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영화의 에세이, 영화라는 에세이 
[Critique] 영화의 에세이, 영화라는 에세이 
  • 이상용
  • 승인 2023.08.0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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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과 <나의 연인에게>에 등장하는 에세이와 형식

이 글은 영화의 마지막을 채우는 형식으로 등장하는 두 개의 에세이에 관한 사유인 동시에 영화 속 글쓰기와 영화라는 글쓰기가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2022)에는 에세이가 등장한다. 엔 조라 베라치드 감독의 <나의 연인에게>(2021)는 한 통의 편지가 등장한다. 에세이와 편지는 다른 형식으로 보일지 몰라도 '에세이'의 하위 범주에는 편지, 일기, 독후감 등이 포함된다. 두 작품 모두 에세이가 직접적으로 다뤄지는 영화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의 형식도 에세이의 외양을 띠고 있다.

<더 웨일>은 월요일에서부터 금요일까지 5일의 일정을 따라가면 전개된다. <나의 연인에게>는 주인공 아슬리와 사이드가 사랑에 빠진 후 5년간의 세월을 다루고 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첫 번째 해', '두 번째 해'라는 소제목과 함께 2001년의 '다섯 번째 해'로 이어진다. '5일'과 '5년'이라는 차이는 클 수 있지만 영화가 다루는 시간의 분량이 유사하다. <더 웨일>은 촘촘하게 기록된 하루의 일기이고, <나의 연인에게>는 5년을 압축하는 일기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다섯 개의 시퀀스로 구성된 형식을 구현한 셈이다. <더 웨일>은 연극 무대에 올려진 작품이기도 해서 다섯 개의 시퀀스는 희곡의 '장'과도 형식적으로 유사하다.

 

ⓒ <월든: 다이어리, 노트, 스케치>(1969)

그런데 이 영화들이 일기(다이어리)라는 에세이의 형식을 취한다고 해서 '필름 다이어리'라는 명칭과 혼동하면 곤란하다. 영화 일기로 직역할 수 있는 '필름 다이어리'는 뉴욕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인물인 '요나스 메카스'의 작품이나 이와 유사한 스타일의 영화를 두고 사용하는 명칭이다.

요나스 메카스의 필름 다이어리는 사건이라 부를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불연속적인 기록의 모음이었다. 1969년 작인 <월든: 다이어리, 노트, 스케치>는 1960년에 찍어두었던 영상을 모아 만들었다. 거리, 공원, 도로와 도로변에 자라난 풀, 필름에 담긴 햇빛 등 부유하는 영화적 이미지가 이어진다. 2007년 무렵에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365일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카메라로 쓴 일기이자 삶의 한 조각들을 카메라에 담는 단순함에 근원을 둔다. 

그런데 오늘날 아방가르드 영화의 한 흐름으로 논의되어 온 '필름 다이어리'를 희미하게 만든 것은 영화 문화의 퇴조나 변화 때문이 아니었다.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등 새로운 형태의 다이어리가 대거 등장하면서 지각의 기록 방식은 다양해졌고, 훨씬 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영향력을 지닌 이미지 다이어리의 시대가 열렸다.

<더 웨일>과 <나의 연인에게>이 취하는 일기의 형식은 '불연속적' 방식이나 일상의 파편을 다루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본적으로 드라마(서사)의 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허구화된 극적 구조의 장치를 강화한다. 그럼에도, 어떤 장면들은 필름 다이어리의 풋티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더 웨일>에서 주인공 찰리가 창밖에 놓인 접시에 새모이를 주며 신경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죽어가는 남자의 하루 속에 새를 향한 관심과 애정은 극적 구조의 틈을 벌리면서 일상에 포함되어 있는 타자성을 건드린다. 이러한 것을 효과적으로 다룬 작품이 짐 자무쉬의 <패터슨>(2016)일 것이다. 버스 운전기사이자 시인인 패터슨의 일주일을 따라가는 일기적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카메라가 자주 머무는 것은 주변화된 이미지를 응시하거나 카메라가 자의적으로 외부를 향하는 순간이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 ⓒ 까멜리아이엔티

<나의 연인에게>의 대다수 장면은 여주인공 아슬리의 일상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필름 다이어리'와는 거리가 멀다. 아슬리의 일상에 담긴 문제들이 영화의 말미에 폭발하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5년의 압축적인 일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반목하는 연인의 연대기다. 사랑에 빠지고 동거를 시작한 후 첫해에 일어난 갈등은 아슬리 집안에서 레바논 남자와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사랑에 문제로 보이는 인물은 사이드를 소개하지 않는 아슬리다. 둘째 해에는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리고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셋째 해에 남편 사이드가 예멘으로 떠나버리면서 전환이 일어난다. 아슬리는 홀로 베이루트의 시댁을 찾아간다. 그녀는 남편의 행방을 모른다는 이유로 시댁 식구들에게 추궁을 당한다. 넷째 해에는 연락이 없던 사이드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아슬리는 그를 밀어내지만, 사이드는 그녀의 곁에 있겠다고 약속하며 그녀의 마음을 되돌린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미국에서 조종사가 될 수 있는 자리가 났다며 또다시 떠난버린다. 이 순간 이상해 보이는 것은 아내를 버려둔 사이드가 아니라 또다시 기다리는 아슬리다. 

<나의 연인에게>는 아슬리와 사이드의 이상한 관계를 보여준다. 아슬리의 문제가 집안에 사이드를 소개하지 못하는 가족적 차원이라면, 사이드는 아내에게 자신의 선택과 정체를 숨긴 채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신념과 연결된 문제들을 건드린다. 영화는 이러한 영역들을 오가며  말을 감추거나 머뭇거리는 이상한 남녀를 보여준다. 다섯째 해에는 미국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는 사이드를 직접 만난다. 사이드는 아슬리에게 또다시 행복한 꿈(인 동시에 헛된 기대)을 불어넣는다. 두 사람은 함께 비행을 하며 행복의 순간을 맛본다. 그런데 아슬리가 자신의 직장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911 테러 소식이 들려오고, 사이드가 테러범이라는 연락이 온다. 아슬리의 일지 속에 채워진 일상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시간의 사이로 종교, 사건, 테러, 역사의 편린이 끼워져 있다.

영화는 이를 정면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아슬리의 시선을 통해 감추거나 비가시화는 방법을 채택한다. 아슬리는 남편 사이드의 여러 모습을 단편적으로 목격하거나 바라본다. 하지만 이 상황에 다가서거나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된 채 사이드를 기다리는 아슬리가 주로 등장한다. 요즘 같으면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만큼 아슬리의 순응적 태도는 이 영화의 주된 인물 묘사다. 

결국, 사이드의 행동은 영화의 결말과 함께 드러나는데, 가령 사이드가 절친이자 식당을 준비하는 파레스에게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버렸다고 된다고 화를 내는 장면은 친구 사이의 단순한 불화가 아니라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사이드의 민감한 반응이었음을 뒤늦게 파악하게 된다. 이를 지켜보는 아슬리는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테러범의 아내이자 부종조사(copilot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라는 애칭으로 불리었던 아슬리는 말없이 현실을 지켜보거나 심지어 남편의 편에 서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영화는 한 남자 혹은 비밀을 숨겼던 테러리스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아슬리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작품일까. 그녀 또한 속아버린 피해자인가?

그녀는 테러의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처럼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방관해 버렸다. 하지만 아슬리를 피해자의 자리에 올려두기도 어렵다. 이 영화의 예상되는 실패는 애매한 그녀의 위치와 입장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극적인 '비밀'을 품고 있는 일상을 살아가는 아슬리는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인다. 무엇보다 최후의 '진실이 드러냈을 때' 어떤 불가해한 감정의 파고가 밀려오기를 기다리지만 이 또한 애매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테러범이었고,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그럼에도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만의 비밀(아슬리)을 간직해야 하는 모습은 너무나 많은 것을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짐을 지운다. 이 혼란스러운 결말의 이미지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 <나의 연인에게> ⓒ 까멜리아이엔티

늦게 도착한 편지

이러한 결말의 복잡성을 함축하고, 하나로 묶어 내고자 하는 것이 '편지'다. 사이드의 편지는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아슬리는 남편이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FBI에게 건네받게 된다. 이 편지는 테러가 일어나기 하루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아슬리는 남편의 다른 유품은 모두 미국 측에 돌려준 채(이러한 아슬리의 행동에 요원들은 당혹해한다) 편지만을 들고 황급히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남겨진 유품은 남편의 죽음을 재확인하는 반복에 불과하다면, 편지에는 아슬리 개인에게 속한 어떤 기대감, 어떤 미래,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편지를 읽는 동안 아슬리의 표정이 이러한 것을 대변한다.

편지는 처음부터 9.11 테러보다 늦게 도착하도록 예정되어 있었고(편지 속에는 그것을 확인하는 말이 등장한다), 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미국 측에서 아슬리에게 편지를 준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테러범의 편지가 세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아슬리를 수신자로 지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편지를 통해 아슬리에게 호소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의 제목이 '나의 연인에게' 혹은 영문 원제인 '부조종사'인 이유가 편지 속에 있다. 연인을 향한 편지는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테러범의 편지이기에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포함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이러한 역설 속에서 뒤늦게 도착한 편지의 의미를 읽어볼 수 있다. 

• 사이드의 편지

먼저 널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그건 절대 의심하지마. 널 사랑해. 언제나 사랑할 거야. 영원히. 난 세상을 떠났지만 다른 곳에서 널 기다릴게. 내가 있는 곳에선 인생은 한순간일 뿐이야.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거야. 멋지고, 탈 많았던 5년, 함께 보내줘서 고마워.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어. 그래, 너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 내가 생각했던 그런 남편도 아니었고.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다시 결혼한다고 할지라도 좋아. 하지만 언제나 내 신념을 잊지 마. 저들이 나에 대해 많은 얘길 할 거야. 넌 알 거야. 무엇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할지. 난 널 믿어. 지금은 이해 못 해도 내가 남기고 간 세상은 달라질 거야. 그 결과를 보고 다들 행복할 거야. 언제나 너와 함께 할게. 니가 어떻게 사는지 멀리서 지켜볼 거야. 사랑하는 내 부조종사. 남편을 자랑스럽게 여겨. 그리고 네 자신도. 너 없이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넌 나의 영원한 사랑이야. 고마워. 당신의 남편 사이드 아와드. 2001년 9월 10일. (진한 글씨는 필자의 강조다)

사이드의 편지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자신과 아슬리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저들이 나에 대해 많은 얘길 할 거야."와 함께 시작된 세상 혹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우려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호소와 자신의 결론이다.

편지를 받은 당장에는 자신을 비난할 이야기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 가운데 사이드는 아슬리를 구별짓고 특별하게 대우하고자 쓴다. "넌 알 거야. 무엇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할지. 난 널 믿어."라는 문장에서 아슬리의 분별력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아슬리는 자신을 선택하기를 요청한다.

하지만 이러한 말만으론 테러 행위를 다른 차원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 사이드는 미래를 끌어들인다. "지금은 이해 못 해도 내가 남기고 간 세상은 달라질 거야. 그 결과를 보고 다들 행복할 거야." 그것은 사이드의 신념이자 이러한 선택을 한 결정적인 이유를 드러낸다. 그는 현재 일어나는 자신의 테러 행위가 미래를 다르게 만들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직 아슬리에게만 가능한 호소이자 생각이다. 그것은 무수한 불특정한 타인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 ⓒ 까멜리아이엔티

9.11 테러로부터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도 그 결과를 보고 행복해하지 않는다. 시차를 두고 제작된 이 영화에서 테러범의 편지가 연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가 될 수밖에 없다. 관객들은 이미 사이드의 선택이 현실에서 행복한 미래를 가져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시하기 때문이다. 관객과 사이드의 간극은 결국 이 영화의 출발점이며, <나의 연인에게>의 영화적 기획은 이러한 간극을 담은 편지와 함께 있다.

그렇다면 편지를 받은 아슬리는 어떠한가? 관객들이 편지를 파악하게 되는 것은 아슬리를 통해서다. 편지를 읽는 그녀의 태도가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반응과 차이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편지를 읽는 특별한 장소를 설정한다. 아슬리가 편지를 읽는 순간은 집으로 돌아온 이후이거나 한적한 장소가 아니다. 그는 FBI요원들과 헤어진 직후 다급히 엘리베이터으로 들어와 승강기 버튼을 조작한 후 홀로 머문다. 사람들이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공적인 장소이어야 하고, 남겨진 편지에 대해 가장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편지가 함께 거울로 둘러싸인 엘리베이터는 특수한 영화적 장소로 설정된다. 

엘리베이터의 내부는 거울로 둘러싸여 있는데 많은 고전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거울 효과를 연상시킨다. 편지를 읽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사방에 둘러싸인 거울을 보여주며 아슬리를 중심에 두었다가 그녀에게 클로즈업으로 다가간다. 카메라는 다시 뒤로 물러나 최대한 많은 거울을 잡는다. 거울로 둘러싸인 아슬리는 남편의 편지를 읽으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과 함께 감정적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편지를 읽는 순간에 아슬리는 외부와 단절된 채 홀로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춰지던 아슬리의 모습이 분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네 자신도."라는 대목을 읽을 때, 화면 오른쪽에 비춰진 거울 속 아슬리가 편지를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현실의 아슬리를 바라본다. 거울 속 아슬리가 편지를 내려놓고 현실의 아슬리를 바라보는 모습은 오른쪽에서부터 차례로 왼쪽 화면으로 이동하면서 거울마다 반복된다. 여러 거울 속 아슬리는 더 이상 편지를 읽지 않고, 편지를 읽는 현실의 아슬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이러한 자기분열적 이미지는 아슬리의 이중성을 노출한다. 

거울 속 아슬리는 더 이상 편지를 읽지 않는다. 이들은 편지로부터 빠져나온 미래의 아슬리일 것이다. 이처럼 분열된 상태에서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 등장한다. "너 없이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넌 나의 영원한 사랑이야. 고마워. 당신의 남편 사이드 아와드. 2001년 9월 10일." 

아슬리가 아슬리를 바라보는 장면은 레바논에 있는 사이드의 집에 머물 때 등장한 바 있다. 한밤중에 아슬리가 깨어났을 때 유령처럼 보이는 다른 아슬리가 깨어난 아슬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처럼 아슬리를 바라보는 분열적이고 자기 반영적 이미지의 공통 요소는 "걱정이나 근심"일 것이다. 영화는 분열된 아슬리를 통해 편지의 현실과 시선의 현실이 엇갈리는 순간 끝난다. 

하지만 이 결론은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슬리의 분열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FBI를 만나 남편의 물건을 받고 편지를 읽기 전 아슬리가 먼저 직면한 것은 세상의 반응이었다. 버스에 탄 아슬리는 테러의 의도와 목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엿듣는다. 신문을 읽는 승객의 모습을 본다. 신문 표지에는 테러의 현장이 프린트되어 있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대화를 듣는다. 창밖으로는 경찰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어머니는 사이드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다.

어머니 "애초부터 그 녀석 눈빛이 마음에 안들었어.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니까." 

동생 "저는 평범해 보였어요."

어머니 "얼굴에 쓰여 있진 않지."

아슬리 "잘 알지도 못했잖아요."

어머니 "너는 알았어?"

답답해하던 아슬리의 표정이 슬프게 바뀐다. 어머니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사이드를 알지 못했다. 이어지는 장면은 아슬리가 FBI를 만나 사이드의 물건을 받고 편지를 읽는 장면이다. 현실의 아슬리가 사이드의 말에서 쉽게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여전히 사이드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이드와 아슬리의 관계였고, 아슬리가 연인으로 살아온 세월의 결과였다. 따지고 보면 어머니이든 시어머니이든 그 누구도 두 사람의 관계를 제대로 보거나 인정해 주지 않는 현실에서 아슬리가 믿어야 했던 유일한 출구는 사이드뿐이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 놓여 있는 아슬리였기에 사이드의 번복과 거짓말을 따라가야만 했다.

이 무기력함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불쌍한 부조종사 아슬리의 어리석음 때문인가. 이 질문은 반드시 어째서 사이드가 테러범이 되었는가와 함께 동반되어야만 한다. 영화는 두 인물의 가족을 드러내지만, 이들이 기성세대와 충돌하는 단편적인 이미지를 보여줄 뿐 보다 이를 심화하거나 드라마로 구축하지는 않는다. 가족으로부터 단절되어 온 두 사람을 돌볼 존재들은 부재한 채 사이드는 다른 아버지(종교, 정치, 환상)에게 귀를 기울인 것은 아니었을까. 이들은 변화하는 가족상으로부터 버려진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을까.

'테러리스트의 아내'라는 과감한 선택에는 9.11 테러를 둘러싼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이야기해 보고자 했던 야심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그녀는 남편이 테러범인 줄 몰랐기에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과 유대할 유일한 관계였기에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었기에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현실에서 겪은 사안은 터키와 레바논 사람이라는 국가적, 종교적 갈등과 신념과 사랑 사이에서 일어나는 괴리와 단절이라는 사랑을 둘러싼 오래된 갈등의 테마였다.

그런데 사이드의 뒤늦게 도착한 편지는 자신을 이해할 유일무이한 사람이 '아슬리'라고 지정 함으로써 그녀를 묶어 두고자 한다. 테러범의 고백은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사랑의 언어일 수 있지만, 사랑의 기본적인 왜곡은 현실과 가까울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멀수록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 역설이 <나의 연인에게>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자 '엔 조라 베라치드' 감독이 지속적으로 다뤄온 연인의 초상이다. 그녀의 데뷔작 <투 마더스>(2013)이든, <24주>(2016)이든 커플들 사이에 평온함으로 유지되는 것은 없다. <투 마더스>에서 레즈비언 커플에게 아이를 양육하고자 하는 선택은 거대한 도전이 되고, <24주>의 부부에게도 임신 중인 아이에게 문제가 일어나면서 갈등이 일어난다. 두 영화에서 '아이'가 커플의 위기를 만들어 내는 요소라면, <나의 연인에게>에서는 종교적 신념과 테러범이라는 위치가 역설의 자리를 채운다. 사이드는 이러한 역설을 담아 아슬리에게 편지를 보낸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당신만은 내 마음을 알거라 생각하면서. 

 

영화 <기생충>(2019) ⓒ CJ 엔터테인먼트

편지의 내용과 현실의 엇갈리는 역설에 대한 친숙한 사례는 영화 <기생충>(2019)에 등장한다. 아들 기우는 아버지 기택의 모스 신호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와 편지를 쓴다. 이 편지는 미래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아버지.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본적인 계획입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 대학, 취직, 결혼, 뭐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벌겠습니다.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 이사 들어가는 날에는 저는 엄마랑 정원에 있을게요. 햇살이 워낙 좋으니까요.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건강하세요. 그럼 이만. 

'근본적인 계획'을 전하는 이 편지의 아이러니는 두 가지다. 하나는 기우는 결코 지하에 있는 아버지에게 이 편지를 전달할 수가 없으며, 다른 하나는 근본적인 계획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편지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다. 필자의 저서 『봉준호의 영화언어』(난다)에서 설명한 바 있는 이 편지를 둘러싼 맥락은 불가능성이라는 역설 속에서 작동한다. 그럼에도 이 편지는 '수신자에게 정확히 도착한다.' 왜냐하면 이 편지의 진정한 수진자는 기택이 아니라 영화의 최종 심급자인 관객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수신자인 관객은 편지를 둘러싼 여러 맥락을 저마다 수신받는다. 어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끈끈한 유대감을 확인할 것이고, 어떤 이는 불가능한 미래를 전달하는 기우의 어리석음에 혀를 찰 것이며, 어떤 이는 계급적 우화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메타포를 수신할 것이다. 

<나의 연인에게>에 배송된 뒤늦게 도착한 편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테러범의 편지이지만 연인을 향해 이해를 갈구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을 통해 복잡한 맥락이 형성된다. 편지를 받은 아슬리는 답장을 쓸 수 없기에(사이드는 이미 죽었다!) 이 감정을 어떻게 분출할 수가 없다. 이 이상한 조건이 분열적인 이미지로 충돌한다. 

관객들은 이 편지를 연인의 호소로 받아야 할지, 테러범의 파렴치함으로 읽어야 할지, 연인 아슬리의 유일한 사랑으로 보아야 할지 혼동 속에 놓인다. 그것은 아이러니한 편지 읽기다. 화면 속에 배치된 엘리베이터의 분열적 이미지와 문자의 간극 사이에서, 미래와 현실의 차이 속에서, 감정과 이성의 논리적 부조화 속에서 이 영화 혹은 영화의 결론을 두고 뭐라 말해야 할지 혼돈이 밀려온다. 편지는 아이러니를 촉발하는 출발점이며, 엘리베이터 안은 편지를 수신하는 장소이면서 결국 분열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함축하는 장소가 된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결국 최후의 수신자는 아슬리가 아니라 아이러니와 분열된 이미지를 편지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을 응시해야 하는 관객이다. 달리 말하자면, 관객은 편지를 읽는 분열적 아슬리를 통해 분노와 연민 사이에서 번민하는 독자가 된다.

 

쓰여지는 에세이

<더 웨일>은 25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의 몸이 된 찰리가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다. 9년간 보지 않았던 가족(특히 딸 엘리)을 만나고, 우연히 전도를 위해 집으로 찾아온 토마스에게 도움을 받는다. 매일 같이 자신을 체크하러 오는 간호사이자 과거의 연인 앨런의 동생 리즈의 도움을 받고, 온라인으로 에세이 쓰기 수업을 하며, 피자를 매일 같이 배달해 먹으며 파멸해 가는 날들을 보여준다. 

지금 당장 심장마비가 일어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이 남자에게 에세이란 무엇일까. 에세이는 그가 가르치는 직업과도 관련을 맺지만 그를 지탱해 주는 '성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에세이의 정체는 딸 엘리가 8학년 때 쓴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대한 것이다. 독후감이나 가벼운 비평문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 에세이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주인공 찰리의 삶을 지탱해주고, 위기를 넘기도록 치유해 주는 역할을 한다. 도대체 이 에세이가 무엇이기에 죽어가는 남자의 마지막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 

• 8학년에 쓴 엘리의 <모비딕> 에세이. 

"허먼 멜빌이 쓴 걸작 <모비딕>은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작중 화자인 이슈마엘이 작은 어촌에서 퀴퀘그라는 남자와  누워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스마엘과 퀴퀘크는 교회에 갔다가  배를 타고 출항하는 데 선장은 해적인 애이해브다. 그는 다리가 하나 없고 어떤 고래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 고래의 이름은 모비 딕. 백고래다. 내용이 전개되면서 애이해브는 많은 난관에 직면한다. 그는 평생을 그 고래를 죽이는 데 바친다. 안타까운 일이다. 고래는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죽이려는 에이해브의 집착도 모른다. 그저 불쌍하고 큰 짐승일뿐. 

애이해브도 참 가엾다. 그 고래만 죽이면 삶이 나아지리라 믿지만 실상은 그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될 테니까. 난 이 책이 너무 슬펐고 인물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고래 묘사만 잔뜩 있는 챕터들이 유독 슬펐다.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찰리는 이 에세이를 보물처럼 읽는다. 단지, 딸이 쓴 글이어서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다. 영화 초반 심장 마비를 일으킨 찰리에게 토마스가 다가왔을 때 그는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말한다. 에세이를 읽던 토마스는 이게 무슨 소용인지 반문하지만 놀랍게도 에세이는 찰리를 진정시키며 고비를 넘기도록 돕는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나 비유일까?

 

영화 <더 웨일> ⓒ 그린나래미디어

찰리는 대학교에서 온라인으로 에세이 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자신의 카메라를 꺼둔 채 에세이에 대해 여러 코멘트를 한다. 찰리가 강조하는 글쓰기의 요건은 단 하나다. 구문론이나 작법에 대한 여러 가지를 가르친 후 학생들에게 말하는 단 하나는 "자기 아이디어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다. 

아이디어라는 말을 생각으로 바꾸어도 무방해 보인다. 글의 종류 중 에세이만이 자기를 드러내는 글은 아닐 것이다. 소설이든, 시든, 모든 글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는 마지막 수업에서 자신의 충고에 따라 새로운 에세이를 보낸 학생들을 언급한다.

크리스티는 "부모님은 방사선기사가 되라는데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른다." 

줄리안은 "내 미래가 창창하다는 말 아주 진저리가 난다."

애덤은 "흥미진진한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 거란 걸 받아들여야 한다."

찰리는 정말 진솔한 글이었다고 말한다. 진솔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름답고 깨끗한 것과는 반대쪽에 있다. 크리스는 알지도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은 직업을 강요받고 있으며, 줄리안은 자신의 미래가 창창하다는 의미없는 말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애덤은 한발 더 나아가 인생은 지루하거나 별로일 거라는 사실 앞에 직면해 있다. 찰리가 기본적으로 강조하는 좋은 에세이란 그런 것이다. 희망에 찬 찬가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미래의 염원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매일이 진저리가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진솔한 글이라는 뜻이다.

찰리는 몇몇 학생들이 진솔한 글을 보내주었으니, 자신도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고장이 났다고 거짓말했던 노트북의 카메라를 켠다. 학생들은 그의 몸과 발을 보여주는 화면을 보며 놀란다. 이 순간 진실이 유포된다. 진실은 고통스러운 현실, 끔찍한 사실, 혐오스러운 모습을 직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찰리의 딸이 쓴 에세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엘리의 에세이가 가리키는 진솔함이 있다. 에세이는 이 소설이 지닌 슬픔을 강조한다. 애이해브 선장이 고래를 쫓는 것이 허무한 까닭은 정작 고래는 애이해브의 집착과 의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 승선한 선원들도 마찬가지다. 애이해브는 악마적인 영웅일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선원들은 그의 의지에 감염되듯이 모비딕을 잡아야 한다는 의지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쫓는 줄도 모르는, 이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는 고래를 향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넋두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쫓아야 하는 의무감과 사명감을 주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 모비딕의 독자라면 이 작품이 '니힐리즘' 운운하는 허무주의의 극단을 가리키는 이야기라는 해설을 어디선가 읽었을 것이다. 엘리의 에세이는 니힐리즘을 운운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민을 느낀다. 그리하여 "고래 묘사만 잔뜩 있는 챕터들이 유독 슬펐다.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라고 적고 있다. 이 대목을 찰리는 영화 중반중반에 꽤나 반복해서 읊조린다. 아마 이 에세이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더 웨일> ⓒ 그린나래미디어

찰리의 인생을 보여주는 <더 웨일>의 형식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5일간의 시간 동안 죽어가는, 고래처럼 거대한 사내의 일상을 보게 된다. 리즈에게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며, 학생들에게는 진실하라고, 진솔하라고 다그치면서도 스스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등장인물인 피자 배달부의 걱정과 위로를 받다가 정작 자신의 모습이 들통났을 때 "세상에"라며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진실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 오히려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지독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제출한 진솔한 글이라 찰리가 평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흔히 진리나 진실은 아름답거나 완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들의 고백은 아름답고 깨끗한 것과는 반대쪽에 있다. 크리스는 알지도 못하고 하고 싶지도 않은 직업을 강요받고 있으며, 줄리안은 자신의 미래가 창창하다는 의미없는 말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애덤은 한발 더 나아가 인생은 지루하거나 별로일 거라는 사실 앞에 직면해 있다. 에세이를 통해 영화가 건드리는 진실이란 고통스럽고 아픈 것과 직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희랍어 알레테이아(alētheia)를 가져왔다. 망각이나 은폐라는 뜻의 '레테lethe'라는 단어에 부정의 접두사 'a'가 붙은 것이다. 하이데거 혹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진리란 은폐되어 있던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잔리는 '탈은폐'다.

에세이와 비교해 알레테이아를 생각할 수 있다. 진리는 단순히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순간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은폐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진리를 은폐를 시킨 것은 인간의 선입견이나 몰이해 그리고 현실적인 척하며 스스로를 속이거나 타협하는 마음이다. 이것을 걷어낼 때 진리가 드러난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끔찍한 민낯이며, 거대한 몸집의 찰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찰리의 집을 자주 방문하는 피자 배달부는 매번 친절하게 안부를 묻는다. 그에게 염려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목요일 피자 배달에서 찰리가 나타나기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배달부는 진짜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자 경악한다. "세상에!"

에세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찰리는 몇몇 학생들이 진솔한 글을 보내주었으니 자신도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감추고 있던 노트북의 카메라를 켠다. 학생들은 그의 몸과 발을 보여주는 카메라를 보며 놀란다. 학생들의 경악하는 모습들이 분할된 화면에 펼쳐진다. 진실은 학생들의 에세이처럼, 찰리의 드러난 몸처럼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먼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무엇'이다. 

이 영화가 가리키는 것이 여기에 있다. <더 웨일>은 에세이 쓰기와 읽기로만 이뤄져 있는 것이 아니라 찰리가 어째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과정에 있다. 그는 몸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지난 인생을 드러내야 한다. 제자였던 동성 연인과의 관계, 그의 죽음, 두 사람을 둘러싼 종교적 배경과 이력이 영화에 펼쳐진 5일의 기간 동안 '알레테이아' 된다. 이 영화의 형식이 바로 드러내는 과정, 드러내는 진실의 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더 웨일> ⓒ 그린나래미디어

그 가운데 에세이는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진실을 담는 치료제 구실도 하였다. 특히 딸의 '『모비딕』 에세이'는 위안을 주며, 찰리의 심장마비 증세를 완화시켜주는 치료제가 되었다. 그것은 신비한 경험일 수 있지만 글이 하나의 치료제라는 것은 이미 이천년 전부터 존재한 생각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초기 저작인 『그라마톨로지』에는 '파르마콘'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데리다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의 한 대목을 가져와서 파르마콘의 이중성을 논의한다.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이집트의 신화에 등장하는 문자의 신 토트를 소개한다. 토트는 파라오 타무스 앞에서 문자의 효능을 자랑한다. "내 발명품은 기억과 지혜의 처방전(파르마콘)입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문자가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 것이라 나무란다. "그것은 기억의 치료가 아니라, 이미 발견한 것을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해. 지혜에 관한 한, 그것으로 제자들에게 진리가 아닌 그것의 가상(억견)만 심어주게 될걸세." 

문자의 신 토트는 글이 기억과 지혜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치료약(파르마콘)이라고 강조하지만, 파라오는 오히려 사람들의 기억이 게을러지고 의지하려는 독약(파르마콘)에 불과하다고 경계한다. 희랍어 파르마콘이 치료약이자 독약이라는 이중성을 지닌 단어다. 그리고 이 내용에서 중요한 것은' '글 혹은 글자'가 누군가에는 치료약이 되고, 누군가에는 독약이 된다는 진단이다. 오늘날 인터넷을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댓글들이 보여주는 것은 독약 혹은 치료약이 아니었던가.

사춘기에 들어선 딸 엘리가 쓴 글은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9년 전 딸을 떠난 찰리에게는 유독 특별한 치료약이 된다. 무엇보다 찰리가 좋아하는 대목은 "난 이 책이 너무 슬펐고 인물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고래 묘사만 잔뜩 있는 챕터들이 유독 슬펐다.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을…"이라는 부분이다. 허먼 멜빌의 작품에 등장하는 고래에 대한 긴 묘사와 설명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엘리의 모습에서, 행여 자신의 선택과 삶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찰리에게 엘리의 에세이가 가족을 버린 그의 죄의식을 건드리지만(독약), 동시에  찰리의 죽어가는 삶을 지탱시키며 딸을 만나고자 하는 동기가 된다. 엘리의 새로운 에세이 쓰기를 도와주겠다며, 엘리와의 만남을 시작하고, 엘리의 질문 속에서 과거의 죽은 연인에 대한 상처를 떠올리면서 회복해 가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이 응축된 과정이 찰리의 5일간이다. 엘리의 에세이는 가족을 버린 찰리의 치명적 독약이자 다시 만나야 한다는 희망을 부여잡게 되는 삶을 지탱하는 치료제인 셈이다. 

『모비딕』의 선장 에이허브가 보여주는 것도 유사하다.  그에게 고래는 평생에 걸쳐 쫓아야 하는 치명적인 미끼이자 독약이지만(결국 고래로 인해 죽게 되지만), 그의 인생에 고래가 없었다면 추격하는 본능적 삶을 지탱해 갈 수 있는 것이 가능했을까. 누군가는 희망 고문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삶을 지탱한다. 종종 희망고문을 나쁜 것으로 여기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말이야말로 '파르마콘'의 또 다른 현실적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영화 <더 웨일> ⓒ 그린나래미디어

에세이의 문제와 관련하여 <더 웨일>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반전) 중의 하나는 토마스와 관련되어 있다. 찰리를 도와준 이후 종종 표교를 내세우며 집을 방문하는 찰리는 엘리와 마주치게 되는데, 엘리는 그의 사진을 찍어 자신의 SNS에 올린다. 그 결과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이 사실을 알게된 토마스의 가족은 돈을 훔쳐 몰래 가출하였던 토마스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에세이인 동시에 (송수신이 가능한) 편지의 기능이 결합된 SNS는 말하지 못했던 부모를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사태를 해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에세이라 할 수 있는 SNS의 파르마콘이다. 

엘리의 SNS가 보여주는 역설적인 모습은 여러 번 강조된다. 찰리의 아내는 엘리와 찰리가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얼마나 악마적일 수 있는지를 엘리의 SNS를 통해 보여준다. 거기에는 버젓이 몸집이 불어난 찰리의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그렇다면 토마스에 관한 것 역시 악의였을까?

이 영화가 말하는 사정은 전혀 다른 데 있다. 모비딕에 관한 에세이든, 에세이의 기능을 하는 SNS이든 글이 지닌 형태는 가치 중립적이다. 다시 말해 파르마콘은 약이기도 하고 독약이기도 하다. 즉 글을 읽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따라 악이 되고 하고, 선의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진실되게 써야 하고, 그것을 통해서만이 무엇이든 시작된다. 자신을 드러낼 때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어떤 리액션이 일어날 수 있다. 숨기는 것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한다. <더 웨일>은 결국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글쓰기를 보여준다.엘리가 오래전에 쓴 모비딕 에세이로 돌아가 반복하는 것은 거기에 모든 출발점이 있으며, 이것을 치료제이자 독약으로 안고 살아가는 찰리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찰리가 딸에게 자신의 진실을 말해야 하는 순간들을 통해 출발점을 재정립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의 또 다른 제목은 <찰리의 진실>이다. 그가 쓰는 진실은 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에세이에 속한 다른 인물들도 건져낸다. 토마스가 이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고, 자신의 에세이를 아빠 찰리에게 보여주는 엘리 또한 이 과정을 통해 도움을 받는다. 모두가 과거의 상처로부터 속박된 사람들이었다면 에세이는 이들에게 그 사연을 드러내고, 최소한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 ⓒ 까멜리아이엔티

에세이에 관하여

헝가리의 문예이론가인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의 서론인 「에세이의 본질과 형식에 관하여 : 레오 포퍼에 보낸 편지 Über Wesen und Form des Essays : Ein Brief an Leo Popper」를 통해 에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시도한 바 있다. 

루카치에 따르면 에세이의 본질은 새로운 사실을 무로부터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젠가 생생했던 사실을 단지 새롭게 정리하는 것이다. 에세이는 이미 형성된 것에 전념한다. 동시에 에세이의 필터를 거친 사실이나 작품은 이미 형성된 완고한 형식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

루카치의 입장에서 에세이는 과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이 사실의 관계를 제시하고 예술이 영혼과 운명을 표현하는 반면에 에세이는 어떤 다른 것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늘 이미 형성된 것을 이용하여 그 속에서 숙명적인 사실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때 루카치가 염두해 둔 것은 '비평'에 가깝지만 에세이의 형식은 이미 형성된 것들 속에 담긴 어떤 숙명을 드러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두 편의 영화에 쓰인 에세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나의 연인에게>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편지는 테러리스트와 그의 아내, 혹은 5년간 결혼 생활을 했던 보통의 연인에 대한 숙명적인 사실과 그들의 관계를 정립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더 웨일>에 등장하는 엘리의 에세이 역시 고래에 대한 단상과 주인공 찰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거구의 찰리는 누가 보아도 고래를 연상시킨다.) 허망하게 추격당해 버린 그의 인생을 압축한다. 흰고래가 자신을 쫓는 에이허브 선장의 존재를 몰랐던 것처럼, 찰리 역시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을 추격해 온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단, 5일간은 선장과 고래의 격전인 동시에 찰리와 그를 뒤쫓는 인생과의 격전으로 압축된다. 

심지어 이 영화들은 에세이의 연대기적 구성을 통해 각 인물들의 숙명적인 삶을 드러내고자 한다. 불가해한 선택과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은 그 누구도 삶을 통제하거나 지배할 수 없으며, 에세이적 형식은 그 모습을 압축하고, 전달하며, 보여줄 따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진술의 방식이야말로 이 영화 혹은 에세이의 기본적인 척도다. 에세이적인 구성을 통해 이 영화들이 인물들의 운명 속에 다가가려고 애쓴다. 

그것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찰리가 비상하는 듯한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죽음의 순간인가? 아니면 새로운 비약인가? 테러리스트임을 알게 된 채 남편의 편지를 읽는 아내의 모습은 사랑을 재확인하는 축복인가? 아니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의 굴레인가?

에세이는 그것을 확정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들의 삶에 속한 숙명을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숙명에 대한 이해는 독자(관객)의 몫으로 주어진다. <기생충>의 마지막 편지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기우의 근본 계획은 실현되기가 불가능하지만 성공적인 사기극을 벌여서 이룰지도 모를 일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 편지가 무사히 전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지닐 수도 있다. 

이처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에세이는 에세이 자체의 문제이기보다는 에세이를 둘러싼 인간의 남다른 운명과 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과 선택을 아우른다. 두 영화의 에세이 혹은 에세이의 형식은 영화가 인간을 보여줄 수 있는 한 연대기적 방식의 글쓰기에 해당한다. 자신의 숙명을 알지 못했던 인간의 어리석음과 불행 가운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는 몸부림이 '에세이의 등장'과 함께 그것을 낭송하거나 읽어가는 순간 영화 전체를 압축하고 함축한다. 하지만 에세이를 읽는 행위가 행복의 절정은 아니다. 오히려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불행을 바탕으로 문득 맛보게 된 일말의 행복감을 담는 한 낮의 글쓰기다. 역설 속에 에세이는 쓰여지고, 존재한다. 영화라는 에세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추신
이 글은 기초는 더 숲에서 진행된 '<나의 연인에게> 씨네모어' 강연과 '<더 웨일>과 소설 『모비딕』' 독서토론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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