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th ARAFF] '메디터레이니언 피버' 발병 원인은 전체주의입니다
[12th ARAFF] '메디터레이니언 피버' 발병 원인은 전체주의입니다
  • 박정수
  • 승인 2023.08.1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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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성 지중해열'(메디터레이니언 피버Mediterranean Fever)이란 지중해열 유전자의 변이로 발생하는 '유전병'이다. 전 인류에게 발병 소지가 있으나, 주로 지중해인에게 발병되기에 '지중해'라는 단어가 붙여졌다. 마하 하즈 감독은 자신의 신작에 해당 병명을 차용한다. 이 영화는 자살로 위장한 '청부 살해'를 친구에게 부탁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중해 열병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그 이유는 주인공이 죽음을 선택하게 된 배후엔 '유전'이, 곧 넓은 의미의 가족인 '민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 나자렛 태생의 영화감독 '마하 하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침례교 문화권에 속했지만 유대교를 엄격하게 따르지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한 팔레스타인인도 아니었다. 하즈는 양 민족의 영향을 편식하지 않고 고루 수용했지만,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강요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단된 상황'이 늘 자신의 반쪽을 부정하였다. 이에 반발한 그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오고 가는 장편 데뷔작 <퍼스널 어페어스>(2016)에서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반영하였다. 이 작품에는 방문, 커튼, 대문, 검문소 등 무수한 '문'이 닫혀있는데, 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단을 상징한다. 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여닫음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허가증'이 필요하고, 이에 따라 개인의 자유는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그 끝에는 검열을 이겨낸 주인공이 자아를 실현하고야 마는데, 하즈는 신작 <메디터레이니언 피버>에서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내의 정체성 위기를 고찰한다.

 

ⓒ 영화 <메디터레이니언 피버>

영화의 도입부, 주인공 '왈리드'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왈리드는 70대 병약한 어머니 '하나'를 밀어서 낙상으로 사망하게 만든다. 이때, 왈리드의 두 가지 생각―'자신이 어머니를 죽였기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와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밀친 것이기에 책임이 없다'―이 하나의 프레임에 동시에 담긴다. 곧장 영화는 잠에서 깨어난 왈리드가 아내 '올라'와 그리고 그 자신과의 첨예한 대립이 각기 다른 프레임을 점유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이 상황이 '리버스 숏'으로 가시화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의 프레임에 포착된 왈리드의 모순적인 두 속내는 대립이 아니라 사실 '병존'이다.

왈리드는 어머니가 죽길 바라지만 죽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야만 한다. 그녀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영화의 형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도입부에서 카메라가 첫 번째로 주목하는 대상은 '하나'다. 싸늘한 주검으로 전락한 하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미동 없는 시체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마찬가지로 움직일 필요가 없어서 고스란히 얼어붙는다. 이후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검사관, 법의학자가 들이닥치고 망자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살아 있는 그들'에 의해서 카메라는 '달리 인'하기 시작한다. 즉 죽음이 멈춤이라면, 삶은 이동이다. 여기서 왈리드는 '살아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다. 그는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야 하나, 아니면 어머니를 살리고 자신의 삶을 멈춰야 하나 고민한다.

 

ⓒ 영화 <메디터레이니언 피버>

여기서 의문은 왜 왈리드는 하나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가. 마하 하즈는 전체를 위해 개인을 획일화하는 '전체주의'의 희생을 탐구한다. 왈리드는 가족이라는 전체를 위해 '움직임이 제한'된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전체를 지배하는 권력자 내지는 가장을 죽이거나 전복해야 하는데, 그 지배자가 왈리드가 속한 가족 내에서는 하나다.

마하 하즈는 가부장제를 '모계 사회'로 뒤집어, 남성이 여성의 지배에 처해보게 만든다. 이를 통해 남성 가장이 여성과 식구들을 지배할 때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했던 것들이, 실제론 전체주의였음을 고발한다. 왈리드와 또 다른 주인공 '잘랄' 모두 경제적으로 무능하여 '여성의 돈'에 기대며 살아가고 있다. 여성의 자본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남성은 '빚쟁이'이거나 '고리대금업자'로서 상대에게 돈을 빌리거나 빚을 돌려받아야 하는 수동성이 부각된다. 반면 여성들은 의존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자신을 쥐어 짜내어 아이들을 책임지는 모습인데, 의존적인 남성들은 여성에게 대가를 받는 만큼, 그 여성이 지배하는 '가족을 위한 존재'로 희생해야 한다. 하나는 왈리드가 수익을 내기 어려운 '작가'를 때려치우고 안정적인 직업을 택하길 바라며, 올라는 왈리드에게 가사, 등·하교 등을 지시한다. 그녀들의 요구를 행동에 옮길 시간에 왈리드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집필에만 매진하고 싶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가족이라는 전체를 위해 묵살된다.

<메디터레이니언 피버>는 전체주의가 가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더해서,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전체주의도 포함하며, 이는 국민들을 옭아맨다고 말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류는 '특정 국가'에 소속된 '어느 나라의 국민'이거나 '구체적인 민족 내지는 인종'을 갖는다.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인적 사항은 자유롭고 고유한 '나 자신'으로서 자아나 개성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사샴이 병원에 갔을 때, 필수 기재 사항은 개별적인 특이 요소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종과 종교다. 특히 종교를 기재하지 않았을 시에, 개인의 '인적사항표'를 완성할 수 없고 진료를 받을 수 없다. 즉 종교, 국적, 인종 등이 개인을 뛰어넘어 인적 사항을 구성하는데, 그 여파가 일상생활에도 반영된다. 민족이나 인종, 국적, 종교 등은 해당 개념의 근거인 '보편성'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두고 개인들은 보편성을 전부 따를 수도 있고, 일부만 일치할 수도 있으며, 모두 거부할 수도 있다.

<메디터레이니언 피버>는 보편성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개인의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이 개인의 일상을 자꾸만 침범하는 상황을 그린다.

가령 잘랄이 처음 이사 왔을 때, 저녁 12시 반에 자는 팔레스타인인은 없다며 왈리드의 집을 무례하게 방문한다. 또 팔레스타인인 자신이 듣는 노래는 다른 팔레스타인인도 좋아할 것이라는 듯, 건물이 떠내려갈 정도로 볼륨을 크게 키운다. 왈리드는 잘랄이 주장하는 팔레스타인인의 보편성을 거부하는데, 그때 잘랄의 사냥용 '맹견'들이 왈리드를 물어뜯으려 한다. 전체주의 내에서 보편성은 선택이 아니라 협박이자 강제다. 이는 팔레스타인 내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국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면 보편적인 세계 원리를 구성하는 '유대 자본'이나 '백인 패권'이 팔레스타인을 침략하는 행위 또한 전체주의의 일환이다. 백인들이 구성해놓은 전체를 위해서 팔레스타인의 고유한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여파를 사샴에게서 목격할 수 있다. 사샴은 학교에서 '지리'를 배울 때, 유대인 선생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 막무가내로 주장하자 매우 불편해한다. 사샴이 이에 반발하자 유대인 선생은 전체를 따르지 않는 소년을 학급에서 내쫓았다.

 

ⓒ 영화 <메디터레이니언 피버>

마하 하즈는 전체주의를 '건물'이라는 상징으로 가시화한다. 영화에서 다수가 함께 모여 사는 거대한 '공동 주택'이나 '전원주택'이 눈에 띈다. 공동 주택 안에는 왈리드의 신경을 벅벅 긁고, 자신의 생각을 마냥 상대방과 '동일시'하는 무례한 이웃들로 빼곡하다. 그의 부모가 사는 전원주택에선, 잔치를 열 때마다 식구들을 사실상 강제 동원한다. 그래도 각각의 '가구'는 공동 주택 내에서 독립된 거주 공간을 구획하고, 가구 속에서도 식구들은 각자의 '방'을 나누어 사적인 공간을 점유한다. 형식상으로는 서로의 공간이 보장되어 있다. 그런데 건물에 문제가 발생한다. 문이 삐걱거리고, 배관이 새며, 천장과 벽엔 누수도 발생한다. 이는 건물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고, 각자가 책임져야 할 사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이때 건물에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제에 전혀 책임이 없는 이웃을 소환해서 고쳐달라고 강요한다. 항상 지나친 요청을 받는 왈리드는 거부하기 버거워한다.

여기에는 국가와 국민들 간의 관계가 반영된다. 집다운 집으로서 국가를 제공하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무만 짊어지게 만드는 전체주의로 국민을 착취하는 국가, 같은 국민이자 민족이라는 이유로 전체를 위해 희생해달라는 뻔뻔한 태도가 말이다. 이에 개인들은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다. 지리 수업에서 수도를 침탈당한 팔레스타인 소년 사샴은 '복통'을 호소하고, 의사는 영화의 제목인 지중해 열병이 원인일 수 있다며 의심한다. 비록 사샴의 복통은 지중해열이 아니라 스트레스성이었지만, 소년의 책임이 아닌 선조들이 물려준 유전병은 유전이라는 거대한 민족, 곧 전체주의에 의한 피해의 상징이다. 더욱이 왈리드의 친구는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어서 인공호흡기와 산소탱크를 대동하지 않으면 삶을 유지하기 어렵고, 왈리드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우울증이란 내게 소중한 것을 박탈당했을 때 발생하는데,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요, 전체주의가 값진 자신을 앗아가기에 우울증이 발병한다.

왈리드는 우울증에 더해 '폐소공포증'까지 동반된다. 어둠이 개인의 주위를 빼곡하게 칠하고 에워싸는 상황에서 왈리드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 '어둠' 또한 전체주의의 상징이다. 식구들이 누르 또한 갑갑하게 에워싼다. 예법을 강요하고, 사적인 약속을 금지하며, 그녀가 낳지도 않은 단지 동생일 뿐인 사샴을 돌보라 강요한다. 누르라는 개인은 전체주의의 어둠에 잠식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어둠이 점점 더 엄습하여 왈리드의 작업실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소중한 그의 삶을 은닉하기에, 왈리드는 살아야 할 이유를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그가 죽여 달라고 간청하는 곳, 멧돼지가 죽고 잘랄이 자살하는 장소가 바로 어둑어둑한 '밤의 숲'이다.

 

ⓒ 영화 <메디터레이니언 피버>

하지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국가에 속하고,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우울증에 걸린 채로, 전체주의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마하 하즈는 왈리드와 잘랄의 관계를 엿보며 전체주의의 일방적인 희생이나 강요 대신, 상호 능동적인 배려와 희생에서 출발하는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제안한다.

분명 둘의 관계 또한 이기적인 측면이 있다. 잘랄은 소음과 간섭, 왈리드는 창작을 위한 수단이자 청부살인업자로서 상대를 도구로 착취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상대에게 헌신한다. 잘랄은 왈리드에게 돈을 받지 않고, 그의 집 배관 문제와 부모님 댁 누수를 바로잡아 준다. 왈리드 또한 잘랄을 위해 케이크를 구워주고 많은 돈을 흔쾌히 건네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 잘랄을 건져낸다. 그렇게 상대를 구속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 빛날 수 있게 상호 조력할 때, 전체주의에 의해서 멈춰 선 카메라를 탈피한다. 영화는 살 떨림과 박동이 느껴지는 '핸드 헬드'로 전체주의의 사회적 테크놀로지인 건축의 '실내'를 벗어나며, 그렇게 널따란 야외로 나아갔을 때 '트래킹 숏'과 '익스트림 롱숏'이 동원된다. 문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공간을 누비고 선택할 수 있을 때, 올라의 표현으로 왈리드는 명랑하고 경쾌해진다.

그러나 이상은 오래가지 못한다. 마하 하즈는 전체주의가 구성원 다수를 착취하고 희생시키듯, 일상에 만연한 '이기주의' 또한 나를 위해 타인을 '살해'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왈리드는 잘랄에게 자기를 위해 살인의 짐을 짊어져달라고, 부탁으로 위장한 가스라이팅을 한다. 안 그래도 잘랄은 고리대금업자의 도구로 전락하여 위협을 당하고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데, 왈리드 마저 동정심을 자극하며 삶을 피로 얼룩져 달라 압박하니, 제 소중한 삶이 타인에게 착취당하며 수세에 내몰린 잘랄은 자살을 택한다. 반면 이기적인 왈리드는 극의 말미까지 죽지 않는다. 잘랄을 착취하여 소중한 나를 고양한 왈리드는 우울증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고 귀중한 제 삶을 바로잡는다.

즉 전체주의와 이기주의는 전체와 자신만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타인을 착취한다는 점이 동일하다. 이를 기원한 민족주의, 팔레스타인의 생활사 등을 마하 하즈는 여러 상징을 동원하여 풀어낸다. <메디터레이니언 피버>는 소위 '영화적'이라고 말할 법한 연출에서 성취는 덜 도드라지지만, 팔레스타인의 오늘날을 일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지적이고도 진지한 각본임에는 틀림없다. 작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각본상을 받은 것이 납득이 간다. 더욱이 무겁고 어려울 수 있었던 내용을 장르적 문법과 절충하여 경쾌하고도 가볍게 풀어낸 인상적인 작품이다.

[글 박정수 영화평론가, green1022@ccoart.com]

 

ⓒ 영화 <메디터레이니언 피버>

메디터레이니언 피버
Mediterranean Fever
감독
마하 하지
Maha Haj

 

출연
아메르 흘레헬
Amer Hlehel
아시라프 파라Ashraf Farah
아낫 하디드Anat Hadid
사미르 엘리아스Samir Elias
신시아 살림Cynthia Saleem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8분
공개 제12회 아랍영화제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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