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th EXiS]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 기억의 수신자를 찾아서
[20th EXiS]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 기억의 수신자를 찾아서
  • 이현동
  • 승인 2023.07.2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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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은 누가 배송하였는가"

'풍경'을 대상으로 한 영화들을 떠올릴 때, 고려하게 되는 몇몇 감독이 있다. 왕빙, 제임스 베닝, 차이밍량, 피터 휴튼, 주앙 페드로 호드리게스 등이 바로 그 예다. 왕빙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감독들은 '풍경이 갖는 힘'을 믿는 감독이라 말할 수 있다. 이들이 영상 이미지로 구현하는 풍경이란 대체로 미장센이라기보다 속도에 관련된 것이다. 이 영화들은 온갖 종류의 풍경들이 정처 없이 배열되거나 사운드를 아예 소거시키기도 하고, 롱 테이크, 카메라 움직임을 제한하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오히려 주류 영화의 구동 원리인 몽타주와 미장센의 활용에 제약을 줌으로 얻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골몰한다. 비주류인 이 영화들은 '리얼리즘'이라는 말로 상찬되고, 특정한 시네필에게 선호되는 장르로 여겨진다. 이러한 소수 관객은 '영화적'이라 불리는 기존 영화들과 불온한 관계를 유지하며 감상자를 자처한다.

기본적으로 풍경을 바라보는 감상자는 예민하다. 기존 영화의 문법에 대해 의문을 품고 조금씩 주류에서 방향을 선회한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불온함은 돌연 영화의 본질을 논하는 극단적인 본질주의자로 변모하기에 십상이면서도, 영화란 무엇인지를 탐닉하는데 주의를 기울인다. 풍경의 영화를 지지했던 앙드레 바쟁과 반면에 몽타주 이론에 가장 큰 선구자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사이에는 어쩌면 아무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풍경의 영화란 뤼미에르의 영화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주류든 비주류든 영화를 본다는 건 유희와 쾌락, 자극을 초월하여 어쩌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엽서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유념해 보자. 프랑스 영화평론가 세르주 다네는 엽서의 이미지가 익명의 풍경으로부터 온 죽은 나뭇잎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과도한 서명과 과도한 의미로 채워진 영화는 우리의 판티즘을 강탈하는 요소가 된다는 그의 말은 시대를 불문하고 영화의 행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익명의 풍경으로부터 수신자의 시도를 탐험의 대상으로 여길 때, 우린 진정한 풍경의 시네필로 거듭날 수 있다. 왜냐하면 풍경에겐 종말은 없고 도리어 풍경의 시작으로부터 어느 곳이든 풍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린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2003)을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이제야 영화가 끝났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 영화관 밖으로 나가는 자와 동일한 모습의 코스플레이를 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 영화 <버려진 꽃>(2017)

풍경으로 본 시선의 문제

'전준혁' 감독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숨겨진 사물과 공간을 확인하는 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소환하는 데까지 나아감을 알 수 있다. 대체로 풍경이란 일상에 있지만 기억에는 정확하게 감지되지 않는다. 풍경을 영상 이미지로 복원하거나 편집할 때 개방되는 효과란 순전히 혼란스러움을 유발할 뿐이다. 짤막하게 기술되어 있는 영화소개를 먼저 읽지 않는 이상 온전하게 풍경의 영화를 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전준혁은 비인칭으로 존재하는 카메라, 즉 시선의 역할이 풍경을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 역할을 감내하는 건 우리이긴 하지만, 감독은 감상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준다. 예를 들어 <버려진 꽃>(2017)은 서울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사장과 폐기물 수집장에서 촬영되었다. 버스와 지하철, 호텔의 창문, 보문동 재개발 지역 등에서 촬영된 푸티지들에선 어느 순간 소멸하고 다른 건물이 세워지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서 우린 미처 알지 못했던 서울의 풍경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물론 그의 작업이 심오하다거나 기발한 관찰과 상상을 동원하여 착상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에 내재하고 있는 사물과 풍경들을 채집하여 모은 푸티지는 서로를 맥락화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맥락화는 위에서 말했듯이 공간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시간의 변화를 영민하게 체크할 수 도구가 되기도 한다. 공간과 사물의 이동, 계절의 변화 등은 끈질기게 풍경을 관찰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제20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소개된 전준혁의 작품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2022)는 주로 외부의 공간을 담았던 그가 내부인 집을 통해 개인 혹은 가족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는 보편적인 공간인 '집'을 대상으로 '기억'과의 관계를 추적한다. 대한민국에서 '집'이란 거주지로 영구적이지 않고, 대부분 사람은 일정 기간이 되면 여러 이유로 이사를 하게 된다. 어찌보면 이는 그의 영화에서 공통된 특징인데, 그에게 공간은 계속해서 영화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보다 희미해지고 언젠간 사라질 것만 같이 다가온다. 가장 직접적으로 이를 나타냈던 첫 번째 작품인 <층>(2012)은 세운상가를 비롯하여 환경조성 정책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거리를 환기하고자 그 의도를 마지막에 자막으로 내비친다. 전준혁은 온전히 그 공간 안에서 머물 수 없는 잊힐 위기에 처한 공간을 '집'으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한편으로 그런 유동성 때문에 집은 수많은 기억을 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집은 단순히 개인과 공동체적 차원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보편적인 거주 형태기도 하다. 전준혁은 자신이 갖고 있었던 집에 대한 기억을 관객에게 은연중에 주입함으로 그 기억함에 동참하기를 요구한다. 특히, 내레이션 삽입은 이미지와 함께 제의적 차원에서 영화를 보게 하고, 심지어는 무의식에 잠재된 기억의 흔적과 대면하게 만든다. 이는 '집'과 '기억'의 연관성이 얼마나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집이란 소재가 최근 한국 영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지를 살펴보면 시선의 문제가 유독 도출된다. 특히나 몇 년간 급등한 집값을 빌미로 등장한 재난 블록버스터 <싱크홀>(2021)과 가족 서사를 끈끈하게 다루면서 집이란 공간이 얼마나 서정적인 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 묘사한 <남매의 여름밤>(2019)은 장르는 다를지언정 동시대를 소환하는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다. 다만, 이 작품들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집'과 관련하여 시선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온전히 공간에 주제와 이미지를 남용하지 않고 기억을 송환해야 한다.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에서 집은 공간의 위치에 기억을 기입할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시선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에서 시선의 문제란 이미지를 송신하는 감독과 수신받는 관객 사이의 간극에서 여전히 속박된 위계의 문제를 지시한다. 이런 문제는 사진이나 미술 작품의 경우는 덜하지만, 관객의 의존도가 큰 영화는 이야기가 다르다. 위에 언급한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의 문제는 이 시선의 문제를 동반한다.

 

ⓒ 영화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2022)
ⓒ 영화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2022)

우편은 누가 배송하였는가

<내 집에 살던 당신에게>는 낯선 사람에게 배달 온 편지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익명의 편지란 과거, 현재, 미래의 거주자들에게 왕래하게 될 기억의 수행자로 기능한다. 수행자를 전담하는 내레이션은 집을 안내하는 가이드라기보단 환청에 가깝다. 정확한 의미를 포착할 수 없는 문장들은 이 영화의 미장센과도 맞닿아 있다. 처음에 우두커니 마주하는 어두운 방과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옅은 빛은 명시적으로나마 이 영화가 간직하고 있는 어둠을 진술한다.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 않는 카메라는 감독이 언급한 바 있는 배회하는 영화적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또한 수신자와 송신자가 명확하지 않은 낯선 편지가 왕래하는 '집'이란 공간은 어느 하나 정치화되거나 진영화 되지 않는 진공 상태로 존재한다.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영화의 공간은 특정한 순서와 상관없이 뒤바뀐다.

언제든지 거주자에 의해 공간과 활용과 배치가 뒤바뀔 수 있고, 심지어는 오래된 아파트는 재건축이 되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공간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는 반대로 기억을 다시금 소환하기에 적합하다. 아파트란 공간은 크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유사한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준혁 감독은 이전의 작업이 그랬듯이 다양한 각도로 공간을 조명한다. 아파트에 방치된 폐기물과 방향을 잊은 채 거꾸로 세워져 있는 의자, 아파트 마당에서 엄마와 아이가 정답게 눈싸움하는 모습, 베란다에 있는 다양한 식물은 아파트에 거주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마주할 수 있었던 장면들이다. 유독 흥미로운 순간이 있다면 밤에 아파트 외부에서 촬영한 장면이다. 내레이션은 이렇게 말한다. '몇 명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서른한 개의 동이 있다는 사실 또한 세어 볼 때 알게 되었다'라는 말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뒤섞인 낯선 공동체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기억이 '먼지처럼' 있다는 대목은 더불어 기억의 형태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레이션의 역할은 세월의 흔적 속에 파묻혀 있는 기억을 관객에게 배송하는 데 있다. 물론, 이건 '기억' 자체를 배송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행위를 배송하는 것이라는 사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움켜쥘 수 없는 기억을 조합하기 위해 사물과 공간, 심지어 풍경처럼 보이는 인물도 한 맥락 안에서 한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들뢰즈는 우리 뇌를 '스크린'으로 여겼다. 그만큼 뇌를 수동적으로 작동시킬지, 혹은 자동으로 세팅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다만 풍경의 영화를 보는 이들이라면 엽서에 쓰인 '기억'이란 우편번호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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