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현의 무빙] 그가 묻는다, 가장 깊은 '책임감'과 '애정'을 담아
[홍상현의 무빙] 그가 묻는다, 가장 깊은 '책임감'과 '애정'을 담아
  • 홍상현
  • 승인 2023.08.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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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2023)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람이 분다」 이후 꼬박 10년 만에 연출을 맡은 장편애니메이션이다. (C)2023 Studio Ghibli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2023)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람이 분다> 이후 꼬박 10년 만에 연출을 맡은 장편애니메이션이다. ⓒ 2023 Studio Ghibli

이민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라면 몰라도 동북아시아에 살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 게다가 한국말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배운 것도 아닌데 이를 포함해 보통 세 가지, 줄여도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써야 하는 환경은 종종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반면, 뜻밖의 유용함을 느낄 때도 있다. 예컨대 사실과 다른,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관한 혐의를 누군가에게 덧씌우며 흥분하는 이들을 목도할 때다. 오해를 불식하고 의도했던 취지를 전하기 위해 상대가 어떤 노력을 해도 허사다. 애초에 답이 정해져 있으니까. '프레임', '합리적 의심' 운운하지만 결국 모함 내지 억측에 불과한 오물을 쉴 새 없이 끼얹어 진실을 뒤덮는다. 논리적 반박은 사태해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앞뒤 가리지 않는 집단광증이 제풀에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밖에. 서로 다른 언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환경이 필자의 정신건강에 기여하는 건 바로 이때다.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언어코드를 서로 엇갈리게 하는 것. 순간 흥분한 자들의 악의적인 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으로, 글은 점과 선의 조합으로 바뀐다. 이런 자기보호수단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장편애니메이션이 될 뻔했던 <바람이 분다>(2013) 개봉 당시였다.

불운한 시대에 불운한 땅에서 태어난 천재의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바람이 분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보기보다 곁가지를 붙들고 늘어져서라도 기어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생채기를 내고 말겠다는 욕망의 먹이가 되었고, 그렇게 베를린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아카데미 공로상에 빛나는, 심지어 <스즈메의 문단속>(2023)이 기록을 갱신할 때까지 한국에서 19년간 장편애니메이션 최다흥행기록(2004년 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가지고 있을 만큼 사랑받던 이 거장은 '도대체 영화를 제대로 보기나 했을까' 싶은 일부 집단에게 군국주의 운운하는 꼬리표와 함께 난도질을 당했다. 머릿속이 멍해질 만큼 분노를 느꼈지만, 어떤 대응도 무의미하리라는 것을 예측한 필자가 택한 방법은 단지 극도의 피로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구로사와 아키라 이후의 현존하는 일본영화계 최고 원로지만 높은 수익성 때문에 외부의 투자조차 꺼리는 애니메이션업계의 지형 상 국제적인 인지도와 달리 엄청난 빚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야했던 생전의 구로사와 아키라와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다. VIA MEXT HP
미야자키 하야오는 구로사와 아키라 이후의 현존하는 일본영화계 최고 원로지만 높은 수익성 때문에 외부의 투자조차 꺼리는 애니메이션업계의 지형 상 국제적인 인지도와 달리 엄청난 빚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야했던 생전의 구로사와 아키라와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다. ⓒ VIA MEXT HP

꼬장꼬장한 사내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망상인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의 궤적을 아주 잠깐만 더듬어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대학시절 전쟁의 불합리함을 역설하는 강의에 감명받아 수집하던 군사관련 서적을 모두 없애버린 까지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평생 반전·평화주의자의 신념을 고수해왔다. 시답잖은 모함의 구실이 되었던 <바람이 분다>에 대해서도 "제로센, 제로센 하며 떠들어대는 마니아의 대부분은 콤플렉스로 똘똘 뭉쳐 뭐에든 자부심을 느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고 일갈하는가 하면, 주인공인 호리코시 지로는 물론 항공기부품을 제조하는 가업(미야자키항공흥학)에 종사했던 부친에 대해서도 "무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심지어 이러한 세계관을 갖게 된 게 어른이 된 후부터도 아니다. 소년시절부터 군부가 폭주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어리석고 한심한 일이라 여기며 반감을 품었다.

확고한 주관은 행동으로도 이어졌다. 정부의 평화헌법(헌법 9조) 개정과 재무장 시도, 위안부 문제 등 정세가 우려스러운 상황으로 치달을 때마다 스튜디오 지브리 차원의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내며 각을 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반전·평화주의를 전 지구적 관점으로 확대했다. 쉰 살이 되던 해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힘을 모아 《뉴욕타임스》에 걸프전쟁을 비판하는 광고를 실었고<붉은 돼지>(1992)를 만들면서는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분쟁에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2000)에서 묘사된 전쟁의 참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침략 피해국이던 중화민국(지금의 타이완)의 국민당 선전부에서 활동했던 홋타 요시에의 소설에서 가져왔다. 2008년 강연에서 일본의 어린이들이 내셔널리즘으로부터 해방되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아베내각이 집단 자위권 정비를 밀어붙일 당시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아베 신조는 위대한 사내로 역사에 남고 싶어 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겁니다"라며 총리를 직격했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이미지 보드를 대량으로 그려 작품을 구상하고 그림콘티와 동시 진행으로 작품을 제작해 나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제작방식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C)2023 Studio Ghibli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이미지 보드를 대량으로 그려 작품을 구상하고 그림콘티와 동시 진행으로 작품을 제작해 나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제작방식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 2023 Studio Ghibli

프로파간다를 넘어

그런 미야자키 하야오가 장편애니메이션 감독 은퇴를 철회하고 돌아왔다. 주일미군 재편으로 오키나와에 태평양안보를 위한다는 구실 하에 무리한 부담이 가해지는 것을 우려하며 헤노코 기금 공동대표에 취임(2015년 5월 8일), 앞으로 문화계 원로의 역할을 맡는 걸 당신의 소명으로 인식한 것일까 하던 필자의 예상을 뒤집고 2017년 2월 24일 스튜디오 지브리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를 통해 은퇴 철회를 공식적으로 인정, 얼마 후 와세다대 교정에서 개최된 이벤트("소세키와 일본, 그리고 아이들에게")에 직접 참석해서 신작이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주인공에게 큰 의미를 갖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 소개했다.

그런데 여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끼어든다. 바로 2020년 3월 11일의 팬데믹 선언. 2019년까지만 해도 58만 명이던 지브리 미술관의 입장객 수는 장기휴관이 이어지면서 2020년 3월부터 2021년 2월까지의 11개월간 6만 6천 명으로 줄었고 재정난에 빠진 운영사 도쿠마 기념 애니메이션 문화재단2020년 10월 27일 스페인 로에베 문화재단과의 재정지원 스폰서십 체결을 공표했다. 개관 당시이던 2001년부터 거의 전 기간 동안 관장 자리를 지키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명예관장으로 일선 후퇴하고, 전문경영인 출신 나카지마 키요후미가 관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미술관이자 자신의 스튜디오로서 설립한 공간에서의 일선후퇴는 신작에 임하는 더 큰 절박함으로 이어졌으리라. 그리고 1년 5개월 후. 장편애니메이션 감독 복귀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세상에 나온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작품의 '노 마케팅' 원칙이다. 배급을 맡은 도호로써는 무척 당혹스러웠으리라. 이미 일본의 극장관람객수가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한 데다 12억 내수시장의 마케팅 생태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전국 441개 관에서 개봉한 작품을 홈페이지나 예고편은 물론 스틸사진 하나 공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반겼을 리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뒤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엄혹한 현실로부터 아이들에게 일시적인 도피처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 온 전작들과 결이 다른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케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입장에선 프로파간다다. 자칫 개인숭배로 이어질 수도 있는 행위를 달가워할 무정부주의자(그는 1990년 일찌감치 "소련도 싫은 나라지만 중국도 싫고, 미국도 싫습니다. 일본도 싫지만요"라며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주)는 없다. 그의 소신이 홍보 전략에 영향을 미친다면 노 마케팅은 선택의 여지없는 결론이었다. 더욱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발언권은 강력하다. 구로사와 아키라 이후의 현존하는 일본영화계 최고 원로지만 높은 수익성 때문에 외부의 투자조차 꺼리는 ―제작배급사의 단독투자로 이익을 회수하려고 하는― 애니메이션업계의 지형상 그는 국제적인 인지도와 달리 엄청난 빚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야했던 구로사와 아키라와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히토를 아래 세계로 인도하는 왜가리의 목소리 연기는 스다 마사키가 맡아 입체적인 캐릭터의 매력을 뽐냈다. (C)2023 Studio Ghibli
주인공 마히토를 아래 세계로 인도하는 왜가리의 목소리 연기는 스다 마사키가 맡아 입체적인 캐릭터의 매력을 뽐냈다. ⓒ 2023 Studio Ghibli

페르소나

상영이 시작된 지 고작 몇 분 만에 알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아동문학가·반전활동가이며 당대를 대표하는 진보적지식인이었던 '요시노 겐자부로'가 1937년 발표한 동명소설의 실사화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일단 주인공인 중학생 코페르 군(코페르니쿠스로부터 따 온 별명)의 일상이 묘사되면 여기 숙부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사회의 구조, 관계성에 대한 코멘트를 다는 형태로 구성됐다. 그러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3년째 되던 해 병원에서 일어난 화제로 어머니(히사코)를 잃은 주인공(마히토)이 새어머니(나츠코, 히사코의 여동생)의 친정으로 피란을 떠난다는 설정부터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애니메이션이 모두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이며, 히사코가 성인이 된 마히토를 위해 이 책을 남겼다는 접점은 남는다.) 

마중 나온 나츠코를 따라 일본의 고성이 연상되는 현관을 지나는 마히토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를 닮은 하인들이 맞이하고, 이들이 다시 깔끔한 이층양옥 한 채와 낡은 빅토리아식 저택이 함께 서있는 안뜰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벼랑 위의 포뇨>(2008)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본격 '미야자키 하야오 판타지'임을 깨달을 수 있다.

나츠코와 마히토가 현관을 지날 때 마히토의 머리 위로 날던 왜가리는 또 다른 세상의 입구인 낡은 빅토리아식 저택에 산다. 그리고 마히토와 홀로 맞닥뜨리자마자 "어머니의 시신을 본 적이 없으시죠. 당신의 도움을 기다리고 계신답니다!"라는 말을 던진다. 물론 왜가리의 안내로 예측불허의 사건들을 경험하며 기상천외의 캐릭터들과 조우한다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티프이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밖의 차별점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작품이 아이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점은 전작들과 동일하나 주인공의 연령대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변 아이들을 따라가던 지금까지의 패턴과 다르다. 초기 미야지카 하야오 작품의 주인공들의 연령대는 그의 직계자녀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의 치히로는 지인의 딸, <벼랑위의 포뇨>의 포뇨는 그의 손녀 등과 동일했다. 하지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초등학생 마히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또래다. 성별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이웃집 토토로>(1988), <마녀 배달부 키키>(1989),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의 주인공들과 다르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주인공에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동성의 주인공은 대상화하기 힘든데다 본인이 반영되어 비관적이 되기 쉽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었다.

물론, <미래소년 코난>(1978)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1986), <모노노케 히메>(1997)처럼 예외가 있다 쳐도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히토'는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지나치게 어른스럽고 예의바르다. 역시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1940년대 당시만 해도 불치의 병이던 결핵에 걸려, 9년이라는 세월을 병상에서 보낸 어머니로 인해 일찍부터 생각 많고 조숙한 아이가 되어야 했던 소년기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오버랩 된다.

 

히사이시 조의 OST는 무려 15년 만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출하는 판타지를 만나는 반가움을 배가시켜준다. (C)2023 Studio Ghibli
히사이시 조의 OST는 무려 15년 만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출하는 판타지를 만나는 반가움을 배가시켜준다. ⓒ 2023 Studio Ghibli

어슐러 르 귄처럼, 노먼 메일리처럼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히토라는 페르소나를 앞세워 관객들을 자신의 세계관(Weltanschauung)이 담겨있는 철학적·예술적 자서전이자 잠언록으로 인도한다. 낡은 빅토리아식 저택을 통해 '아래 세계'로 들어가는데, 이곳은 문자 그대로 '지면 아래의 세계'가 아니다. 마히토의 현상계의 인물이 동일하게 존재하며, 서로를 볼 수 있고 왕래까지 가능하다. 그렇지만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가 아닌 다중우주(multiverse)인 까닭에 누구나 반드시 현상계와 동일한 모습은 아니다. 예컨대 현상계의 키리코와 아래 세계의 키리코는 나이도 성격도 전혀 다른 인물이다. 아래 세계에 사는 히사코는 소녀인 반면, 현상계에서 내려온 동생 나츠코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한다. 오로지 전체주의나 증오와 전쟁을 상징하는 존재들만 동물의 모습에 머물러 어디서나 똑같은 현실태(에네르게이아)로 존재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아래 세계에서 군벌과 같은 양상을 띠는 잉꼬들은 현상계로 오면 그저 관상조의 모습으로 돌아갈 뿐이다. 작가의 주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지점. 아울러 이 모든 것들은 그간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접했듯 만물이 이름을 지니고 서로 조화하는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Earthsea)를 연상시키는 풍경 속에 놓여있다.

아래 세계에서의 모험은 앞으로의 생에서 척도가 되는 지구의, 즉 세계관을 어떻게 완성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관장하는 이는 마히토의 종조부다. 헌데, 관찰할수록 마히토와 종조부 모두 미야자키 하야오의 페르소나로 보인다. 오늘의 거장이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다 종국에는 새로운 시대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마 영문을 모르셨을 겁니다. 저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는 부분이 있었어요."

2023년 2월 첫 시사를 마친 뒤 미야자키 하야오가 했던 위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내용이 어렵다'이다. 그럴 만하다. 초반부의 스토리는 마히토가 왜가리와 함께 아래 세계로 사라진 나츠코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반을 지나면 어느새 그것이 궁극의 목표가 아닌 게 되어버린다. 주인공 일행을 추적하는 잉꼬대왕과 졸개들도 종조부와 대립관계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저작의 하나로 꼽는 노먼 메일러의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다.

노먼 메일리는 이 전쟁소설에서 시간 순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 서사의 틀을 깨고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과거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그들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정치인'타인머신'과 병사들의 대화를 희곡처럼 구성한 '코러스'등으로 스토리텔링의 실험을 시도했다. 단지 전쟁의 참상을 그리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전쟁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는 인물의 성격이 돌변하고, 인과관계가 불분명해 보이는 사건이 이어지며, 예상 못 했던 갈등이 느닷없이 불거지고, 잠시 해결되는 듯했다가,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실험적인 내러티브와 궤를 같이한다. 하여, 영화 속의 전능자인 종조부는 13개의 돌을 무너지지 않게 쌓아 올려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자신을 공격하던 이들과도 친구가 될 만큼 선하고 순수한 마히토에게 묻는다.

'그러니 너는 어떻게 살겠느냐'고.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엔딩테마를 부른 요네즈 켄시. 재미있는 것은 이 한곡만으로도 이번 신작의 연출의도를 누구나 알 수 있다는 사실. 곡명이 다름 아닌 “지구의”다. (C)2023 Studio Ghibli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엔딩테마를 부른 요네즈 켄시. 재미있는 것은 이 한곡만으로도 이번 신작의 연출의도를 누구나 알 수 있다는 사실. 곡명이 다름 아닌 "지구의"다. ⓒ 2023 Studio Ghibli

바람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공전의 히트조짐을 보이자 예상대로 82세라는 감독의 생물학적 연령을 들먹이며 '마지막 작품' 운운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호사가들은 9월 1일 신작 개봉을 앞두고 있는 91세의 야마다 요지에게는 무슨 말을 하려나.

여하튼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돌아온 히사이시 조의 OST를 들으며 오랜만에 극장에서 눈시울을 붉힌 필자로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타이틀 롤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기무라 타쿠야가 마히토의 아버지 목소리로 특별출연한 것에 격세지감을 느끼면서도, 그가 환갑이 되어 노역을 맡게 될 때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작품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The Boy and the Heron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Toshio Suzuki

음악

히사이시 조Joe Hisaishi

 

출연

산토키 소마Soma Santoki

스다 마사키Masaki Suda

아이묭Aimyon

히노 쇼헤이Shohei Hino

시바사키 코우Ko Shibasaki

기무라 타쿠야Takuya Kimura

쿠니무라 준Jun Kunimura

 

배급 도호주식회사 Toho Co., LTD.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24분

등급 미정

현지개봉 2023년 7월 14일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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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2023-08-07 19:22:20
항상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팬입니다 평론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