적 장소라는 내부의 현실 사이 거리감을 보존하려는 민성의 소망이 발현된 결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재난 이후를 살아가는 민성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자기 보존으로서의 생존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민성이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아내가 바깥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부단히 애를 쓰는 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서사는 철저히 재난 '이후'의 풍경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세 차례의 중요한 플래시백이 등장하는데, 이로써 말하는 것은 영화의 주요 인물들에게 닥쳤던 재난 직전과 당시 그리고 직후의 시간이다. 그 첫 번째 자리는 민성에게 주어진다.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민성은 상처투성이인 손을 보며 대재난의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끝내 구하지 못한 자신을 떠올린다. 두 번째 플래시백은 새해 행사 장면에서 노래하는 영탁의 모습에 틈입한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영탁의 비밀, 즉 그가 김영탁(박종환)을 살해한 '모세범'이라는 진실이 밝혀진다. 세 번째 또한 영탁의 것인데, 아들의 손을 잡고 울부짖는 노모의 모습에서 그는 재난 직후 딸의 죽음과 마주했던 자신을 본다.

이러한 모든 장면의 축적을 통해 강화되는 것은 무엇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리는 장소의 대비 속 '인간 군상의 아이러니'다. 구조하지 못한 손과 살인을 저지른 손 그리고 끝내 지켜지지 못한 손까지. 아파트 안팎에서 각기 다른 경험을 한 두 인물의 플래시백이 재난 이후의 장면에 덧씌워지면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질적인 서로의 모습에 섞여 든다.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여타의 인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입주민들은 '아파트'라는 장소를 기점으로 안팎의 경계를 구분하지만, 아파트 복도를 휘젓는 그들의 모습은 어느새 '바퀴벌레'로 지칭했던 외부인들의 몸짓을 닮아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끝없이 유예되는 재난 이후의 시간

이쯤에서 넌지시 묻게 되는 것은 민성, 영탁과 달리 생략되어버린 명화의 시간이다. 물론 얼마간 바깥의 상황에 무지한 그녀가 재난 당시 아파트 내부에 있었으리라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명화의 맑은 눈을 보고 있으면, 그녀가 단잠에 빠져있느라 당시의 상황을 전혀 몰랐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명화가 현실과 다소 무관한 존재처럼 보이는 배경에는 자신의 이상이자 삶의 조건을 수호하기 위한 민성의 안간힘이 있다. 그 때문일까. 명화는 올곧고 뚜렷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그녀의 전사에 침묵하는 영화의 방식만큼이나 모호한 구석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명화는 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는 소신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어리둥절할 만큼 집단의 절차와 결정에 순응한다. 가령, 자신이 돌보던 외부인 모자(母子)를 집 밖으로 보내기 직전에 그녀가 되묻는 것은 고작 남편 민성의 윤리적 결단이다. 단언컨대 명화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지옥 같은 '바깥'의 세계에서 가장 멀리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극단을 향할수록 반대편 극단에 가까워지듯,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바깥'에서의 삶을 허락받는 유일한 인물 역시 다름 아닌 명화다.

명화를 각성시켜 바깥의 세계로 이끄는 것은 그녀가 실천하지 못한 선(善)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도균(김도윤)의 죽음이다. 도균이 아파트 내부에서 합의된 규율에 항의하며 투신할 때, 모두가 그 광경에 눈을 피하지만, 명화는 이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두 눈으로 목격한다. 이후 명화는 혜원(박지후)의 집 베란다를 통해 영탁의 집 벽을 부수고 그에 관한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녀에 의해 진실이 폭로된 뒤로는 그야말로 파국의 연속이다. 아파트 내부의 공동체가 와해 직전에 이르렀을 때, 잇따르는 외부인들의 공격으로 입주민들의 유토피아였던 아파트는 제 기능을 상실한다. 영화는 민성과 명화 부부가 가까스로 그곳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비추는데, 그럼에도 명화는 아직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없다. 여전히 그녀의 곁에는 민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의 말미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다소 과감한 실험을 감행하고, 명화는 비로소 바깥의 장소에 홀로 남겨진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결말이 한여름 더위를 가시게 할 정도로 공포스러운 이유는, 단순히 명화가 민성의 죽음 후 진정한 재난 이후의 시간을 경험한다는 실감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어떠한 결탁의 이유 없이도 따뜻한 손길이 오가는 곳, 타인의 승인 없이도 삶과 거주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 명화가 도착한 장소가 대재난의 위력에도 굳건히 서 있었던 황궁 아파트보다 더욱 실재하기 어려운 유토피아처럼 보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가상의 베일이 벗겨진 자리에 여전히 남겨진 또 한 겹의 가상, 명화에게 재난 이후의 시간은 끝없이 유예된다는 것이 공포의 진짜 이유다. 다시금 영화의 오프닝, 민성의 얼굴에서 멀어지며 아파트를 소개했던 카메라의 운동을 떠올려보자. 엔딩에서 반복되는 동일한 구도의 숏에서 민성의 얼굴은 명화의 얼굴로 교체되고, 수직의 유토피아는 수평의 유토피아로 대치된다. 그러나 두 숏 사이에서 발견되는 실로 중요한 차이는 카메라와 인물 사이 창문의 존재 유무다. 베란다 창문 바깥에서 민성의 얼굴을 비추던 카메라와 달리, 명화와 카메라 사이에는 창문이 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스크린 안팎의 경계를 돌파하기보다, 철저히 스크린 내부로 수렴하며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정의한다.

장면 곳곳에서 드러나듯 '황궁 아파트'에는 적지 않은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살아간다. 하지만 이 장소에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처럼, 영화의 첫 번째 유토피아에는 '교육'이 부재하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의 엔딩에 등장하는 두 번째 유토피아에서 인물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달리 말해,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가 공존하는 그 풍경 속에서 명화는 지금 어떤 전망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에게 따뜻한 식사를 권하는 이의 목소리는 무척 달콤해서 마치 꿈결처럼 들리는데, 만약 이것이 꿈일 수 있다면 그녀의 단잠을 깨우지 않는 민성의 안간힘이 아직 영화 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닐지. 그렇게 영화는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명화에게 다가올 재난 이후의 시간은 어쩌면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시각, 즉 민성이 현관으로 나가 베란다로 돌아오는 비약의 틈바구니에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끝없이 유예되는 재난 이후의 시간 사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회귀의 감각이야말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끝에서 느껴지는 오싹함의 실마리다. 그러니 이 영화에 관해 말할 때, 더 이상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무화된다는 식의 표현은 적절치 못할 것 같다. 영화는 바깥을 소거한 채 철저히 내부만을 긍정하는 결말에 다다르고, 그렇게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지켜줄게.”라는 민성의 약속은 지켜진다. 진정한 '재난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명화는 잠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하지만 그녀가 눈을 뜬 자리에는 다시 베란다 문을 닫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민성이 보일 것만 같다.

[글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 롯데엔터테인먼트

콘크리트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감독
엄태화

 

출연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박지후
김동윤

 

제작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2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8.09

함윤정
함윤정
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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