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안개 사용법
[Critique] 안개 사용법
  • 이상용
  • 승인 2023.08.1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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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기형도, 안토니오니, 박찬욱, 봉준호 그리고 <미스트>

'안개'란 무엇인가? 'Fog'인가, 'Mist'인가, 그것도 아니면 'Foggy'인가. 영어로 변환하면 달라질 수 있는가. 안개는 자연적 현상이지만, 현실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곤란함에 빠진다. 안개를 구체화하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달아날 것만 같은, 아니 달아날 때 그 본질에 다가설 수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혹은 예술)는 안개의 성질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그것은 물리적 실체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안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관념'을 구현하는 것에 가까우며, 안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안개들이 등장한다.

뿌옇고, 희미하며, 눈 앞을 가리고, 나타났다 금세 사라지며, 이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안개는 그것을 구현하는 관념에 따라 영화의 이미지가 된다. 

 

ⓒ 영화 <빅 피쉬>(2003)

안개가 지닌 관념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 등장하는 찰나다. 서로 다른 장소 사이를 메우고, 연결하는 것이 안개다. 이 안개는 공간의 단절일 뿐만 아니라 두 개의 장소를 연결시켜주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요즘이라면 '멀티버스'라는 말로 퉁치고 넘어가겠지만, 고전적인 이미지에서 안개는 서로 다른 장소를 연결하는 강력한 매개였다.

영화에서 안개를 통과하는 순간은 자주 목격된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2003)에서 골룸에게 속은 프로도는 거대한 식인 거미 쉴롭이 사는 동굴을 통과하는 상황에 처한다. 안개와 거미줄이 뒤엉킨 이 곳은 죽음의 장소이고, 이곳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불의 산에 도달할 수 있다. 팀 버튼의 <빅 피쉬>(2003)에서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이 들려주는 옛이야기 중 하나는 마을을 떠나 거인과 함께 두 갈래의 길 앞에 섰을 때다. 젊은 날의 아버지(이완 맥그리거)는 시인 노더 윈슬로우가 간 적이 있다며 숲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한다. 블룸은 안개와 거미줄로 쌓인 숲을 통과해 신발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마을에 들어선다. 유령 마을이라고 소개하는 죽은 이들이 오는 곳이고(그래서 모든 이들이 신발을 신고 있지 않는다), 블룸은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시인(스티븐 부세미)을 만나기도 한다. 결국, 블룸은 밤의 어둠을 통과하여 마을을 빠져나온다.

영화 속에서 안개나 유사한 방해물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는 장면은 흔하다. 눈 앞을 가리는 시계가 걷히고 세상이 드러나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기대, 공포, 연민, 환상이 밀려온다. 자연스럽게 안개는 비가시성에서 가시성으로의 전환과 관련을 맺는다.

 

ⓒ 영화 <트루먼 쇼>(1998)

눈앞에 있지만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은 실질적 안개가 아닐지라도 '안개의 효과'라고 부를 수 있는 일련의 장치다. <트루먼 쇼>(1998)에서 주인공 '트루먼'(짐 캐리)이 스튜디오를 벗어나려고 하자 물(폭우)의 위협은 물론이고, 불, 방사능, 교통량 증가, 버스의 고장, 여행 티켓의 솔드 아웃 등을 동원해 트루먼의 발을 묶는다. 실제로 트루먼이 사는 곳은 방송국의 거대 스튜디오이며, 외부에서 카메라를 통해 스튜디오를 통제하는 엔지니어와 프로듀서는 버튼을 조작하여 이곳의 환경은 물론이고 기후까지도 조작할 수 있다. 조정실의 버튼은 모두가 트루먼이 알 지못하는 진실을 가리는 장치인 셈이다. 

방금 전 트루먼이 지나간 담벼락을 치우면 엑스트라 배우들이 식사하는 장면을 손쉽게 목격할 수 있지만, 오랫동안 통제된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의 결말은 비현실적 환상이다. 물에 대한 공포를 지닌 트루먼이 심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폭우를 통과해 스튜디오의 벽에 달린 문에 도달한 후 마지막 인사와 함께 열고 나가기 때문이 아니다. 트루먼쇼의 애청자들의 태도야 말로 기이한 환상이기 때문이다. 트루먼의 인생을 저당 잡는 스튜디오의 통제는 시청자와 시청률을 통해 확보되었고, 시청자의 존재야말로 이 쇼를 진행하는 동력이었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부는 시청자야말로 이 프로그램의 주체였다는 사실을 지워버린 채 방송국 피디를 악마화하기에 급급하다. 그것은 애당초 이 세계(스튜디오)가 어떻게 형성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지워버린다. 제아무리 천재적인 프로듀서의 기획과 발명이라고 할지라도 미디어의 프로그램은 쉽사리 독재화될 수 없다. 그것은 모두의 동참으로 완성된 '리얼리티쇼'였다. 스튜디오는 오로지 트루먼만을 위해 세워졌으며, 이곳의 모든 문은 트루먼을 위해 존재한다.

트루먼은 오랫동안 자신을 막아선 문 안으로 들어선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에 대한 성찰을 이미 알려준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에 따르면, 문지기는 시골사람이 이 문 안을 지나쳐도 앞으로 거쳐야 할 수많은 문들이 있고,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자신보다 크고 힘이 세다고 경고한다. <트루먼 쇼>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차원이다.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나간(혹은 들어간) 트루먼은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 것인가. 과연 그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이 갖춰진 스튜디오 바깥에서 살 수 있을까. 그것이 트루먼이 원했던 진정한 자유인가? 애초에 방송을 시작할 수 있는 규약과 약속들은 이토록 쉽게 무의미할 수 있는 문제인가? 그를 둘러싼 절차적, 법적 문제들은 과연 트루먼을 자연스럽게 내버려 둘 수 있는 일인가?

<트루먼 쇼>의 결말은 '자유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모든 절차를 무시해 버린 채 트루먼의 새로운 선택을 감동적으로 바라본다. 이것이 과연 리얼리티쇼의 결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방송국 피디의 말처럼 스튜디오야말로 트루먼을 외부로부터 보호해 주는 일종의 '안개'였던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안개가 문제가 되는 것은 가시화된 세계를 은폐하고, 그것을 보려고 하는 주인공과의 대립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를 괴롭히는 중요한 사실은 그 동안 눈 앞에 있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기에 답답했던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2021) ⓒ CJ ENM

박찬욱 감독도 <헤어질 결심>(2022)을 제작하면서 '안개'의 기호에 빠졌을 것이다. 이 영화는 두 가지를 따라간다. 하나는 형사 해준이 서래의 범죄를 입증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서래와 해준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다.  범죄의 진실은 시차를 두고 설명되지만 어려운 것은 사랑의 증명이다. 그것은 사랑을 설명하거나 증명하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범죄의 증명은 명백하다. 해준은 부산에서의 사건과 이포에서의 사건을 각 에피소드의 막바지에 이르러 증명한다. 월요일 할머니의 핸드폰을 들고 서래가 남편 기도수를 어떻게 죽였는지 행적을 추적한다. 이포에서는 임호신이 서래의 계획에 따라 사철성에 의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를 파악한다. 그런데 서래가 두 가지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달랐다. 서래가 기도수를 살해한 것은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였지만, 사철성을 부추겨 남편을 살해하도록 유도한 이유는 남편이 해준과의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임호신의 죽음은 단순히 서래 자신을 위한 계략이 아니라 해준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해준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두 번째 살인 사건의 범죄를 입증했을 때), 비로소 서래의 사랑을 깨닫는다. 이처럼 범죄의 증명이 사랑의 증명이 되는 아이러니는 첫 번째 살인 사건의 결과에서도 등장한다. 월요일 할머니의 핸드폰을 들고 현장에 다녀온 해준은 서래에게 모든 사실을 말한 후 할머니의 핸드폰을 바꾸었으며, 범죄 행적이 담긴 핸드폰을 바다에 버리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해준의 이러한 행동은 사랑하는 연인의 범죄를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다.

사랑은 범죄를 숨긴다. 그런 점에서 <헤어질 결심>의 사랑은 진실을 가리는 안개와 같다. 해준의 사랑은 서래의 범죄를 묵인하고 증거를 없애도록 충고하는 차원에 이르고, 서래의 사랑은 또 다른 남편을 죽도록 만든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공모야말로 이 영화의 강력한 역설이자 사랑의 증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증명의 방식은 더 이상 사랑하는 연인의 곁에 머물 수 없게 만든다. 해준은 서래의 범죄 사실을 눈감았기에 완전히 붕괴되어 그녀를 떠나야만 했고, 서래는 해준을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실천한 후 완전한 범죄를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그녀야말로 이 모든 것의 결정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기도수의 죽음에 증거가 핸드폰이라면, 임호신의 죽음에 대한 증거는 서래 자신인 셈이다. 이 점을 이해할 때 범죄와 사랑을 연결하는, 사랑의 정념이 범죄를 일으킬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는 박찬욱 영화의 특징을 파악하게 된다. <올드 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박쥐>(2009) 등의 영화에서 무수하게 반복되어 온 것 중의 하나가 범죄와 사랑이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는 인물들의 행적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범죄와 사랑의 뒤엉킴을 원활히 묘사하기 위해 <헤어질 결심>이 천착하는 것이 안개다. 정훈희 버전만이 아니라 송창식이 더해진 '안개'를 새로이 녹음하고, 이포가 안개의 장소임을 무수히 반복하며, 영화 시작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이 도로를 뒤덮은 안개 속을 졸음 운전하다가 사고를 낼 뻔한 장면 등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안개의 기호들을 펼쳐낸다. 이 안개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관객들이 안개에 서서히 빠져드는 것은 월요일 할머니가 반복적으로 정훈희의 '안개'를 듣기 때문이다. 서래가 핸드폰에 깔아줬다는 안개는 그 자체로 범죄 행각을 가리킨다. '안개=핸드폰=월요일 할머니=서래'는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해준은 식사를 준비하면서 정훈이의 '안개'를 아내 앞에서 틀어놓는다. 불륜과 해준도 안개라는 음악에 뒤엉켜 있다.

안개는 진실을 볼 수 없는 할머니의 치매이기도 하고, 영화 전체를 가리키는 가리워진 진실의 추적이기도 하며, 진실을 알았으면서도 묵인하는 맹목적인 사랑이 되는 동시에 완전한 범죄 혹은 완전한 사랑이 되기 위해 스스로 사라져버리는(자살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해준은 눈 앞의 진실을 외면해 버린 안개다. 서래는 해준을 헷갈리게 만들어 버리는 전형적인 팜므파탈의 안개로 시작하여, 끝내 해준을 사랑하게 되고, 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신비스러운 안개가 되어 사라진다. 마침내 물거품과 함께, 영원히 울부짖도록.

 

영화 <설국열차>(2013)

안개의 공포와 매혹

안개를 자주 활용하는 감독 중 하나가 '봉준호'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을 하고,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설국열차>(2013)는 <헤어질 결심> 이상의 안개로 채워져 있다. 설원의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꼬리칸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의 진격이다. 원작인 그래픽 노블에는 없는 '요나'가 필요했던 것도 이러한 탓이다. 요나는 가로막힌 세계를 볼 수 있는 자이고, 아버지 남궁민수와 함께 '문'을 여는 필수조건이 된다.

안개의 기호는 봉준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봉준호의 영화언어』(난다)에서도 상세히 언급했지만, <기생충>(2019)의 반지하 집에 등장하는 방역 연기 장면은 무수히 반복되어 온 봉준호 영화를 보여준다.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 방역 연기 때문에 개가 사라지는 장면, <살인의 추억>(2003)에서 내리는 비와 어둠으로 인해 모두가 대기한 상황에서 여중생이 시체로 발견되는 장면, <설국열차>(2013)에서 어둠의 터널을 지날 때 벌어지는 전투, <괴물>(2006)의 방역 장면과 옐로우 에이전트를 한강 시위대에게 투하하는 장면, <옥자>(2017)에서 도살장에 들어갔을 때 내부에 깔려있는 연기 등.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의 시야를 가리는 안개가 등장한다. 그 가운데 주인공은 눈을 부릅뜨고 가리워지거나 흔들리는 세상 속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 형사는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부릅뜨고 보아야 함을 몸소 실천한다. 또는 <괴물>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버지 박강두(송강호)는 괴물의 입에서 구해낸 세주를 지키기 위해 어둠에 깔리는 한강을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응시해야만 한다.

<설국열차>의 거대한 설원 풍경이야말로 안개일 것이다. 기차에 탄 이들은 1년 주기로 세상을 순환하지만, 차가운 유리창 밖에 놓인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오로지 남궁민수만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꼬리칸의 최종 목적지인 엔진실 앞에서 남궁민수는 커티스와 다툼을 벌이다 기차 안에 있는, 눈앞에 있는 이 문이 아니라 기차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엔진실의 문을 열어도 여전히 기차라는, 세상과 분리된 안개 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 기차 밖의 문을 여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다. 1년 주기로 순환하는 기차의 여정처럼, 엔진실의 지도자 윌포드와 꼬리칸의 지도다 길리엄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들은 기차라는 폐쇄적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인구수를 조절해 왔다. 욀포드의 설명에 따르면 커티스의 혁명은 인구 조절을 위한 요소에 불과했다. 결국, 혁명 또한 폐쇄적인 순환 고리에 갇혀 있던 것이다. 이 질서의 고리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앞칸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기차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매년 밖을 내다보던 남궁민수는 비행기의 몸체가 보이는 것을 응시하고, 밖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커티스의 혁명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다.

 

영화 <기생충>(2019) ⓒ CJ ENM

물론, 보려는 자 혹은 볼 수 있는 자의 노력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방역 연기 속에서 피자 상자를 접던 기택(송강호)은 불량품을 수도 없이 만들어 냈다. 이처럼 안개는 볼 수 있다고 믿는 자를 속이기도 한다. 봉준호의 안개는 자주 폐쇄적인 자장을 만들어 내고, 그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안개 밖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기생충>에서 기우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그가 저택의 바깥을 단 한 번도 응시하지 못한 채 저택의 내부에서 올라가는 것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 저택에 숨겨진 지하실이 있다는 사실을 놓쳐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준호는 안개 속에서 '보아야 함'을 여러 번 강조한다.

<괴물>의 시작과 함께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남자는 한강 아래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괴물을 본다. 그는 괴물을 보았기 때문에, 이로 인한 공포로 자살을 선택하지만 그를 따라온 직장 동료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개 속을, 물속을, 연기 속을, 지하실을 볼 수 있다면 이로 인한 두려움으로 인한 죽음이 동반되기도 하겠지만,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때로는 죽음보다 무가치한 일이다.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응시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의 자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안개처럼 살아왔지만, 어느덧 안개를 통과하며 스스로 보는 자가 된다.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해준의 사건이 미제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해준은 두 번씩이나 묵인할 수는 없는 남자다. 사랑 때문에 해준이 또다시 서래의 범죄(사철성의 어머니를 독살하고, 그로 하여금 남편을 죽이게 한)를 묵인한다면 해준은 '붕괴의 붕괴' 혹은 거대한 붕괴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이포를 떠나 안개 속의 안개 마을로 숨어들 수밖에 없다. 자신이 붕괴되는 것을 선택한 서래는 파도가 밀려오는 물결 속에서 가장 먼저 사랑의 결말을 보는 자에 해당한다.

 

ⓒ 영화 <미스트>(2007)

'안개 속에서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본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대부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적인 차원의 결단은 눈감아 버리는 일이다. 스티븐 킹의 단편을 영화로 옮긴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2007)의 결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트를 빠져나와 차를 몰고 가던 일행이 집단 자살을 선택한 것은 안개에 가려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치고는 매우 극단적인 엔딩을 선택한 셈인데 카메라는 총소리와 함께 침묵으로 멈춰버린 차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마침표는 집단 자살이 아니다. 잠시 후 안개가 걷히고 군인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이 조금만 더 버텼다면 이들은 살아났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안타까움이 일어난다. 그런데 안개를 둘러싼 질문은 이 순간에 시작된다. 이들이 안개 속에서 조금만 버텼다면 과연 생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생존에 대한 인간적인 마음이 드틑 탓이 아닐까. 마트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면 군인들이 이 사태에 대한 원인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소탕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주민들을 순순히 살려두었을까?

<미스트>의 진정한 안개는 눈앞을 가리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영화가 끝나도 이 의문은 명확히 풀리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집단 자살보다 더 할리우드적이지 않은 엔딩이자 진정한 안개의 실체다.  안개는 사람들 사이에 공포를 살포한다. 왜냐하면 안개 속에서는 쉽사리 적과 아군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비 영화의 진정한 효시라 할 수 있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의 마지막 장면은 사투 끝에 살아난 주인공이 소탕 작전에 나선 민병대에 의해 좀비로 오인받아 사살되는 모습이다. 총에 맞아 죽은 존재는 좀비인지 인간인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죽은 시체는 모두가 좀비여야만 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있을 뿐이다.

<미스트>의 주인공들이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들이 맞이해야 하는 것은 좀비 영화의 결말일 수 있다. 그들은 진격하는 군인에 의해 오인을 받아 죽을 수도 있고, 소문을 내지 않으려는 군부의 목적에 의해 제거될 수도 있다. 마트에서 나와 차에 탄 채 도주하던 이들이 진정으로 보지 못한 것은 안개에 가리어진 현실이 아니라 '안개를 만들어 낸 현실'이다.

 

영화 <엑시트>(2019) ⓒ CJ ENM

진정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안개 자체나 안개에 가리어진 눈앞이 아니라 끊임없이 안개를 만들어 내는 현실이다. 기형도의 시집 『입속의 검은 입』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장한 '안개'가 수록되어 있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안개에 대한 진술은 흔히 등장하는 안개의 공포에 해당한다.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그런데, 이 시에서 진정으로 흥미로운 안개에 대한 통찰은 중반부터 등장한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처음에 안개는 공포를 동반하지만 금새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익숙해지고 나면 인간은 안개처럼 흘러다닌다. 인간이 곧 안개와 같은 존재성을 띠게 되고, 안개에 익숙해진 인간은 오히려 안개없음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통찰이 '안개'라는 시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안개는 공포스럽기도 하고,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지만,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실체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안개가 어째서 일어났는지 원인을 파악하거나 찾으려 하지 않는다. 안개에 익숙해진 채 낯선 상황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할 뿐아다. 

현실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로 마스크 쓰기를 들 수 있다. 암묵적으로 코로나가 해제되면서 공적 장소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지 않지만, 개인에 따라 특정한 장소에서는 마스크 쓰기를 여전히 선호한다. 그러니까 마스크를 쓰는 것은 사람이 많은가 적은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가에 달여 있다. 마스크 쓰기는 더 이상 타인이 지니고 있을 코로나 병원균에 대한 공포의 문제와 연결되지 않는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공포가 더 크게 작용한다.

기형도 시인이 생존했더라면 이러한 통찰은 더욱 깊어졌을지 모른다. 안개의 공포가 아니라 안개가 제공하는 매혹과 안락함에 대해서, 안개가 일으키는 역설의 현상에 대해서. 동시대는 SNS를 통해 쉽게 타인의 정보나 이미지를 취할 수 있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사생활이 보호받기를 원한다. 우리를 진정으로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은 노출인가, 누군가로부터 차단을 당하는 것인가?

재난 영화 <엑시트>(2019)처럼 실체를 알지 못한 채 가스(안개)를 피하려고 위로 올라가는 것은 고전적인 답습이다. 이 영화의 재난 혹은 가스는 하나의 쓰임만을 보여준다. 가스를 벗어나면 안전하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주인공들은 높이높이 올라만 간다. 그 사이에 놓치고 있는 것은 가스로 인해 두 사람만의 장소와 시간이 허락되었고, 세상과 단절된 채 그들만의 유토피아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에 멜로의 코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이 좀 더 강조되었다면, <엑시트>는 출구없는 세상의 공포만이 아니라 출구없는 연인의 유토피아적 환상을 포함할 수 있다. 그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통한 매혹의 가능성이다.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의 서래를 통해 '안개'를 강조하는 것은 안개가 그녀를 가려준다는 사실에 있다. 안개는 서래를 신비롭게 만들고 끝내 해준을 매혹시킨다. 해준은 서래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하지 못한 채, 안개에 가리워져 있기에 사랑에 빠진다. 그녀를 둘러싼 안개는 한꺼풀 정도를  벗겨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다. 해준의 조상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서래의 과거는 독립운동군 시절로까지 소환이 되고, 집안의 땅인 호미산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그녀에 관한 역사가 드러날수록 안개가 걷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안개들로 둘러싸인다. 한 개인의 정체성이 이처럼 복잡한 곳에 이르는 한국영화를 근래에 본 적은 없다. 『산해경』의 등장이나 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래라는 개인이 지닌 산해경에 있을 것이다.  

 

영화 <옥자>(2017) ⓒ 넷플릭스

아무려나 영화에서 안개 효과는 자신과 타인을 신비롭게 만든다. 고전적 시기의 할리우드 영화가 여주인공을 신비롭게 드러내기 위해서 '아웃 오브 포커스' 되거나 '소프트 포커스' 효과를 자주 사용했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타이유의 '에로티시즘'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매혹되는 대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방식은 완전한 노출이 아니라 부분적 혹은 흐릿한 노출이라는 것은 문화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개 속에서 욕망이 발휘되는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다. 여주인공 하인숙은 안개 속에 숨겨진 자신의 욕망을 파악한 주인공 윤희중에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앞으로 오빠라고 부를 테니까 절 서울로 데려가 주시겠어요?" 
"아이, 서울로 가고 싶어 죽겠어요." 

그녀의 말은 노골적인 동시에 노골적이지 않다. "오빠, 서울" 등 지향점만을 가리킬 따름이다. 무진의 안개는 이러한 욕망을 강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개는 욕망의 노골화를 지우기도 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해 주는 역할을 돕는 모호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부뉴엘의 영화 제목처럼 욕망은 모호한 대상이기 때문에 인물을 환장하게 만든다. 안개 속에서 몸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을 드러냄으로써 욕망에 이끌리도록 유도한다. 하인숙은 물론이고, 윤희중도 하인숙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모호함이야말로 무진의 명물이 안개라는 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하인숙의 욕망은 성공하지 못한다. 윤희중은 서울 혹은 아내로부터 연락이 오자 재빨리 안개(무진)로부터 도망친다. 주인공은 아내에 의해 승진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고, 아내야말로 더 강력하게 욕망을 건드려 주면서 주인공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원하는 것은 무진의 안개나 무진의 하인숙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더 큰 안개이고,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더 큰 유혹과 욕망이다. 그것은 아내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하인숙은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고, 서울의 거대한 안개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무진기행』의 섬세함이다. 무진의 안개는 잠시 쉬어가는, 다음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장소에 안개가 명물인 것은 당연하다. 

 

안개 속의 풍경

프란츠 카프카의 미완성인 대표작 『성』에 대한 오독 중 하나는 인물들이 '성'에 갇혀 억압받는다는 식의 해석이다. 『성』을 읽어본 독자라면, 주인공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이 시달리는 것은 성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송』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요제프 k는 소송을 당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소송'이 시작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작품 속에 인용되는 작품이자 카프카의 단편이기도 한 『법 앞에서』의 내용처럼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시골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가 만나는 유일한 사람은 문지기이며, 문지기는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있고, 거기에는 자신보다 더 무시무시한 문지기가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시골사람은 눈치를 보며 허락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방식을 동원해 들어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삶의 고통이자 과정이다. 

 

ⓒ 영화 <안개 속의 풍경>(1988)

안개가 괴로운 것도 마찬가지다.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안개의 일부가 되거나 안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안개의 가장 놀라운 측면은 안개와 함께 있어도 항상 안개로부터 밀려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서래의 소망인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다'말의 함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서래가 원한 것은 미결의, 해결되지 않은, 영원한 안개로 해준의 곁에 남고 싶은 것이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1988)이 여정이 도달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의 어린 남매가 아버지가 있는 독일로 향해 간다. 로드 무비이고,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가 독일 사람인지, 독일에 있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남매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이들은 애비없는 자식들이라 불리는 '사생아'다. 

이들이 통과하는 것, 이들이 막막한 안개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은 '어른들의 세계'이다. 유일하게 남매를 반겨주고 도와주는 것은 오레스테스라는 청년이다. 남동생을 데리고 여정에 오른 누나 블라는 이 청년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군입대를 목전에 둔 오레스테스가 게이 청년임이 목격된다. 블라는 동생을 데리고 청년을 떠난다.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도 남매를 돌봐주거나 오래도록 보살펴 줄 수 있는 어른은 없다. 이 어른없는 세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세계를 앙겔로풀로스는 '안개 속의 풍경'이라고 부른다. 우아하게 불러서 그렇지, 그리스의 독재 정치와 경제가 무너진 '망가진 세계'다. 

앙겔로플로스는 안개의 세계로부터 어린 남매가 탈출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이 원하는 독일이 안개가 걷힌 땅인지,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안개의 효과는 전유럽에 걸쳐있고, 이들 남매가 안개를 벗어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해 보인다. 

그 가운데 하나의 메타포가 던져진다. 오레스테스가 남매에게 선물로 준 필름 조각이다. 필름의 사진은 안개로 가득하다. 오레스테스는 그 안개 속에 '나무'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필름 조각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나무가 보일 리 만무하다. 영화의 마지막은 로드 무비의 형식을 따라 독일 국경지대에 도착한 남매를 보여준다. 그런데 보트를 타고 국경을 넘던 남매는 국경 수비대에게 발각되고, 안개 속에서 총이 발사된다. 장면이 바뀌면 남매는 독일에 도착했다고 말한다. 여전히 안개 속을 걷고 있다.

"일어나 빛이야." 
"우린 독일에 있어."
"두려워."
"두려워 하지마. 내가 이야기 해 줄게."
 동생 알랙산더가 이어서 말한다. 
"태초에는 어둠이었어. 그 후에 빛이 만들어졌지"

알렉산더의 말이 끝나자, 안개가 걷히고 남매 앞에 나무가 나타난다. 메타포로 던져진 안개 속의 나무다. 남매는 나무로 향해 달려가 끌어안는다. 이 메타포를 너무 심각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남매는 죽은 것이다. 그럴 때만이 이들은 안개 속에서 빛을 볼 수 있고, 안개 속에 있다는 나무를 끌어안을 수 있다. 안개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성 자체도 안개처럼 한없이 가벼워지고, 쉽게 흐트러지며, 휘발성과 희미한 존재성 속에 머물러야 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죽음으로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현실은 어린 남매에게 가혹한 폭력이며, 이들은 죽음을 통해서만 안개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비극일까, 아니면 유일한 희망일까. 

 

영화 <붉은 사막>(1964) ⓒ 일미디어

유럽의 감독 중에 안개에 대한 통찰과 안개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대표적인 감독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다. 이탈리아의 포강 유역에 자리한 페라라는 안토니오니의 고향이며, 안개로 유명한 도시 중 하나다. 안토니오니의 초기 대표작인 <외침>(1957)을 보면 그가 얼마나 안개를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다.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 남자 주인공을 따라가면서, 딸과 함께 도착한 페라라 지역의 안개를 경험하고, 자신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 절망에 대해 절규한다. 안개는 많은 이들을 공포와 절규로 몰아가는 원인과 호응하는데, 이 영화에서만큼 명확하게 사용한 작품도 드물 것이다. 알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안개와 같고, 주인공이 방황하는 곳은 그녀의 마음 또는 안개 속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안개 속에서 절규하는 것뿐이다.

안개 속의 공포가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붉은 사막>(1964)이다. 배경은 해변도시 라 벤나이기는 하지만 회색지대의 공장과 안개 속에서 방황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안개라는 측면에서 이 영화가 <외침>과 달라지는 지점은 안개 속에 쉽사리 섞이지 않는 여주인공 모니카 비티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녀가 연기하는 줄리아나는 첫 장면에서 초록색 코트를 입고 등장한다. 안토니오니의 첫 컬러영화이지만 줄리아나의 옷을 비롯한 몇몇 색을 제외하고는 안개와 같은, 잿빛의 이미지로 촬영된 이 작품에서 줄리아나의 옷은 주변과 구별되는, 안개에 섞이지 않는 또렷한 색깔이다. 그녀의 불안은 공장을 운영하는 남편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의 친구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못하는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표출된다. 줄리아나의 색깔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시켜 준다.

<헤어질 결심>의 서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해준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바닷가에 서 있던 서래가 입고 있는 옷이 초록인지 파랑인지를 두고 말들이 오간다. 색은 위치와 맥락에 따라 흔들리고 뒤섞이며, 깨어지고 붕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포로 이사가기 직전 서래는 붉은 옷을 입고 나타나면서 강렬하게 존재성을 드러낸다. 그녀는 해준을 만나기 위해 이포에 왔지만 처음부터 이포의 안개에 휘말릴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녀의 다른 색깔만이 해준으로 하여금 자신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래의 색은 점점 옅어지고 이포의 자연과 섞이기 시작한다. 파도와 모래와 안개 속에 스스로의 몸을 누이기에 이른다. 안개가 된다는 것, 안개적인 존재성을 띤다는 것은 이 영화에 깔린 은근한 변화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에서도 인물이 안식을 구하는 방법 중 하나가 주변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 <확대>(1966)

안토니오니의 대중적인 성공작 <확대>(1966)에서 사진작가인 토마스는 공원에서 찍은 사진 속에 시체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침입에 의해 사진은 사라지고, 공원의 현장은 물론이고 그의 말을 믿어줄 사람들도 요원해 보인다. 한 마디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토마스의 고통은 이와 함께 시작된다. 자신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존재하지 않고 더 이상 증명할 수 없다면 그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토마스가 고민하는 근원적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잘나가는 패션 사진 작가이고, 뭇여성들이 스튜디오에 찾아와 기꺼이 옷을 벗는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 사진들에 대한 공허함을 느낀다. 

<확대>의 첫 장면은 노숙자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나온 토마스가 자신의 오픈카에 뛰어오르는 장면이다. 그가 이곳에서 하룻밤 머문 것은 노숙자들의 사진을 찍기 위함이었다. 화려한 패션이나 모델 사진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은 진짜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의 사진이다. 이러한 열망 속에 사로잡힌 토마스는 살인 사건을 목격하고(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카메라에 찍힌 것이다), 진실의 증명을 위해 애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 앞에서 그는 증명할 방법을 상실하고 점점 무기력해 진다. 영화의 결말은 다시금 공원을 찾은 토마스가 지나가는 광대 무리를 보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영화 초반에 나왔던 반전, 반핵 시위를 벌였던 히피 집단일 수도 있다. 차에서 내린 광대들은 테니스장에 모여든다. 그리고 테니스를 치기 시작한다.

영화사의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테니스 장면에는 라켓도, 공도 없다. 그들은 마임을 하듯이 테니스 경기를 치르는 흉내를 낸다. 광대들은 진지할 뿐만 아니라 실재처럼 행동한다. 라켓에 맞은 공이 떠올라 테니스 장 밖으로 벗어난다. 카메라는 날아간 공이 토마스를 향해서 떨어지는 것을 정확히 보여준다(존재하지 않지만 마치 공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카메라의 세밀함은 이 영화의 백미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를 보여주는 카메라는 영화와 현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위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경기를 지켜보던 토마스는 광대들의 시선을 느낀다. 그들은 당신 앞에 떨어진 보이지 않는 테니스공이 보이지 않냐고 말하는 시선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던 토마스는 이 세계에 동참한다. 허리를 숙여 공을 집어 돌린 후 테니스장으로 향해, 광대 무리에게 공을 던져준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세계. 그것이야말로 안개의 실존성이다.

<확대>가 던지는 실존성이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 세계는 존재하는 무수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카메라의 운동은 보이지 않는 테니스공을 따라 정확히 존재감을 담아 구현된다. 양자물리학이나 미시 물리학의 차원으로 가지 않아도 카메라의 운동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성을 부여받는다.

 

ⓒ <확대>(1966)

안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안개는 희미하기에 종종 우리를 혼돈에 빠트리지만 안개의 희박한 무게를 인정하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안개를 집어 들어 원하는 곳으로 던지면 된다. 그러면 안개는 그 방향으로 날아가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필요하다면 또다시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안개의 실존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속에서 여전히 유의미한 영화적 경험으로 우리의 시야를 사로잡는다. 

안토니오니를 안개의 감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가 추구한 것이 현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제목처럼 <구름 저편에>(1995)에 존재할 수 있음을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작품은 빔 벤더스 감독이 조력한 유작으로 여겨졌지만(이미 안토니오니는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였다),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2004)에 동참함으로써 마지막 작품이 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이 작품의 시작은 안토니오니의 고향이자 안개의 도시인 '페라라'다. 그곳에서 사랑을 하게 된 남녀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사연을 채집하는 이는 안토니오니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극 중 영화감독(존 말코비치)이다. 그는 "존재하는 것은 이미지로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한 결과가 '구름 저편에'이고, 그 시작은 안개의 도시이자 자신의 고향인 페라라의 사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안개는 모든 것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영화)의 비밀과 사랑의 은밀함을 드러내기 위한 거대한 장치로 영화를 가득 채우고, 영화를 압도한다.

<구름 저편에>는 페라라의 안개로 시작하여 엑상 프로방스(프랑스)의 하염없이 내리는 비로 끝을 맺는다. 어디에나 자연은 있고, 안개와 비가 있으며, 그 속에 사랑을 기다리거나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혹은 카메라는 그들을 최대한 오래 붙잡으려고 애쓸 뿐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온전히 어둠 속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몫이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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