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가 끝내 뭉뚱그리는 것들
'밀수'가 끝내 뭉뚱그리는 것들
  • 함윤정
  • 승인 2023.07.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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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픽션의 바다에 수장된 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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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는 1970년대 한국이란 영화의 배경과 호응하는 음악과 함께 시작된다. 카메라가 육지를 떠나는 배 한 척을 따라가면, 일과를 무사히 마치기를 염원하는 선박의 일원들과 푸른 바다로 뛰어드는 해녀들의 모습이 차례로 비춰진다. 경쾌하면서도 평화로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수중 발레의 군무처럼 합을 이루는 두 주인공의 '몸짓'이다. 깊은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춘자(김혜수)와 수면 위로 올라가는 진숙(염정아)이 서로의 손을 끌어당기며 각자의 운동에 속도감을 높일 때, 그들의 우정을 우아하게 표현한 화면 연출은 제법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영화의 카메라가 뭍에 당도하자마자 포착하는 것은 해녀들에게 닥친 변화의 국면이다. 그들이 바다에서 건진 생물의 상태에 탄식을 금치 못할 때, 진숙은 어촌 인근에 설립된 화학 공장의 영향으로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에 격한 감정을 표출한다. 춘자는 그런 진숙의 감정에 공감하기보다 다소 냉담한 반응을 남기며 자리를 뜨는데, 이후 엄 선장(최종원)과 브로커 삼촌(김원해)의 대화 장면을 거친 후 '밀수'라는 영화의 주요 소재가 본격적으로 스크린의 표면에 떠오른다. 산업의 피해자라는 위치와 생계라는 당위에서 시작된 밀수 행위는 오히려 해녀들에게 전례 없는 호시절을 선사하고, 이를 한껏 즐기는 인물들의 모습은 시종일관 영화에 삽입된 음악만큼이나 쾌활한 분위기로 전달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는 단속과 안타까운 사고가 겹치면서 춘자와 진숙의 우정은 갑작스레 중단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영화는 침체된 분위기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진숙의 옥중 생활과 동료 해녀들의 증언이 2분할된 화면에 수놓아질 때, 조악하게 묘사된 계절의 순환처럼 <밀수>는 무거운 상황을 전하면서도 그곳을 온몸으로 빠져나간다. 어느덧 '2년 후, 서울 명동'으로 바뀐 배경에서 전국 밀수 오야봉인 권 상사(조인성)가 등장하고 춘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해녀 생활을 하던 '군천'으로의 귀환을 택한다. 그렇게 돌아간 군천에서 춘자는 동료이자 친구였던 진숙뿐 아니라 고옥분(고민시), 장도리(박정민), 이 계장(김종수) 등과 다시 만나며 좌충우돌을 겪는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각 인물의 의심과 반목, 계획과 작전이 충돌하는 풍경은 긴장과 유쾌함을 무난하게 동반하며 극을 절정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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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적 활력이 향하는 목적지

수면 위에 둥둥 떠버리는 금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유리잔을 씹어먹는 장도리, 가슴에 칼이 꽂히고도 멀쩡히 되살아난 권 상사. 현실성에 개의치 않는 극의 설정은 <밀수>가 표현적인 연출로 충무로에서의 경력을 쌓은 류승완의 '오락 영화'라는 사실을 재차 떠올리게 한다.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굳이 이렇게나 무리한 방식으로 밀수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지 의구심이 들지만, 이러한 접근으로 이 영화를 물고 늘어지는 일이 비평적으로 유효한 의미를 남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다소 민망할 정도로 가볍게 '처리'된 장면들이 서사의 맥을 풀어버리는 사태까지 무람없이 수용하기란 어렵다. 사건의 정황과 주변 인물들의 대사만으로 두 주요 인물 사이에 불신을 싹 틔우거나, 과도하리만치 적재적소에 등장해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는 '상어'를 투입한 연출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만의 장점이 돋보이는 대목이 있다면, 그 뿌리는 단연 류승완의 오랜 장기에 있다.

류승완은 바다라는 배경과 해녀라는 소재를 영민하게 활용한 액션으로 숏의 리듬과 서사의 무게를 유연히 조절한다. 장도리와 권 상사가 펼친 호텔에서의 한바탕 대결뿐 아니라 영화의 후반부에 야심차게 준비된 수중 액션 장면은 꽤 참신한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다만, 이쯤에서 되묻게 되는 것은 이러한 <밀수>의 장르적 활력이 향하는 목적지다.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던, '제법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려 보자. 서로의 손을 끌어당기는 두 인물의 몸짓이 선보이는 우아한 리듬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재차 반복되며 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데 활용된다. 이후 당도한 <밀수>의 엔딩에서 남성들을 모조리 무찌른 여성들은 끝내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배를 되찾은 진숙이 키를 잡은 후 그들은 잔잔한 바다를 가로질러 뭍으로 향한다. 이때 다이아몬드에 반사된 빛으로 화사하게 물든 여성들의 얼굴과 따스한 석양이 포근히 내려앉은 선상의 풍경은 모든 것이 평형 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 분위기를 완성한다. 이토록 낭만적인 화면의 구도는 마치 그들 모두가 각자의 몫을 공평하게 분배하리라는 결말을 보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밀수>가 두 주인공 사이의 믿음과 우정을 봉합하고 연대로 쟁취한 승리라는 결말로 나아가기까지, 영화의 장르적 활력과 서사가 만나 종국에 다다른 장소에서 발견되는 것은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낙관의 태도다. 이러한 결함을 시인하는 영화의 양심선언이기라도 한 걸까. 극 중 춘자가 반복적으로 내뱉는 어떤 대사가 자꾸만 의미심장하게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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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인물'과 '알 수 없는 인물' 사이

3년 만에 다시 만난 춘자와 진숙은 공평하게 서로의 뺨을 두 대씩 후려친다. 먼저 입을 뗀 쪽은 진숙이다. 그녀는 춘자를 향해 다짜고짜 "정말 너냐?"고 묻는다. 이때 진숙의 질문은 두 함의를 갖는다. 내 앞에 다시 등장한 당신이 정말 '그 이춘자'냐는 의미와 3년 전 우리를 배신한 자가 정말 '너'냐는 의미. 이에 가능한 춘자의 대답 역시 두 가지인데, 그녀의 선택은 "너 나 못 믿냐?"가 아닌 "너 나 모르냐?"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진숙은 석양 아래 선상에 홀로 앉아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했던 <앵두>를 부른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눈동자." 진숙의 목소리로 돌아온 노랫가락은 더 이상 극의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여기서 연인의 사랑과 진심을 되묻는 원곡의 의미는 '믿음'을 토대로 한 우정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읽힌다. 춘자의 빼어난 공사(?) 능력이 돋보이는 선상의 삼자대면 장면을 지나 카메라는 이제 다방에 홀로 앉아있는 춘자를 비추는데, 이때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다시 한번 '앵두'다. <밀수>에는 70년대 한국의 정서를 반영하는 곡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주요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거듭 들려오는 곡은 '앵두'가 유일하다. 이처럼 영화는 음악을 활용해 복고풍의 분위기를 조성할 뿐 아니라, 인물 간 벌어진 믿음이 봉합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기대를 부추긴다.

동료 해녀 억척(주보비)이 생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다 끝내 상어에게 한쪽 다리를 잃자, 진숙은 어쩔 수 없이 춘자와의 협업에 착수한다. 진숙은 "내가 너 믿는다고 착각하지 마라."며 아직 춘자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자신의 심리를 구태여 확인 시켜주는데, 이후 시제를 이리저리 오가는 그들의 작전 시퀀스는 상황을 예측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장면들에 영화의 역동적인 리듬을 동기화하며 춘자의 주도면밀함을 강조한다. 해당 시퀀스 직후, 춘자는 "명줄"과도 같은 계좌를 진숙에게 맡김으로써 자신에 대한 믿음을 보증하려 든다. 두 인물이 자꾸만 환기하는 것처럼 영화는 장르적인 활력을 선보이는 가운데 두 인물 사이 '믿음'의 문제가 깃든 서사에 무게추를 둔다. 그런 한편, <밀수>는 공연히 서사를 비틀며 인물에 대한 관객의 믿음을 교란한다. 춘자는 '군천 식구들' 모르게 가방 하나를 따로 빼달라는 권 상사의 부탁에 응하고,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대가로 목걸이를 받아 챙긴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 '그쪽 식구', 즉 권 상사의 편에 섰음을 확인한다.

이러한 춘자의 단독 행동은 더욱 깊은 차원에서의 전략일까, 혹은 여러 '식구' 안에 편입해 살길을 도모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일까. 춘자라는 인물의 내면을 가늠하는 데 점차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문제는 진숙이 별안간 춘자를 향한 마음의 빗장을 풀어버리는 데서 발생한다. 그녀는 춘자로부터 전해 들은 몇 마디 이야기와 그녀가 제시한 사진에 그간의 의심을 몽땅 거두어들인다. 진숙은 춘자를 의심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마치 죄인이 된듯한 태도를 취하는데, 납작 수그러든 진숙 앞에서 춘자는 얄미울 만큼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며 다음과 같이 쐐기를 박는다. "너 진짜 나 모르냐?" 우리는 춘자가 꽤나 성공적인 서울 생활을 영위하던 와중 죽을 위기에 처하자 황급히 군천으로의 복귀를 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심지어 군천에 돌아온 춘자는 진숙이 아닌 옥분과 장도리를 먼저 찾아간다. 언젠가 장도리에게 "나도 믿지 말고, 권 사장도 믿지 마."라는 교훈을 설파했던 그녀에게 진숙이 거듭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넬 때, 영화 곳곳에 야무지게 흩뿌려진 '믿음'의 문제는 그야말로 유야무야된다. 진숙이 던진 물음을 교묘하게 회피한 것으로도 모자라, <밀수>는 갖은 정당화로 무장한 춘자를 앞세워 역동적인 극의 전개를 가장한다. 이토록 싱겁게 회복된 믿음을 싣고 영화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수중 액션의 장소, 군천 앞바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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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다보니 영화의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서로서로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는 우정과 믿음의 몸짓 앞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조금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어떤 부연 없이도 명확하고도 투명했던 그 의미는 이제 온갖 변명과 당위를 앞세우고도 매우 불투명하고 또 불순해 보인다. 그렇게 <밀수>는 장르적 쾌감과 서사구조의 완결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자신이 도입한 얕은 픽션의 바다에 가라앉는다.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수중의 저항으로 감속된 액션의 속력만큼이나 영화의 활력이 미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칭 '해양 범죄 활극'이란 혼종의 장르로 우리 앞에 등장한 <밀수>는 '해양'이라는 배경과 '범죄'라는 소재를 꽤 참신하게 그려내는 데까진 성공하지만, 결론적으로 '활극'을 위해 급조한 설정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다.

 

<밀수>가 끝내 뭉뚱그리는 것들

<밀수>는 서사와 인물을 구축하는 일에 소홀하면서까지 영화 내적인 활력(주로 액션 장면에서의 쾌감)에 몰두했던 류승완의 초기작과 비견하기엔 과도하게 당위에 천착한다. 춘자의 모든 행동에는 알고 보면 매번 적당히 말이 되는 이유가 있고, 인물의 발화를 통해 해명되는 구차한 자기변명은 모두 영화 바깥의 세계에서 무리 없이 납득될 만한 것이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사공이 만들어지지 않음에도, <밀수>는 안전한 설정과 영화의 힘을 모두 취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특히, 춘자는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 좀처럼 신뢰할 수 없으면서도 매력적이었던 과거 류승완의 캐릭터들을 자꾸만 흉내 낸다. 코를 찡긋거리는 특유의 표정에서 김혜수라는 배우의 여전한 매력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작품 내부적 층위에서 보았을 때 춘자가 남발해 마지않는 윙크는 매력을 보존하려는 일종의 발악처럼 느껴진다. 같은 맥락에서 <밀수>에는 훌륭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전형과 통속을 탈피한 '캐릭터'는 부재하다. 오로지 신박한 액션 연출을 위해 기용된 그들은 영화 속에서 춘자가 주장한 '깊이'를 갖지 못한다. 류승완의 영화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던 배우 류승범이 <베를린>(2013)에서 로맨티스트 캐릭터에 죽임을 당한 후로, 더 이상 그의 영화에서 윤리적 당위에 함몰되지 않고도 치명적인 매력을 갖는 캐릭터를 기대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이는 춘자를 보호하고 홀로 위험을 무릅쓴 <밀수>의 로맨티스트 권 상사를 살려낸 쿠키 영상이 알량한 '서비스'처럼 보이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오프닝에서 <밀수>는 친절한 자막으로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을 설명한다. 이때 '1970년대 중반'이라 뭉뚱그려 표기되었던 시대 배경은 추후 극적인 전개를 위해 '1974년'이라는 구체적 시제로 다시 설명된다. 반면에 '군천'이라 구체적으로 명명되었던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후반으로 갈수록 그 허구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불균질한 CG를 논외로 하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군천 앞바다에 들어선 화학 공장 때문에 전복이 죽어나가고 해녀들이 일자리를 잃지만, 그럼에도 이 바다 어딘가엔 문어와 상어가 살아간다. 훼손된 자연 앞에서 영화의 인물들이 선택한 것은 진숙이 허공에 외친 으름장처럼 공장을 불태우는 쪽이 아니라, 인위적인 시스템을 활용하는 쪽이었다. 죽고 죽이는 액션의 난장 끝에 <밀수>가 가닿는 결말도 그들의 방식과 유사하다. 생계를 이어야 한다는 실로 처연한 당위에서 시작된 해녀들의 자맥질이 한껏 도취된 낭만으로 끝날 때, 출항 장면에서 선연하게 그려졌던 화학 공장은 손쉽게 자취를 감춘다. 다만 영화는 영롱하게 반짝이는 바다 위 뛰노는 돌고래들과 함께 만선의 낭만을 자축한다. 이 배가 닻을 내릴 먼 땅은 더 이상 존재가 희박한 가상의 지역 '군천'이 아니라, 엔딩곡의 제목처럼 완전한 자급자족을 꿈꾸는 '무인도'일지 모르겠다.'

[글 함윤정 영화평론가, badasal2@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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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Smugglers
감독
류승완

 

출연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김종수
고민시

 

제작 외유내강
배급 NEW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2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7.26

함윤정
함윤정
부산 가덕도에서 생활하며 영화와 바다에 대해 생각하고, 극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운영하는 꿈을 꾼다. 미학을 공부하러 간 대학에서 영화를 찍은 후로 좋은 관객이 되면 나은 삶을 살게 되리란 이상한 믿음을 갖게 됐다. ‘좋은 관객’이란 무엇일까? 나의 글과 말은 늘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좋은 관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영화를 더 아끼게 되고, 지난밤 꿈에서 본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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